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6
– 36화에 계속 –
36화 구원자(saviour)
국가 제창이 끝나자, 시종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의 은총에 의해, 전 러시아인의 임페라토르, 모스크바, 키예프, 블라디미르, 노브고르드의 전제 군주, 폴란드와 그루지야의 차르, 카잔, 아슈트라한, 케르손, 시베리아의 차르, 스몰렌스크, 리투아니아, 볼히니아, 핀란드의 대공…….”
대제국의 황제답게, 알렉산드르 2세를 수식하는 직위와 호칭은 한도 끝도 없이 길었다.
‘이걸 어떻게 다 외우나?’
이선은 지루함을 느꼈으나 정자세를 유지했다.
“투르키스탄과 아르메니아의 군주…… 모든 북부 국가들의 지배자이자 주인……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알렉산드르 2세 폐하 만세!”
“만세!”
도열해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이선은 그중 낯익은 사람들이 보였다. 맨 앞의 니콜라이 대공은 이선을 향해 눈인사를 보냈다.
거창한 지위의 소유자, 알렉산드르 2세는 옥좌 앞에서 장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일, 참으로 불측하게도 짐을 노린 암살 시도가 또 있었다. 작년 2월의 황궁 테러로 시종들이 죽은 데 이어, 오늘도 짐의 근위병이 목숨을 잃게 되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짐은 건재하다. 이는 하느님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이자 정교회의 수호자인 차르에게 명하신바, 짐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황제는 자신의 건재를 알린 후, 향후 시정방침에 대해 말했다.
“짐은 내무대신 로리스-멜리코프 백작에게 명하여, 제국과 황실의 안녕을 위협하는 테러 분자를 뿌리 뽑을 것을 명령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주요 도시에 3개월간의 계엄령을 선포한다. 다시는 이러한 역적들이 러시아에서 나타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짐은!”
황제는 이 부분에서 어조를 강하게 했다.
“1881년 3월 1일에 서명한, 로리스-멜리코프 백작의 개혁안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갈 것이다. 젬스트보(지방 자치 기구)와 도시두마(시의회)는 대표자를 선출해 황제의 입법 자문 기관이 된다. 러시아 제국은 신의 대리인인 차르와 신민의 조화 하에 무궁토록 번영해 나갈 것이다.”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을 더 강력하게 밀어붙일 것을 강조했다. 전제국가인 러시아에서 입법 기구를 만드는 것에 반발하는 보수파가 많았으나, 황제의 강력한 의지 앞에 반대하지 못할 터였다.
“짐이 개혁안에 서명한 날에 역적들의 암살 시도가 실패했음은, 하느님께서 짐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고 보호해 준 것이다. 실로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 수가 없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린다.”
‘정교회의 수호자’인 황제는 모든 것을 신의 영광으로 돌렸다. 그리고 정교회 방식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해 성호를 세 번 그었다.
“С нами Бог! (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황제가 신에게 인사를 올리자, 좌중 또한 성호를 그으며 구호를 외쳤다.
“Боже, Царя храни! Многая лета Царю, государю России и защитнику православной веры!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 러시아의 군주이시자 정교회의 수호자이신 차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뭐라는 거냐.’
러시아어, 그것도 아주 장중하고 고풍스러운 황실 언어와 교회 슬라브어로 이야기가 오고 가니 이선은 고유 명사 외에 알아듣는 데 한계가 있었다.
성호를 긋는 좌중의 열렬한 반응을 보건대 황제가 중요한 발표를 하고, 신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러시아어를 익혀 두어야겠다. 최소한 프랑스어는 유창하게 할 줄 알아야지.’
러시아 국민이 아니고, 정교도도 아닌 이선과 장무영은 그저 부동자세를 유지할 뿐이었다.
“짐이 피격당한 바로 그 장소에, 짐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올리고자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을 세우고자 하네.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지당하십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알렉산드르 3세가 암살당한 부황을 애도하고자 세운 성당이지만, 바뀐 역사에서는 암살 음모로부터 구원받은 걸 기념하는 성당이 될 터였다.
“그 성당에는 마땅히 짐을 구한, 이 시대의 구원자들 이름이 적혀야지.”
