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68
– 49화에 계속 –
2부 49화 국제 사회주의
1904년 8월, 러시아는 혼란스러운 국내 사정과 영불협상 체결 문제로 인해 관심이 유럽에 쏠려 있었고, 아시아는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니콜라이 2세는 국무회의에서 이선의 친서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서 언급했다.
“황제 폐하, 만약 한국과 일본이 프랑스와 영국이 체결한 협약과 비슷한 조약을 맺고, 이를 영국이 보증하는 형태가 된다면, 극동에서 러시아를 배제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1896년에 체결한 러시아·청국·한국 삼국조약과 상충되는 게 아닌지요?”
외무대신 람스도르프가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온건파였지만, 차르가 외교 문제에 있어 타국 군주인 이선을 너무 신뢰한다는 우려가 있었다.
“외무대신, 극동에서 전쟁 가능성이 사라지면 좋은 거 아니오? 육군대신, 극동의 대치상황은 어떻소?”
“예, 지난 2월 일본 간첩의 사할린 파괴공작과 일본 상선 격침 이후, 일본의 여론은 격앙되었습니다. 도쿄의 우리 공사관과 정교회 성당을 습격해 전쟁 직전까지 갔지요. 당시 극동군은 비상을 내려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일본의 온건파를 대표하는 원로 이토 후작이 팽창주의자에 의해 테러를 당하고, 이어 강경파를 대표하는 야마가타 원수가 무정부주의자에게 테러를 당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혼란은 심화되었습니다. 만약 이때 일본의 국론이 전쟁으로 일치단결했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육군대신 쿠로파트킨, 실제 러일전쟁이 일어났다면 러시아군 총사령관이 될 그는 전쟁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극동군의 전력은 재무부 산하 동청철도 경비대를 포함해도, 12만 4천입니다. 일본군은 상비군만 약 18만, 예비군을 포함하면 60만 이상입니다. 전쟁 발발 시 적의 공격이 집중되리라 예상되는 남만주는, 포트 아르투르(여순) 요새를 제외하면 전혀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동청철도가 개통하긴 했지만, 현재 유럽의 긴박한 정세를 생각하면 극동에 대규모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습니다.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2-3월의 전쟁 위기를 경험한 후, 쿠로파트킨은 러시아가 극동에서 전면전을 치를 능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일찌감치 청국과 한국, 일본이 모두 반발하는 남만주 점령을 철회하고 북만주 획득에만 집중하자고 주장했었다.
“본래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동청철도 부설은 제가 책임지고 맡았던 분야입니다. 비록 일부 구간이 아직 완공되진 않았지만, 마침내 부설과 개통이 완료된 지금, 아시아를 향한 러시아의 평화로운 침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러시아의 가장 훌륭한 동맹입니다.”
국무회의 의장 비테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동청철도 부설의 최고 공로자였다. 비록 지금은 실권을 잃었다지만, 여전히 영향력 있는 관료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위협적이었던 일본은 온건파인 사이온지 총리가 정국을 안정시켰고, 한국 황제 폐하께서 러시아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중재해 주고 있으니 외교적으로 불리한 처지는 아닙니다. 영국이 우리의 동맹 프랑스와 협약을 체결했으니, 영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이 러시아를 무작정 적대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국내의 경제 위기와 사회적 불안입니다. 먼저 내정의 안정이 있어야 국제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비테는 내무대신 플레베를 흘겨보았다. 비테 실각 이후 권력자로 떠오른 내무대신은 강경책으로 일관하여 오히려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플레베는 ‘극동에서의 작은 승리가 국내 반발을 진정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강경책을 주장했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되자 침묵했다.
“일부 불온분자들의 망동은 올해가 가기 전에 모두 진압되고,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신민이 황제 폐하께 감사 인사를 올리게 될 겁니다.”
“일부 불온분자요? 폴란드와 핀란드의 불안이 러시아까지 전이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파업과 농민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진압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선황 알렉산드르 2세께서 그러하셨듯이,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국민을 단결…….”
“세르게이 율리예비치(비테).”
차르가 불편하다는 듯이 비테의 말을 잘랐다.
“조언 고맙소. 하지만, 내정과 치안 문제는 내무대신에게 맡기시오. 선황께서 그토록 은혜를 베풀었건만, 돌아온 건 역적들의 폭탄이었소. 짐은 결코 불온한 무리와 타협하지 않겠소.”
니콜라이에게 조부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부친 알렉산드르 3세는 충격으로 반동정책으로 일관했고, 니콜라이도 마찬가지였다.
