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7
– 37화에 계속 –
37화 총아(寵兒)
“무엇이든 좋으니, 말해 보도록 하시오.”
“폐하! 조선과 러시아의 국경 지대인 연해주 일대에는, 러시아에서 ‘고려인(кореец)’이라고 부르는 조선 백성들이 많이 삽니다. 그 수는 대략 1, 2만에 이릅니다. 왜 대략이냐고 하면,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 역시 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소.”
“이에 대한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러시아에 이주한 백성들은 모두 조선인이니 조선으로 송환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먼저 논의가 되어야, 러시아와 조선 간에 수교가 이뤄질 수 있다는 거지요.”
“이미 러시아의 입장을 전한 것 같은데. 이미 그들은 러시아 국민이 되었으니, 돌려보낼 수 없소.”
러시아 입장에서, 인구가 희박한 극동 연해주 지역에서 고려인은 없어서는 안 될 인력이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선 백성들이 러시아로 떠난 데에는 조선 정부의 책임이 큽니다. 그들이 러시아로 가서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된 건, 모두 러시아 제국과 황제 폐하의 은덕입니다. 조선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립니다.”
1869년의 대흉년 이후 두만강 인근 주민들이 대거 러시아로 이주했다. 러시아 지방 당국의 긴급 구호와 토지 제공으로 이들은 기아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러시아로 향하는 이주민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하하, 감사라고 받을 게 있나. 이들이 러시아에 온 이상, 짐의 신민인 것이오.”
“하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조선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러시아 풍습을 따르는 것도,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도, 근대식 교육을 받는 것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국적과 사는 곳은 러시아이지만, 여전히 삶의 방식은 조선을 고수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고려인 1세대는 러시아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조선의 풍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러시아 당국에게 이는 골칫거리였다.
”이들을 근대화시키려면, 책임 있는 조선 당국자의 협력과 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이선의 말에 담긴 속내를 파악했다.
“저는 조선 왕실의 일원으로, 조선 백성들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치적인 이유로 조선을 떠나야 했듯이, 고려인들 역시 경제적인 이유로 조선을 부득이하게 떠나야 했습니다.”
이선은 강하게 호소하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조선과 러시아, 두 나라 모두를 위하여 고려인들을 이끌고 싶습니다. 고려인들은 러시아의 극동 개발을 이끌 첨병이자, 조선의 근대화에 큰 자극이 될 것입니다. 이들이 부유해지면, 러시아는 변방을 굳건히 할 수 있고, 조선은 근대화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겠지요. 고려인은 조선과 러시아를 잇는 가교가 될 것입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이선이 생명의 은인이라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지만, 황제로서의 책무가 우선이었다.
이는 러시아의 변방 통치에 있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제 군주라 할지라도 단번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러시아가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현지 무슬림 지도자들을 포섭해, 러시아 귀족으로 삼고 현지 주민의 대리통치를 맡기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러시아와 차르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한 이들이었다.
이선은 조선 왕의 장자로 왕위 계승권에도 가까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를 내세워 조선 국경 지대 주민의 자치권을 맡긴다는 건, 양날의 검이었다.
‘조선을 러시아의 품으로 끌어들이든가, 조선의 적이 되든가.’
“제 신분이 문제가 된다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러시아와 조선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역사적 사례를 들자면, 알렉산드르 1세 폐하의 외무대신,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같은 경우라고 여겨 주십시오.”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Ioannis Kapodistrias)는 본래 그리스 출신의 귀족이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계 주민들은 종교가 같은 러시아에 출사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역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초빙을 받아 러시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황제의 신임을 받아 빈 회의에서 러시아 대표로 참석하고, 외무장관을 역임하는 등 최고의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1822년,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여 독립 전쟁을 일으키자, 그리스 임시 정부는 카포디스트리아스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전 유럽을 돌면서 그리스 독립을 호소했고, 외교적 노력 끝에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이끌어 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냈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그리스에서는 독립을 쟁취해낸 독립 영웅이었고, 러시아에서도 국익을 위해 노력한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이선이 그의 사례를 들으니, 황제는 이선이 하려는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 있는 동안에는, 러시아를 위해 봉직하겠다. 그리스를 오스만에게서 독립시켰듯, 장차 조선을 청과 일본 사이에서 독립을 쟁취한다. 영국·프랑스·러시아의 독립 보증을 받은 그리스처럼 열강 사이에 균형을 지키며, 러시아에 우호적인 정권을 이끌겠다.’
