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62
– 43화에 계속 –
2부 43화 충성 경쟁
5월 31일은 국경일, 황제의 탄일인 건원절이었다.
대한제국 선포 이래 건원절 기념식은 빠진 적이 없었지만, 올해는 취소되었다.
“광무 8년 건원절은 공식적인 행사를 개최하지 않는다. 각급 관청과 학교, 민간에서도 국경일에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번거롭게 모이지 말라.”
박람회와 함께했던 광무 6년의 성대했던 건원절 기념식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올해 행사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에 실망했지만 이해했다.
“연초에 명헌태후께서 승하하셨으니, 황실은 상중(喪中)이 아닌가.”
“황제 폐하께서는 효심이 지극하시니, 당연한 일일세.”
“그래도 좀 아쉽군. 올해도 근위사단 행진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국민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건원절 다음날인 6월 1일, 내무부의 대국민 발표가 있었다.
“광무 8년 건원절을 기해, 일부 역적들이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역모를 획책했다. 역적들은 불측하게도 경운궁에 불을 지르고, 어가에 폭탄을 던지려는 시역을 꾀했다. 아,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실로 천명을 계승하신 분이니, 역적들은 감히 하늘을 거스를 수 없다. 하늘이 보우하사, 대황제께옵서는 더없이 평안하시고, 역적들은 모조리 검거되었다. 역적들은 국가의 은덕을 입었음에도, 흥아론에 심취하여 일본 국수주의 단체와 결탁하였으며……”
전례 없는 시역 음모에 전국이 충격에 빠졌다.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여보게들, 소식 들었나? 역적 놈들이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고 했다네!”
“들었네!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어찌 감히 황제 폐하께 불측한 짓을!”
“배후에 왜놈들이 있다던데? 왜놈들도 경무청에 여럿 잡혀갔다네.”
“영국놈들이 황제 폐하를 아라사 앞잡이라고 모욕하더니, 왜놈들은 감히 시해까지 획책해!”
“영국놈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왜놈들의 행각을 결코 참을 수가 없네!”
“암,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 어찌 시역 음모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나!”
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분기탱천한 군중은 진고개의 주한 일본 공사관으로 몰려들었다.
일본 공사관은 경무청 순검들에 의해 엄중히 보호받고 있었다.
“이보시오, 길을 터 주시오! 왜국 공사를 만나 패역무도한 짓거리를 항의해야겠소!”
“대황제 폐하의 명이시다! 공사관은 외교 공관이니, 결코 침범해서는 아니 된다! 그대들은 황명을 받들어 조속히 해산하라!”
황명이라는데 군중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그들의 분노가 삭이지 않았다.
“왜놈 신문인 한성신보가 시역을 선동해서 경무청에 잡혀갔다고 하오!”
“뭐요! 갑시다, 한성신보로!”
대역 사건의 배후지로 의심받고 있는 한성신보사로 군중이 몰려들었다. 검거 이후 한성신보는 정간되어 건물은 폐쇄된 상황이라, 일본인 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한 군중들은 건물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현판 떼!”
“아니, 현판 가지고 되나! 헛소리를 찍어 내는 윤전기를 박살 내야지!”
“옳소! 전부 때려 부숩시다!”
군중은 한성신보사 내부로 진입하여 기물을 마구잡이로 박살 냈다. 일장기가 끌어내려져 찢기고, 인쇄 시설은 박살이 났다.
이윽고 진고개 주변의 일본인 거주지를 공격하자는 선동도 쏟아졌으나, 순검이 이미 진고개 일대를 방비하고 있었다.
“성상께서는 현명하신 분이시니, 결코 일인과 대립하는 걸 원치 않으실 거요. 이만 해산합시다.”
한성신보에서 한바탕 분풀이를 한 후, 군중은 해산했다.
“젠장,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부임한지 불과 며칠도 되지 않은 신임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경무청의 일본인 체포는 조약 위반이라고 한국 정부에 항의했지만, 일본인이 시역 음모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차가운 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한국에 갓 부임한 하야시는 정보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즉시 도쿄 외무성에 보고하고, 훈령을 요청했다.
시역 음모의 불똥은 개화당 내각에도 튀었다. 주모자로 지목된 이들은 하나같이 개화당 지도부와 인적 관계가 있는 이들이었다.
우범선은 아예 옛 개화당원이었고, 대부분 일본 유학파인 유신회 인사들은 개화당 지도부의 추천을 받아 유학을 떠났었다. 유신회는 개화당에서도 가장 친일적인 무리가 갈라져 나와 결성한 단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욱이 정변이 성공하면 개화당 정부를 추대하여 내각책임제를 실현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들로서는 졸지에 역모에 연루된 셈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 군인들이 여럿 연루되었으니, 제복군인의 수뇌인 박유굉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웅렬, 유길준, 박유굉 등은 줄줄이 황제 앞에 대죄를 청했다.
심지어 은퇴하여 집에 머물러있던 원훈 김홍집, 박정양도 노구를 이끌고 나와 대죄를 청했다.
