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3
– 33화에 계속 –
33화 운명(運命)
이선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태자비 전하, 대공 전하. 두 분께서 저를 이토록 생각해 주시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조선 왕실에서 저는 언제나 찬밥 취급이었는데, 러시아 황실에서 이렇게 과분할 정도로 따뜻한 대접을 받다니…….”
그 어렵다는 눈물 연기를 거뜬히 해내는 이선이었다. 마리야는 이선의 손을 토닥이면서 손수건을 건넸다.
“두 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황실에 반드시 보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보은을 다짐했다.
“그 마음만으로도 고맙군요. 공작은 아직 어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마음 편안히 지내면서 쉬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전하.”
이선은 눈물을 거두었다.
‘정말로, 러시아 황실에게 보은해 주지. 황제의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큰 은혜가 어디 있겠어?’
이선이 황궁에 머무른 지 어언 한 달이 지났다. 1881년 새해가 밝은 것이다.
‘드디어 운명의 해로군.’
서양과의 수교와 본격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 조선에도 운명의 해이고, 이선 자신에게도 운명의 해였다.
이선은 1881년 새해를 세 번 맞이했다. 서력 1월 1일, 정교회 국가가 사용하는 율리우스력 1월 1일, 동양에서 사용하는 음력 1월 1일.
러시아에서 서력 1월 1일은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갔고, 율리우스력 1월 1일에 로마노프 황실 가족은 겨울 궁전에 모여 축하했다.
19세기에는 서력과 율리우스력 사이에 12일 차이가 발생했으므로, 실제로는 1월 13일이었다.
“황제 폐하, 신년을 맞이하여 축하 인사를 올립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고맙소, 공작. 황궁 생활은 마음에 드오?”
“태자비 전하와 대공 전하의 배려로 아주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좋소. 공작은 우리 황실의 귀빈이니, 황궁에 있는 동안 편히 지내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알렉산드르 2세에게도 1881년은 중요한 해였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대개혁이 시작된 농노 해방령 20주년을 맞이하여, 점증하는 혁명가의 위협으로부터 국체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개혁 법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제는 새로운 법안을 통해, 개혁을 원하는 진보파들을 만족시키고 급진파 혁명가들을 고립시킬 생각이었다.
사적으로는, 황제가 10년 넘게 사랑을 키워온 애인,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정식 결혼을 발표할 생각이었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의 서거 직후 이미 비밀 약혼을 한 황제는, 서거 1주기가 지나면 결혼을 발표하고 새 황후로 선포할 생각이었다.
황태자의 반항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조선의 왕자를 황태자 궁에 붙여 놓은 것이었다. 서자라 할지라도 국가와 왕실에 얼마나 충성하는지, 황태자가 직접 보라는 의미였다.
아직까지 황제는 이선을 조선의 특사나 협상 대상으로 여기기보단, 자신의 사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1월이 지나가는 동안, 여전히 이선은 암살을 막을 방법을 골몰했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우면서도 내 공로를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
황태자비나 니콜라이 대공을 통해 암살을 경고해야 할 텐데, 그런 중요한 문제를 맥락도 없이 막 던질 수도 없었다.
방법을 고민하던 이선에게, 안영흠이 뜻밖의 해답을 주었다.
1881년 1월 30일, 이날은 음력으로 신사년 새해 첫날이었다.
외국에 나와서도 여전히 음력 역법을 따르고 있는 조선인들은, 이날을 맞이하여 이선에게 축하 인사를 드렸다.
“군 대감, 신사년 새해를 맞이하여 경하를 올립니다. 비록 아라사에 있어서 신년 행사는 따로 할 수 없겠지만…….”
“고맙소. 여러분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오.”
안영흠은 빙긋 웃더니, 들고 있던 책을 펼쳤다.
“신년이 됐으니, 늘 그랬던 것처럼 신년 운수를 봐 드릴까요?”
안영흠은 잡과(雜科)에 응시했던 중인으로, 그중에서도 음양과(陰陽科)를 봤었다. 음양과는 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 등을 다루는 시험인데, 합격하면 관상감에 속하게 된다.
비록 초시에만 합격하고 복시에는 떨어져 관상감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안영흠의 전문은 명과학이었다. 명과학은 문자 그대로 운명, 길흉, 화복 따위에 관한 문제를 논하는 학문이었다.
운현궁의 식객을 거쳐 완화궁에 들어온 안영흠은 옛 경험을 살려 종종 명리학을 보곤 했다.