현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는 황태자비 마리야의 오빠였고, 알렉산드르 2세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신생국 그리스를 이끌며, 친영 정책과 친러 정책을 적절하게 구사하며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열강의 동의하에, 동로마 제국의 고토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 거주 영토를 야금야금 파먹고 있었다.
“공작이 말하려는 바는 확실히 잘 알겠소. 하지만 이는 짐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니, 관련 부처의 대신들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소.”
이선 역시 황제를 구했다는 명목으로, 단숨에 허락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가 끝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예, 폐하의 현명하신 판단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황제는 껄껄 웃었다.
“하하, 공작은 정말 개인적인 욕심은 없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짐이 특별히 궁내부를 통해 지시를 내려놓겠소. 차르스코예 셀로 외에도, 겨울 궁전에 거처를 마련해 놓을 터이니 언제든지 편하게 이용하도록 하시오. 또한 생활에 부족함이 없도록, 러시아 대공의 신분에 준하는 연금을 내리도록 하겠소. 이는 짐의 사소한 배려요.”
“황은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동양에서 온 소년이 황제의 목숨을 구했다. 황제는 소년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다고 한다.
소문은 단 하루 만에, 페테르부르크 상류 사회에 쫙 빠져나갔다.
“황제 폐하께서 무사하시다니, 정말 천만다행일세.”
“동양에서 온 귀족 소년이 암살을 경고하고, 막았다지?”
“소문에 따르면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러 온 왕자라는군.”
“왕자? 어쩐지, 황제 폐하께서 그 소년에게 대부가 되어 주겠다고 하셨다던데.”
“내가 듣기로는, 니콜라이 대공께서 형제로 삼겠다고 하셨다는군.”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그 소년이야말로 이제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총아가 될 거야. 황제 폐하의 구원자에 동양의 왕자라니, 이보다 더 극적인 이유가 어디 있겠나?”
“맞아. 그 주위에 있으면 높으신 분들의 눈에 들어오기 딱 좋겠군.”
며칠 사이에, 이선이 머물고 있는 니콜라이 대공의 페테르부르크 저택으로 초대장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러시아 황가의 일원인 대공들은 물론이고, 공작들, 백작들, 고위 관료, 외교관, 장성들의 초대장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건 내가 몸이 100개라도 다 참석 못 하겠는데…….”
이선은 쏟아지는 초대장들을 다 읽지도 못했다.
“하하, 그건 네가 페테르부르크 최고의 총아가 되었으니까 그렇지.”
니콜라이와 이선은 서로 말을 놓고 ‘너(ты, tu)’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유럽 언어는 2인칭으로 친소관계를 표현한다. 러시아어와 프랑스어에서는 ‘вы’와 ‘vous’가 상대방에 대한 존칭이나 먼 관계를 의미한다면, ‘ты’나 ‘tu’는 가까운 사이, 허물없는 사이를 의미했다.
당연히 황태손이 ‘ты’라고 부르는 사이는 한정적이었다. 니콜라이는 황제의 구원자, 이선을 신뢰했다. 마침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모두 1868년 5월생으로 생일도 비슷해서, 진짜 형제처럼 대하게 되었다.
“이건 가는 게 좋을 것 같고. 이런 건 굳이 안 가도 돼.”
러시아 사교계에 정통한 황태손이 친히 초대장을 선별해 주었다.
“전하께서도 함께 가 줬으면 하는데.”
“주빈은 공작인데, 내가 가면 방해가 되지 않겠어?”
“나는 사교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전하께서 나를 에스코트해 주셔야지.”
“사교계의 초대를 받았으면, 귀여운 아가씨를 에스코트해야지, 왜 사내를 데려간단 말인가.”
“하하, 그 무슨 말씀이신가. 내가 여기에 아는 아가씨가 어디 있나? 함께 가 줬으면 하네.”
이선은 정말로 니콜라이 외에 ‘친구’가 없기도 했지만, 황태손이 이선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남의 소문을 탈 필요 없이 직접 보여 줄 생각이었다.
“알겠네. 그럼 먼저 종조부님, 콘스탄틴 대공 전하의 초대부터 받아들이도록 하세.”