알렉산드르 2세는 ‘구원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짐이 시해 음모로부터 살아남은 것 또한 하느님께서 예비하신바, 짐을 돕기 위해 신의 전령을 보내신 덕이다. 짐의 손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근위 기병대 야코프스키 대령과 카자크 기병들, 경찰청장 보로지츠키 총감과 수도 경찰들. 이들의 공로를 모두 치하한다. 그리고…….”
황제는 마침내 이선의 이름을 호명했다.
“조선국 특명 전권 공사 이선 공작은 앞으로 나오라!”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이선은 황제의 정면으로 나아갔다.
“이선 공작과 그의 가신의 적절한 조치가 없었더라면, 짐은 살아서 이 순간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동방박사를 보내시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비하셨듯이, 동방의 왕자를 보내시어 러시아 제국을 보호하셨도다. 이선 공작, 러시아 제국과 짐은 그대의 공로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황제는 이선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어로 치하했다. 이선은 과도한 찬사에 오그라드는 기분이었지만, 기쁘게 웃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직접 훈장을 이선의 왼쪽 가슴에 달아 주었다.
“성 스타니스와프 1등 훈장을 조선국 특명 전권 공사 이선 공작에게 수여한다.”
성 스타니스와프 훈장(Order of Saint Stanislaus)은 본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최고훈장이었으나, 러시아가 폴란드를 병합하면서 훈장도 계승했다.
러시아 제국 최고 훈장으로 치는 성 안드레이 훈장이나 성 게오르기 훈장,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과 비교하면 격이 조금 떨어졌지만, 저 3개의 훈장이 황족이나 대신, 장성급에게 부여하는 최고 훈장임을 감안하면 공훈을 세운 외국인에게 부여하는 훈장으로 가장 애용되었다.
동양인으로는 1878년 일본 공사 에노모토 타케아키가 성 스타니스와프 1등 훈장을 받은 바 있었다.
“……성 스타니스와프 3등 훈장을 이선 공작의 가신, 장무영에게 하사한다.”
황제는 친히 장무영의 가슴에도 훈장을 달아 주었다. 대책 없이 조선을 떠난 지 1년 만에, 러시아 황제에게 훈장을 받을 날이 오다니. 장무영은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 스타니슬라프 1등 수훈자는 러시아 제국 세습 귀족의 권리를 누리고, 매년 연금을 하사받습니다.”
시종장의 설명에, 이선은 약간 시큰둥했다.
‘……설마 그게 끝은 아니겠지.’
“이선 공작의 노고를 어찌 훈장과 돈으로 갈음하겠는가? 짐의 손자 니콜라이 대공과 함께 힘을 합쳐 시역 음모를 막았으니, 공작은 니콜라이의 형제나 다름없다. 이는 또한 짐의 손자나 다름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황제의 설명에 이선은 비로소 마음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전제 군주국인 러시아에서 황제의 손자나 다름없다니, 엄청난 일이군.’
“공작, 만약 공작이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인이 되길 희망한다면, 짐이 직접 공작의 대부(代父)가 되어 주겠소.”
“폐하, 그건……!”
황제가 직접 대부가 되어 주다니, 알렉산드르 황태자가 너무 과도한 게 아니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황제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표트르 대제께서 흑인 소년 간니발의 대부가 되고, 그를 러시아 제국의 장군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대제께서 선례를 보이신 일을, 짐이 못 할 것은 무엇인가?”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Abram Petrovich Gannibal). 일명 ‘표트르 대제의 흑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에티오피아 태생으로 추정되는 간니발은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려 갔는데, 러시아 공사가 사들여 페테르부르크로 보냈다. 당시 유럽 궁정에서 흑인 시종의 존재는 군주의 권위를 보여 주는 귀중품 같은 존재였다.
표트르 대제 이후에도 러시아 황실에서 흑인 청소년들을 데려온 경우는 있었으나, 황제의 권위를 빛내는 근위병으로 쓰는 정도였다.
하지만 계몽 군주, 표트르 대제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타고난 신분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표트르는, 흑인이라 할지라도 피부 색깔과 무관하게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흑인 소년은 세례를 받고,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에서 따온 아브람 간니발이란 이름을 얻었다.
