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31
– 12화에 계속 –
2부 12화 계몽전제군주의 꿈
김옥균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드러내자, 도르지예프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실로 티베트와 몽골, 한국은 오랜 형제였습니다. 저는 국적은 러시아이나, 혈통은 부랴트 몽골인이고, 종교적으로는 티베트인입니다. 티베트와 몽골은 종교와 관습, 역사를 공유하는 형제 민족입니다. 또한 몽골과 한국도 오랜 역사를 공유하는 형제 민족이니, 티베트와 한국도 형제 민족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티베트-몽골식 아시아주의인가?’
열렬한 태도를 보이는 도르지예프와 달리, 김옥균은 약간 뜨악했다. 그는 한국인과 보다 가까운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형제 민족’이라는 주장도 동의 안 했는데, 티베트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양국의 관계사에 대해 공부한 바 있었습니다. 몽골 제국 시절, 귀국의 국왕께서 티베트에 오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랬지요. 옛 고려 시절, 충선왕(忠宣王)이 티베트로 귀양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약 600년 전의 일입니다.”
14세기 초, 고려 국왕 왕장(王璋)이자, 몽골 제국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이지르부카(益智禮普化)는 몽골의 제위 투쟁에 깊숙이 관여했다. 승리의 대가로 원 황실로부터 요동 지역을 관할하는 심왕(瀋王)의 작위를 받는 후대를 받았으나, 후일 실각하여 멀리 티베트에 귀양 가기에 이르렀다.
“그때 고려 국왕 이지르부카와 티베트 승려들이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하지요. 굉장히 총명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10갑자(甲子)의 세월이 지나 빈도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건, 영혼의 특별한 이끌림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귀국 황제 폐하께서 이지르부카 왕의 환생이 아닐지…….”
“법사,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찌 전조(前朝)의 충선왕과 우리 황제 폐하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충선왕은 칸의 신하에 불과했지만, 우리 황제 폐하는 제국의 주군이십니다!”
통역을 통해 전해 들은 김옥균이 정색하며 반박했다.
근대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은 조선 지식인 출신 입장에서, 몽골의 영향을 받은 ‘원 간섭기’는 별로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었다. 충선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그다지 좋지 못했고, 오히려 굴욕적이라 여기고 있었다.
더욱이 환생이라는 개념을 중시하는 티베트와 달리 조선은 현실적 사후세계관을 가진 나라였다.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로 말씀을 드린 게 아닙니다. 저 넓은 대륙을 지배했던 몽골 제국을 계승한 게 오늘날의 러시아입니다. 귀국 황제 폐하께서는 이지르부카가 대칸 카이산(海山, 원 무종)을 도와 제국의 대업을 이룬 것처럼, 차르를 제국의 대업으로 이끌어 나가고 계십니다. 카이산이 대칸이 되어 이지르부카가 고려의 왕이자 만주의 왕이 된 것처럼, 차르께서 하얀 칸으로 대륙을 지배하시게 될 때, 한국 황제께서도 고려의 황제이자 만주의 황제가 되실 것입니다!”
“……”
젊었을 때는 몽상가라는 말을 들었던 김옥균이었다. 20년 전, ‘아시아의 프랑스’ 한국을 만들겠다는 입버릇처럼 했던 그였다. 몽상 같았지만, 착착 현실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젊었을 적의 자신도 감히 비견될 수 없는 몽상가가 등장했다.
‘유럽의 몽골이 러시아라고? 그리고 우리 대한이 고려라고?’
“대략 무슨 말씀인지는 이해하겠는데,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사람은 거듭 태어납니다. 오늘날의 정세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과연 우연은 아니었다. 역사대로라면 얌전히 티베트로 갔어야 할 도르지예프가 한국에 온 건,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모범으로 삼아서였다. 그리고 의친왕 이강을 통해 이선의 ‘지혜’를 알게 돼서였다.
“몽골과 티베트는 러시아의 후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모범을 따르고 싶습니다. 차르께서도 매우 우호적이십니다. 귀국의 도움을 간절히 바랍니다.”
역사적, 종교적 수사는 제외하고, 김옥균은 도르지예프의 주장을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러시아 제국이 몽골 제국을 계승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는 패권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몽골과 티베트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다.
셋째. 그러기 위해선 청나라가 무너져야 한다.
넷째. 몽골과 티베트는 러시아의 보호를, 한국의 지원을 받길 원한다.
다섯째. 한국 황제가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만주의 지배자가 되길 바란다.
‘말이 되나, 이게…….’
만약 김옥균이 젊은 시절의 혁명가였다면, 솔깃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승려 신분으로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세상을 떠돌며 열심히 유세(遊說)하는 도르지예프는, 좀 이상해 보여도 애국자임은 틀림없었다.