이선은 니콜라이와 함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궁전으로 향했다.
황제의 동생인 콘스탄틴 대공은, 해군 총사령관과 국무원(國務院) 의장을 역임한 해군 원수(元帥)였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콘스탄틴은, 농노 해방과 해군 개혁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현재도 개혁적 입장에서 헌법 제정과 의회 도입을 주장하고 있었다.
황족들 중에서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콘스탄틴은, 황제 암살 미수의 최대 수혜자였다.
실제 역사에서 반동적인 성향의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는, 즉위하자마자 숙부를 국무원 의장과 해군 총사령관직에서 경질하고 사실상 은퇴시켰다.
개혁 지지자인 콘스탄틴이 알렉산드르 2세의 생존에 얼마나 다행으로 여길지, 또 그 공로자인 이선을 얼마나 고맙게 여길지는 말하나 마나였다.
“어서 오시오, 이선 공작! 내 궁전에 와줘서 정말 고맙소.”
소년용 근위대 제복에 성 스타니슬라프 1등 훈장을 패용한 이선이 정중히 답례했다.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가신인가? 그대들의 공로 또한 잊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전하.”
안영흠과 장무영은 머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이들 역시 연미복에 스타니슬라프 3등 훈장을 패용하고 있었다.
안영흠은 자신만 황제를 알현하지 못한 것에 큰 아쉬움을 느꼈으나, 이선이 황제에게 안영흠 또한 중요한 공로자라고 건의하여 훈장을 수여 받을 수 있었다.
“여러분! 황태손 니콜라이 대공, 그리고 조선의 이선 공작과 그 가신들이 왔소. 러시아와 차르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이들을 위해 경의를 표합시다!”
“와아!”
짝짝짝-.
콘스탄틴 대공의 찬사에, 궁전에 있는 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손뼉을 쳤다.
“공작, 황제 폐하께 동양의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되고 싶다고 했다지요?”
“저는 러시아와 조선, 두 나라 모두를 위해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역사적 선례를 찾아보았습니다.”
“하하, 그것참 흥미로운 이야기였소. 알고 있겠지만, 바로 내 사위가 그리스 국왕이거든.”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는 콘스탄틴 대공의 딸, 올가와 결혼하여 러시아와의 관계를 튼튼히 했다.
“그리스와 조선이라, 참으로 잘 어울리는 비유요. 조선의 지리적 위치는 동양의 그리스라 할 수 있지. 내가 바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창설한 장본인이라서, 동양 문제에 관심이 많소. 1860년 이래 조선과의 수교를 건의했던 것도 바로 나였지. 앞으로 자주 내 궁전에 들려 이야기 나누도록 합시다.”
콘스탄틴 대공은 태평양 함대를 편성하고, 극동 영토를 확장하고, 미국에 알래스카 판매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황제가 국방과 외교 문제에 있어 가장 신뢰하는 동생이기도 했다.
‘앞으로 매우 유용하게 쓰일 인물이군.’
“대공 전하의 초대는 언제든지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웃으면서 정중히 화답했다.
“좋소. 자, 여러분! 내 초대를 받아 줘서 고맙소. 그럼 오늘은 부디 즐겁게 보내도록 하시오.”
콘스탄틴 대공은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이선, 오늘은 네가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이야. 그러니 오늘은 국가의 대사 같은 건 잊고, 마음 편히 즐기라고.”
니콜라이는 이선을 젊은 여성들이 있는 쪽으로 인도했다.
“숙녀 여러분, 다들 평안하십니까?”
“대공 전하의 덕분이옵니다. 전하께옵서는 평안하시옵니까?”
니콜라이의 인사에, 귀족 영애들이 드레스에 손을 잡고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예의를 표했다.
“우리 시대의 영웅, 머나먼 조선에서 온 이선 공작을 숙녀 여러분께 소개하겠소. 사교계가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을 터이니까 잘 부탁합니다.”
“예, 전하.”
“공작, 부디 숙녀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시길 바라네.”
니콜라이는 이선의 등을 떠밀고, 자신은 다른 쪽으로 향했다.
이선은 순간 난감함을 느꼈다.
수많은 귀족 여인들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사교계의 총아가 되어 버린 한 소년에게만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