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30
– 11화에 계속 –
2부 11화 전륜성왕(轉輪聖王)
“내가 성상께 충성을 맹세한 이래 20년째 보좌하고 있지만, 그분의 깊은 속내는 아직도 다 파악하지 못할 것 같네. 성상은 하늘이 내린 분이야. 그건 틀림없네. 석조전 집무실에 앉아서 세상만사를 다 내다보시네. 가끔은 이 세상이 아니라 딴 세상에서 온 사람 같다니까. 성상께서 뭘 예측하면 열에 아홉은 맞아떨어져! 그러니 내 조언 같은 게 영향력이 있을 리가 있나?”
김옥균은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박영효는 내심 놀랐다. 세간에서 황제의 최측근, 복심이라 불리는 김옥균조차 정책 결정에 소외가 되어 있다니.
“나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네. 재능이 타고난 데다 어릴 적부터 해외를 다녀 견문이 넓은 덕이다. 아니, 근데 그것만으로도 말이 안 돼. 이 이야기는 지금껏 개화당 창립 동지였던 자네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네만, 말하지.”
“대체 무슨 비밀이오?”
“임오년, 내가 처음 성상을 뵈었을 때일세. 군란이 터졌다는 소식에 일본에서 막 귀국했을 때지. 귀국했을 때는 이미 다 정리되어 있었고. 난 정권을 잡은 대원군, 정권 실세로 떠오른 완화군을 뵙고자 했네. 마침 바로 연락이 오더군.”
“음, 그랬지요. 개화당의 존립을 위해서.”
박영효는 1882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만남부터 놀랍더군. 지금이야 공당(公黨)이지만, 그때의 개화당은 비밀결사 아니었나? 그런데 이미 개화당의 내력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거야. 역매(亦梅, 오경석) 선생이 주청 영국 공사관을 몰래 방문해 개항을 논의한 사실, 내가 동인 선사를 일본에 보내 주일 영국 공사관과 수교를 논의했던 사실, 은밀히 충의계를 결성해 변혁을 도모했던 사실…….”
“뭐요? 그걸 완화군, 아니 성상께서 알고 계셨다고? 고균 형이 충성을 맹세하고 다 일러준 게 아니라? 난 형이 비밀결사 수장이 되어 가지고 어지간히 입도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이선과 김옥균이 별도로 회동한 후에, 그의 소개로 개화당원들이 이선과 만나 충성을 다짐했기에, 박영효는 여태 비밀결사 개화당의 내력을 다 김옥균이 말해 준 거로 알고 있었다.
“이 사람아! 그 당시 개화당의 존재가 비밀인데, 그걸 내가 먼저 공개하나! 성상께선 이미 다 알고 있었어, 거의 모든 걸!”
“아니, 대체 어떻게? 아, 운현궁의 정보력인가? 천하장안?”
“대원군이 먼저 알았으면, 변혁을 도모했던 우린 진작에 끝장났겠지. 처음엔 성상이 귀국길에 원산에서 만난 역관 백춘배가 흘렸나 싶었지. 그는 내 측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어. 그냥 다 알고 계셨던 거야. 생각해 보게. 임오년에 성상의 보령(寶齡)이 몇이었지?”
“아마 열다섯…….”
“그래, 열다섯에 이미 모르는 게 없었어. 그보다 2년 전에, 열셋의 나이로 성상께선 무작정 청국과 러시아로 떠났지. 그리고 러시아 차르의 암살을 막아 냈네. 이게 조선에서 태어난 왕족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행동인가?”
박영효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생각에도, 황제의 예측력은 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 돌이켜보면 알렉산드르 2세와 그 손자 니콜라이 2세의 암살을 모두 막았고, 국내적으로든 국외적으로든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난 20년간 고민해 봤네만은, 이제는 이해하길 포기했네. 아, 그냥 성상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분이구나, 이렇게 생각해야지. 그러니 모든 사안에 있어 저렇게 정확한 예측을 하고, 저 대국의 황제들조차 손바닥 안에 놓고 계산하는구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국외자가 보기에는 이선의 재능과 운이 그만큼 좋은 거로 보였겠지만, 그 측근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달랐다.
그저 이선의 말대로 냉철한 분석을 통한 행운의 연속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이한 일이었다.
김옥균은 근대인답게 이성과 합리의 영역으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이해에는 한계가 있었다.
“성상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분이니, 참으로 이 나라의 복일세. 하늘이 이 나라를 구해 주려고 보내신 분이라 생각하네.”
“…….”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러니 우리는 군말 없이 성상께서 명한 바를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알겠나? 오늘 한 이야기는 우리 둘만 알고, 알았으면 술이나 마시자고.”
“…… 알겠소.”