“또 알겠습니까? 올해가 대감의 운명을 바꿀 한 해가 될지를…….”
운명, 이란 말에 이선은 퍼뜩 생각이 미치는 게 있었다.
“안 공, 혹시 서양인의 운명도 볼 수 있소?”
“서양인도 사주(四柱)는 있을 터이니, 생년월일만 알면 대략 볼 수는 있겠죠. 그런데 왜…….”
이선이 목적하는 바를 안영흠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이선은 황태자비와 니콜라이 대공에게 운세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황실에서 일어날 ‘재앙’을 경고하라고 안영흠에게 지시했다. 그러자 안영흠은 깜짝 놀랐다.
“예에? 그건 진짜 명리학이 아닙니다. 목적을 갖고 거짓말을 할 수는…….”
“안 공. 솔직히 말해서, 외교라는 건 거짓말을 호의로 포장해서 상대방에게 선물하는 것이오. 내가 청국이나 아라사에 가서 한 일이 다 그렇소.”
“그, 그야 그렇지요. 그래도 명리학은 외교하고는 좀 다른…….”
안영흠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이선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더 솔직히 말해 봅시다. 러시아에 와서 안 공이 한 일이 뭐가 있소?”
따지고 보니 없었다. 비서이자 재정 담당인데, 이건 모두 러시아 황실에서 편의를 제공해 주니 의미가 없었다. 장무영은 이선의 경호원 역할이라도 하지, 안영흠은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신세였다.
“……없습니다. 대감께 도움이 못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 이유는 안 공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전문 분야가 달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오. 드디어 안 공의 전문 분야를 쓸 일이 왔소. 이 일이 성공하면, 우리는 러시아의 공로자가 되겠지.”
이선의 말에 안영흠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분께 뭐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지금부터 황태자 부처, 황태손에 대한 정보를 드리겠소. 그걸 사주에 끼워 맞춰서 적당히 비위 잘 맞춰주다가, 내가 하는 말들을 섞어서 하면 되는 겁니다.”
“근데 제가 그걸 외국어로 말하긴 어려운데요.”
“아, 그렇군. 통역은 내가 하도록 하지.”
이선은 자신이 아는 역사적 지식을 총동원해, 안영흠에게 설명했다. 안영흠은 이를 꼼꼼히 받아 적었다.
그날 저녁. 이선이 황태자비를 찾아 정중히 인사했다.
“태자비 전하. 오늘은 동양 역법으로 신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제 가신이 전하께 신년을 축하드리고, 그간의 은혜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고 합니다.”
안영흠은 이선의 가신 신분이라, 황족들과 한자리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황태자비는 그 말을 듣고 반갑게 답했다.
“오늘이 동양에선 새해로군요. 그렇다면 어서 오라고 하세요. 함께 축하해야지요.”
부름을 받은 안영흠은 한쪽에 책을 끼고, 황태자비 앞에 나타나 정중히 인사했다.
“이선 공의 가신인 안영흠이 고귀하신 전하께 감히 인사를 올립니다.”
안영흠의 외국어 실력이 썩 훌륭하지 못했으므로, 이선이 통역으로 전달했다.
“신년을 맞이하여 축하드립니다. 만수무강하시고 만사형통하시옵소서.”
“고맙소. 그대도 좋은 일이 많기를 바라오.”
황태자비는 짧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안영흠의 말보다, 그가 옆에 끼고 있는 동양 서책이 궁금해졌다.
“그 책은 무엇이오?”
“동양의 신비한 서책입니다. 인간의 운명과 길흉화복을 다루는 것이지요. 새해가 되면 살펴보곤 한답니다.”
이선의 설명에 황태자비는 관심을 보였다.
“그거 흥미롭군요. 그럼 공작도 매해 운수를 살피나요?”
“예, 제 가신은 마침 조선에서 역술관을 지낸 명리학 전문가입니다. 인간의 운명을 살피는 데 탁월한 시야를 갖고 있지요. 제가 청을 거쳐 러시아에 온 것도, 상당 부분 이 사람의 조언을 받아서였습니다.”
이선의 말은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황태자비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19세기는 서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서, 사람의 운명에 대한 온갖 신비주의가 인기를 끌었다. 신비학이라든지, 점성술이라든지, 심지어 강령술까지 온갖 종류의 오컬트가 인기였다.
