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8
– 38화에 계속 –
38화 후계자
‘야, 야! 네가 떠나면 난 어쩌라고!’
니콜라이는 영어에 능통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지만, 귀족 여성들에게는 러시아어나 프랑스어로 말을 해야 할 터였다. 이선은 어느 쪽이든 큰 자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이선이 굳이 영어를 고집한 이유는, 프랑스어나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정도로 실력이 썩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외국어 실력이 필요한 외교 무대에서 어설픈 외국어 실력은 치명적이었다. 그렇다고 통역을 두자니 믿고 맡길 사람도 없어서, 스스로 대화하길 원했다.
외국어 사용에 대한 스트레스는 러시아에서도 심했는지, 이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총애했던 장남 니콜라이 황태자가 어렸을 적,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고 한다. 프랑스어는 국제공용어였으므로 황제는 황당해했다.
“네가 프랑스어를 못 하면 외국 외교관들과 어찌 대화를 할 생각이냐?”
“통역을 쓰면 되지요.”
“러시아 황제가 프랑스어도 못 하다니, 전 유럽이 너를 비웃을 거다.”
“그럼 전 유럽에 선전포고해서 정복해 버리지요.”
장남의 엄청난 포부에, 황제도 한 방 먹은 듯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포부가 크고 다재다능해서 황제감이라고 인정받은 니콜라이 황태자는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차남 알렉산드르가 황태자가 되었다.
이선의 친구, 니콜라이 대공의 이름은 바로 이 요절한 황태자에서 따온 것이었다.
‘나도 세계를 정복해서 한국어를 공용어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때까지 외국어 공부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이선은 문득 부담을 떨쳤다.
‘이건 외교도 아닌데, 틀렸다고 누가 뭐라고 할 거야?’
“Je ne parle pas français…… Mais je veux apprendre dur…… Je veux que vous compreniez……. (나 프랑스어 못해요…… 하지만 열심히 배워 보려고 해요…… 여러분이 이해해 줬으면 해요…….)”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킥킥 웃음이 나왔다.
“저 왕자님, 귀엽지 않니?”
“그러게.”
아직 어린 나이, 준수한 용모, 그들이 알지 못하는 동양의 왕자라는 신비함, 황제의 구원자라는 후광은 모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설픈 프랑스어 실력은 오히려 귀엽게 보였다.
“어느 나라 왕자랬지?”
“카레야(Корея, 조선)라잖아.”
“카레야가 어디야?”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다는데.”
“내가 듣기로 그 나라 왕이 터키 술탄처럼 엄청난 부자라던데.”
“진짜? 그럼 저 왕자는 조선의 왕위 계승자야?”
“바보야, 왕위 계승자가 여기까지 왔겠니?”
“너흰 정말 바보구나. 그게 뭐가 중요해? 저분은 황제 폐하를 구한 분이야. 앞으로의 인생이 탄탄대로인 분이라고.”
“그러네. 하지만 신랑감으로 삼기엔 동양인에 이교도인 게 좀 아쉽네.”
“이미 폐하께서 러시아 귀화와 개종을 제안하셨다더라. 폐하께서 친히 대부가 되어 주시고.”
“그래? 그럼 저 왕자님도 신랑감으로 괜찮겠는 걸?”
귀족 영애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자기들끼리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이선은 알아듣지는 못해도,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후, 좋을 때다.’
겉으로만 14세의 완화군 이선, 그 안의 정신은 30대의 냉소적인 학자 이선우였다.
니콜라이가 소개한 미혼의 러시아 귀족 영애들은 아름답고 순수해 보였지만, 하나같이 너무 어렸다. 조혼이 심한 조선만큼은 아니어도, 이 시대 러시아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20세 내외였다.
‘물론 현재의 나보다 연상이긴 하겠지만……. 정신적으로 10~20세는 연하. 어리다, 어려.’
순간 생각이 다른 곳으로 미친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지. 애초에 그렇게 따지면 120살 정도 연상 아닌가? 이선과 이선우 사이엔 120년의 차이가 존재하니까.’
현재는 완화군 이선 그 자체였지만, 정신적으로는 21세기의 이선우에 더 가까운 그로선, 새삼 자신이 얼마나 이 시대에 이질적인 존재임을 깨달았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난 1868년생 완화군 이선인데, 그딴 거 따져서 뭐 하게?’
