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29
– 10화에 계속 –
2부 10화 이해관계
대한제국 국무회의, 각의(閣議).
황제의 주관하에 총리대신과 내각 각료들이 국정의 모든 사안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의회가 개원한 광무 5년(1901) 이후 내각에 상당한 힘을 실어 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최종 결정권자는 황제였다.
당면한 국내 사안을 논의하고 그날의 각의를 마치기 전, 이선이 물었다.
“경들은 근래 확산되고 있는 일각의 여론, 소위 대한 민족주의나 아시아주의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갑작스러운 하문에 각료들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 당시, 내각의 의견은 반으로 갈려 있었다.
총리대신 박정양, 참정대신 김윤식, 탁지대신 어윤중, 학무대신 신기선 등 옛 동도서기(東道西器)파는 사상적으로 볼 때, 동양에 더 친화적인 아시아주의에 이끌려야 했지만, 범(凡)민족주의와 아시아주의에 대해 유보적인 반응이었다.
내무대신 박영효, 외무대신 김옥균, 군무대신 윤웅렬, 법무대신 민영익 등 옛 문명개화파는 사상적으로 볼 때, 서구화론자들이었으나 근래 들어 범민족주의와 아시아주의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급진적 서구화론자인 독립당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농림대신 전봉준, 상공대신 이용익은 각자 농민, 상공인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직무에 충실했기에 이념적인 판단은 내리지 않고 있었다.
각의에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박영효가 자파(自派)를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민족주의자나 흥아론자들의 동태는 실로 경망스럽기 짝이 없으나, 이들의 광망(狂妄)함도 우국충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주, 특히 남만주 일대는 대한의 이익에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주 문제에 있어 러시아가 양보하는 태도를 보이면 여론도 진정될 것입니다.”
총리 박정양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잘 드러내지 않고 관료적 역할에만 충실했지만, 국익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성상께옵서 러시아 황제 폐하와의 돈독한 친분은 차치하더라도, 러시아는 수교 이래 대한의 중요한 우방입니다. 영국과 일본이 러시아에 대한 비난을 쏟아 내고 있긴 하지만, 러시아는 아직 협약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한이 우방인 러시아를 자극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옛 문명개화파와 동도서기파가 입헌개화당으로 합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간극을 보이고 있었는데, 결국 사상적 근원보다는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입장이 갈린 것이었다.
동도서기파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현재의 동아시아 판세를 굳이 깨길 원치 않았고, 문명개화파는 변화를 도모했다.
“의견 고맙소. 근래 동양의 정세 변화에 대해 짐의 생각을 말하자면, 정치는 생물이오. 정세의 변화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소. 필요하면 국익에 따라 변화할 수 있지.”
이선의 말에는 현재 질서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었지만, 바로 그다음 말을 이었다.
“작금과 같이 정세 변화가 중대한 시기에, 특정 이념에 근거해서 국가를 운용하는 건 지극히 위험한 일이오. 민족주의든, 아시아주의든 필요에 따라 이용해야지 거기에 이끌려서 국정을 움직일 순 없소.”
이선은 특정 여론에 이끌려 정책을 결정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우리 대한은 여전히 러시아와의 조약이 살아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하오. 7년 전에 체결한 러시아와의 동맹 조약, 재작년에 체결한 만주 협약을 러시아가 먼저 깨트리지 않는 한, 대한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바꿀 생각이 없소.”
1896년에 체결한 러-청-조 비밀동맹조약은 1900년 의화단 전쟁으로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었지만, 아직 효력이 만료한 건 아니었다.
1901년 만주 협약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비록 러시아가 만주 철군 문제를 놓고 청나라와 갈등을 빚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협약 자체가 깨진 건 아니었다.
“짐이 왜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겠소? 러시아 황제와 친분이 있어서? 러시아와의 관계에 투자를 많이 해서? 물론 중요한 요인이오만, 그 자체만으로 국정 방향을 결정하지는 않소.”
이선은 친소(親疏) 관계가 아닌, 국익의 관점에서 러시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보다 중요한 건, 이해관계의 문제요. 러시아와 대한은 직접적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소. 러시아는 대한의 독립을 침해할 생각이 없고, 친러 성향 완충국가면 충분하오. 근래 들어 남만주 이권 문제를 놓고 러시아가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대한과 근본적으로 대립할 생각은 없다고 봐야 하오. 외교적 타협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란 말이지.”
