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71
– 52화에 계속 –
2부 52화 한영일동맹
광무 8년(1904) 9월.
전보가 런던과 도쿄, 서울을 오가며 조약 협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선은 원래 국내외적으로 모든 사안을 꼼꼼히 검토했지만, 특히 이번 조약은 만전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선 직접 런던으로 가서 조약을 협의하고 싶으나, 황제가 나라를 비우고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이선은 유럽과의 시차를 고려하여 밤새 업무에 몰두했다.
“폐하, 옥체를 생각하시어 잠시라도 쉬심이…….”
“그러고 싶소만, 조약이 확정되기 전까진 그럴 여유가 없군.”
“폐하,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일전에 아뢴 바와 같이, 만약 일을 그르친다면 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나이다.”
김옥균이 다시금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선은 김옥균의 충정을 높이 평가했지만, 애초에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길 생각이 없었다.
“경은 정부의 수상으로서 짐과 국민에게 책임지지만, 결국 최종 책임은 군주인 짐에게 있소. 책임을 져야 한다면 함께 지는 것이고, 공로를 누린다면 이 역시 함께 누리는 것이오.”
“폐하! 갑신경장으로부터 어언 20년이 지났습니다. 과거와 비견될 수 없는 변혁의 나날이었습니다. 지난 20년과 같이, 앞으로도 성상의 영도 하에 대한에는 밝은 앞날만이 있을 것입니다.”
김옥균이 이선을 향해 새삼 찬사를 보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짐도 그렇게 믿고 싶구려.”
영일동맹에 합류한다는 건, 대한제국의 외교적 입장이 전환되는 일이었다.
점점 종막을 향해 달려가는 ‘그레이트 게임’에서 영국의 편에 선다는 걸 의미했다. 영불협상으로 국제 정세가 크게 바뀌었기에 추진하는 조약이었지만, 아직도 의문은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을 믿을 수 있는가? 청일전쟁도 청나라와 협상하는 척하면서 선전포고 없이 기습했고, 러일전쟁에도 개전 직전까지 협상하다가 갑자기 선전포고 없이 기습했고, 중일전쟁에도 선전포고 없이 기습했고, 태평양전쟁에도 미국과 협상을 이어 가다가 갑자기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공습했지.’
실제 역사의 일본은 외교적 신뢰도가 0에 수렴했다. 그러면서 언제나 ‘평화와 자위(自衛)를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고 정당화했다.
어떤 한국 독립운동가의 비판처럼, ‘일본이 약속했다가 뒤집은 협상과 조약문으로 집 전체를 벽지로 도배할 수 있는’ 지경이었다.
변화한 역사에서 일본이 얼마나 바뀔지는, 언제나 강경파에게 끌려다니던 일본 정부가 군부를 얼마나 통제할 수 있을지 달려 있었다.
‘역설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조약을 맺어서 묶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국이 포함된 상호방위조약으로 일본의 행동 범위를 최대한 묶어 두려는 방안이었다.
한일만의 조약이라면 일본이 언제든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일본의 보스는 영국이었고, 일본이 보스의 뜻을 거스르고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터였다.
일본이 무리수만 두지 않는다면, 동맹은 충분히 유지될 가치가 있었다.
‘확실히 영불협상으로 부담은 줄어들었지. 문제는 러일전쟁이 없다면, 영러협상이 지연될 터인데……. 고립된 독일이 빈틈을 파고들 수도 있겠군.’
영불협상으로 고립된 독일이, 한영일동맹으로 고립된 러시아에 접근할 수 있었다.
물론 러시아는 프랑스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동맹이기 때문에 손쉽게 편을 갈아탈 수는 없지만, 차르의 정세 판단력이 문제였다.
그렇기에 한영일동맹이 러시아를 적대하는 동맹이 아니라는 걸, 니콜라이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미국은 한영일동맹을 우호적으로 대할 터.’
이선이 진정 동맹을 맺고 싶었던 나라는 미국이지만, 최소한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고립주의를 천명하는 미국이 동맹을 맺을 리가 없었다.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제국주의적 확장을 노리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정치관도, 그가 결국 임기 8년의 대통령임을 감안하면 한계가 있었다.
한국은 영일동맹에 합류하는 한편, 미국에게 우호적인 손짓을 계속 보내 외교적 보조를 취했다.
이선은 그 어느 때보다,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한 외교에 전력을 다했다.
* * *
런던에서는, 주영공사 윤치호가 황제와 총리의 훈령을 받으며 조약의 세부사항을 논의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20세기 대한이 나아갈 길은 영미 자유주의, 해양세력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과연 성상께서는 현명하시니, 외교의 전환을 이루시리라 믿었습니다. 성상이 러시아 황제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친러라고 여긴 자들이 어리석은 거지요.”
