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64
– 45화에 계속 –
2부 45화 유라시아 제국
동아시아가 정치적 격랑에 휘말린 1904년 봄.
영국의 ‘티베트 원정대’는 마침내 티베트의 수도 라싸로 가는 길을 열었다.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협상이 끝내 결렬되자, 원정대는 좁은 산악도로를 지나 티베트군이 방어하는 험준한 요새를 돌파했다. 티베트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영국군에게 처참할 정도의 교환비를 냈다.
지난 몇 달 간의 교전에서, 티베트군은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영국군 사상자는 단 200여 명이었다. 그나마도 험준한 지형 탓에 영국군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지, 야전에서 교전이 벌어지면 영국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성하, 영국은 신성한 도시 라싸에 무기를 들고 오려 합니다. 황공한 일이오나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영국에 항복하거나, 성하의 가르침을 받기를 열렬히 고대하는 몽골인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내 동포들을 학살한 영국에 어찌 항복하겠는가? 러시아에서는 끝내 지원이 없소?”
“성하께서 몽골에 왕림하시면, 보호를 약속했습니다.”
달라이 라마 13세는 한숨을 쉬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러시아의 지원은 없었다. 몽골이라면 모를까, 러시아는 인도의 지척에 있는 티베트를 놓고 영국과 갈등을 빚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명목상 종주국인 청 조정이 하는 일은 더 없었다. 티베트에서 청나라를 대표하는 암반(주장대신, 駐藏大臣)은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도르지예프를 비롯한 부랴트 출신 승려들은 달라이 라마에게 몽골행을 권했다. 몽골 왕공들은 종교 수장인 달라이 라마를 열렬히 지지했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인들에게 청나라에 맞서는 독립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어찌 달라이 라마가 동포들을 저버리고 떠날 수 있겠소?”
“때로는 물러서야 하는 법입니다. 몽골에서 힘을 길러, 천명을 잃은 만주로부터 티베트와 몽골의 독립을 이끄셔야 합니다. 한국 황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러시아에서 힘을 길러 조국으로 되돌아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개혁을 이끌지 않았습니까? 성하께서도 그와 같은 운명에 계십니다.”
고심하던 달라이 라마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우르가로 몽진한다. 비록 지금은 떠나지만, 반드시 되돌아와 수복하리라.”
6월 27일, 달라이 라마는 판첸 라마에게 섭정 지위를 내리고, 몽골의 수도 우르가로 떠났다.
라싸에서 우르가까지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주독립국을 향한 티베트의 험난한 길을 암시하는 듯했다.
“마침내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비밀의 도시에 도달했구나.”
7월 3일, 원정대는 라싸에 입성했다. 여러 서양 모험가들이 이 신성한 도시에 오기를 열망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이 나라는 문을 열지 않았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은 영국 원정대에 의해 강제로 열리고야 말았다. 근대 문명의 오만과 폭력을 짊어지고 온 침략자들에 의해.
“영국은 러시아의 마수로부터 티베트를 구원했다. 만주를 강점한 러시아와 달리, 영국은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면 그 즉시 회군할 것이다.”
라싸에 입성한 영국군은 ‘평화 사절단’을 자처했다. 이들은 대민 의료 지원을 하며 티베트인의 환심을 사려 했다.
영국이 그토록 침략을 정당화했던, ‘러시아의 그림자’는 라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러시아군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 스파이의 흔적도 없었다. 러시아가 선물로 준 베르단 소총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영국군의 진격 앞에 아무 소용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원정대는 티베트에 새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조정으로부터 훈령이 없었으니 참여하지 않겠소. 하지만 당신들이 어떤 조약을 맺건, 조정은 승인하지 않을 거요.”
암반은 영국의 조약 체결을 방관했지만, 은밀히 황제에게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난 죄를 물어 폐위하라고 권했다. 달라이 라마의 몽골행은 몽골인들의 반청 의식에 불을 지를 수가 있는 사안이었다.
티베트와 몽골을 모두 중국 본토의 성처럼 개편하려고 하는 북경 조정은 이번 기회를 활용하고자 했다.
“오직 달라이 라마 성하만이 조약을 체결한 권한이 있으시다. 우리는 결코 조약을 맺을 수 없다.”
섭정 판첸 라마와 대신들은 여전히 달라이 라마에게 충성하며, 조약 체결을 거부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총칼 앞에서 이들을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 티베트 영토의 어느 부분도 외국에 양도, 판매, 임대될 수 없다.
2. 어떤 국가도 티베트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 영국을 제외한 외국의 외교관이나 대리인은 티베트에 입국할 수 없다.