문명개화파 각료들은 다른 생각이 있는 듯했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일본은? 언제나 대한을 자신들의 영향권, 이익선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들의 안보와 이익에 한반도는 필수불가결적인 요소라 생각하지.”
현재의 일본이 해군 중심의 북수남진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곤 하지만, 강경파인 조슈-육군의 북진론자들은 언제나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최소한 강경파라는 러시아군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침해하자고 주장하는 의견은 없었다.
“외교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오. 오래전부터, 원교근공(遠交近攻)은 전략의 기본이오. 물론 기선과 철도의 시대에는 원교근공이 예전 같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다르오. 당장 러시아 제국주의가 일본 제국주의보다 훨씬 강력할지라도, 그들의 근원은 유럽에 있소. 아무리 동양에서 공격적인 정책을 쓰더라도, 군사력의 대부분은 유럽에 묶여 있소.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곧 완공된다 할지라도, 상황이 당장 바뀌지는 않소.”
러시아가 극동 신항로 정책을 발표했다지만, 이는 사실상 차르와 그 측근의 독단일 뿐, 아직까지 러시아는 유럽 국가였다. 그들의 전략적 우선순위는 동유럽, 발칸, 중동,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순이었다.
이선은 러시아를 유라시아 제국으로 움직여 동양 질서를 재편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그건 청나라를 무너트릴 혁명이 발생한 이후의 일이었다.
역사대로 진행된다면, 1911년 이후의 일이었다.
“현재로서는 러시아보다 일본이 더 위험하오. 일본에는 아직도 정한론자들이 군부와 정계에 남아 있소. 뭐, 물론, 일본이 계속 북수남진 정책을 추진하고, 대한이 굳이 일본과 적대하지 않는 이상, 양국 관계가 나쁠 이유가 없소. 짐 역시 일본과의 우호친선은 동의하는 바요. 진심으로 한일 두 나라가 선린(善隣)으로 남길 바라오.”
이건 외교적 사탕발림이 아니라, 이선의 진심이었다. 일본은 여전히 가상적국 1호로, 한국의 군비 증대는 일본 견제가 목표였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고,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이상 극한 대립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부족한 국력으로 만주 전역을 차지하자는 주장, 아시아주의라는 이름으로 동양 연대를 부추겨 서양 세력에 맞서 싸우자는 주장은, 현재의 상황을 도외시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빚자는 허황된 궤변에 지나지 않소. 대한은 아직 모험을 할 만한 국력을 갖고 있지 않소!”
공격적 민족주의와 아시아주의는, 현시점에선 국력을 과신한 모험에 불과했다.
대전략게임이라면 모를까, 실제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선 국운을 걸고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국력을 넘어선 과잉팽창은 몰락의 씨앗이었다.
“아직 10년은 이르오. 짐은 아직 젊고, 인내심을 갖고 있소. 지금은 차분히 내실을 기를 때요. 경들은 짐의 뜻을 잘 살펴, 국가의 방향이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각자의 책무를 다해 주길 바라오.”
흉중의 깊은 생각을 드러낸 황제의 담화에, 대신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삼가 황명을 받들어 국무에 매진하겠사옵니다!”
‘흠, 현시점의 정책은 현상유지지만, 정녕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하게 된다면…….’
이선은 석조전에서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국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게 해야지. 우리에게 가는 피해가 없이, 러시아와 일본의 국력을 소모시킬 수 있다면 러일 충돌이 무조건 나쁠 이유는 없지. 하지만 러일 간의 충돌에 한국을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
러시아와 일본 간에 충돌이 예상되는 지점은, 러시아령 사할린(가라후토)-일본령 지시마(쿠릴열도), 한반도, 남만주(러시아령 관동주)였다.
현재 일본이 북수남진 정책을 쓰고 있다지만, 여전히 조슈-육군 강경파는 러시아 주도 삼국간섭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고, 한반도와 남만주에 대한 야욕을 품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러일전쟁의 원인이 되는 한반도와 남만주만큼은 어떻게든 충돌을 피하게 만드는 게 이선의 대외전략 목표였고, 지금까지 잘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사할린과 쿠릴에서 충돌하는 건, 뭐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근데 러시아든 일본이든 미치지 않고서야, 사할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리가 있나?’
설령 사할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한반도에 유탄이 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없었다.
