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69
– 50화에 계속 –
2부 50화 적의 적은 아군
“동지는 한국에서 왔다고 했던가요? 아까 듣기로 한국에는 노동자 정당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디 소속으로 오셨는지?”
“한국에 농민당은 있습니다만, 노동자당은 없습니다. 현재는 사실상 모든 정당이 정부의 통제하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제 소속은 없고, 참관인 자격입니다. 신문사 유럽 특파원이죠. 처음으로 인터내셔널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아, 기자시군. 어쩐지 영어도 유창하더니.”
“영국에서 공부했습니다. 작년까지 런던에 살았죠.”
“그래요? 나도 한동안 런던에 있었습니다. 작년까지.”
“오, 그러시군요. 어쩌면 같은 공간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매일 공부했었습니다. 예전에 마르크스 박사가 앉았다는 G7 자리를 차지하는 건 경쟁이 치열했습니다만.”
기자라는 말에 경계심을 가지던 울리야노프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보다 더 나은 도서관은 이 세상에 없지요. 나도 매일같이 드나들었습니다. 나는 주로 L13에 앉았지요. 내 할 일에 집중하다 보니 동양인도 매일같이 온다는 건 몰랐군요.”
“하하, 도서관이야 책 읽는 곳이지 사람 보는 곳은 아니니까요. 하물며 세계에서 가장 볼 책이 많은 곳에서야.”
인텔리 특유의 공감대가 형성된 덕에 분위기가 좋아졌다. 자신을 기자라고 소개한 한국 청년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울리야노프 동지, 잠시 인터뷰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비공개로 해도 좋습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대표해 플레하노프 동지와 인터뷰를 했습니다만, 동지의 고견도 듣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어떤 질문입니까? 플레하노프 동지는 뭐라고 하던가요?”
“근래 동아시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플레하노프 동지는…….”
아직까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1세대인 플레하노프의 영향력이 컸지만, 울리야노프는 이미 자신이 그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흥미롭군요. 러시아 전제정이 국내의 모순을 감추기 위해 극동으로 진출하려 한다는 분석은 동의합니다. 다만 나는 플레하노프 동지와 생각을 좀 달리하는데,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패전한다면 혁명적 상황이 더 심화되리라 봅니다.”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러시아가 패배하리라 보시는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현 시점에선 일본과 한국 지배층이 러시아 차리즘보다 더 진보적이지요. 겉으로만 열강일 뿐, 낙후한 러시아가 패배한다고 해서 놀랍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인민이 패배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차리즘의 패배는 오히려 인민의 승리에 기여하겠지요.”
명색이 러시아 국적인 울리야노프는 거리낌 없이 러시아의 패배를 예상했다.
“혁명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상관없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적의 적은 아군이지요. 정치의 기본 원리 아닙니까?”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이어진 울리야노프의 정세 분석과 막힘없는 화술은, 청년을 감탄시켰다.
“마지막으로 이건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답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동지의 형님께서는 차르 암살에 가담한 혁명가입니다. 동지가 혁명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형님의 죽음과 관계가 있습니까?”
“혁명은 통속적인 복수극이 아닙니다. 역사 발전의 필연적 단계지요. 내가 형님을 존경하긴 하지만, 테러와 암살만으로는 절대 세상을 못 바꿔요. 지금의 사회혁명당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 각성한 노동 계급의 전면 봉기가 세계 혁명을 이끌게 될 겁니다.”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는 나로드니키(인민주의)의 테러리즘을 신봉했지만, 블라디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했다.
“그러고 보니 한국도 차르 암살과 깊은 관련이 있군요. 한국 황제가 왕자 시절,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막아 신뢰를 얻었지요. 나도 그때를 확실히 기억합니다. 러시아 전역에서 한국 왕자를 축복했거든. 결국 6년 뒤에 차르는 폭탄을 맞게 되니 죽을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로 인하여 이선과 한국의 운명도 바뀌었지만, 그 자신은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는 울리야노프의 운명도 바뀌게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범이었던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바뀐 역사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성공시켰고, 차르 시해범의 일족인 울리야노프 가문은 결국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블라디미르는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했고, 결국 마르크스주의자가 됐지만 러시아에서 괴리되었다. 올해 34세인 그는 17년을 타국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미 정신적으로 절반은 독일인이나 다름없었다.
마르크스-엥겔스-카우츠키로 이어지는 계보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울리야노프는, 원 역사의 급진파 볼셰비키를 분리할 이유도 없어졌다.