한영동맹을 앞장서서 주장했던 이승만은, 정말로 동맹이 추진되자 의기양양했다. 자신이야말로 황제의 본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듯.
“우남, 내가 선학으로서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언행을 가려서 하는 게 좋겠네. 자네는 이제 막 관계에 입문했네. 관료 사회는 학계나 정계하고는 또 달라. 자네가 떠들 필요 없이, 묵묵히 자네 일만 잘해 내면, 알아서 상급자들이 배려하고 발탁할 것이네. 내 말 명심하게.”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무리 주목받기 좋아하는 성격이라지만, 윤치호의 충고를 무시할 정도로 이승만은 어리석지 않았다.
윤치호가 이승만에게 했던 충고는, 사실 부친 윤웅렬이 그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개화당의 일원으로 오랫동안 군무를 맡아 온 윤웅렬은 이선을 지척에서 모셨던 인물이었다.
아들이 자유주의 야당인 독립당을 이끄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다가, 김옥균이 제안한 영국 공사직을 받아들이자 크게 기뻐했다.
“성상께서는 눈과 귀를 백 개, 아니 천 개 정도는 가진 분이시다. 네가 영국에 갔다고 해서 다르지 않다. 다른 생각 말고, 오직 국가의 명령만을 따르며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라. 물론 네가 성심을 헤아려 능력을 보인다면 더욱 좋겠지. 그리되면 성상께서 너를 중히 여기실 것이다. 고균이 왜 그토록 성상의 총애를 받는지 명심하거라. 충성과 능력을 모두 인정받은 데다, 성심을 헤아리는 눈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네가 정녕 고균과 금릉위의 뒤를 이어 성상의 오른팔이 되어 나라를 이끌고 싶다면, 능력을 발휘해 성심을 얼마나 받들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윤치호는 부친의 조언을 떠올렸다.
고균(김옥균)과 금릉위(박영효)의 뒤를 이어 나라를 이끌고 싶다면.
여기서 그가 대임(大任)을 충실히 이행하고, 황제가 내린 임무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면, 나라에도 득이 되고 장차 그 자신의 입지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었다.
윤치호가 구상하는 안은 다음 다섯 가지였다.
첫째, 동맹 조약을 황제가 부여한 조건으로 체결한다.
둘째, 불평등 조약을 개선한다.
셋째, 차관 도입을 타진한다.
넷째, 군함 도입을 타진한다.
다섯째, 현재 정부를 이끌고 있는 보수당뿐만 아니라 자유당과도 돈독한 관계를 만든다.
첫째와 둘째는 황제가 부여한 임무였고, 셋째는 김옥균이 지시한 임무였고, 넷째는 해군력 강화를 주장하는 부친이 군무대신에서 물러나기 전 지시한 임무였고, 다섯째는 자신의 구상이었다.
첫째와 둘째만 성공시켜도 충분히 임무는 완수하는 것이었지만, 셋째와 넷째까지 유리한 조건으로 성사시킨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다섯째는 미래를 위한 보너스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국운뿐만 아니라, 내 정치 생명까지 달렸다. 최대한 할 수 있는 곳까지 해 보자.’
독립당 인사들이 황명을 받아 외교를 주도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부친이 군무대신에서 사퇴하여 정부 내 최대 후원자를 잃은 윤치호는 더 절박하게 느껴졌다.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냉소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윤치호가, 진심으로 열성을 다하는 순간이었다.
삼국 동맹 조약은 9월 내내 각국에 수정안과 협상이 오고 가면서, 점차 합의가 가까워졌다.
“이제 삼국 간에 동등한 동맹 관계가 임박했으니, 불평등 조약은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윤치호는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거듭 주장했다. 일본도 치외법권 조항의 수정에는 양해를 얻은 바였다.
하지만 영국이 불평등 조약을 개정할 생각이 없다는 게 걸림돌이었다.
“처음 서양과 통상조약이 체결된 22년 전과 달리, 이제 대한제국은 서양을 참조한 근대적 헌법과 형법을 갖춘 문명국가가 되었습니다. 국제무역을 존중하며, 민법과 상법도 갖췄습니다. 동맹이 되는데, 어째서 조약은 개정되지 않는 것입니까?”
“비록 새로운 법이 확립되었다고는 하나, 서양과 동양의 법치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유예되어야 합니다.”
“근래의 대한제국을 보십시오. 일부 영국 언론이 그토록 야비하게 황제 폐하를 모욕하였음에도, 언론의 자유를 존중하여 넘어갔습니다. 감히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고 한 대역죄인들도, 대한제국이 문명국가가 아니라면 이미 극형을 당하고 일족이 멸문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근대적 형법에 근거하여 역적들조차도 정당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더 이상은 한국의 법치체계가 다르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핵심은 관세자주권의 문제였다.