‘24년 전 동인 선사를 보는 것 같군. 그때는 몽상가 취급을 받았지만…….’
김옥균은 24년 전, 승려 이동인을 일본에 밀항시켜 영국과 비밀리에 교섭시키게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이동인은 서양과의 수교를 이끌어 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주일 영국 공사관을 찾아 서기관 어니스트 사토우(Ernest Satow)와 밀담을 나누고, 그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결국 이동인은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의 추천을 받아, 승려 신분임에도 고종을 알현하여 수교의 필요성을 수락 받았다. 마침내 서양과의 수교를 논의하는 밀사의 지위를 받았다.
이동인을 움직이던 개화당으로선 환호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증발(蒸發)해 버렸다.
개화당이 아무리 이동인을 찾아도 행방이 묘연했다. 후일 집권 후에 다시 이동인의 행방을 찾았지만 끝내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결국 누군가, 서양과의 수교를 반대하던 누군가에게 암살당해 암매장당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이 등장했지.’
기껏 서양과 만들어 놓은 끈이 사라져 김옥균이 절망감을 느꼈을 때, 러시아에서 완화군 이선이 나타났다.
이선의 지위, 능력, 정세 판단, 서양과의 관계는 감히 이동인 따위와 비교가 될 바가 아니었다.
김옥균은 마침내 지도자를 찾았다는 마음에, 개화당을 통째로 이선에게 바쳤다. 그리고 정말로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이뤄 냈다.
‘그때를 떠올리면, 이 승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겠지만…….’
젊은 혁명가 김옥균이었더라면, 설령 몽상에 불과할지라도 애국자에게 동의를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노회한 외교관이었다. 이런 몽상 같은 주장에 동조할 수 없었다.
“법사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조선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은 티베트와 몽골의 처지에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오, 그렇다면…….”
“하지만 어떤 확답도 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개인적으로 법사를 만난 것이지, 외무대신 자격으로 만난 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귀국은 만국공법에 의한 독립국이 아니며, 대한제국과 수교를 맺은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귀국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없습니다.”
김옥균의 냉정한 대답에도, 도르지예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귀국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하오나 황제 폐하께 오늘의 일을, 제 말을 꼭 전해 주십시오.”
“그리 하겠습니다. 대한에도 좋은 절이 많습니다. 법사께서는 불승의 자격으로 북부 지방을 여행하시면 됩니다. 머무르시는 동안, 수행원이 호위할 것입니다. 그럼 편안한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옥균의 눈짓에 통역을 맡은 익문사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국 시까지, 도르지예프는 익문사 요원의 감시를 받을 터였다.
김옥균은 황성으로 돌아가, 석조전에서 이선을 알현했다.
도르지예프와의 회동 내역을, 대화 하나까지 복원하여 전달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수고했소, 고균.”
“황공하옵니다.”
“그래, 고균이라면 이 승려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을 터. 어떻게 생각하오?”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응하면 안 됩니다. 이 모든 구상은 장대한 몽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몽골인과 티베트인이 대한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청국과의 관계 파괴를 감수할 만큼은 아닙니다. 만주 황실이 몽골과 티베트의 분리를 받아들일 리가 있겠습니까? 러시아가 청국과의 전쟁까지 각오하며 몽골과 티베트를 정말로 후원하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김옥균의 냉정한 분석에, 이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흠, 짐의 생각도 그렇소. 기껏 청 황제에게 은혜를 베풀어 두었는데, 그걸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순 없지.”
“영명하십니다. 딱 한 가지 이용할 만한 게 있다면, 심왕의 역사적 연원입니다. 물론 원나라에 충성하고 대가로 받은 심왕을 자주독립국인 대한이 대놓고 내세울 수야 없지만, 후일 만주 진출에 제동을 걸 청나라에 추가로 제시할 명분 하나쯤은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역사는 언제나 무기가 되는 법이니까. 고조선, 고구려, 발해, 고려에 이르기까지 뭐든 역사적 명분을 추가해서 나쁠 건 없지. 고려해 보리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아무튼, 이래저래 매우 흥미로운 시기야. 앞으로도 계속 주목해 봅시다.”
이선은 마치 전혀 관계없는 방관자적 위치에서 말했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외무부나 익문사와는 별개로, 이선은 니콜라이 2세와 광서제에게 비밀 친서 외교를 계속 하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에게 한국에 대해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의친왕의 입, 실질적으로는 이선의 조종이었다.
‘자, 사소하게나마 유라시아의 지각 판을 흔들어 볼까. 영국이 러시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추구한다면, 나도 영국의 시선을 동아시아에서 돌리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이선은 말없이 집무실의 유라시아 지도를 쳐다보았다.
* * *
계몽전제군주(啓蒙專制君主), 혹은 개명전제군주(開明專制君主).
