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43
– 24화에 계속 –
2부 24화 시대정신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대한제국에서도 개각(改閣)이 이뤄졌다.
차이가 있다면, 타의로 물러난 비테와 달리, 총리대신 박정양은 자의로 물러날 의사를 드러냈다.
최초의 주미 조선 전권공사로 그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도한 박정양은, 대미 외교가 차관 협정으로 성과를 보이자 곧 사임의 뜻을 표했다.
“폐하, 신은 이제 노둔(老鈍)하여, 성상과 국가를 위하여 직을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사옵니다. 부디 사직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전임 총리 김홍집의 사임과 마찬가지로, 박정양은 노쇠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다.
박정양의 나이 63세, 이 시대 기준으로 노인이라 할 나이였다.
“경이 총리로 취임한 지 이제 2년이거늘, 어찌 벌써 퇴임하려 하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이제 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물러나 새 시대를 이끌 인재들을 후원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정양은 김홍집과 같은 탁월한 업무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민의를 존중하고 여러 정파와 두루 좋은 관계를 맺는 포용력을 지녔다. 본인은 온건한 동도서기파였지만, 그는 젊은 개화파들의 후원자 역할을 아끼지 않았다.
헌법 제정과 민의원 개원 이후 어울리는 총리 상이었다.
“경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사직을 윤허하겠소. 김홍집 공의 전례를 따라, 경을 중추원 종신 의관으로 임명하고 원훈(元勳)의 칭호를 내리고자 하니, 짐과 정부에 앞으로도 조언을 부탁하오.”
이선은 말리지 않았다. 갑신경장 이후 수많은 과제를 수행하면서, 관료들의 과로는 일상적이었다.
김홍집이나 박정양은 개화 정책을 주도한 최상급 실무 관료로서, 과로의 부작용인지 나이 60을 넘기자 노쇠함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땅히 황명을 따르겠나이다.”
박정양이 사임하니, 후임 총리의 인선이 중요했다. 일시적으로는 부총리격인 참정대신이 총리를 대리했으나, 명예직에 가까웠다. 참정 김윤식도 69세의 노인이었다. 김윤식도 함께 사의를 표했다.
“결국 어심(御心)에 누가 있느냐가 중요한데…….”
“그야 뭐, 외무대신 아니겠소?”
“성상의 신임도 두텁고, 개화당 지도자이기도 하니.”
총리로 유력하게 떠오르는 이는 오랫동안 개화당의 지도자이자, 내각의 실질적인 2인자였던 외무대신 김옥균이었다.
내무대신 박영효도 물망에 오르긴 했으나, 김옥균이 우위에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10월 17일, 박정양이 사임하고 이틀 만에, 김옥균을 총리로 임명하고 후임 내각을 조직하라는 대명(大命)이 떨어졌다.
“외무대신 김옥균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니, 경은 현명한 이들로 내각을 조직하라.”
“신은 본래 재주가 없고 어리석어, 그와 같은 대임(大任)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오니…….”
김옥균이 관례적인 사양을 표하자, 이선이 손을 내저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이제 형식적인 사양은 그만합시다. 경을 총리에 임명하는 건, 짐과 정부, 의회의 상황을 보건대 당연한 수순이오. 받들도록 하시오.”
이선으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김옥균은 자신의 측근이자, 현재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입헌개화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이기도 했다. 정치가로서의 능력도 충분히 검증되었다.
“신 김옥균, 삼가 지엄하신 대명을 받드옵니다. 목숨을 다해 성총(聖聰)을 보좌하고, 국가와 국민을 다해 헌신하겠사옵니다!”
김옥균은 황제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선은 신임 총리에게 격려했다.
“짐은 경의 능력과 애국심을 믿겠소.”
김옥균의 나이 53세. 처음 개혁을 결의한 지 어언 30년 만에 마침내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에 올랐다.
김옥균은 기존의 내각에서 큰 변화를 주지 않고, 약간의 개각만 했다. 내각의 2인자는 내무대신으로 유임된 박영효였다.
“나 김옥균은, 위로는 대황제 폐하를 받들고, 아래로는 국민의 총의(總意)를 대표하여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성실히 직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광무 7년 10월 24일, 민의원과 중추원의 추인을 받고, 황제의 임명을 받아 김옥균 내각이 출범했다.
대한제국 3대 총리대신 김옥균은, 최초로 의회에서 총리 취임 연설을 했다. 군주정의 전통적인 재상에서, 입헌국가의 수상으로서 변화함의 상징이었다.
초대 총리 김홍집과 2대 박정양은 개화파지만 조선의 관료적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면, 김옥균은 새로운 시대의 정치인 상에 더 가까웠다.
