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79
– 60화에 계속 –
2부 60화 1905년, 혁명의 해
1905년 1월 1일 일요일.
새해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세계를 덮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이 가속되는 해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혁명 운동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섬나라, ‘황국 신민’의 나라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조슈 번벌은 헌정을 유린하고, 민의가 아닌 총칼로 정권을 세우려고 하오! 메이지 38년, 일본은 중대한 역사의 기로에 서 있소. 민의를 짓밟는 군사 정권이냐, 민의를 대표하는 입헌 국가냐! 우리 국민은 일치단결하여, 헌정을 수호하고 번벌 정권을 타도합시다!”
“헌정 수호! 번벌 타도!
도쿄 히비야 공원에는 헌정수호위원회가 주최한 호헌 집회가 열렸다.
첫 집회에 1월의 추운 날씨라 참가자는 1천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는 겨울을 몰아낼 것 같았다.
가쓰라 내각은 집회를 막고 싶었지만, 위수령이 해제되었으니 새로운 위수령이나 계엄령을 선포하기 전까진 법적 근거라곤 치안경찰법 8조의 치안 소요 문제였다. 치안경찰법을 내세워 집회를 금지하려 하니, 집회 신고인이 영국인 기자 베델이라 막을 수가 없었다.
경찰을 동원해 집회를 해산하고 싶어도, 호헌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이가 문부대신을 지낸 거물급 중의원이자, 원내 1·2당을 대표하는 오자키 유키오와 이누카이 쓰요시이니 무력을 쓰는 것도 어려웠다.
“헌정 수호! 번벌 타도!”
“오, 뭐지? 집회인가? 간만이군.”
“암, 번벌 놈들은 타도해야지. 이 나라가 조슈의 나라냐? 도대체 유신 이후로 몇 년을 해 처먹는 거야?”
“야마가타 늙은이, 이제 지겹다! 팔도 없으면 이제 그만 집에서 쉬라고 해!”
“야마가타의 앞잡이 가쓰라 물러나라!”
“옳소! 헌정 수호! 번벌 타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참가자가 공원에 모여들었다. 신년과 일요일을 맞이해 가족이나 친지와 함께 공원에 들렀다가,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도 많았다.
군국주의적 여론이 팽배한 일본이긴 하지만, 조슈와 육군이 정부를 무너트리고 헌정을 짓밟은 것에 분개하는 일본인도 많았던 것이다.
“호헌 동지들! 노고가 많았습니다. 오늘의 집회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헌정이 회복되고 번벌 정권이 타도되는 날까지, 헌정수호위원회는 매주 일요일 이곳에서 모여 구호를 외칠 것입니다. 오자키 의원과 이누카이 의원께서는 제국의회에서 농성을 이어 나가기로 하셨습니다. 헌정 수호와 번벌 타도의 그 날까지!”
“와아아아!”
“헌정 수호! 번벌 타도!”
어디까지나 ‘헌정 수호’, 헌법의 정통성을 지키고 체제 내 개혁을 외치는 호헌 운동이니만큼, 집회가 마치자 자진 해산했다.
헌정수호위원회는 야마가타가 주도하는 가쓰라 내각을 퇴진시키고, 조슈벌이 지배하는 육군의 망동을 제압해 문민통제를 이룩하며, 궁극적으로 선거 제도를 개편해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이룩하겠다는 목표였다.
같은 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신문, ≪평민신문≫ 신년 특별호가 발행되었다.
「우리는 인류의 자유가 완전하도록 민주주의를 신봉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문의 좋고 나쁨, 재산의 많고 적음, 남녀의 차별, 이 모든 문제로 인해 생기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든 압제의 속박을 제거하기를 원한다!」
≪평민신문≫을 대표하는 필진 고토쿠 슈스이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어조로 펜을 들었다.
헌정수호위원회가 외치는 헌법과 의회 수호를 넘어, 신분제·자본·젠더에 의한 계급 타파를 부르짖었다.
「그들의 제국 건설은 필요가 아니라 욕망이다. 복리가 아니라 재해다. 국민적 팽창이 아니라 소수 인간의 공명과 야심의 팽창이다. 무역이 아니라 투기다. 생산이 아니라 강탈이다. 문명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명을 괴멸(壞滅)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사회 문명의 목적이란 말인가? 국가 경영의 본지란 말인가?」
평민신문이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는 건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였다. 그 통렬한 비판은 정권과 군부를 향했다.