“신등이 어리석어 국가의 동량을 키우고자 하였는데 역적의 조아(爪牙)를 키우고 말았습니다.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졌으니, 신등은 성상께 죄를 청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모두 신등의 죄입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대신들은 경운궁 중화전 앞에 무릎을 꿇고 거듭 죄를 청했다.
마침내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대신들은 더욱 고개를 깊이 숙였다.
“경들은 모두 일어서도록 하시오.”
“신등이 무슨 낯으로 용안을 뵐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죄를 청할 뿐입니다.”
“일어서시오. 짐이 원하는 건 경들의 굴종이 아니오. 앞으로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냐는 것이지.”
이선의 강권에 대신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들이 저 역적들과 이런저런 관계가 있었다는 건, 짐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건 경들이 당국자여서 그랬던 거 아니겠소? 유학을 가려면 대신들의 추천이 필요했으니, 이름을 올린 게 어찌 죄가 되겠소?”
“하오나 저 역적들을 추천하고, 관리하지 못한 죄가 있사오니…….”
“무엇보다 저 역적들이 감히 대역을 저지르고 신등을 내세우려고 했다고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각을 총사퇴하고 성상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신등의 사퇴를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김옥균과 박영효가 내각 총사퇴 의사를 밝히니, 다른 대신들도 잇달아 사퇴를 청했다.
“어허, 이런! 경들은 들으라. 짐과 경들은 20년 전부터 이 나라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위해 힘써 왔다. 짐은 경들의 충정과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경들에 대한 짐의 신뢰가 겨우 한 줌도 안 되는 역적들에 의해 사라지겠는가?”
이선은 개화당 내각에 변함없는 재신임을 표명했다.
“하물며 동양의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고, 주변국에는 전쟁과 반란의 기운이 가득하다. 이 어려운 시국에 경들과 같이 유능한 신료들이 어찌 짐과 국가를 저버리려 하는가? 짐은 경들을 믿는다. 경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국무에 충실하라.”
황제의 거듭된 신뢰 표명에, 대신들도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특히 김옥균은 눈물까지 글썽거릴 정도였다.
“폐하! 어리석은 신등을 이토록 아껴 주시니, 이 무한한 성은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충성을 다해 성상과 국가를 보위하겠습니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대신들은 새삼스레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다. 이선은 엄숙한 표정으로 이들의 충성 맹세를 받았다.
충성 경쟁은 정파를 막론하고 쏟아졌다. 오래전부터 이선에게 가장 비판적이던 유림들조차도 상소를 올렸다.
“아! 극역무도(極逆無道)한 자가 예로부터 무수히 많았지만, 이 역적들처럼 극악하고 패악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나라에 지금까지 없었던 변고이고 흉역(凶逆)으로서도 지금까지 없었던 역적이니, 모든 사람치고 그들의 살갗을 깔고 자고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새 형법에는 교형(絞刑)에 처하는 것 외에 더 이상 극형이 없습니다. 비록 폐하께서 형벌을 관대하게 하려는 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아! 저 흉역한 무리는 국가가 너그럽게 용서해 준 은혜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반역을 꾀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대역(大逆)들은 때를 기다릴 것 없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저자에서 사지를 찢어 거리에 목을 매달며 그 족속들과 연관된 패거리들을 잡아 가둬야 합니다. 위로는 선왕의 법을 따르고 아래로는 훗날의 악을 징계하소서!”
유림들은 새로이 제정한 형법 대신에 역적들을 옛 대명률로 다스리라고 촉구했다. 역적들을 친국(親鞫)하여 고문하고, 공개 처형하며, 연좌제를 적용해 일가친지를 모두 잡아 가두라고 외쳤다.
“상소의 충정은 갸륵하긴 하나, 결코 가납할 수 없다. 대한은 헌법과 형법을 따르는 문명국가이다. 짐이 직접 법을 제정했는데, 어찌 이를 파괴하랴? 저 역적의 무리는 과연 흉악하기 짝이 없다. 저들이 스스로 신민 된 도리를 저버렸다고 하여 어찌 헌법과 형법의 원칙을 저버리겠는가? 조사와 심리(審理), 재판은 원칙과 절차에 따라 집행될 것이니, 이는 문명국가의 규례이다.”
이선은 근대법의 원칙을 지킬 것을 분명히 천명했다.
“특히 연좌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연좌를 외치는 이들은, 짐의 명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운 내무협판 민영환을 보라!”
“내무협판의 생부는 임오년 역적 민겸호이다. 민겸호는 군민을 탄압하고 국고를 도적질했으며, 짐과 대원왕을 모해하려다 토벌된 역적이다. 그런데 만약 그때 연좌를 적용해 자제를 벌했다면, 어찌 오늘날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민영환이 있겠는가? 사람을 일깨우는 건 혈통이 아니라 교육이다. 짐은 결코 역적의 일가라 하여 벌하지 않겠다. 이들이 민 협판처럼 자발적으로 부형(父兄)의 죄를 씻고 국가에 충성하게 될 날을 기다리겠다.”
과연 민영환이야말로 역적의 죄를 충성으로 갚은 살아 있는 사례였다.