김옥균은 개화당 파벌을 근대적 정당으로 전환했고, 사상적 깊이가 있으며, 연설에 능했다. 대중적 인기도 여타 정치가들에 비하면 높았다.
“솔직히 말해서, 고균의 행정 능력은 도원(道園, 김홍집) 대감에 비하면 한참 못하지. 죽천(竹泉, 박정양) 대감만큼 포용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교술 좋고 말 잘하니 외교관으로서의 장점은 충분하지. 외무대신으로서 그만한 적격이 없어. 하지만 일을 추진함에 있어 실속은 부족하니, 총리로서의 정치력은 오히려 금릉위(박영효)보다 못할 수 있네.”
옛 개화파의 사상적 지도자로, 오늘날 개화당 지도자들을 모두 문하에서 가르쳤던 ‘백의정승’ 대치 유홍기(劉鴻基).
어느덧 나이 70대, 은퇴하여 속세와 거리를 두고 있는 유홍기는, 근래 노환으로 건강이 나빠져 요양 중이었다.
병문안을 겸하여 소식을 전하러 자신을 찾아온 제자 오세창에게, 유홍기는 의외로 냉정한 평가를 했다.
외무부 아주국장으로 김옥균을 상관으로 보좌했던 오세창은 스승의 평가에 놀랐다.
30년 전, 김옥균을 개화파로 인도한 게 바로 유홍기 아니었던가.
“하온데 성상께서는 어찌하여 김옥균 대감을 총리로?”
“덕국의 헤겔이란 철학자가 있네. 나폴레옹을 향해 Zeitgeist, 시대정신이라고 했다지. 고균은 갑신경장 이래, 성상과 함께 개화와 독립, 평등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대표했네. 그건 부정할 수 없어. 고균이 총리에 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일세. 성상께선 만승(萬乘, 천자)의 지위에 계시니 논외로 하고, 누가 고균보다 더 이 나라의 개화를 대표할 수 있겠는가?”
유홍기의 평가는 정확하다 할 수 있었다.
김옥균은 조선의 문명개화, 자주독립, 만민평등을 일찌감치 외쳤고, 이선을 개화당의 지도자로 받들어 함께 노력했다. 그는 새로운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그 자신이 안동 김문이라는 명문 양반가 출신임에도, 구체제와 신분제에 대해 극도로 거부감을 가지고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대저 무위도식하는 양반이란, 아무 쓸모도 없는 무리에 지나지 않으니 잡초처럼 뽑아내야 한다. 인재는 출신과 상관없이 오직 능력으로 선발해야 한다.”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은 오직 문명개화에 있다. 인민은 아직 어리석고 무지하니, 국가가 계몽에 힘을 다하여 저들을 이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옥균은 서구화가 곧 문명개화라는 절대적 과제로 놓고, 민중을 무지한 무리로 여겨 계도의 대상으로 보이는 엘리트주의적 시각을 지니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유학의 전통적인 제세경륜(濟世經綸)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민국가를 지향한 김옥균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대표했고, 이선의 충실한 조력자였다.
“김옥균 대감이 마침내 총리가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대한의 정치가 중에 그만한 분이 없지.”
군부에는 특히 김옥균의 지지자가 많았다.
1895년의 대군주 밀서 사건 이후, 개화당 계열 장교들은 완화군 추대에 나선 바가 있었다.
이선이 황제가 된 이후, 군대의 정치 참여와 파벌 형성을 엄격히 금지하여 공공연히 세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군부의 주류는 개화당의 심정적 동조자라 할 수 있었다. 당장 군인 중 최고 엘리트인 참모국 총장 박유굉부터 박영효의 일족이자, 개화당의 지지자였다.
“대황제 폐하를 위하여, 총리대신 각하를 위하여!”
“대한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갑신경장 이래 관료 조직에 문벌(門閥)이 없던 이들이 등용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특히 군대에는 지방의 하층 출신으로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과 전공으로 출세한 장교들이 많았다.
이들은 입신양명과 민족주의적 열망이 가득했다. 장교들이 신분타파와 능력에 의한 등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반청(反淸) 자주를 대표한 김옥균을 지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단장님, 김옥균 대감께서 새 총리가 되셨답니다. 군부에 좋은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황성으로부터의 소식을 전해 온 참모장의 말에, 5여단장 홍범도 정령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정부를 누가 이끌건, 군인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할 뿐일세. 우리는 황제 폐하의 군인이자, 국군이라는 잊지 말게.”
“소, 송구합니다.”