일본도 20년 넘게 조약 수정을 외치며 마침내 염원이던 조약을 영국과 1894년 7월에 체결했다.
새 영일통상항해조약에 따르면, 일본은 영국에 개항장을 넘어 내륙개방을 대가로, 조약 체결 시점으로부터 5년 이내에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을 철회하고 최혜국 대우를 상호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동맹인 일본을 상대로도 결코 관세자주권만은 용인하지 않았다. 관세만은 여전히 열강과의 협정세율을 지켜야 했다. 대외무역을 중시하는 영국으로선, 비서양 국가에 순순히 관세자주권을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영사재판권의 철회와 상호 최혜국 대우만으로도, 법적 권리로는 서양 열강과 동등한 ‘근대문명국가’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있어, 영일 사이에 대등 조약이 성립된 것만으로 청나라의 수만 군대를 격파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대한제국도 당장 관세자주권의 철폐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일본과 모종의 합의를 봤다.
“일본이 서양 열강으로부터 관세자주권을 쟁취할 수 있도록 한국도 적극 지지하겠습니다. 일본이 관세자주권 조약을 맺는 시점에서 3년 이내에 한국도 관세자주권을 얻도록 협력해 주길 바랍니다.”
“좋습니다. 그리 하지요.”
서양 열강으로부터 관세자주권을 쟁취하는 건 일본 외교의 최대 목적 중 하나였으므로, 동맹국이 함께 쟁취하자는 주장을 무작정 거절할 수 없었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1911년에 일본이 관세자주권을 회복하게 되니, 계획대로라면 한국도 1914년 즈음에는 관세자주권을 회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14년에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지니……. 뭐, 역사가 바뀐다고 해도 세계대전은 필연이겠지.’
이선의 계산대로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서양 열강도 한국에 계속 불평등 조약을 압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상호방위조약 체결 후 1년 이내로 새로운 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여, 내륙개방을 조건으로 영사재판권과 최혜국 대우 문제를 논의하도록 합시다.”
마침내 영국도 영일통상항해조약을 전례로 하는 새로운 한영통상항해조약에 동의했다.
열강의 우두머리인 영국이 불평등 조약을 수정하면, 영일통상항해조약처럼 열강 각국도 수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 30년의 불평등 조약 시대가 막을 내리고, 동양을 넘어 서양 열강을 상대로도 진정한 자주를 향한 길이 열렸다.
1904년 9월 27일, 상호방위조약 최종안이 타진되었다.
조약 실무자인 외무장관 랜스다운,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 주영 일본공사 하야시 타다스, 한국 외무대신 서광범, 주영 한국공사 윤치호는 각국 수상인 밸푸어, 사이온지 긴모치, 김옥균의 승인을 받았다.
각국 국가원수인 에드워드 7세, 메이지 천황, 광무 황제의 재가를 받아, 10월 1일 조약이 런던에서 최종적으로 체결되었다.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 연합왕국, 대일본제국, 대한제국은 동양 평화와 안보를 위해, 각국 국민의 평화를 향한 열망을 재확인하며, 연합왕국 국왕 폐하의 정부, 일본 천황 폐하의 정부, 한국 황제 폐하의 정부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제1조. 영국·일본·한국은 청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지지한다.
제2조. 영국은 청국 전역, 특히 장강 유역과 티베트 일대에, 일본은 복건과 해남도 일대에, 한국은 남만주 일대에 각각 특수한 정치적·상업적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조약 당사국은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제3조. 제3국이 침략해 온다면, 조약 당사국은 공동으로 연합해 방어할 의무가 있다.
제4조. 만약 1국이 자국 방위에 필요하다 판단하여 제3국을 향해 선제공격을 한다면, 나머지 조약 당사국은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
제5조. 만약 2개 이상의 열강이 적대국으로 참전해 교전이 발생한다면, 중립을 지키던 조약 당사국도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펼 의무가 있다. 이 경우, 강화조약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하며, 적대국과 단독 강화조약을 맺지 않는다.
제6조. 조약 기간은 5년으로 하며, 만료 1년 전에 1국이 각국에 해제를 통지하기 전까지 자동으로 연장된다.
이상의 조약은 동아시아 지역으로 한정하며, 추후 협상을 통해 범위를 확대할 수 있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한다.
1904년, 메이지 37년, 광무 8년 10월 1일, 런던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 연합왕국을 대표하여, 외무장관 랜스다운 후작
대일본제국을 대표하여,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타다스
대한제국을 대표하여, 특명전권공사 윤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