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78
– 59화에 계속 –
2부 59화 호헌 운동
사이온지가 내각 총사퇴를 선언하고, 후임 내각이 선출되어 인준되는데 2주의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원로회의 내의 갈등이 심하다는 의미였다.
야마가타는 육군-조슈 주도의 내각을 수립하려 했지만, 이토와 마쓰가타는 입헌정우회-사쓰마-해군 연합을 유지하고자 했다.
사이온지와 현 내각은 그동안 임시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9월 이래 특파대사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박영효는, 은밀히 하라를 만났다.
“내무대신 각하,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 대한 황제 폐하께서도 일본의 헌정 위기에 대해 큰 우려와 안타까움을 표하셨습니다. 일본이야말로 동양 최초로 헌법과 의회를 설립하고, 선진적인 정치 제도를 확립해 아시아 국가들의 모범이 되지 않았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사이온지 총리와 하라 대신이 일본의 헌정을 잘 이끌어나가기라 믿으셨습니다.”
“소생이 내무대신으로서 제대로 총리를 보좌하지 못한 책임입니다. 국민은 물론이요, 이웃나라에도 들 낯이 없습니다.”
하라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미 정국의 주도권은 자신을 떠나, 원로들에게, 아니 육군에 넘어가 있었다.
“각하께서는 내무대신에서 물러나도, 의회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 입헌정우회의 간사장입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다면, 의회 정치의 미래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입헌정우회는 물론이고, 제1야당인 헌정본당도 군부 규탄에 합세했지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의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가 않습니다. 설령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해도, 저들은 중의원 해산으로 맞설 겁니다. 물론 재선거를 치러도 1,2당이 압도적 과반은 차지할 겁니다. 그래도 의회에 총리 선출 권한이 없는 이상, 교착상태가 반복될 뿐입니다.”
하라가 메이지 헌법의 허점을 밝혔다. 의회의 권한이 제한적이라, 아무리 압도적 과반을 차지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요. 만약 육군이 주도하는 내각이 들어섰는데, 위수령까지 유지되면 어찌합니까? 위수령이 계엄령으로 바뀔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군부가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는 환경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박영효의 우려 표명에 하라의 정신이 번뜩 들었다. 테러 이후 현 정부가 치안 안정을 목적으로 선포한 위수령이다. 정작 군부가 믿을 수 없다는 게 드러난 지금, 현 정부가 물러나기 전에 위수령은 해제해야 했다.
“조언 고맙습니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잠시 그 문제를 놓치고 있었군요.”
하라는 즉각 정부와 의회를 움직였다.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던 사이온지도 위수령 해제만은 적극 동의했다.
“군부의 요청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게 된 현재, 군부에 의해 치안은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이에 정부는 위수령 해제를 결의합니다.”
12월 14일, 위수령 해제를 결정한 정부는 중의원에 동의를 요청했고, 중의원은 즉각 압도적 다수로 의결했다.
“아니, 도대체 왜 군부의 동의도 없이 위수령을 해제한 겁니까!”
“위수령 선포와 해제는 정부가 결정할 사안입니다. 군부의 궐기로 치안 안정을 만방에 선포한 상황인데, 위수령을 더 유지할 이유가 없지요. 가뜩이나 헌정 위기라고 말이 많은데, 새로운 내각이 위법적 절차 없이 적법하게 통치하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해군은 치안 안정이라는 소기의 목적에 도달했다고 판단, 위수령 해제에 동의합니다. 육군도 동의해주기 바랍니다.”
사이온지 내각이 보여준 최후의 결단에, 결국 육군도 물러서야 했다.
“일단 육군 주도 내각 설립이 우선이니, 위수령 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다. 어차피 필요하다면 위수령이 아니라 계엄령도 선포할 수 있지. 의회가 반대하면 해산하면 그만이고. 받아들이도록.”
어차피 육군이 차기 내각을 주도하기로 한 상황에, 이 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었다.
“좋아. 이제 언론과 집회의 자유는 확보될 수 있겠군.”
박영효는 이선의 지시를 받아, 이회영과 함께 대일 공작을 수행 중이었다.
역모 사건으로 책임을 지고 사임한 박영효는, 대일 공작을 성공시켜 자신의 충성심과 능력을 입증하고자 했기에 열성적이었다.
12월 19일, 진통 끝에 마침내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전 내무대신 가쓰라 다로 육군대장이 12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국내 치안을 수호하지 못한 책임으로 내무대신에서 불명예스럽게 경질되었다가, 불과 반년 만에 화려하게 복귀한 셈이었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의 조칙으로 대명(大命)을 받들어, 본관 가쓰라가 내각총리대신을 맡게 되었습니다. 원로와 대신 여러분의 협력과 지도를 바랍니다.”
대장대신(재무부)을 총리가 겸임하고, 내무대신은 참모차장 고다마가 겸임하며, 육군대신에 데라우치가 유임된 걸 제외하면, 의외로 각료직 자체는 정파별로 균형 있게 채워졌다.