“이번엔 내가 묻죠. 근래 영국 신문에서 한국 황제를 러시아 차르 직속 제3부의 비밀 첩보원이라고 주장하던데?”
“말도 안 되는 헛소리죠. 설마 그런 황색언론을 믿는 건 아니시겠지요?”
“물론 안 믿죠. 만에 하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러시아 덕에 정권을 잡았다고 해도, 확고한 원칙이 있는 지도자라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뿐이지. 결코 타국의 앞잡이 노릇은 안 할 겁니다.”
울리야노프는 혁명가라고 하기에는 사고가 의외로 유연했다.
“그렇지요. 적의 적은 아군이니까.”
“맞습니다. 얼마 전까지 으르렁거리던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은 것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독일이란 적이 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아도 하나도 놀라지 않을 일이고. 이왕이면 러시아에 한 방 먹여 줬으면 좋겠군요. 나는 언제든지 환영할 겁니다.”
울리야노프가 양복 외투를 매만지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이만하면 충분합니까? 나는 다음 약속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지요.”
“인터뷰 감사합니다, 동지. 한국 언론에 동지의 고견을 싣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 나라는 검열이 없나 보지요? 거북한 이야기가 많을 텐데. 뭐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물론 검열은 있습니다만, 수위를 적당히 잘 조절하면 됩니다.”
“좋군요. 나중에 기사 나오면 읽어 보지요. 아, 그런데 한국어는 내가 읽을 수 없군.”
“영어나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사회민주당에 보내 드리지요.”
울리야노프는 악수를 청하다, 벗겨진 머리를 두드렸다.
“이런, 동지의 이름이……. 아까 들었는데.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동양 이름은 익숙하지 않아서.”
“이해합니다. 자주 있는 일이라. 한민 조라고 합니다.”
“Han-min Jo. 확실히 기억하지요.”
“감사합니다. 또 만나기를 바랍니다.”
혁명가에게 재회의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의례적인 인사라고 생각한 울리야노프는 기자와 악수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국영통신사인 제국익문사 유럽 통신원 조한민의 정체는, 물론 첩보원이었다.
인터내셔널에 참관인으로 방문한 것도, 세계의 좌파 정당들, 특히 러시아와 동유럽 사회주의 정당을 파악하고 선을 대라는 훈령 때문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학 강사였던 그로선 생각지도 않았던 변화였다.
1903년 말, 역사학 강사 조한민은 전 법무대신 김학우의 부름을 받아 궁내부로 향했다.
조한민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얼마 전 그가 독립신문에 연재한 ‘서양 급진주의와 혁명의 역사’가 검열 당국에 의해 제재를 받고, 그 자신도 경고를 받긴 했지만 고위 관료가 부를 만한 일은 아니었다.
김학우는 현재 궁내부 특진관 겸 국영통신사 제국익문사 사장이었다. 법무대신까지 지낸 이가 맡기엔 영전이 아니라 좌천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조한민, 27세. 경기도 고양군 태생. 황성대학 문학과 졸업. 고등교육 이수자로 병역 의무 면제. 광무 4년 국비 유학생으로 뽑혀 영국 런던 대학에서 역사학 석사 취득. 올해 귀국 후 황성대학 강사.”
초면에 다짜고짜 자신의 약력을 낭독하는 김학우의 태도에 조한민은 불쾌감을 느꼈지만, 지위를 생각하면 참아야 했다.
“이래저래 국가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은 엘리트 청년이, 무슨 불만이 있어 서양 급진주의와 혁명의 역사를 연구하지?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건 서양의 근대 국가 건설을 본받는 게 아닐까?”
김학우의 공격적인 물음에 조한민은 답변을 잘 가늠했다. 국립대학 강사인 그는 처신을 잘해야 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현재의 서양을 잘 알고자 한다면, 급진주의와 혁명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합니다. 근래 유럽에서는 국가와 제도를 넘어 사회와 계급에 대한 연구가 크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노동 계급이 급성장하고 있는 20세기는…….”
“자네, 사회민주주의자인가?”
‘사회민주주의(Sozialdemokratie)’는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좌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동양에서는 단어조차 모르는 사람이 허다했지만, 러시아 공사를 지낸 김학우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연구 대상이 있다고 해서 제가 꼭 그 이념을 신봉하는 건 아닙니다.”
“아니, 괜찮아. 대한에는 사상의 자유가 있네. 많이 배운 청년이 혁신적인 이념에 이끌리는 건 당연하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한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렸다.
“황제 폐하!”