「이민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말라! 이민은 영토 확장이 필요하지 않다. 무역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말라! 무역은 결코 영토 확장이 필요하지 않다. 영토 확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군인과 정치가의 허영심뿐이다. 금광과 철도의 이익을 좇는 투기꾼뿐이다. 군수를 공급하는 어용상인뿐이다. 번벌 군사 정권과 그 일당만의 이익뿐이다!」
국민이 정부의 증세와 압제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감내하고 있는 것은, 군비 증강과 영토 확장으로 제국의 국위를 떨칠 수 있다는 정부와 어용언론의 선전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국민은 전쟁만 이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었다. 그 환상부터 먼저 깨야 했다.
「혹자는 본지가 자유와 평등을 외치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반대하기 때문에, 로탐(러시아 스파이)이라고 폄하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일본의 그 누구보다도, 인민을 억압하는 차르 전제정의 몰락을 기원한다. 작금의 러시아에는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전제정에 맞서는 혁명가들의 위대한 투쟁과 희생에, 끓어오르는 감동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차르 정권과 번벌 정권은 서로 적대시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전쟁을 원한다는 것은 같다. 일본의 인민과 러시아의 인민이 연대하여, 전쟁을 획책하는 제국주의적 음모를 타도해야 한다. 중국과 한국의 인민도 대의(大義)에 함께할 것이다. 만주족 전제정권 타도의 날도 머지않았다.
러시아 혁명 만세! 일본 혁명 만세! 동아 혁명 만세!」
혁명을 부르짖는 평민신문의 외침은 일본에 전례 없는 것이었다.
신년 특별호에는,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가 공역(共譯)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번역본이 실렸다. 동아시아 최초의 번역이었다.
실제 이들의 마르크스주의 지식은 적은 편이었기에, 영어 번역본을 중역하여 부르주아지를 ‘신사(紳士)’, 프롤레타리아트를 ‘평민(平民)’으로 동양적 표현을 썼다.
하지만 동아시아 최초의 번역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었다. 이들은 장차 중국어, 한국어 번역도 이뤄지리라 믿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나라 민주주의 정당의 단결과 협력을 위해 어디서나 애쓴다.
……지배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평민이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평민이여, 단결하라!」
“평민신문 신년 특별호! 당국의 탄압으로 정간 당하기 전에 읽어 보세요!”
10만 부가량을 인쇄하는 주요 일간지에 비하면, 매주 일요일에 발행되는 주간 평민신문의 인쇄는 평균 5천 부 정도였다.
그런데 신년 특별호는 당일로 모두 매진되어, 3천 부가 증쇄될 정도였다. 전례 없는 패기에 독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떻게 발매됐지? 검열관들 놀고 있나?”
“이렇듯 확고하게 정부 놈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언론은 역시 평민신문뿐이야. 호헌 운동한다는 신사 나리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옳소! 평민이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평민이여, 단결하라!”
위수령하에서는 사전 검열을 받았겠지만, 위수령이 해제된 평시에는 사후 검열이었다.
평민신문 특별호가 발행되는 날은 하필 신년에 일요일이었으므로, 검열당국은 손을 놓고 있었다.
치안당국도 한창 불붙기 시작한 호헌 운동에 모든 신경을 쓰고 있어서 소수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내버려 두고 있었다.
신년 특별호를 받아 든 후에야, 당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평민신문 발매 금지!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발행인, 편집자, 주필, 기자, 인쇄인 모두 체포해! 인쇄 기계도 몰수하고!”
한바탕 검거 열풍이 불었다. 고토쿠 이하 평민사 관계자들은 줄줄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정간과 체포를 각오하고 있었으므로, 순순히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서쪽에서 빌려와 피운 불씨는 건조한 겨울 날씨를 타고 불꽃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바로, 혁명이라는 불꽃이.
* * *
광무 9년 1월 2일, 대한제국 황성.
신년을 맞이하여, 경운궁에서는 간소한 주연이 있었다.
명헌태후의 상(喪)이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로, 주연이라기보다는 황제와 황실, 고관과 의회 대표들이 모인 정례 만찬에 더 가까웠다.
“위대한 성과를 이룩한 광무 8년을 보내며, 새로운 해에도 대한의 찬란한 앞날을 위하여!”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총리 김옥균의 선창에 사람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그들이 보기에 ‘광무 8년의 위대한 성과’는 과장이 아니었다.
영국 및 일본과 방위조약을 맺은 건 위대한 성과였다. 정파를 막론하고 한영일동맹을 기뻐했다. 안보 위협이 사라진 건 물론이요, 세계 최강국인 대영제국과 동등한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 자체에 도취했다.
그러니 광무 9년에도 찬란한 앞날이 펼쳐지리라 기대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고균, 10년 전 완화궁에서의 대화를 기억하시오?”
“신이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죽어서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주연이 끝나고,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오른 이선은 김옥균과 별실에서 한잔 더 했다.