박영효는 충격을 받은 듯, 이후에 아무 말 없이 김옥균이 주는 술을 받았다.
김옥균은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이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미래를 보고 있는지, 최종 목적은 무엇인지.
이선이 세계 지도를 무대로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은, 최측근이라는 김옥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김옥균은 석조전에서 황제를 알현해, 외무부와 제국익문사의 정기 보고를 했다.
“음, 좋소. 경에게 명하고 싶은 바가 있는데.”
“하명하시옵소서.”
“사흘 후에, 멀리서 온 손님이 비공식적으로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오. 그는 짐을 직접 알현하고 싶어 하지만, 아쉽게도 그럴 여유가 없어서. 경이 대신 손님을 만나 줬으면 하오.”
“명하신 바와 같이 하겠습니다. 손님이라 하심은 누구입니까?”
“티베트가 러시아 특사로 보냈던 이요. 요컨대 승려지.”
김옥균은 이선이 넘겨준 문건을 읽어 보았다. 의친왕 이강이 이선에게 보낸 보고서였다. 외무부에도, 제국익문사에도 보고가 되지 않은 사항이었다.
아그반 도르지예프(Agvan Dorzhiev), 그는 평범한 승려가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자 조언자, 외교 특사.
“경은 예전부터 불교 교리에 특별한 관심이 많지 않았소? 조선이 숭유억불을 이어 나가던 시절에도 불교 교리에 깊이 심취했고. 다른 관리들은 승려, 그것도 외국인 승려라고 하면 편견이 있겠지만, 일본 정토종 승려들하고도 잘 어울렸던 고균이라면야, 달라이 라마의 조언자와 대화를 잘 맞겠지.”
김옥균은 스승 유대치의 영향을 받아, 젊었을 적에는 불교 교리에 깊이 심취했다. 명문 양반가 출신임에도 일찌감치 신분제 폐지를 주장한 배경은 일정 부분 불교의 평등사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신이 불교에 호의적이긴 합니다만, 하명하신 바는 개인 자격으로 만나라는 뜻입니까?”
“역시, 고균은 이해가 빠르군. 바로 그렇소. 외무대신으로, 제국익문사 독리로 만나라는 게 아니라, 오직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라는 뜻이오.”
이선은 김옥균에게 달라이 라마와 도르지예프에 대해 티베트와 청국의 관계, 티베트와 열강의 관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는 외무대신인 김옥균도 미처 모르던 것이었다.
‘어떻게 폐하께선 열강도 아닌 이런 변방의 일까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의친왕이 유럽에서 단순히 놀고먹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만, 이런 첩보까지 하고 있었단 말인가? 외무부도, 익문사도 아닌 황실만의 첩보라…….’
김옥균의 의문은 계속 이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명하신 바와 같이, 개인으로 회동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정보 청취와 답변도 개인 자격으로 해야겠습니까?”
“좋은 질문이오. 개인으로 만나되, 정보 청취는 제국익문사 독리답게, 답변은 외무대신답게. 하지만 어떠한 확약도 해 주면 안 되고. 외교관다운 처신을 기대하리다.”
이선이 하는 말의 요점을, 김옥균은 이해했다.
“이는 극비여야 하오. 외국 공사관, 특히 영국과 청국은 몰라야 하오. 러시아와 일본도 몰랐으면 하는군.”
“익문사를 통해 철저히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좋소.”
“더 하명하시는 바가 없으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리합시다. 경의 노고가 많소.”
김옥균이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서는데, 이선이 그를 불러 세웠다.
“고균.”
“예, 폐하.”
“지난 20년간, 경은 늘 짐의 곁에 있었지. 짐과 경은 실로 오랜 동지일세. 짐은 외교와 첩보의 책임을 한 사람에게 모두 맡겼네. 경이 뜻하는 바를 펼치길 바라네.”
“……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폐하! 폐하의 믿음에 이 한목숨을 다해 충정을 바치겠나이다!”
김옥균은 감격함을 드러내며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절했다. 명백한 군신(君臣)의 예였다.
이선은 책상 너머 의자에 앉아 있고, 김옥균은 무릎 꿇고 깊게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군신의 표정은 서로 확인할 수 없었다.
* * *
광무 7년 여름, 모일(某日), 모처(某處).
제국익문사의 안가(安家)로 쓰이는 평양의 저택에서, 외무대신 김옥균과 달라이 라마의 특사 아그반 도르지예프가 비밀리에 만났다.
“원로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한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스님. 김옥균입니다.”
“빈도(貧道)를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망 높으신 외무대신 각하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옥균과 도르지예프는 러시아어 통역을 전담할 익문사 요원만을 대동하고 대담에 나섰다.