김학우가 자리에서 벌떡 기립했다. 조한민은 그때서야, 전면에 걸려 있는 어진 속의 사내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자신도 너무 잘 알았다. 대한국 대황제, 육·해군 대원수, 2천만 국민의 어버이.
황성대학 졸업식에서 멀리서 한 번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화, 황, 황제 폐…….”
긴장한 조한민은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 어떤 예를 취해야 하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조 석사, 너무 긴장할 것 없네. 석사의 의견을 듣고 싶어 부른 거니까. 짐은 새로운 세기의 사조인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네. 근데 국내에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마침 그대가 얼마 전까지 본고장인 유럽에 있었고, 최신 사조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해서 자리를 마련했네.”
“화, 황공하옵니다.”
조한민은 고개를 황급히 숙였다. 황제가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이 많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준비 없이 강의를 하게 해서 미안하네만,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현황, 정당과 조직에 관해서 강의를 해 줬으면 하는군.”
“예, 폐하. 사, 삼가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조한민은 즉석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것도 아니고, 황제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 급진주의와 혁명의 역사,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이론, 유럽 노동계급의 현황, 노동조합과 정당 등에 대해 자신이 아는 대로, 황제의 입장을 고려해가며 설명했다.
황제가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것도 놀랍지만, 조한민이 더 놀라운 건 황제가 의외로 혁명사와 사회주의 이론까지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끔씩 황제가 던지는 질문은 굉장히 날카롭고 수준 높아서, 조한민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당황했다.
“좋은 강의 잘 들었네, 조 석사. 젊은이가 박학다식하고 조예가 깊군.”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럼 그대가 개인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영국 유학 시절, 그나마 동양인을 사람 대접하고 평등하게 대해 주는 건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왕족이라는 신분 덕에 서양에서 인종차별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일반인은 엘리트에 속하는 유학생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진보적 교육을 받은 청년이 제국주의 반대와 만민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에 이끌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양은 그렇다 치고, 동양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실천되겠나? 그렇게 되면 황제인 짐부터 권력을 내려놔야 할 것 같은데.”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아마 대한국민 중 가장 진보적인 축에 속한다고 하는 조한민이라 할지라도, 감히 황제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이끈 황제를 깊이 존경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동양은 노동 계급이 미약할 뿐더러, 특히 대한국은 성상께서 왕도 정치의 성덕을 베풀고 계시니, 어찌 그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이선은 빙긋 웃었다.
“특진관, 조 석사는 일개 강사로 두기에는 재주와 언변이 아까운데.”
“실로 그러하옵니다.”
“조 석사, 어떤가? 나랏일 한번 해 볼 생각 없나? 특히 그대의 전문분야를 살려서 말이야.”
“성지(聖旨)를 따르겠습니다.”
조한민은 엉겁결에 답했다. 자유를 추구하는 그로선 관료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황제가 권하는데 면전에서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조한민은 제국익문사 통신원이 되었다.
교육을 받은 후에야, 조한민은 비로소 익문사가 국영통신사가 아니라 비밀 첩보기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유를 추구하던 자신이 관료도 아니고 비밀 첩보원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엄중한 첩보원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은 성격적으로 안 맞는다는 걸 새삼 느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첩보원 교육을 받은 조한민은 더 이상 예전의 자신과 같을 수가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여유가 생겼다.
학비를 지원받아도 비싼 런던의 물가로 인해 어렵게 생활했던 유학 시절과 달리, 파리에서 거점을 잡고 넉넉한 공작금을 받아 기자 생활을 했다.
표면적인 업무는 유럽 소식을 한국에 전하는 것이지만, 그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러시아 사회혁명당. 폴란드 사회당. 핀란드 사회민주당. 그리고…….’
조한민은 제정 러시아에 반대하는 혁명 조직과 선을 만들고 있었다.
표면적인 신분은, ‘혁명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진보적 언론인’ 이었다. 유럽에는 꽤 흔한 인물상이었고, 동양인이라는 점은 오히려 이색적이었다.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분명히 우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선은 제정에 반대하는 혁명단체들과도 파이프라인을 만들게 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을 탐지하고 계신 건가?’
조한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황제는 러시아 제국에 혁명이 발생하는 걸 원치 않으리라 여겼다.
그렇다면 비밀경찰의 프락치처럼 저들을 감시하다 배신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황제는 진심으로 혁명의 대의를 이해할 수 있는 이를 파견하고 싶다고 했다.
‘설마 황제께서 혁명의 필연성을 믿는 건 아닐 터고.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조한민은 제2인터내셔널에 참석하여 보고 들은 바를 모두 작성하여 황성에 비밀 전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