참모장이 어색하게 서 있자, 홍범도가 어깨를 툭 쳤다.
“물론 예산이 풍족하게 나오면 좋지만, 그건 정부와 의회에 맡겨 두고 우리 일이나 열심히 하세나.”
“예!”
중앙 정치에 관심을 보이는 참모들과 달리, 홍범도는 정치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황제와 개화당에게 특별한 생각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대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평안도 상놈으로 군영에서 나팔이나 불던 내가, 어찌 국가를 위해 군대를 지휘하여 전공을 세울 날이 왔겠는가?”
홍범도야말로 가장 극적인 변화의 상징이었다.
하층 빈민으로 태어나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열다섯 살 때 먹고 살기 위해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양 군영의 나팔수로 들어갔다.
지방군의 온갖 부조리와 부패를 본 홍범도는, 한때 포악한 상관을 들이받고 탈영까지 결심했었다.
바로 그 무렵, 갑신경장이 발생했다. 새 조정은 신분제 폐지와 만민평등, 능력에 의한 입신양명을 약속했다.
새 무관학교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다. 자신처럼 신분이 낮고, 가난하며, 평안도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지닌 이도 시험만 합격하면 연무공원(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홍범도는 아직도 그때를 잊을 수 없었다.
“학도 제군! 제군은 부단히 새로운 병학(兵學)을 익히도록 하라. 새 조선의 무관은, 출신이 아니라 오직 능력으로 선발할 것이다. 제군의 두 어깨에 조선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명심하고, 훈련을 거듭하라!”
임금의 장자인 완화군 대감이 직접 친히 격려했던 감격.
“제군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첨병이다.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 노릇을 하려고 하니, 우리 조선은 아시아의 법국(프랑스)이 되어야 한다. 장차 타국의 압제와 간섭을 물리치고, 조선도 서양과 어깨를 나란히 할 당당한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김옥균 대감의 연설도 기억에 생생했다. 아직 청나라의 제후국이던 시절, 군사력이 형편없던 그 시절에 장차 조선도 당당한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말로 청나라를 격파하고 자주독립을 쟁취했다. 북벌을 성공시키고 만주로 나아갔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지만, 마침내 이뤄 냈다.
“황제 폐하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몸소 방어했고, 북벌을 성공시켜 고토를 수복했다. 나는 장교로 그 영광스러운 승리를 함께 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충군애국하리라!”
홍범도는 강한 충성심과 애국심과 더불어, 자부심을 느꼈다.
자신은 새로운 시대를, 대한제국을 살아가며 지키고 있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5여단은, 만주의 최전방, 연길도 목단강 일대에 주둔하며 북간도의 한인 정착지를 지키는 최전선 부대였다.
오랫동안 황무지였던 북간도는, 한인의 정착과 함께 옥토로 변해 가고 있었다.
특히 만인대 진격과 북벌전쟁 이후, 한인 이주 인구가 급증했다.
1901년 자치령 수립, 압록강 철교 완공과 안봉선 철도 부설, 대규모 농토 개간과 광산 개발은 한인을 만주로 불러 모았다.
‘만주 열풍’은 가히 1900년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가자, 북으로!”
“아침은 황성에서, 저녁은 안서에서! 만주는 가깝다! 경의선을 타고, 압록강 철교를 넘어라!”
“만주는 조상의 고토, 우리의 터전!”
“동포여, 새로운 희망을 약속하는 만주로!”
“다가오는 광무 8년은 전진의 해!”
“개발! 건설! 교육! 국방!”
“싸우면서 건설하자! 배우면서 일하자!”
온갖 구호와 선전이 난무했다.
민족주의적 열망이든, 새로운 자유를 찾기 위함이든, 경제적으로 한몫을 잡기 위함이든, 인생을 바꿔 볼 목적이든 간에 만주는 기회의 땅으로 다가왔다.
정착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새로운 땅에서 희망을 찾고자 온 이들이었고, 그들은 이전보다 나은 삶을 추구했다.
“만주에 가면 땅을 나눠준다더라.”
“만주에 가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더라.”
“만주에 가면 누구나 대우받을 수 있다더라.”
“만주에 가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더라.”
민족주의에 열광하는 식자층이나 투자할 여유가 있는 상류층만 만주에 열광하는 게 아니었다.
가난하고 억압받던 이들일수록, 오히려 더 만주에 열광했다.
문명개화, 자주독립, 만민평등이 19세기 말 조선의 시대정신이었다면,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시대정신으로 만주가 떠올랐다.
‘만주’는 대한제국에서 지리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온갖 욕망을 암시하는 일반명사와도 같았다.
바야흐로 제국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