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66
– 47화에 계속 –
2부 47화 게임 플레이어
이승만의 도발적인 언설은 영국 정치가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한국은 친러국가가 아닙니까? 특히 한국 황제께서는 러시아 차르와 아주 긴밀한 관계로 아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개인적 감정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않으십니다. 아시다시피 정치란 생물과 같습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거지요. 1884년 개혁 전의 한국과 1894년 독립전쟁의 한국이 다르듯이, 1904년의 한국은 또 다릅니다. 한국은 해양세력의 교두보, 선봉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이 동양에서 서구 자유주의 문명을 지키려는 나라라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한국은 황제가 전권을 행사하는 전제국가 아닙니까?”
“아시아에서 일본과 함께 헌법과 의회가 있는 둘 뿐인 나라입니다. 심지어 한국의 참정권 범위는 일본보다 더 광범위하고, 종교와 사상의 자유도 있습니다. 감히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던 반역자들에게도 헌법상의 권리를 인정해 근대적 형법에 따른 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비서구 국가 중에 이런 나라가 또 있습니까? 개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이야말로 서구 문명의 충실한 계승자입니다. 헌법과 의회가 없는 전제정권인 러시아보다 한국이 더 서구에 가깝습니다.”
질의응답과 토론이 거듭 오가고, 포럼은 성황리에 마쳤다.
여전히 대부분의 영국 정치가들에게 한국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약소국으로, 이승만은 영어 잘하는 동양인 광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오늘 발표 흥미로웠습니다. 일전에 프린스 이와 귀국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지요. 윈스턴 처칠이라고 합니다.”
“아, 프린스 의(Prince Ui, 의친왕)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른 즈음의 동년배, 야망 넘치는 청년 정치가 처칠과 이승만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프린스 우이? 이거 발음이 너무 어렵군요. 아무튼 프린스께서는 평안하십니까? 듣자 하니 미국에서 사랑에 빠지셨다는데.”
“하하, 워낙 자유분방한 분이라. 황실이 그만큼 서양에 우호적이니까요. 황제 폐하의 막내아우이신 프린스 영(영친왕)께서는 영국으로 유학을 준비 중이십니다.”
“아, 훌륭합니다. 귀국 황실과 정부가 이토록 영국에 우호적이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겁니다.”
처칠은 얼마 전에 보수당의 무역 정책에 반발해, 보수당을 탈당하고 야당인 자유당에 입당했다. 보수당은 배신자라고 비난했지만 처칠은 개의치 않았다.
처칠은 콧수염을 점잖게 기른 동료 의원에게 이승만을 소개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의원. 자유당의 총아지요. 차기 내각에서 요직을 맡으실 겁니다.”
“오오, 위대한 웅변가로 명망 높으신 의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는 웨일즈 출신 변호사로, 27세의 젊은 나이로 최연소 하원 의원이 되었다.
보어전쟁과 제국주의의 부도덕성을 격렬히 비판하여 전국적 주목을 받은 로이드 조지는, 참정권 확대와 정교분리, 귀족의 불로소득 증세와 인민 복지를 과감히 주장하며 자유당의 거물로 떠올랐다.
보수파와 제국주의자들은 로이드 조지를 혐오했지만, 진보파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미래의 지도자였다.
“영국은 자유의 벗입니다. 귀국이 진정 아시아에서 전제에 맞서는 자유의 선봉이 된다면, 우리는 힘을 합칠 수 있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한국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로이드 조지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그도 현실 정치가이니만큼 결국 국익과 관계된 일이었다.
“보수당은 여전히 러시아의 허깨비를 쫓고 있어요. 고립주의를 청산하고 동맹 외교를 주도하는 건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만, 러시아를 지나치게 자극해서 좋을 건 없지요. 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맞서는 안보 체계를 구축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안 됩니다.”
“프랑스와 협상은 곧 이뤄질 겁니다. 그럼 프랑스의 동맹인 러시아와도 적대를 할 필요가 없지요. 물론 러시아가 만주에서 철수한다는 전제조건이 이뤄져야겠지만.”
“극동에서 한국이 영일동맹으로 기울어지면, 러시아도 강경책으로만 일관할 수 없을 겁니다. 비록 한국이 작은 나라라고는 하나, 한반도는 중요한 지정학적 축입니다.”
이승만이 보기에, 분명히 보수당보다는 자유당이 한국에 대해 더 우호적이었다.
‘내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 지금부터 판을 잘 깔아 놓으면, 영국과의 동맹도 충분히 성사시킬 수 있다.’
이승만은 영일동맹에 한국이 가담하여 극동 삼국동맹을 맺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는 외교를 구상했다. 그가 보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대한제국은 더 이상 예전의 약소국이 아니었다.
주영 한국 공사관.