3. 철도, 도로, 전신, 광업 또는 기타 권리에 대한 양도는 영국을 제외한 외국 세력에게 부여되지 않는다.
4. 영국인은 티베트에서 자유롭게 무역에 종사할 권리를 부여받는다.
5. 티베트는 750만 루피의 배상금을 영국령 인도제국에 지불한다. 지불 완료까지 영국은 츈비 계곡을 점령한다.
8월 3일에 체결된 라싸 조약은 명목상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한 상황에서, 영국은 실질적으로 티베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영국을 제외한 그 어떤 국가도 티베트에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 사실상 보호국이나 다름없었다.
극빈국인 티베트에 750만 루피의 배상금도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영국은 75년 분할을 제안했는데, 이는 곧 75년간 인도-티베트 국경을 계속 점령한다는 의미였다.
조약 체결이 이뤄지자, 영국군은 8월 말까지 철수를 완료하기로 결정했다. 포로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티베트인들의 서양에 대한 극심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종주국이면서 외적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청나라에 대한 불신도 더욱 강해졌다.
영국군의 라싸 점령과 조약 체결 강요는 유럽 각국의 비판을 받았지만, 그 어떤 열강도 티베트를 위해 나서 주지는 않았다.
티베트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던 대한제국에서도 영국을 비판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러시아 스파이 운운으로 영국에 대한 반감이 커진 상황에서, 친미 친영 성향의 ≪독립신문≫조차 영국의 티베트 침략을 통렬히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춘추에 의로운 싸움이 없다 하나 세상에 어찌 이처럼 명백한 무도의 싸움과 무리한 조약의 강제가 있으리오. 영국은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어 서장인의 귀중한 수천 생령을 도살하였는가? 아니다. 오직 자기 말을 듣지 아니하는 이유로! 아연하지 않을 수가 없도다.」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나라가 가장 약하고 가난한 나라를 상대로 벌인 짧은 전쟁은 끝났다.
제국주의 시대의 추악한 단면이었다.
* * *
영국이 러시아 위협론을 들먹이며 티베트를 침공하고, 일본에 로탐 광풍에 몰아닥치며 정국의 혼란이 발생하는 동안, 그들의 숙적 러시아는 뭘 하고 있었는가 하면…….
시급한 국내 문제로 인해 아시아 문제에는 개입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1904년에도 러시아의 불황은 지속되었고, 주변부 소수민족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진짜 문제는 러시아 국내에도 불이 옮겨붙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민의 이름으로, 압제자를 처단한다.”
인민주의와 테러리즘 전통을 계승한 러시아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은 요인 암살에 돌입했다. 각지에서 경찰서장, 헌병대장, 군수, 주지사 등이 테러로 목숨을 잃는 일이 잇달아 발생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노동자-농민 동맹 만세! 8시간 노동! 부당해고 금지! 토지개혁! 국제주의 정신으로 약소민족에 연대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은 노동절을 맞이하여 파업에 돌입했다. 아직까지는 경제적 요구에 머물러 있었지만, 점차 정치적 요구로 확산되었다.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일대에는 토지개혁을 부르짖으며 농민반란이 속출하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위기는, 폴란드와 핀란드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폴란드 사회당이 주도하는 파업과 테러는 총독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렀다.
폴란드가 러시아의 통치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해 온 나라였다면, 핀란드는 가장 순응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핀란드 민심조차 이반하게 된 건, 전적으로 차르의 책임이었다.
“러시아 제국주의 타도! 민족 해방 만세!”
1809년 스웨덴으로부터 할양받은 이래, 러시아 제국은 핀란드 대공국에 광범위한 자치와 독자적인 헌법과 의회를 허용했다. 역대 러시아의 차르들도 이를 용인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더욱 관용적인 정책을 써 핀란드인의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반동적인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는 강력한 대러시아 동화정책과 소수민족 탄압정책을 진행했고, 니콜라이 2세는 이보다 한발 더 나갔다.
차르가 새로 임명한 총독 보브리코프는 강력한 동화정책을 썼으며, 모든 공공문서에서 핀란드어 사용을 금지하고 러시아어 사용을 강제했다. 독자적인 핀란드 군대를 해산하고, 핀란드인을 징집하여 러시아 전역에 배치하게 한 조치는 가장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핀란드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차르는 총독에게 독재권을 주고 의회를 해산시켰다. 청원서를 들고 찾아온 핀란드 대표단은 아예 만나 주지도 않았다.
그 결과, 핀란드는 제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소수민족에서 격렬한 반대파가 되고 말았다.
“핀란드 인민을 대신해 총독을 처단한다!”