“머나먼 거리를 지나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건, 실로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아닌가 싶습니다.”
1901년, 도르지예프는 달라이 라마의 특사로 러시아를 세 번째 방문했다.
2년간 체류하면서 페테르부르크 최초의 불교 사원을 건설하고, 티베트 불교 신자가 많은 칼미키야와 부랴티야에서 종교 활동을 수행했다.
하지만, 표면적인 종교 활동 뒤에는 은밀한 행동이 있었다.
러시아 체류를 마친 도르지예프는, 몽골에 들려 티베트와 종교로 밀접한 몽골의 지도자 젬춘담바 후툭투(Jebtsundamba Khutuktu)와 회동한 후, 만주를 거쳐 한국에 왔다.
“의친왕 전하로부터 말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실로 명망 높은 고승이시라고.”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달라이 라마의 뜻을 따르는 미천한 승려일 뿐입니다.”
“저도 오래전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티베트와 한국의 불교는 많이 달라서, 귀국 불교에 대해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법사께서 활불(活佛, 달라이 라마)과 황교(黃敎)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각하께서 겔룩(Gelug, 黃帽派)에 관심이 있으시다 하니, 달라이 라마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도르지예프는 김옥균에게 한참 티베트의 역사와 불교 교리에 대해 설명했다.
이 복잡한 문장을 러시아어에서 한국어로 통역해야 할 통역은 죽을 맛이었지만, 김옥균은 흥미를 갖고 들었다.
“활불의 좋은 가르침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0년 전, 절을 자주 찾으면서 불교 교리를 배웠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각하께서는 한국의 숭유억불을 끝내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이뤘고, 개혁을 성공시켜 근대화를 이룩한 영웅이라 들었습니다. 불자이자 아시아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존경을 느낍니다.”
“하하, 그건 우리 황제 폐하의 업적입니다. 저는 그 신하로서 명하신 바 일을 해 왔을 뿐입니다.”
도르지예프의 찬사에 김옥균은 공을 황제 이선에게 돌렸다.
“아, 귀국 황제 폐하의 업적은 저 멀리 티베트의 궁벽한 산골에까지 널리 울려 퍼졌습니다. 어린 나이에 러시아로 떠나 힘을 기르고, 귀국하여 위기에 처한 국가를 개혁했으며, 주종관계를 강요하는 청국을 마침내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셨으니, 실로 위대한 황제이십니다.”
‘외교적 수사라지만, 굉장한 찬사군.’
외교적 수사에 익숙한 김옥균도 내심 놀라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도르지예프의 말이 꼭 입에 발린 아부는 아니었다.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청나라의 제후국이었다가 힘을 키워 종주국을 몰아내고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이룬 대한제국은, 청나라의 압제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도르지예프가 김옥균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청나라로부터 티베트와 몽골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꿈꾸는 그로선, 바로 현재 대한제국의 사례만큼 모범으로 적절한 게 없었다.
“달라이 라마께서 선대 라마의 환생이자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듯이, 대몽골 제국의 현신(現身)이 러시아 제국이요, 하얀 칸은 대칸의 환생이자 다라보살의 화신이십니다. 이를 생각해 보면, 한국 황제 폐하께서는 차크라바르티 라자의 환생이자 문수보살의 화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말씀은 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김옥균은 번역이 잘못되었나 싶어 통역을 쳐다보았다.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각하께 문자 그대로 전해 드린 것입니다.”
김옥균은 직접 의미를 물었다.
“대체 하얀 칸은 무엇이고, 차크라바르티 라자가 무엇입니까?”
“하얀 칸(белый хан)은 몽골 세계에서, 차르를 지칭하는 새로운 말입니다. 차크라트바르티 라자(cakravarti-rāja)는 불교 세계에서,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정의와 정법(正法)으로 다스리는 군주를 말합니다.”
“아, 전륜성왕(轉輪聖王)!”
김옥균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의미를 알아들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 귀국 황제 폐하께서는 청나라의 압제에 신음하는 모든 민족과 불자들에게, 전륜성왕이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의친왕 전하로부터 황제 폐하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나니, 그분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모두 알고 계십니다. 세계에 통달한 그 지혜를 토대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실로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의 화신이자, 전륜성왕의 화신이십니다.”
“…….”
“그렇습니다. 저는 대칸과 전륜성왕과 활불의 합일(合一)을 추구하고자 이 나라에 온 것입니다.”
‘…… 대체 뭔 소리야. 내가 지금껏 들은 주장 중에 제일가는 광언 같은데…….’
어지간한 아시아주의 이론에 면역이 되어 있는 김옥균도, 뜬구름을 잡다 못해 하늘을 날고 있는 승려의 말에 황당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