해군대신에는 해군과 사쓰마를 대표하는 야마모토가 유임되었고, 외무대신에 영일동맹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고무라가 유임되는 등 문민 관료들이 각 부처를 맡았다.
하지만 이 내각의 실상이 육군 내각, 야마가타 내각임을 눈치 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총리 가쓰라는 야마가타의 ‘꼬붕’에 불과했다.
소위 ‘군부의 궐기’로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지만, 이런 비민주적·비입헌적 행위는 수많은 사람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는 헌정 질서를 파괴한 행각이오! 우리 입헌정우회는 가쓰라 내각을 지지하지 않겠소.”
“이런 식으로 군이 정부를 무너트리는 건 용인할 수 없소. 우리 헌정본당 또한 책임 있는 정당으로서, 가쓰라 내각을 인정할 수 없소.”
제국의회 제1당인 입헌정우회는 이토가 창당하고, 사이온지가 계승하여 현재는 하라가 주도하는 당이었다. 결국 육군에 굴복한 이토와 사이온지하고는 달리, 하라는 가쓰라 내각을 부정했다.
정우회와 사사건건 대립해오던, 전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가 주도하는 헌정본당도 새 내각을 부정했다.
의회 과반을 차지하는 정우회, 4분의 1을 차지하는 헌정당이 모두 반대하니, 의회 4분의 3이 새 내각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입헌국가라면 내각이 의회의 지지를 얻지 못해 무너져야 하는 상황이지만, 일본은 ‘천황의 조칙’으로 총리가 임명되는 외견적 입헌군주제였기에 의회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중의원을 해산하고, 새 선거를 실시한다.”
가쓰라는 총리의 권한으로 손쉽게 의회를 해산시켜버렸다.
비록 새로운 총선거를 해도 내각 반대 세력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겠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메이지헌법 45조에 따르면, ‘중의원 해산의 명이 있을 때는 칙명으로써 새로이 의원을 선거케 하여 해산일로부터 5개월 이내에 이를 소집해야 한다.’
합법적으로 최대 5개월은 의회 없이 통치가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5개월이면 충분히 전쟁을 준비할 수 있다. 조속히 준비를 마치고, 내년 봄에 개전한다. 해군은 내가 설득하지. 해군도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더 확충되기 전에 제압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걸. 전함 뒀다가 어디다 쓸 거야? 겉으로는 방수자위(防守自衛)를 외치지만, 가상적국을 격멸시키고 싶은 건 그놈들도 마찬가지야.”
“전쟁이 일어나면, 지금 부정적인 여론도 즉각 개전 지지로 돌아설 겁니다.”
“여론이라는 건 손쉽게 조종하는 거야. 국민이야 어차피 어리석기 짝이 없지. 관이 시키는 대로 따라오는 존재지. 불평불만 많은 서양 국가들과 비교하면, 일본인만큼 통치하기 쉬운 국민도 없을 걸.”
야마가타는 경멸스럽다는 듯이 내뱉었다.
“국내 여론은 그렇다 치고, 영국과 한국은 어찌 반응하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기습하더라도, 어떻게든 러시아가 선제공격했다고 만들어야지. 러시아와의 전쟁이 일어나면 결국 영국과 한국도 따라올 수밖에.”
야마가타와 가쓰라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들은 육군의 야욕, 조슈의 야욕이 성취되기 위해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
대한제국, 황성.
이선은 주한영국공사 조던과 회견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은 영국 및 일본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충실히 지키고자 신속히 조약을 심의하고 비준했습니다. 귀국의 뜻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정정불안이 발생하여 군부 과격파가 정부를 주도하게 되었으니, 조약을 무시하고 러시아에 선제공격을 하여 평화를 깨트릴까 우려가 됩니다. 이래서야 동양 평화를 위해 맺은 조약의 의미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본국 정부 역시 일본의 사태 전개에 대해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이선의 우려에 조던도 공감했다. 영국도 아직 상호방위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지만, 원래 영국 의회가 조약 심의에 오랜 시간을 소요하기 때문이지, 조약 자체에 문제를 삼아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이는 영국에서 관례적인 일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면 안 되오. 일본 군부가 엉뚱한 짓을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는 걸 넘어, 극동에서 전쟁을 도발해 러시아의 인도 침입을 막겠다는 밸푸어 내각의 초기 구상은, 독일의 급부상으로 인해 변경되었다.
독일이 프랑스 세력권인 모로코에서 도발할 정황이 드러나고, 프랑스는 유사시 영국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충돌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영국의 동맹인 일본과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가 전쟁을 벌여선 안 될 일이었다.
더욱이 카이저가 차르에게 밀서를 보내 동맹을 시도했다는 정황이 영국 정보부에 파악됐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 카이저의 뜻대로 놀아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은 영국의 충실한 동맹으로서,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바입니다. 짐은 언제나 귀국을 지지하겠다는 뜻을, 정부에 전해주십시오.”
