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80
– 61화에 계속 –
2부 61화 동토의 첩보전
율리우스력 1905년 1월 1일(1월 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신년을 맞이한 페테르부르크는 축제 분위기였다. 제국의 변경에서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지만, 수도는 아직 안온했다.
제국익문사 독리 김학우는 정보원들을 모처에 소집했다.
“다들 모였나?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표면은 통신사 특파원이지만 유럽 사회주의 조직을 담당하는 조한민, 표면은 주러 공사관 무관이지만 군사정보를 담당하는 유동열 정위, 표면은 주러 공사관 3등 참서관이지만 외교정보를 담당하는 이위종, 기타 등등이었다.
이들을 소집한 김학우가 표면적인 궁내부 특진관이자 러시아 특사가 아닌 정보기관 총수라는 걸 러시아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모인 요원들뿐이었다.
“현재 페테르부르크는 잠잠합니다. 비보르그 지구 공장 파업도 작년 말을 끝으로 종료되었고, 1월부터 조업이 재개되었습니다. 노동조합은 당국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망명 중인 사회민주노동당 지도부는 국내에서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거로 추정됩니다.”
“현재 공안당국에서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입니다. 이들은 각지에서 관리와 군인, 경찰 간부들을 사살하고 있습니다.”
“단, 소수민족의 동태는 심상치 않습니다. 폴란드와 핀란드에서는 총파업에 이어 봉기까지 일어날 분위기라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정보원들의 보고를 받은 김학우는 생각에 잠겼다.
황제 이선은 김학우가 계속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 상황을 탐색하고 황성으로 신속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황제가 가장 우려한, 페테르부르크의 위기는 아직 없었다. 파업은 종료됐다. 당국은 노동조합을 통제하고 있다.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는 공안당국에게 성가신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체제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변경에서는 봉기가 일어날 낌새가 보이지만, 차르의 명령만 떨어지면 군대와 경찰이 짓밟을 것이다.
“일전에 지시하신, 일본 공사관 무관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만주 탐문을 마치고 주러 공사관 무관으로 파견된 유동열 정위는, 여러 언어에 능통하다는 특기를 살려 정보를 취득했다.
“그래, 어떤가?”
“아카시 대좌는 과연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미는 것 같습니다.”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대좌는 주러 일본 공사관 무관이다.
아카시는 독일 유학파였고, 프랑스와 미국, 러시아에서 주재 무관을 지내며 여러 언어에 유창했다.
국가를 대표하기에 품위가 중요한 공사관 무관에게 어울리지 않은 꾀죄죄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아카시를 주목하는 러시아인은 거의 없었다.
오흐라나(내무부 공안질서수호국)는 가상적국인 일본 외교관과 군인들을 정기적으로 사찰했지만, 아카시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기피인물)로 분류되지 않았다.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대좌님은 제게 선배이십니다. 만리타향에서 선배님이 계시니 든든합니다.」
「하하, 나도 후배를 만나니까 반갑구려.」
한영일동맹이 체결된 후에는, 한국 외교관과 일본 외교관이 친분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유동열은 일본에서 세이조(成城) 군사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에서 위탁교육을 받은 바도 있는 만큼, 일본어가 유창해 일본인의 경계심도 덜했다.
「그래, 유 정위는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니 어떻소? 과연 대국답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르쿠츠크 기병학교에서 유학할 당시에만 해도 러시아를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남만주에서 기병대 복무를 하면서 환상이 깨지더군요. 러시아가 어떻게 만주를 침탈하는지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만주는 본래 대한의 고토이고, 국익의 사활이 걸린 지역이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결코 용인할 수 없습니다.」
유동열이 반러시아 감정을 드러내자, 아카시가 희미하게 웃었다.
「과연 러시아는 아시아의 공적(公敵)이오. 그러니 일본과 한국이 동맹을 맺게 된 것 아니겠소. 아시아가 연대하여 침략자 러시아에 맞서야 하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언젠가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야지요.」
「뭐, 머지않아 그럴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혹여 전쟁이라도?」
「그건 아니오. 현재 러시아에는 사회 불안이 강하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만주에 신경 쓸 수가 없겠지.」
「혁명이라니요? 혁명이야말로 장담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뭐, 혁명은 저들이 알아서 할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요. 다만 시간이 지난 후에 두고 보면 알겠지.」
아카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동열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의심을 살까 봐 입을 다물었다.