‘결론은, 역시 현상유지야. 설령 영일동맹이 진행되더라도, 러시아와 일본의 강경파만 잘 조절할 수 있다면…….’
하지만, 역사의 진행이 꼭 그의 계산대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선은 더욱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날 밤.
내무대신 박영효와 외무대신 김옥균은, 종로에서 유명한 기루(妓樓)에서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기루의 단골손님인 김옥균은 언제나 그를 따르는 기생들이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주위를 모두 물리고 박영효와 단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가 어언 30년이었다.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문하의 개화파 동문이자, 조선의 변혁을 함께 맹세한 개화당 동지였고, 현재는 국정을 이끌고 있는 내각의 동료였다.
53세의 김옥균, 43세의 박영효. 청년 개화파였던 두 사람도 어느새 장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각자 나이를 먹어 감에 약간 거리가 멀어지긴 했지만, 우정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외무대신 대감.”
“말씀하시오.”
“오늘 성상의 하교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신하 된 도리로, 성상께서 명하신다면 따라야 할 뿐 아니겠소.”
김옥균이 원론적인 말을 하니, 박영효가 쓴웃음을 지었다.
“성상의 하교는 너무나 정론이신지라, 감히 반론할 여지가 없소. 하지만 나는 성상께서 왜 그토록 일본을 경계하시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소.”
“아니, 오늘 성상의 하교 못 들었소?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관계, 원교근공과 영향력의 문제라고.”
“하지만 일본은 우리와 같은 황인종이요, 서양을 제외하면 문명개화를 이룬 유일한 나라요. 뭐, 그런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무엇보다 일본은 함께 청국을 무찌르고 대한의 자주독립을 도와준 혈맹 아니오?”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러시아도 북벌을 도와준 혈맹이오.”
“내가 들으니,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추진한다는 말이 있더이다. 그럼 지금의 판이 완전히 달라지지. 고균은 외무부도 이끌고 있고, 제국익문사 독리이기도 하잖소. 고균은 나보다 세상 돌아가는 걸 잘 알 텐데, 이야기 좀 해 보시오.”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관료와 경찰의 직계수장답게 국내 정보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하지만 국외 정보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었다. 내무부 경무청이나 외무부 정치국의 자료는 공유가 되지만, 극비인 제국익문사 자료는 오직 황제와 독리만이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공식적으로는 관영통신사인 제국익문사가 특수 정보기관임을 아는 것도 박영효가 각료인 덕이었다.
“금릉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외무부의 자료는 공유할 수 있지만, 익문사는 안되오. 그런 정보가 있다더라, 정도만 말씀드리지.”
“고균! 우리가 함께 개화를 맹세하고, 완화군 대감 시절부터 충성을 다짐한 동지라지만, 성상께서 나보다 고균을 특별히 대하시는 건 알고 있소. 나는 성상과 처음부터 주종관계였지만, 고균은 벗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박영효는 이선이 유능하고 공정한 지도자라는 걸 부정하지 않았지만, 김옥균만을 특별히 총애한다고 생각하고 여겼다. 오랫동안 개화당의 3인자였던 그는 상대적인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춘고(春皐, 박영효의 호), 오해하지 말게. 성상께서 사사로이 나를 총애하여 따로 정책을 추진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김옥균이 대신이 아닌 친구의 예로 대하며 황급히 박영효를 달랬다.
“고균 형, 톡 터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분명 성상께서는 분명 군민공치와 입헌의 큰 뜻을 품고, 전제 왕권을 내려놓고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개설하셨소. 내각에도 힘을 실어 주셨고. 하지만 형식이지, 실질적으로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건 결국 성상이시잖소!”
박영효는 개화당 소장파, 즉 독립당의 영국식 입헌군주제 주장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내각이 황제의 정책 결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니, 우리도 마찬가지야. 나는 외무대신으로서 과거 예조판서와는 실질적으로 외교를 집행하는 권한을 갖고 있네. 자네도 내무대신으로서 예전 이조판서와는 다른 막강한 권한을 누리지 않나?”
“내 권한을 더 달라는 게 아니라, 성상의 결단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까 하는 소리 아니오! 이래서야 내각이 옛 의정부와 다를 바가 뭐요? 최소한 형은 익문사 독리로서 성상과 독대하는 시간이 많으니, 총리보다 낫겠지!”
“뭐, 나라고 다를 것 같나? 마찬가지야!”
김옥균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술잔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