특히 원래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제정 러시아는 오컬트가 인기였고, 귀족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무렵, 1870년대에는 러시아 귀족 여성,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가 창시한 ‘신지학 협회’가 전 유럽을 넘어 미국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자칭 영매인 블라바츠키는, 티베트에 정착해 동양의 성자로부터 영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러시아 황실에도 블라바츠키의 신지학 협회 회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 혹시 나와 우리 가족들도 운명을 알 수 있을까요?”
“이미 인간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오른 분들이신데, 더 살펴볼 운명이 있겠습니까?”
안영흠이 일부러 한발 물러섰다. 그럴수록 사람의 심리는 더욱 궁금해지는 법이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황족들이라고 해서 고민이 없겠어요? 우리가 또 모르는 운명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알려 주세요.”
이선이 통역해 주자 안영흠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태어나신 생년월일과 시간을 알려 주십시오.”
“음, 나부터 할까요? 1847년 11월 26일. 시간은…….”
안영흠은 마리야의 생년월일과 시간을 음력으로 환산한 후, 무언가 빠르게 적어나갔다.
“태자비 전하께서는 그야말로 가장 존귀해질 운명을 타고나셨군요. 이미 사주에서부터 소국의 군주에서 대국의 황제가 되실 운명이었습니다.”
안영흠이 하는 말 중 어려운 요소는 빼고, 이해하기 쉽게 와 닿도록 이선이 통역했다.
본래 마리야는 왕국의 공주도 아니었다. 태어날 때는 글뤽스부르크 공작 크리스티안의 딸이었다. 그런데 덴마크 왕의 방계였던 크리스티안이 직계가 단절된 덴마크 국왕으로 추대되면서, 공주가 되었다.
안영흠은 이선이 알려 준 정보를 토대로 황태자비의 운명을 끼워 맞추자, 아주 그럴싸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정말 잘 맞는 것 같네요.”
원래 사람은 심리적으로, 점을 쳐서 맞는 이야기가 나오면 잘 맞아떨어진다고 착각하기가 쉬었다. 마리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말하면서 운명이랍시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서, 마리야는 퍼뜩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영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알아듣지 못할 말로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뭔가를 적고 있는 안영흠과 순진한 얼굴로 통역을 하고 있는 어린 이선을 보면 의심의 생각이 사라졌다.
‘저 가신은 정보를 얻을 방법도 없을 거고, 의심하자면 왕자가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 그런데 굳이 저 소년이 그런 거짓말을 해서 얻는 이익이 뭐겠어? 내가 괜한 의심을 하는 거야.’
“저, 이건 통역하기가 좀 송구한 내용인데…….”
이선이 일부러 난처함을 표하자, 마리야가 대답을 재촉했다.
“개의치 말고 해요.”
마리야는 마음을 풀고 계속 듣기로 했다.
“전하께서는 동양 나이로 서른다섯이 되는 해에 운명이 가장 고귀해진다고 합니다. 1881년 올해겠군요.”
이선의 설명에 마리야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슨 일이 있나요? 그게 왜 송구한 일이죠?”
“전하께서는 러시아에서 가장 존귀한 여성이 되실 것입니다.”
“가장 존귀한 여성이라니?”
“황제의 부인이 될 운명이라고 하는군요.”
“그건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지만, 어떻게 올해에?”
뭐라 말해야 할지, 이선의 표정이 미묘해지는 걸 보고 마리야는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앗, 설마…….”
황태자비 마리야가 황후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방법은 단 하나,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죽거나 퇴위하고 황태자 알렉산드르가 즉위하는 것.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리야의 표정이 변했다.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나요? 내가 황후가 된다는 건 곧 내 남편이 황제가 된다는 것이고, 황제 폐하께서는……!”
마리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명리학이라는 건 그저 운명을 알려 주는 것뿐이지, 꼭 그대로 된다는 게 아닙니다.”
황태자비의 반응은 예상된 바였다. 이선은 미리 준비된 말을 했다.
“어디까지나 운명은 운명일 뿐이지요.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인간이 의지로 운명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이선의 침착한 말에 마리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황제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는 건가요?”
안영흠은 무언가를 쓰다가 얼굴이 새파래졌다. 안영흠이 하는 말을 듣고 이선도 똑같이 놀라워했다.
“그, 그게 말하기가 좀 곤란한데.”
“개의치 말고 말을 해요!”
마리야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음력 2월에, 러시아에 크나큰 우환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감히 군주를 시역(弑逆)하려는 음모가 있을 거라고…….”
이선은 표정 관리를 잘하며, 마침내 주사위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