1등 참서관 이한응(李漢應)은 근래 부임한 2등 참서관 이승만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승만 참서관을 말려야 합니다. 독자적 행보가 너무 심합니다. 아무리 황제 폐하의 친서를 모시고 왔다지만, 발언이 선을 넘었습니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대영 외교에 종사했던 이한응으로서는, 영국이 얼마나 한국을 무시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
이한응이 보기에 한국과 영국의 대등한 동맹은 불가능했다. 최선의 방책은 영일동맹과 노불동맹이 한국의 중립을 보장하고, 한국은 엄정 중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승만은 동맹파, 이한응은 중립파였다.
“우남은 얼마 전까지 미국에서 학자 생활을 했던지라, 자유로운 언행에 익숙해서 그랬으리라 보네. 내가 직접 주의를 주겠네.”
주영 공사 윤치호는 이한응의 비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속내는 좀 달랐다.
‘성심을 헤아려야 한다. 동맹인가, 중립인가?’
김옥균 내각 수립 이후, 외무대신에 주영 공사를 지낸 서광범이 취임했다. 법무대신에는 유길준이 취임했다.
주미공사에는 서재필이, 주영 공사에는 윤치호가 임명됐다.
모두 친미·친영 성향의 독립당 지도부였다.
혹자는 ‘독립당이 결국 그 뿌리인 개화당으로 돌아갔다. 독립당은 그냥 개화당에 다시 합당해라’고 비판했지만, 윤치호의 생각은 좀 달랐다.
‘현재 외교 정책의 실무를 맡고 있는 건 대부분 독립당 계열이다. 근래 대미, 대영 외교가 강화되는 정책과 맞물렸지. 그렇다는 건 역시…….’
총리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당 권력자들은 러시아보다 일본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근래 일본인이 황제 시해 음모에 휘말렸으니, 일본과 손을 잡자는 말은 감히 할 수 없다.
독립당은 예전부터 친미, 친영을 주장했다. 그동안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무시했기 때문에 허황된 주장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한제국은 더 이상 예전의 약소국이 아니었다.
‘흥, 그래도 서양과 대등한 동맹 같은 건 불가능해.’
윤치호는 이승만보다 훨씬 냉소적이었다. 진심으로 영미 자유주의 세계에 편입되길 원하는 이승만과 달리, 윤치호는 영미가 결코 비서구 국가를 대등하게 여기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미국 북동부에 살고, 더욱이 미국 상류 사회에 편입된 서재필의 후원을 받으며 하버드에서 유학한 이승만과 달리, 윤치호는 남부 버지니아에서 유학하며 숱한 인종차별을 받아 봤다.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그의 순진했던 신뢰는 깨지고야 말았다.
‘백인은 결코 황인을 대등하게 대해 줄 리가 없다. 오직 황인이 쓸모가 있음을 인정받았을 때, 백인의 이익을 앞장서서 수호해 준다면 손을 잡는 시늉이라도 해 주겠지. 일본처럼. 대한도 이제 그 시험을 받고 있는 셈이다. 준민한 사냥개로 쓸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치호는 영국의 헌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영국과 동맹을 맺을 수만 있다면, 대한의 위신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간다. 독립당의 입지도 마찬가지.’
윤치호는 외무대신 서광범에게 훈령을 요청했다. 본국에서 온 답변은, ‘영일동맹에 합류할 가능성을 타진해 보라.’였다.
서광범이 혼자서 이런 결정을 내릴 리가 없었다. 최소한 총리 김옥균, 더 나아가 황제가 지시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윤치호는 이승만의 ‘폭주’를 눈감아 주고 있었다. 이승만이 집권여당인 보수당이 아니라 야당인 자유당을 들쑤시고 다니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보수당 정부가 여전히 한국을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윤치호는 한국의 대영 외교를 대표하는 입장이었기에, 영국 외무부를 공략했다.
다우닝가 10번지. 영국 총리 관저.
“요새 어떤 동양인이 휘그(자유당) 애송이들을 선동하며 설치고 다닌다던데.”
“뭐, 이야기 들었소. 특별히 상대할 가치는 없지.”
“그건 차치하더라도,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니오? 어쨌든 간에, 한국은 동양에서 두 번째로 헌정체제를 갖춘 국가요. 이제 저들도 문명사회의 일원이라는 걸 인정할 때가 된 것 같은데.”
“헌정은 아무래도 좋고. 2천만에 가까운 인구, 10만이 넘는 서구식 상비군, 유사시 30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를 무시할 순 없지.”
“우려했던 것만큼 황제가 러시아에 기울어지지도 않았고. 스파이 운운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뭐, 이제 위대한 게임의 일원으로 인정해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소.”
“일본에서도 제안이 들어오고 있소. 영일동맹에 한국을 포함시켜 극동 삼국동맹으로 확대하자고.”
“일본이랑 동맹을 맺은 것도 불만을 느끼는 유권자가 많은데, 한국은 더할 걸?”
“러시아를 극동에서 몰아낸다면 그런 건 상관없소. 한국과의 동맹이 앞당길 수 있다면야.”
“일단 일본과 한국의 제안을 더 들어 봅시다. 당면한 과제는 프랑스와의 협상이오. 프랑스는 동맹인 러시아가 극동 문제에 휘말리지 않기를 원하니까.”