“공작 각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이선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 너무나 아름다운 분들이 계셔서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갑자기 번지르르하게 쏟아내는 이선의 말에, 소녀들 사이에서 꺄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는 조선에서 온 이선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선의 말에 한 사람씩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공작 각하, 저는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여식, 올가입니다.”
“저는 미하일 크리콥스키 공작의 여식, 안토니나입니다.”
한 사람씩 자기 가문과 부친에 대해 자랑스럽게 인사를 하는데, 러시아 귀족 가문에 잘 알지 못하는 이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찬사를 보냈다.
“저는 니콜라이 유수포프 공작의 장녀, 지나이다(Zinaida)입니다.”
“차녀 타티야나(Tatiyana)입니다.”
20세 전후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과 15세 전후로 보이는 예쁜 소녀가 인사했다.
‘드디어 아는 이름이 나왔군.’
이선은 밝게 웃으면서 화답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귀 가문의 명예로운 이름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유수포프 가문에 대해 알고 계시다고요?”
“그럼요. 비록 제가 잘 아는 바는 아니나, 러시아 귀족을 대표하는 명문가라는 건 압니다.”
유수포프(Yusupov) 공작가는 러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귀족으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보유한 자산가로도 유명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유수포프 궁전은 21세기에도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그 화려함은 가문의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선이 유수포프 가문에 대해 아는 건, 지나이다가 아니라 그 아들,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이 역사적으로 명성을 떨친 덕이었다. 바로 ‘라스푸틴 암살자’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현재 가문의 당주 유수포프 공작은 딸만 둘 뿐이었고, 직계로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로 인해 공작 가문의 계승권은 딸들에게 있었다.
어떤 남자가 이 엄청난 자산의 계승자와 결혼할 행운의 사위가 될지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럼 각하께서 유수포프 가문의 초대를 받아 주시면 큰 영광이겠습니다. 이미 아버님께서 초대장을 니콜라이 대공 전하의 저택으로 보내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초대장이 너무 많아서 미처 다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지나이다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공작께서는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으니까요. 공작께서 와주시면 유수포프 가문의 명예요, 아버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저야말로 큰 영광입니다. 초대를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말 나온 김에 다음 토요일은 어떠신지요?”
“좋습니다. 그럼 토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무덤덤하던 이선이 유수포프 공녀에게 관심을 보이자, 영애들은 놀라움과 질투심을 느끼다가 곧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지나이다는 미모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해서, 수많은 귀족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유수포프 공작은 가문을 계승할 장녀가 유럽의 왕족과 결혼하길 원했다. 특히 불가리아 대공인 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가 그녀와 결혼하려고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중이었다.
유스포프 공작가의 초대를 받아들인 이선은, 콘스탄틴 대공의 파티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이선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관심을 끌어 보였다.
“조선이란 어떤 나라입니까?”
“공작께서는 어쩐 일로 러시아에 오셨습니까?”
“공작께서 미래를 예견하여 황제 폐하의 시역 음모를 막았다는데, 대체 어찌 알 수 있었습니까?”
“동양에서는 미래를 보는 법이 있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동양의 신비한 무술로 암살범을 제압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배우는 겁니까?”
이선은 너무나도 많은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피로를 느꼈다. 일일이 대답해 주다 지친 이선은 데려온 안영흠과 장무영에게 떠넘겼다.
“저는 그저 황제 폐하께 알리는 역할만 했을 뿐. 천기(天氣)를 보았던 건 제 가신인 안이오, 암살범을 제압한 건 제 경호원인 장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안영흠과 장무영 주위로 쏠렸다.
안영흠 주위로 ‘미래를 예견하는 동양 점성술’을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장무영 주위로 ‘동양의 신비한 무술’을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안영흠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가져온 명리학책을 펼치며 되는대로 사주를 봐주고 있었다.
“대감, 관상감에 못 들어간 한을 여기서 풉니다. 제가 여기서 사설 관상감을 열어도 엄청 잘될 것 같은데요.”
“뭐,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군.”
“대감께서는 아라사 귀족 영애들과 시간을 보내신 듯한데, 어떠셨습니까?”
“친교의 차원이었지. 조선이나 동양에선 이런 풍습이 없지만, 서양에선 사교를 매우 중시한다오. 미혼 남녀 간에 사교를 해도 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하는 것이지.”