“극동 문제는 한국의 중재를 기대해 봅시다. 일본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면 나쁠 게 없지. 외무대신은 프랑스에 문의해 영국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도록 하시오. 내무대신에게 치안 안정을 위한 전권을 부여하겠소. 올해가 가기 전에 평온한 정세를 되찾길 바라겠소. 전능한 하느님께서 러시아를 보호하시길.”
차르는 엄숙한 어조로 신의 가호를 빌었다. 그는 국제 문제에선 약간의 양보를 할 생각이 있었지만, 국내에선 추호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904년 8월, 이 도시에는 전 세계에서 온 특별한 손님들이 집결했다.
1899년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소집되어 각국 대표단이 평화를 논의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왔다면, 이 사람들은 국가를 대표하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세계 평화’를 외쳤다.
바로 ‘만국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제2인터내셔널(Deuxième Internationale) 제6차 국제 사회주의 대회가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되었다.
아우구스트 베벨, 카를 카우츠키, 빅토르 아들러, 로자 룩셈부르크, 장 조레스, 쥘 게드 등 유럽의 쟁쟁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집결했다.
영국·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네덜란드·스웨덴·덴마크 등 유럽의 합법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 대표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러시아·폴란드·핀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 등 국내에서 불법적 단체로 규정된 사회당 대표들도 참석했다.
특기할 점은, 제6차 대회는 아시아 대표가 여럿 참석했다는 점이었다. 인도국민회의의 창립 멤버인 ‘인도의 늙은 현자’ 다다바이 나오로지(Dadabhai Naoroji)가 인도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참석했고, 동아시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조직한 가타야마 센(片山潜)과 일본 대표단이 참석했다. 공식 정당 대표는 아니지만, 소수의 한국인도 참관인 자격으로 왔다.
총 25개국 500여 명의 대표단이 운집한 가운데, 8월 28일 제6차 대회 개최가 선포되었다.
“만국의 노동자 동지들, 사회민주주의 대표단 동지들! 네덜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름으로 동지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의장으로는 주최국 네덜란드 사회민주당의 판 콜(Henri van Kol)이, 부의장으로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플레하노프(Georgii Plekhanov)와 일본 사회민주당의 가타야마 센이 선출되었다.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가 부의장으로 선출된 건, 다분히 최근에 있었던 러일 간의 전쟁 위기를 감안해서였다. 현재 가장 전쟁 가능성이 큰 지역은 동아시아였다.
러시아 최초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된 플레하노프는 엥겔스로부터 ‘마르크스주의 최고 이론가’라는 찬사를 받은 사람이었다.
이에 비해 가타야마는 일본과 미국에서 고학을 하며, 기독교적 박애정신을 토대로 노동조합운동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본 당국의 탄압으로 사회민주당은 창당 하루 만에 금지, 본인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설령 정부들이 제국주의적 전쟁을 조장해도, 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서로 동지애를 갖고 전 세계 무산계급의 평화 지향성을 보여 줍니다. 만국 무산계급의 단결과 세계 평화 만세!”
의장의 외침에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다. 플레하노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타야마에게 악수를 청했다.
“와아아아!”
열렬한 환호가 쏟아지자, 감정이 고양된 두 사람은 서로를 포옹하고 거듭 악수를 나눴다.
“반동적인 러시아 제국주의자들과 침략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익을 위해 전쟁을 도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무산 계급은 전쟁에 단호히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사진사들은 이 장면을 사진으로 담았다.
대포와 총을 겨누며 전쟁을 각오하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과 달리,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가 악수하고 포옹하는 사진은 ‘조국과 인종을 뛰어넘은 노동 계급의 단결’을 상징했다.
“동지들! 모두 소식을 들어 알 것입니다.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를 분할하기 위한 추악한 협정에 도달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아성인 영국과 프랑스는, 신흥 제국주의 세력인 독일과 세계 패권을 놓고 충돌할 가능성이 큽니다. 각국의 사회민주당과 노동자들은, 권력자들과 부르주아지를 위한 전쟁에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제국주의 반대! 군국주의 반대! 식민주의 반대!”
인터내셔널의 주요 논의사항은 유럽 노동 계급의 열악한 처지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 논의였지만, 1904년 대회는 세계평화와 식민지 문제도 중요한 안건으로 논의되었다.
