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4
– 34화에 계속 –
34화 암살(暗殺)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통역을 전해 듣자 마리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 송구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괜한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용서를 비는 안영흠과 이선을 보자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황제 폐하를 노린 암살 음모는 몇 년 사이에 계속 있었어. 불과 작년 2월에도 황궁 식당에 폭탄이 터졌지. 만약 불가리아 대공이 늦게 오지 않았더라면 폐하뿐만 아니라 황실 일가가 모두 죽었을 거야. 정말 뭔가 신의 섭리가, 운명이 있는 걸까?’
“여기까지 하도록 할게요. 공작의 가신이 한 말은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어디 가서 그런 말을 하지는 말아요. 위험합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운명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이선이 다시 한번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이미 마리야의 심리에는 파장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황태자 알렉산드르는 이선이 서자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부황의 의도가 빤히 보였던 것이다. 황제의 명이라는 말에 이선을 알렉산드르 궁전에 두긴 했으나 껄끄러웠다.
“사샤(알렉산드르의 애칭),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저 동양 소년은 자기 나라와 왕실을 위해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왕자예요.”
황태자비는 남편에게 자기가 생각하는 이선의 인간상을 그려서 보여 주었다.
서자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으나, 오히려 왕실과 후계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먼 나라로 떠난 왕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국익을 위해서 이국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왕자.
“그뿐만 아니라 니키와 동갑으로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있어요. 니키에게도 동양의 왕자가 친구로 있다면 좋은 일 아닐까요?”
엄격하고 보수적이지만 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황태자는, 그 의견을 존중했다.
“당신 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좋은 일이오.”
하지만 마음에서까지 우러나온 건 아니라서, 부인처럼 이선을 살갑게 대하진 않았다.
‘운명’에 대해 듣고 고민하던 마리야는 끝내 남편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뭐요? 마리야, 그런 말을 믿는 거요?”
황태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외의 말이 너무 잘 맞아떨어졌는걸요. 폐하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큰일이 아닌가요? 혹시 만에 하나라도 대비를 해 두는 것이…….”
“감히 무엄하게도 황제 폐하를 노리는 반역자들이 많기는 하오. 하지만 제국 경찰이 그들을 모두 쓸어버릴 것이오. 그 조선 왕자라는 소년, 좋게 보려고 했는데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군.”
“아니에요. 왕자는 깊은 의미를 두지 말라 했습니다. 오히려 신이 자유의지를 주셨으니, 운명은 바뀔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건 그나마 맞는 말이군. 아무튼 부인은 그런 걱정하지 말고, 애들이나 잘 돌보시오.”
황태자는 이선을 만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졌다. 그는 알렉산드르 황궁에서 머무르는 동안 이선을 한 번도 부르지 않고,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군 대감, 저희가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닐까요? 기분 탓인지 몰라도, 굉장히 냉랭해진 것 같은데…….”
사주를 본 이후, 황태자비는 이선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 황태자도 며칠간 머무르면서 이선과 인사조차 하지 않고 황궁을 떠났다. 안영흠이 불안하게 여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 경우에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오. 저쪽은 늘 테러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지. 최악의 경우라고 쳐도 우린 그저 말실수했다고 여길 뿐이겠지만, 저쪽은 황제의 목숨이 담보로 걸려 있는 일이니.”
근래 황제를 노린 테러가 반복되고 있었다. 특히 작년의 황궁 폭탄 테러 이후 황족들은 모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테러의 공포에 시달렸다.
정치가나 왕족에게 테러만큼 두려운 게 없었다. 아무리 대비해도, 언제 어떤 형태로 공격이 날아올지 몰랐다.
‘특히 지금과도 같은 러시아에선.’
이선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고민하던 마리야는 니콜라이에게 털어놓았다. 어린 니콜라이는 아버지와 달리 비웃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금세 심각해졌다. 그 자신도 작년의 테러에 상당한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니콜라이는 즉시 이선을 찾았다.
“공작, 나는 딱히 그 동양의 예언서를 믿지 않습니다. 오직 운명은 신이 정하시는 것뿐, 그런 책에 나온 대로 운명이 정해져 있을 리가 없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명리학은 그저 흥미로 보는 것이니,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황제 폐하의 운명이 달린 일인데, 신하이자 손자가 된 입장에서 어떻게 흥밋거리가 될 수 있겠소? 개의치 않을 수도 없지.”