“예, 폐하. 황제 폐하와 한국 정부의 호의를 반드시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선은 일본보다 한국이 더 신뢰가 가는 파트너라는 점을 강조했다.
육지에서 한국, 바다에서 일본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던 영국의 구상은, 일본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으로 시작부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영국이 보기에도 장차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본에 비해서, 이선은 균형 잡힌 외교와 안정적인 정치로 신뢰를 주었다.
1894년 이래 친일 일변도였던 영국의 동아시아 외교는, 서서히 시각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선은 표정을 관리하면서,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쓰라 내각이 취임하자마자 중의원 해산을 단행하자, 정당뿐만 아니라 여론도 격동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 눈치를 보고 있는 일본 주요 언론들보다, 외신이 더 빠르게 반응했다.
≪데일리 크로니클≫의 일본 특파원,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l)이 필봉의 선두에 섰다.
「기로에 선 일본 정치 : 떠오르는 동양 국가, 일본의 미래는 영국인가, 프로이센인가?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영국의 동맹으로, 영국과 같은 섬나라이다. 일본은 동양의 영국을 자처하며, 극동 정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영국인들은,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정치는 프로이센식 군주정에 더 가깝다. 근래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일본의 헌정이 군부에 의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 일본인들이여, 그대들은 정부가 군부의 뜻대로 조종되길 원하는, 프로이센식 정부를 원하는가? 국가가 군대를 보유한 게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보유한 나라, 프로이센을 원하는가? 수많은 국민이 군부의 야욕으로 전쟁터에 끌려 나가 죽은 후에야 후회할 것인가! 군부에 맞서 헌정을 지켜야 한다! 일본의 충실한 동맹인 영국인으로서, 나는 일본인의 각성을 원한다. ……」
베델의 통렬한 기사는, 재일 서양인 사회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어릴 적부터 일본에서 무역업에 종사해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베델은, 영어와 일본어로 모두 기사를 작성했다.
일본 정부는 즉각 검열에 나섰지만, 검열의 범위 내에 있는 일본 신문들과 달리 영국 신문은 검열 대상이 못됐다.
일본 언론의 보도는 금지됐지만, 베델이 작성한 기사는 일본인들에게 전파됐다.
“일본의 추태를 일본인들이 나서지 못하고, 영국인의 입을 빌려 대신 비판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네.”
“야마가타, 가쓰라가 다 무엇이냐? 우리도 맞서 싸워야 하네!”
자유주의 성향의 ≪만조보≫와 함께, 가장 강력한 반정부 성향의 신문인 ≪평민신문(平民新聞)≫.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평민신문은 당국으로부터 검열받고 정간당하기 일쑤였다.
야마가타 테러 사건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이 대거 체포되자, 평민신문의 사회민주주의자들도 검거되었다. 하라의 온건한 대처로 테러와 무관한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석방될 수 있었지만, 위수령 하에서 정간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위수령이 해제되자, 평민신문은 복간됐다. 하지만 곧 가쓰라 내각이 수립되어 그들에게 감시의 눈을 들이켰다. 평민신문 편집부와 기자들은 늘 경찰의 감찰 대상이었다.
“올봄의 히비야 폭동은, 비록 배외주의적 열망을 표출한 거지만 민중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네. 우리가 총대를 메세. 까짓 거, 감옥에 가두라면 가두라지. 어차피 한 번 신세지고 나오니까 두려울 것도 없네.”
평민신문 편집장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가 총대를 메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비판의 필봉을 휘두르고, 민중 운동을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격동하는 재야뿐만 아니라, 정계에서도 대처에 나섰다.
문부대신을 지낸 바 있는 입헌정우회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는 철저한 헌정주의자, 의회정치의 수호자였다.
오자키는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는 헌정본당 수석총무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를 만나 호헌(護憲) 운동을 제안했다.
“가쓰라, 아니 육군과 야마가타는 헌정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부와 의회는 군부의 노리개가 되고 말 겁니다. 호헌 운동을 전개해 저들의 야욕을 저지해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양당이 공동으로 호헌 운동을 개시합시다. 비록 지도부가 태도를 유보하고 있습니다만…….”
의원들이 들끓는 것과 달리, 정작 정우회 총재 사이온지와 헌정본당 총재 오쿠마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총리를 지냈던 이들은 원로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운동과는 거리를 두라는 입장이었다.
“그 사람들이야 헌정 수호보다 본인의 지위를 더 중시하니까 그렇지요. 결국 다시 원로의 간택을 받아 총리에 오를 거라고 믿으니까. 소장파 의원들이라도 중심이 되어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좋습니다. 행동으로 나서지요.”
12월 27일, 오자키와 이누카이가 중심이 되어 ‘헌정수호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정치인에 이어, 신문기자와 학자들도 헌정수호위원회에 합류했다.
번벌 타파 · 헌정 수호를 슬로건으로 내건, 호헌 운동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