마치 1895년, 김옥균이 개화당을 대표해 이선에게 왕좌에 오르라고 권했던 그 날처럼.
“그때, 독립전쟁 승전으로 1기 10년을 마쳤다고 회고했지. 이제 한영일동맹 체결로 2기 10년도 마치고, 3기에 접어들었소.”
“폐하께서 말씀하신, 수성의 시대로군요.”
수성(守成)의 시대. 1기와 2기의 성과를 토대로, 평화 위에서 산업 발전과 국력 진흥으로 근대국가의 기틀을 만든다.
“짐이 3기는 수성의 시대라고 했던가?
“예. 1기는 혁명의 시대요, 2기는 제국의 시대, 3기는 수성의 시대가 되리라고.”
“음, 수성이라는 건 평화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데. 그걸 장담 못 하겠군.”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옵니까? 방위조약도 체결되었고, 안보 위협도 사라졌습니다. 대한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창창하옵니다.”
“이제 대한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오. 대한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마침내 열강 간에 벌어지는 거대한 게임의 일원이 되었소. 국제 정세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지.”
‘프랑스와 독일은 모로코 문제를 놓고 대립하고 있고, 영불협상을 맺은 영국은 프랑스에 합류할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은 여전히 적대하고 있다. 국내의 혁명적 분위기가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오히려 심화할 것인가?’
이선이 제국익문사에 주문한대로, 일본에서는 반정부 운동의 불씨가 붙기 시작했다.
호헌 운동이 당장 번벌 정부를 퇴진시키거나 군부의 우위를 무너트리진 못하겠지만, 군부의 무리수로 인해 정치적 정당성이 훼손됐고,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걸 분명히 보여 줄 것이다.
“여전히 일본을 우려하고 계십니까?”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아니 앞으로도 군부가 문제가 될 거요. 짐은 사이온지와 하라, 아니 해군의 야마모토만 되도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근데 야마가타나 가쓰라는 그게 안 돼. 군대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군대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니.”
“신도 일본의 급격한 정세 변화에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만, 새 내각은 조슈와 육군을 제외하면 다른 정파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만큼,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그런데 문제는 러시아야. 러시아에서 혁명적 위기가 발생하면, 전쟁을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지 못한 일본 군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
러시아에 체류 중인 김학우가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는 1904년 말에 접어들면 더 심화되고 있었다.
이선이 특히 우려하는 바는, 실제 1905년은 러시아에서 1차 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피의 일요일만 없으면 돼. 차르에게 겸손히 청원하러 온 충성스러운 국민들에게 총만 쏴 대지 않아도, 부분적인 위기는 발생해도 혁명은 발생하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 1905년 1월 22일, 차르에게 부당해고 문제를 청원하기 위해 겨울궁전을 찾은 노동자들이 진압군에 의해 학살당한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이로 인해 ‘자비로운 아버지 차르’의 신화는 깨지게 되었다. 국민에게 총질을 한 차르의 어리석은 실수로, 전러시아가 분노로 들끓은 끝에 혁명이 터졌다. 바로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다.
실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라기보단, 혁명으로 전쟁을 중단하게 된 러시아의 패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누적된 문제가 있으니, 언젠가 혁명이 터지긴 터지겠지만. 피의 일요일의 전제조건인 러일전쟁도 없었고, 군수공장 파업과 부당해고도 없었으니, 당장 문제가 발생하진 않겠지?’
이선은 더 이상 니콜라이에게 국내 정치를 조언하지 않고, 익문사 조직을 통해 러시아의 동향을 세밀히 파악했다.
김학우의 보고에 따르면, 1904년 12월 현재 폴란드와 핀란드에서는 혁명적 위기가 발생했으나, 아직 페테르부르크는 문제가 없었다.
피의 일요일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여순 요새 함락에 이은 푸틸로프 군수공장 파업과 부당해고도 없었고, 그러니 집회가 발생할 요인도 없었다.
‘그래도 대비는 해야 해. 일본은 군부의 총구가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러시아는 차르의 총구가 어디로 튈지 모르잖아.’
니콜라이 2세는, 언제 어디든 문제가 발생하면 강경진압을 선택할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선은 일본에도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고 있었다.
‘일본의 민주화가 촉진되면 좋은 일이지만, 만약 실패하더라도 정치 불안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를 일본 군부가 전쟁의 적기로 판단하지 않도록.’
1905년의 첫 해가 떠올랐다.
신년을 기뻐하는 세계의 인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역사는 이 해를 혁명의 해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타오르는 불꽃은 초원을 태우는 큰불이 되고 말리라.
첫 번째 불꽃은, 마르크스가 ‘민족들의 감옥’이라고 비판했던 나라, 러시아 제국을 향해 타올랐다.
러시아에서는, 거대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