니콜라이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폐하의 안위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황실과 제국의 재앙이오. 말해 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 있으리라 예견한 것이오?”
이선도 진지하게 답했다.
“제 가신의 말에 따르면 올해 음력 2월, 서력으로는 3월에, 군주를 시역하려는 음모가 있을 것이라 합니다.”
“3월, 3월이라. 만에 하나 그렇다면, 막을 방법도 있겠지?”
“그렇겠지요. 다만 이건 저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만…….”
“어째서?”
“전 러시아의 당국자가 아니지요. 어떤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공 전하라면 모를까요.”
은근슬쩍 니콜라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이선이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건 권한이 있으면서도 방기한 자의 책임이다.’
“……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동갑이지만, 훨씬 어른스러운 이선에게 니콜라이는 조언을 구했다.
“폐하께서 정기적으로 겨울 궁전 밖을 나가시는 일이 있습니까?”
니콜라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일요일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근위대의 사열을 받으러 군영으로 나가십니다.”
‘그럼 그거네.’
이선은 3월의 달력을 살펴보았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이 1881년 3월로 기억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날짜는 헷갈렸다. 더욱이 러시아는 12일 느린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어서 어느 쪽인지도 불확실했다.
3월의 첫 번째 일요일은, 3월 1일이었다.
‘3월 1일, 서력으로는 3월 13일. 기억났다! 맞아, 3월 13일이었어!’
이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은 역사적으로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이선은 구체적인 암살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황제가 탄 마차를 향한 폭탄 테러였지. 하지만 마차가 방탄 마차인 덕에 폭탄은 근위병과 마부만 부상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황제는 떠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안위를 대중에게 알리고 부상자를 돕겠다는 이유로 마차 밖으로 나갔지. 그 순간 두 번째 실행자가 폭탄을 던지고…….’
폭탄을 직격으로 맞은 알렉산드르 2세는 팔과 다리를 잃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황제는 가까스로 황궁으로 돌아갔으나,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역사적으로도 매우 특이한 사건이지. 암살 위기를 겪은 황제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부상자를 돕겠다고 나섰다가 죽다니. 좋게 말하면 선량한 황제고, 나쁘게 말하면 위기의식이라곤 없는…….’
황제의 선량함은 개인으로선 좋은 일이었으나, 그 자신이 국가를 책임지는 전제 군주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실제로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 이후 대개혁은 물거품이 되니, 작은 인정이 죽음을 앞당긴 셈이었다.
“전하, 지금까지의 사례를 보건대, 반역자들은 분명히 황제 폐하께서 밖으로 나왔을 때를 노리고 폭탄을 던질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폐하께선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마차에서 내리지 않으시고, 마차는 방탄이라 폭탄도 소용없죠.”
“그렇습니다. 마차만 안 내린다면 상관없죠. 하지만 만약 내리는 순간이 가장 위험합니다. 도중에 내린다거나 하는 순간을 노릴 겁니다.”
“그럼 어쩌죠? 근위병이 막아야 할 터인데.”
“대공 전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 열병식에, 전하께서도 참석하겠다고 하세요. 그리고 마차에 같이 타시는 겁니다. 만에 하나, 그 어떤 순간에라도, 폐하께서 도중에 마차에서 못 내리게 전하께서 막으십시오.”
니콜라이가 생각해 보니,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알겠소. 해 보도록 하리다.”
“그리고 전 만약을 대비해서, 폐하께서 이동하실 행로에 수상한 자가 없는지 감시의 눈을 켜고 있겠습니다.”
“그건 나도 도울 수 있소. 내게 그럴 권한이 없으니 경찰을 동원할 순 없겠지만, 우리 황궁의 사람들을 동원합시다.”
“알겠습니다. 제 경호원은 제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무예 실력을 가진 이로, 암살을 막기 위해 특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지휘를 맡기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일국의 왕자를 혼자 경호할 정도이니, 동양의 신비한 무술에 정통한 것이겠지.’
이선의 과장에 니콜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황궁에서 장무영이 이선의 명령으로 동양의 검무를 보여 준 적이 있는데, 그 화려한 몸동작에 크게 감탄한 터였다.
“가장 좋은 건,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어떤 일이 생긴다면…….”
“나 역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막아야지.”