“이 늙은이는 영국 제국 내에서 평화적인 정치투쟁으로 인도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 믿고, 인도인 최초로 영국 하원에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허상이었습니다. 영국은 결코 인도의, 아시아의, 식민지의 자유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최근에 저지른 티베트 침공을 보면 그들의 정의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은 결코 스스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식민지의 해방을 위해 유럽의 노동자들이 함께 나서야 합니다!”
나오로지가 요청한 식민지의 자유를 위한 결의안은, 유럽 대표단의 지지를 얻어 통과되었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현재의 사악하고 불명예스러운 식민제도에 반대하고, 식민지 주민들이 희망하는 자치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각국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관료와 부르주아지, 금융 갱단의 이익을 위해 자행되는 식민 확장을 타협하지 않고 반대하는 것이, 각국 사회민주당과 인터내셔널의 의무이다.”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은 필연적으로 노역, 강제 노동, 토착민의 근절을 초래한다. 국제 사회주의의 성취만이 세계의 평화로운 문화 발전과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한 세계 자원 개발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식민지 문제는 대표단의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식민주의에 비판적인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조차, ‘서양 자본주의가 미개발된 비서양 지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식민지인의 자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특히 영국·프랑스·독일 등 주요 제국주의 열강의 사회민주당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일단 갈등은 봉합되고 유토피아적인 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파국을 암시하고 있었다.
“반동적인 러시아 제국주의 세력은,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아시아에서 위험한 곡예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국내의 본질적인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제국주의적 모험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 차리즘이야말로 세계 혁명을 막는 최대의 적입니다. 러시아와 폴란드, 핀란드, 우크라이나, 캅카스의 무산 계급은 차리즘에 맞서 단결하고 있습니다! 혁명이 머지않았습니다.”
플레하노프와 러시아 대표단의 현황 보고는 동유럽 대표단의 박수를 받았다. 국내에서 파업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폴란드 사회당과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과 연대했다. 차리즘은 이들 모두에게 있어 공통의 적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피하기 위해 지배 계급이 일정 부분 혁명적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 한국의 광무 정부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시행했습니다. 그렇기에 민족주의자들과 소수의 자유주의자도 대부분 정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노동계급은 아직 빈약하며,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계급은 정부에 충성합니다.”
“농민들은 ‘황은’을 깊이 숭배합니다. 교육의 부족으로 계급성을 인지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지배 계급이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은 정부 주도하에 자주독립과 근대화, 토지개혁이 이뤄졌기에, 황제에 대한 숭배가 강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히비야 시위에서 보이듯이, 과도한 군비에 대한 압박은 인민의 불신을 사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족 해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쟁취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장차 아시아가 혁명운동의 중심지가 되리라 자신합니다.”
가타야마 센의 동아시아 현황 보고에 이어, 한국 참관인의 보충 발표가 있었다.
동양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유럽 대표단은 말없이 경청했다. 이들은 아시아가 혁명의 중심지가 되리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다. 서양인들에게 있어, 동양인은 ‘전제에 익숙하고 국가에 충성스러운’ 백성들이었다.
“동지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러시아 혁명이 세계 혁명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까요?”
“아, 동양 정세에 대해 발표한 동지로군요.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아시아도 잠재력은 충분합니다.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낙후되어 있다는 건 백인의 편견입니다. 장차 20세기의 혁명을 주도하는 건, 살롱에서 커피나 마시며 혁명을 떠드는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라, 자국의 봉건적 세력과 제국주의 열강의 이중 압박을 받고 있는 아시아 민중이 될 것입니다.”
“명쾌한 분석입니다, 울리야노프 동지. 과연 차르를 날려버린 혁명가의 형제답군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일원인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 바로 1887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폭탄을 제조하였다가 처형된 혁명가의 동생이었다.
“으음, 형님의 이상과 희생은 고결했지만, 차르 하나 날려 버린다고 혁명이 바로 오지는 않습니다. 단결된 인민의 힘이 혁명을 이끌 수 있지요.”
울리야노프는 형이 차르 암살 혐의로 처형된 이후, 러시아에서 살 수 없게 되어 가족들과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 빈과 베를린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한 그는,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족 문제를 중시하는 이론가가 되었다.
즉, 러시아에서 투쟁하며 ‘레닌’이란 이름을 얻은 실제 역사와 달리, 울리야노프는 중부 유럽의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따랐다.
이로 인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도 전위조직을 강조하는 볼셰비키와 대중적 정당을 지향하는 멘셰비키로 분열되는 일이 없었다.
이선이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저지한 것이, 나비효과처럼 역사를 계속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