6월 16일, 핀란드 총독부 관료 에우겐 샤우만 (Eugen Schauman)은 총독 니콜라이 보브리코프(Nikolay Bobrikov)를 원로원 청사에서 총탄 세 발을 쏴 암살했다. 저격범은 스웨덴계 귀족으로, 부친이 러시아군 장성이자 원로원 의원이었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현장에서 자결한 샤우만은 미리 유언장을 남겨 단독범임을 강조했다. 그는 유언장에서 차르에게 충고했다.
“제국을 대국적으로 통치하십시오. 특히 폴란드와 핀란드, 발트 국가들의 감정은 세밀히 신경 써야 합니다.”
물론 유언장은 차르에게 전달되지도 않았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차르는 결코 신민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 대체 황제 폐하께서는 뭘 하고 계신 거요?”
“초강경파인 내무대신 말만 따르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거 아니오.”
“일단 당면한 경제위기부터 해결해야 하오. 비테 의장에게 다시 재무대신을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그만은 절대 안 된다고 하지 않소.”
경제위기와 정치위기에 잇달아 직면한 상황에서, 가장 유능한 관료인 비테를 재무대신에서 경질한 후폭풍이 일었다. 비테는 허울뿐인 각료회의 의장 자리에서 아무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재무대신으로 재임용하자는 의견은 차르가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총칼과 압제,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으로 제국을 다스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내무대신 플레베가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차르를 제외하고 전러시아가 증오하는’ 플레베는 이어지는 소요사태에 강경책으로만 대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차르가 전제군주로서 단호한 결단력과 통치력을 보여 준다면 모르는데, 니콜라이는 다른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들, 제발 이번만은 제국을 계승할 후계자가 태어나야 해.”
알렉산드라 황후의 출산이 곧 예정되어 있었다. 잇달아 딸만 넷을 낳은 알렉산드라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았다. 니콜라이는 딸들을 사랑하는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그에게도 아들이 필요했다.
“제국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건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다. 후계자만 태어나면 제국은 안정되고, 신민은 순종할 것이다.”
니콜라이는 여전히 국무를 성실히 수행했지만, 정신적으로 현실도피와 인지부조화 상태였다.
“아들만 태어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데, 이건 신께서 정해 주는 일이지 짐의 의지와 무관하니.”
온갖 혼란스러운 보고의 연속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친우 이선이 보내오는 편지였다.
「친애하는 짐의 형제 황제 폐하. 근래 일본이 비록 러시아에 도발을 벌이고는 있으나, 스스로 혼란에 빠져 우려할 바가 못 됩니다. 극동의 일은 크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께 극비사항을 전달해 드립니다. ……」
「곧 황후께서 출산이 예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아드님이 태어나실 겁니다. 동양에서는 해마다 상징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올해는 12년에 한 번 돌아오는 용의 해입니다. 갑진(甲辰), 청룡의 해지요. 폐하와 짐은 36년 전인 1868년에 태어났습니다. 무진(戊辰), 황룡의 해지요. 아시다시피 용은 동양에서 군주를 상징합니다. 그중에서도 황룡은 황제를 상징합니다. 폐하께서는 황제로 태어날 운명을 타고 나신 겁니다. 청색은 곧 동방과 생명의 시작을 알리기에, 청룡은 황제의 후계자를 상징합니다. 황룡의 후계자는 청룡일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께서 그토록 고대하던 황태자는 올해, 청룡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실 것입니다.」
과학적 근거라고는 전혀 없는, 오행사상과 도참을 멋대로 갖다 붙인 참언(讖言)에 불과했으나 신비주의자 니콜라이에게는 동양의 신비한 예언같이 느껴졌다.
“이미 몇 번이나 아들이 태어날 거라 예언하고 돈만 타 먹은 자칭 예언자들과 비교하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설명인가. 황룡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짐의 후계자는 곧 청룡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리라.”
이선의 ‘예언’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7월 30일(서력 8월 12일), 황후는 마침내 고대하던 아들을 낳았다.
마침내 아들이자 후계자를 얻게 된 니콜라이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아들! 위대한 러시아의 전제군주가 될 내 후계자! 동방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너는 장차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다스릴 제국의 황제가 되리라!”
니콜라이는 아들의 운명을 축복했다.
이선은 일전에 차르에게 유라시아의 천명이 있으며, ‘서방 로마의 후계자와 동방 칸의 후계자가 하나로 결합할 때, 진정한 제3의 로마는 완성된다’고 하였다.
니콜라이는 바로 그 꿈을 이룰 후계자가 태어났다고 믿었다.
예언을 성취할, 유라시아 제국을 계승할 후계자가.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에 점화된 전쟁의 불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