표트르 대제가 직접 간니발의 대부가 되어 주었다. ‘페트로비치(표트르의 아들)’란 부칭도 표트르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흑인 노예에서 황제의 대자로, 인생 역전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간니발의 후견인이 되어 프랑스로 유학을 보냈고, 간니발은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로 돌아온 간니발은 표트르 대제와 그 후계자들의 총애를 받았다. 최종적으로 육군 소장과 레발(Leval, 에스토니아) 총독을 지냈으며, 귀족 작위와 막대한 토지를 수여 받았다. 간니발은 완벽하게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간니발의 외증손자가 바로, 러시아의 국민 시인으로 이름 높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다.
러시아 제국은 당대 서양 제국들 중에 가장 인종 차별이 적은 나라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러시아 제국이 근대 국민 국가가 아닌 전근대적 신분제 국가였기에 그런 일이었다.
프랑스나 미국 같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에서는, 외국 상류층이 귀화한다고 해서 특별대접을 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근대 국민 국가에서는 외국인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인종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자국의 평민들보다 외국 귀족을 늘 우대해 왔고, 러시아 귀족이나 관료제에 포섭된 외국계 귀족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독일계 귀족은 물론이요, 동양계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
종교와 인종이 다른 튀르크계 귀족들, 몽골계 귀족들도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되면 우대받았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카프카스에서 러시아의 지배에 맞서서 무려 25년간 게릴라전으로 싸웠던 무슬림 지도자 이맘 샤밀(Imam Shamil) 같은 경우도 있었다.
러시아와 카프카스 무슬림 쌍방 간에 무수한 피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맘 샤밀은 항복한 후에는 알렉산드르 2세를 알현하고 러시아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그 자식들도 귀족 세습을 인정받아 러시아 사관 학교에 입교할 정도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간니발의 사례를 언급해 이선을 양자이자 러시아 제국의 지배층으로 키우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낸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에게 간니발이 있다면, 짐에게는 이 동양 소년이 있는 거지.’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2세 치세에 중앙아시아와 극동에서 대거 영토를 확장했다. 새로운 신민을 통합할 의무가 있는 다민족 제국의 황제에게, 황제의 목숨을 구한 동양 소년이 러시아를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그림은 선전용으로 아주 좋은 것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정중히 사양하고 싶습니다, 폐하.”
하지만 이선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황제의 엄청난 호의를 거절하다니, 좌중은 모두 놀랐다.
“황제 폐하의 은혜는 실로 감읍할 따름이지만, 저는 조선인이고 조선 국왕 폐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하여 조국과 부왕을 저버리고, 러시아인과 정교회 신자가 되겠습니까?”
이선이라고 갈등이 없지 않았다.
‘여기서 수락하면, 러시아에서는 호의호식하면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지. 하지만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은 완전히 끊어질지도 모른다. 내가 황제를 구한 목적이, 러시아 귀족이나 관료가 되기 위함은 아니잖아?’
짧은 고민을 마친 이선은, 자신이 조선의 왕자이자 애국자임을 강조하며 거절했다.
“제가 황제 폐하를 구한 건, 조선을 위한 일이지 저를 위한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제게는 조선 왕실과 2천만 동포에 대한 책무가 있습니다. 저는 전례 없는 국난의 위기에 직면한 조선의 구원자가 되고 싶습니다.”
“허어, 조국과 왕실에 대한 공작의 충성심은 정말로 대단하군.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해.”
황제는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러시아 귀화와 정교회 개종을 철회했다.
“알겠소. 하지만 짐은 꼭 그대에게 보답하고 싶은데, 소원하는 바가 있소?”
“이웃 나라인 러시아 제국과 조선 왕국이 수교를 맺고, 평화를 유지하며, 만대에 우호를 함께 하는 것이면 족합니다.”
이선은 속내를 감추고 일부러 겸손하게 말했다.
“그건 당연히 그리될 것이오. 짐의 말은, 그대의 개인적 소원이 없냐는 것이오.”
“왕족으로서 저는, 국가의 뜻이 곧 저의 뜻이오, 국가의 행복이 곧 저의 행복이지요.”
어린 소년의 겸손한 처신에 황제는 더욱 감탄했다. 제멋대로이고 권력 지향적인 서양 왕자들을 보다가, 국가와 왕실에 충성하는 조선 왕자를 보니 신선할 따름이었다.
“짐은 조선이 아니라,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군. 말해 보도록 하시오.”
“그렇다면, 한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