황제의 일성(一聲)에 국민은 감탄했다.
“감히 시역을 꾀한 역적들에게도 원칙을 지키시다니, 과연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이 내린 성군이 아니신가!”
“역적의 일가라 할지라도 국가의 동량으로 키우겠다니, 참으로 관대하시네. 민 공과도 같은 분이 계시니 충분히 납득이 되네.”
“암, 문명국가의 원칙은 지켜야지. 황제 폐하의 높은 뜻을 헤아리지 않을 수가 없네.”
독립당을 비롯한 자유주의자들, 그간 친일 성향을 보였던 아시아주의자들도 충성 경쟁에 합류했다.
예컨대 아시아주의에 공명하여 러시아를 비판하는 논설을 썼다가 구금된 바 있었던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은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친일파들을 통렬히 비판하는 논설을 썼다.
「비록 세계적으로 군민공치의 시대가 왔다고는 하나, 황실의 존엄함과 군주의 군권은 불가침의 존재이다.」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신무한 성덕으로 대한의 국위를 만방에 떨치셨으니, 국부(國父)나 다름없으시다. 어찌 신자(臣子)된 처지로 충성을 다하지 않겠는가. 근자에 일부 불경한 자들이 망동을 꾀하였으나, 하늘이 국민의 충심에 조응(照應)하여…….」
「대한에는 오직 대한의 국익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실체도 없는 동양, 아시아가 우선하랴? 마치 일본을 제 조국처럼 여기는 무리의 동태가 한심하기 짝이 없더니, 결국 이런 흉악한 짓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저 무도한 일본을 어찌 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일본 정부와는 무관하다고 하여도, 일본인이 연루된 이상 이는 일본의 책임이다. 엄중히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 도쿄.
「한성신보 주필 구니모토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는 신문을 통해 흥아론을 고취하며 황제 폐하를 로탐으로 모는 기사를 개제, 선동을 멈추지 않았다. 흑룡회에 속하는 스기야마 히카루, 도오가츠 아키 등은 소위 유신회 일당과 접촉하며 역모를 조종했다.」
「…… 소위 유신회는 흑룡회의 한국 지부에 지나지 않다. 대한제국 정부는 흑룡회가 시역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확신한다. 흑룡회는 황제 폐하를 시역하고, 청국 만주에서 반란을 조종했으며, 주변국의 혼란을 부추겨 그들의 야욕을 채우려 했다.」
한국 정부의 친서를 전달받은 일본 정부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일본인들이 한국 황제 시역 음모를 조종했다니, 이는 실로 엄청난 외교 문제였다.
「흑룡회는 이토 후작뿐만 아니라, 대로동지회 해산을 감행한 일본국 총리와 내무대신도 로탐으로 의심하고, 암살하여 정변을 도모하려 한 것으로 추정한다. …… 이성과 합리를 공유하는 한일 양국은 암살과 전쟁을 도모하는 국제 범죄조직에 맞서, 관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무조건 일본을 규탄한 게 아니라, 오히려 흑룡회가 사이온지와 하라도 로탐으로 몰아 암살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거 조작 아닌가? 궁궐에 불을 지르고 폭탄을 던져 정권을 바꾼다고? 세상에 이렇게 어설픈 정변 계획이 어디 있어?”
“폭탄이야 도쿄 시내에서도 날아다니는데. 흑룡회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아니지, 소위 대역 사건으로 누가 제일 이익을 봤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보이지 않나? 한국 당국의 자작극이야.”
일본은 대역 사건의 배후를 의심했다. 계획은 너무나 어설펐고, 시기도 너무나 공교로웠다.
“이토 후작과 야마가타 원수 피습 사건에도 온갖 음모론이 횡행하고 있는데,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국 황제 암살 미수 사건에 자작극을 운운할 순 없소. 어찌 되었건 황제 암살은 엄청난 일이 아닌가. 아무래도 대한 특사를 파견해야겠소. 한국 정부에 일본인이 연루된 된 것에는 유감을 표명하고, 상황을 면밀히 파악합시다.”
사이온지는 특사 파견을 결정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황제 암살 미수에 일본인이 연루되다니, 오쓰 사건의 악몽이 떠오르는군.”
러시아의 분노를 감내해야 했던 오쓰 사건처럼 심각한 사태와는 비견될 수는 없어도, 상황을 확실히 파악할 때까지는 당분간 한국에 저자세로 끌려다닐 판이었다.
한국이 시종일관 강경책으로 나온다면 모를까, 일본 정부와 우익을 분리시켜 합리적인 해결책을 논의하고, 분노에 찬 한국인들로부터 일본 공사관과 재한 일본인들을 보호하는 데 무작정 자작극이라고 의심할 순 없었다.
더욱이 러시아 황태자를 습격하고, 원로 이토마저 로탐으로 몰아 테러를 저지른 경험이 있는 일본 우익인지라, 러시아 음모론을 맹신하는 자들이 한국에서도 미친 짓을 저지르지 않았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한국에 완전히 코 꿰였구만. 어리석은 우익 놈들!”
사이온지는 지금 이 순간, 한국 황제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지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