마침내, 영국은 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놓고 벌이는 거대한 체스, ‘그레이트 게임’의 일원임을 인정했다. 청나라·러시아·일본의 종속 변수가 아닌, 한국 그 자체가 독립 변수라는 걸 인정한 것이다.
* * *
시간을 잠시 앞으로 돌려, 광무 8년 6월, 대한제국 황성.
“우린 정말로 황제를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한국 정부가 뒤집어씌운 겁니다.”
“억지 자백을 받아 내려고 밤새 재우지도 않고,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배후라는 건 다 거짓입니다!”
“닥쳐! 어리석은 놈들 같으니, 몇 년간 공들인 대한 공작을 네놈들이 다 망치고 말았어! 그것만으로 네놈들은 전부 총살감이야!”
특파대사 하라는 공사관으로 이송된 피의자들에게 분노를 쏟아 냈다.
일본 정부는 대역 사건에 일본인이 연루된 데 유감을 표명하고, 피의자들을 강력히 처벌할 것을 약속하여 신병을 인수했다.
대역 사건에 연루된 한성신보사는 폐간되었고, 흑룡회 조직들도 모조리 적발되어 추방되었다.
어떻게든 한국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하라로서는, 대한 공작이 원점에서, 아니 마이너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에 분통이 터졌다.
정국 전환을 위한 황제의 자작극이 아닌가, 라는 의심은 이선에게 우호적인 하라에게도 있었지만, 그런 의심을 드러낼 순 없었다.
“경이 특사로 직접 방한하였으니, 짐이 답례하지 않을 수가 없소. 짐을 시해하라고 조종한 일본인들은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특별히 신병을 인도하지요.”
“관용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하라는 이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국민들의 불만과 원성이 자자합니다. 이런 역적들을 어찌 그냥 풀어 주냐고. 하지만 영사재판권이 귀국에 있으니 어쩔 수가 없지요. 대한은 조약을 존중하니까. 그런데 서양을 상대로 영사재판권을 없애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던 일본이 대한을 상대로 이를 유지하는 건 모순이 아닙니까?”
“피의자를 본국에서 재판해 강력히 처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약 수정은 외신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향후 정부에서 정식으로 논의…….”
“압니다, 이해하지요. 이 사안은 장차 차분히 논의하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문제가 있다는 걸 파악했으니까.”
이선은 조약 개정 문제를 더 논하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흑룡회, 현양사, 대로동지회 등 팽창주의 우익단체들은 망상에 빠져 일본의 국운을 위협하고, 한일관계도 훼손했소. 흑룡회는 짐을 시해하여 대한 정부를 무너트리려 했소. 그뿐만이 아니외다. 저들의 목표는 일본에 있지. 여세를 몰아 사이온지 총리와 하라 대신도 암살하여 일본 정부도 전복하려 했소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망상이란 말이오?”
이선의 열변에 하라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익들이 일본 내에서 정변을 도모했다는 증거는 아직…….”
“유신의 원훈, 이토 후작에게 폭탄을 던진 자도 대로동지회 아닙니까. 짐이 후작을 얼마나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는지 경도 잘 알 겁니다. 짐과 후작은 천진에서, 시모노세키에서 함께 동양 평화를 위해 노력한 동지지요. 그런데 평화를 지키려는 후작의 대계는 살피지 못하고, 저 어리석은 자들은 로탐 운운하며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짐까지! 국가의 운명과 동양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자야말로 진짜 스파이나 다름없소!”
이선은 진심으로 이토의 피습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토 후작도 폐하의 말씀을 들으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아, 근래 후작의 병세는 좀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지만, 다행히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현재 최고의 치료를 받으며 재활 중입니다.”
“그래요, 불행 중 다행입니다. 쾌차를 기원합니다. 동양 평화의 수호자였던 이토 후작이 저렇게 된 이상, 이제 일본 정치를 이끌 사람은 사이온지 총리와 하라 대신입니다. 짐은 두 분이 오래 일본을 이끌어 나가길 바랍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일본을 힐난하는 어투였던 이선의 어조가 다시 정중해졌다.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로 일련의 테러와 음모로 인해 최대의 이득을 본 건 이선이었고, 일본에서는 사이온지와 하라였다. 하라도 이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일관계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는, 전에도 말했다시피 일본의 일부 인사들이 대한을 여전히 얕잡아 보면서 종속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대등한 관계로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이제 힘을 쓰지 못할 겁니다.”
“좋습니다. 역설적으로, 위기는 기회라고 하였습니다. 한일관계에 방해가 되는 자들은 이제 제압되었습니다. 이제 경이 특사로 방한했으니, 짐이 특별한 제안을 할까 합니다.”
일본, 더 나아가 서양 열강도 대한제국을 더 이상 종속변수로 여겨서는 안 됐다. 동등한 게임 플레이어라고 인정해야 했다.
대한제국은 더 이상 예전의 약소국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