18세기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근대화를 꿈꾸는 동양의 군주와 정치가들에게, 계몽전제군주는 중요한 모범이었다.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진행 중인 대한제국의 이선이나 일본의 메이지를 가리켜, 호사가들은 ‘동양의 표트르 대제’ ‘동양의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근대화에 뒤떨어진, 그러나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청나라 광서제에게 굉장한 자극이 되었다.
“짐은 아라사의 표트르 대제를 본받아, 대청국을 총체적으로 개혁할 것이다!”
의화단 전쟁 이후 서태후를 실각시키고 재집권한 광서제는, 변법을 재개했다.
광서 27년(1901), 광서신정(光緖新政)이 실시되었다.
핵심은 부국강병, 제도의 서구화, 중앙집권화였다.
마침내 오랜 역사의 과거제가 폐지되고, 사법제도와 행정제도의 개혁이 이뤄졌다. 입헌과 의회제도의 논의도 진행되었다.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군제개혁도 착실히 진행되었다. 청나라 유일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북양군(北洋軍)은 황제 직속으로 전환되었고, 신임 북양대신으로 임명된 장훈은 황제의 충신이었다. 참모총판 단기서는 독일 유학파로, 군대의 정예화를 위해 힘썼다.
1901년에 직례총독 이홍장이 죽고, 1902년에 양강총독 유곤일이 죽었다.
독판정무처를 구성하던 양무파 삼두 중에 남은 건 오직 호광총독 장지동뿐이었다.
장지동은 여전히 지위를 유지했지만, 기해정변에서 중립을 지킨 장지동을 광서제는 불신했다.
시간은 과연 젊은 황제의 편이었고, 광서제는 즉위 이래 처음으로 국정을 도맡았다.
“명치유신과 조선의 경장처럼!”
광서제의 실질적 모델은 메이지 유신과, 조선의 갑신경장이었다. 중앙집권화와 급진적 서구화 모델은 메이지 유신에서, 유교 국가를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는 작업은 갑신경장을 모델로 했다.
‘한국 황제야말로, 짐이 본받을 위인이다.’
명목상으로는 자존심 문제 때문에 대놓고 말할 수 없었지만, 광서제는 명백히 이선을 모델로 삼고 있었다.
의화단 전쟁에서 서안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구해준 광무제 이선은, 개혁에도 아낌없이 조언을 해 주었다.
광서제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이선이 조언하는 개혁안을 거침없이 추진하고자 했다.
그는 특히 자신의 개혁을 방해하는 지방 세력들을 누르려고 했다.
일본과 조선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청 영국 공사, 어니스트 사토우는 중국에 주재하는 외교관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
1862년에서 83년까지 일본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메이지 유신의 과정을 직접 살폈고, 당대 서양 외교관치고는 드물게 일본어와 한문에도 능통했다.
이동인을 통해 최초로 조선어를 배운 영국 외교관이기도 했으며, 1887년에서 89년까지 주 조선 총영사를 지냈다.
영국 최고의 동아시아 통으로 평가받은 사토우는 삼국전쟁 직후인 1895년에서 1900년까지 주일 공사를 맡았고, 의화단 전쟁 직후에는 주청 공사로 발령받았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에, 영국의 동아시아 외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광서제는 종종 사토우를 불러들여 조언을 청했고, 사토우는 자문에 응했다.
“청국 황제 폐하는 개명을 추구하는 군주라고 할 수 있으나…….”
사토우는 광서제의 노력은 높이 평가했으나, 그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청국은 현대적 형태의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아니다. 차라리 준 자치적인 총독들의 연합체이며, 각자가 독립적인 재정, 육군, 해군, 사법 제도를 보유한 성(省)들의 연맹이다. 이는 사실상 일종의 전면적 자치체제이다.”
이미 청나라는 태평천국 전쟁 이후 중앙집권이 붕괴되는 과정이었고, 의화단 전쟁 이후에는 사실상 잔해만 남아 버렸다.
광서제가 중앙의 지배를 되살리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지방의 반감은 커져 갔다.
본토 18성보다, 더 반감이 큰 건 변강(邊疆), 즉 몽골과 티베트, 신강이었다.
광서신정은 기존 청나라의 지배 방식, 몽골의 칸이자 티베트의 보호자이자 무슬림 제후의 주군으로 간접통치하는 유목제국의 관점에서 벗어나, 중국식 중앙집권제를 도입하려고 했다.
한족 출신 관리들이 변방에 새로 파견되어, 전례 없는 중앙집권화를 강요했다.
이는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제 만주인의 천명은 끝났다!”
마침내 청나라의 변강에서, 분리 독립의 새로운 기치가 솟아나고 있었다.
이는, 새로운 계몽전제군주를 꿈꾸는 고산지대의 젊은 군주의 야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