니콜라이는 이선과 협력의 뜻으로 악수를 하였다.
운명의 날, 1881년 3월 1일(서력 13일).
알렉산드르 2세의 기분은 매우 좋았다. 바로 그날 아침, 내무 대신 로리스-멜리코프(Loris-Melikov) 백작의 개혁안에 서명한 터였다.
이른바 ‘로리스-멜리코프의 헌법’이라 불리는 개혁안은, 지방 자치 기구인 젬스트보와 시의회에서 의원들을 선발, 입법 자문 기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최초로 러시아 제국에 대의제적 요소를 부여하여, 국정 운영에 민중이 선출한 대표들이 참여하고 입헌군주국의 토대를 확립하는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전제 군주인 황제의 권력은 손대지 않는 선에서, 절충안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만하면 됐네. 이만하면 자유주의자들도 적당히 만족하겠지. 이제 급진파들을 고립시켜야 할 때야.”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안에 서명을 마치고, 내무대신에게 전달했다.
“짐을 암살하려 했던 테러리스트 두목을 체포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이틀 전, 황제 암살을 노리는 급진 혁명 단체 ‘인민의 의지(Narodnaya Volya)’ 지도자가 체포되었다. 황제는 그 보고에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염려 놓고 기병대의 사열을 볼 수 있겠군.”
“폐하, 그래도 아직 잔당이 다 체포된 건 아니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오늘 사열은 불참하심이…….”
“일요일이 유일하게 짐이 외출하는 날인데, 황제가 돼서 그 정도도 못 가는가? 두목이 잡혔으니 잔당들은 벌써 도망갔을 것이네. 일정대로 움직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대신 경호를 빈틈없이 하겠습니다.”
내무대신에겐 수도 경찰력을 움직일 권한이 있었다.
“번거롭게 할 게 없소. 예전처럼 근위병만 이끌고 나가도 충분하오.”
여전히 암살 음모가 진행되는지 긴가민가하던 니콜라이는, 이틀 전 테러 단체 두목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3월에 시역 할 음모가 있다더니 정말이로구나.’
니콜라이는 즉시 겨울 궁전으로 달려가, 할아버지인 황제를 알현했다.
“폐하, 오늘 열병식에 소손 또한 함께하고 싶습니다.”
“호오, 네가 말이냐. 미래의 제국 황제로서 근위대의 사열을 보는 것도 좋겠지. 함께 가거라.”
“괜찮으시면 폐하의 마차를 함께 타고 싶습니다.”
황제의 마차는 방탄 마차라, 유사시 가장 안전했다. 손자의 안위를 걱정한 황제는 순순히 수락했다.
“그러거라. 모처럼 함께 가자꾸나.”
3월 1일 오후. 황제는 예정대로 근위 기병 학교로 가 기병대 사열을 보았다.
황제는 기존 동선대로 움직이지 않고, 바로 겨울 궁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다른 황궁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황제와 황태손을 태운 마차는 12명의 카자크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예카테리나 운하에 위치한 제방을 지나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무 일도 없구나.’
니콜라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를 시역하려는 음모 자체는 있었으니, ‘예언’ 자체는 틀린 게 아니었다. 대신 운명이 바뀐 것이라 생각했다.
그 마차를 향해, 수많은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이선도 그 시선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선은 암살 장소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 부활 성당. 일명 피의 구세주 성당.’
훗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는 피의 구세주 성당은, 바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그 자리에 세워진 사원이었다.
21세기에 그곳에 관광을 간 기억이 있는 이선은, 알렉산드르 2세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피격되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선은 바로 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길, 어떤 놈이야?’
테러범이 나 테러범이오, 라고 얼굴에 써놓을 리가 없었다. 이선은 장무영과 황궁 시종들에게 수상한 자가 있으면 문답 무용으로 잡으라 명령했다. 물론 사법권 같은 건 없지만,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잡으라 했다.
오후 2시 15분. 황제를 태운 마차가 근위대와 함께 운하 위에 놓인 노란색 다리를 건너왔다.
황제의 행렬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황제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남자는 모자를 벗고, 여자는 손수건을 흔들었다.
황제는 창문 너머로 흰색 손수건을 흔드는 어떤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바로 그때, 누군가 앞을 향해 손수건에 쌓인 원형의 물체를 던졌다.
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