미혼 남녀 간에 사교라니,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처음에는 별 쌍놈들 풍습이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라사 여인들이 어깨 드러내고 헐벗게 입는 걸 보고 역시 서양 오랑캐는 어쩔 수 없구나 싶었는데도, 보다 보니 눈도 크고 용모도 아름답고 말도 시원시원하니 보기 좋습니다.”
안영흠은 러시아인들이 주는 술을 한 잔씩 받아먹다가, 술기운이 오른 듯 얼굴이 불콰해져 있었다.
“가만 보니 아라사 여인들이 제 주위로 많이 모여드는데, 제가 여기 기준으로 좀 잘생긴 얼굴인 걸까요?”
“…….”
30대 홀아비 안영흠의 착각에, 이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거야 당연히 이 자리에서 동양인이 우리밖에 없기 때문 아니겠소. 더군다나 안 공이 동양 역법에 대해 잘 안다고 하니까 여인들이 몰려드는 거지. 아무래도 점성술 같은 건 남자보다 여자가 더 관심이 많지 않소? 서양도 다르지 않소.”
“그, 그렇군요.”
안영흠이 민망한 듯 얼굴이 붉어지자, 이선이 빙긋 웃었다.
“뭐 그렇게 발전해 나갈 수도 있는 거지. 잘해 보시구려.”
“그 무슨 말씀을. 대감이야말로 잘해 보십시오. 어느새 열넷이니, 조선에선 혼례를 염두에 둘 나이입니다. 성상께서도 그 무렵에 국혼을 올리지 않으셨습니까?”
조혼이 빈번한 조선에서, 특히 왕족들은 10대 초반이면 결혼을 했다.
“지금으로선 혼례를 논할 때가 아니오. 내가 아라사 여인과 결혼한다는 건 말도 안 되고.”
“하긴, 그건 그렇죠. 조선 왕실에서 어찌 감히 서양인 며느리를…….”
안영흠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족이든 귀족이든 러시아 여인이랑 결혼하면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로 귀화해야 하는데, 그럼 조선하고는 영영 연을 끊겠단 말이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이선은 냉철했다. 지금은 여인의 사랑보다 권력이, 조선으로의 복귀가 더 중요했다.
다음 주 토요일.
이선은 가신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의 유수포프 궁전으로 향했다. 제복 차림인 백발의 집사가 이선을 정중하게 맞이하고, 궁전 안으로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유수포프 가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지나이다 유스포바와 동생 타티야나가 이선을 반갑게 맞이했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지나이다는 미모 외에도 지적(知的)이고 친절한 것으로 유명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 뛰어난 사교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차녀 타티야나는 언니의 빛에 가려 수수해 보였지만, 그녀 역시 아름다운 소녀였다.
단지 유수포프 공작과 귀족 가문의 관심이 모두 장녀 지나이다에게 쏠려 있어서 그렇지, 15세의 타티야나도 신붓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선은 자매의 손등에 키스하며 서양식으로 경의를 표했다.
“오호…….”
이선은 자매를 따라가다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러시아 최고의 부유한 귀족 가문답게,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와 회랑조차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였다. 그야말로 러시아 귀족 사회의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했다.
‘과연 엄청난 갑부로 유명한 유수포프 공작가답다. 관계를 맺기에 딱 좋군.’
이선은 공녀의 미모에 반했다기보다, 철저하게 사업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었다.
황제로부터 러시아 대공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받아 거액의 은사금을 받은 이선은, 그 돈을 어디다 써야 가장 합리적인 투자가 될지 고민 중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식 거래소 동향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지만, 가장 확실한 정보를 얻으려면 상류사회의 내부동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황실은 모든 걸 소유하고 있으니까 굳이 이런 걸 관심 가질 필요도 없지. 하지만 유수포프 공작이라면 다를 거야.’
유수포프 가문은 페테르부르크에만 4개의 궁전을 갖고, 러시아 37개 지역에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토지 귀족으로서 10만 에이커(400㎢) 이상의 토지에서 나오는 소득 외에도, 근대적 자본가로서의 면모도 발휘해 수많은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근대는 자본의 시대. 황족과 귀족도 좋지만, 자본가와의 관계가 필요하다. 유수포프 가문을 통하면, 러시아 대자본가들하고도 통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이선은 공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선은 선별해서 고른 초대자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