이후에도 유동열은 종종 아카시를 만나 사사로운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대좌는 스톡홀름 출장이 잦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주러시아 일본 공사관이 주스웨덴 공사관까지 겸임하기 때문입니다만.”
유동열이 조한민과 이위종에게 시선을 보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보고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유 정위의 정보를 토대로, 이위종 참서관과 함께 스톡홀름을 방문했습니다. 역시나 표면적인 이유는, 주러 한국 공사관이 주스웨덴 공사관까지 겸임하기 때문이지요.”
이위종은 프랑스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대한제국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다. 하지만 군인의 길을 걷는 대신에, 부친의 뒤를 이어 외교관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위종의 청원은 받아들여져, 부친 이범진이 공사로 재직 중인 러시아 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와 군사기술에 모두 능통한 이위종은 이선의 눈에 들었고, 익문사 현지 요원으로 발탁되었다.
“이 참서관은 스웨덴에서 업무를 보고, 저는 특파원 자격으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을 취재했습니다. 인터내셔널에서 친분을 쌓은 덕분에 스웨덴에 망명한 핀란드 혁명가들과도 알게 됐지요.”
러시아령 핀란드에 인접한 스웨덴에는, 러시아 제국의 압제를 피해 온 망명객들이 존재했다.
“아카시 대좌는 은밀히 핀란드 혁명당과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일본 육군 대좌쯤 되는 사람이 사회민주주의에 공명하진 않을 텐데 말입니다. 유럽에 오래 체류하다 보니 좌익이 된 걸까요? 일본에서도 정치 불안이 이어진다는데, 인터내셔널과 손잡고 혁명을 도모하려고?”
조한민의 농담에 김학우는 일절 반응하지 않고, 계속 보고나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무안해진 조한민은 보고를 이어 나갔다.
“알고 보니 핀란드 혁명당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인터내셔널을 통해 폴란드 사회당과도 안면을 텄는데, 사회당 지도자인 피우수트스키가 가명으로 스톡홀름에 종종 나타납니다. 하필 아카시가 스톡홀름에 출장할 때 말이지요. 아시다시피 피우수트스키는 러시아 내무부가 지목한 폴란드 반란 수괴지요. 폴란드 사회당도 아카시와 은밀히 회동하고 있으리라 추정됩니다.”
조한민이 획득한 정보는, 그가 국제주의에 공명하는 사회민주주의자로 위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는 오흐라나에서 자주 써먹는 방법이었다. 혁명 조직에 오흐라나 스파이가 침투한 경우는 늘 있었다.
그렇기에 혁명가들은 늘 외부인을 경계했지만,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희귀한 동양인이라는 포지션은 인터내셔널의 환영을 받았다. 인터내셔널의 보증을 받은 조한민은, 특유의 화술과 지식으로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들은 ‘국제 동지’에게 핵심 정보를 알려 주진 않았지만, 추정의 여지를 제공했다.
“심지어 친러시아 자치파로 여겨지는 폴란드 민족민주연맹도 아카시와 접촉하는 거로 추정됩니다. 아직 확인은 못 했습니다만, 러시아 사회혁명당이나 사회민주노동당 망명 지도부와도 접촉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차르에 반대하는 정당이라면 가리지 않고 만난다는 거군. 그 말인즉슨·….”
“물론 일본 장교가 진심으로 러시아 혁명에 공감하진 않을 테고, 아카시 대좌는 배후에서 반란을 조장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알겠네. 비용이 많이 발생할 텐데, 그걸 혼자 할 리 만무하지. 아카시에게 지시를 내린 상부는 일본 육군이겠지.”
김학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아카시 대좌와 분리주의·사회주의 정파들을 주목하라고 명령한 의문이 이제야 풀렸다.
‘정말 대단하시군. 황성에서 천리안이라도 갖고 계신 건가?’
김학우는 황제가 보이는 혜안에 감탄하다 못해 가끔씩 섬뜩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익문사를 제외하고도 정보의 근원이 무엇이기에…….’
물론 익문사를 제외하고도, 궁내부 경위원, 원수부 군사정보국, 내무부 공안국, 외무부 정치국 등의 정보기관이 있다. 그래도 대외정보 취득과 공작에 있어서 익문사를 따라올 기관은 없었다. 애초에 다른 기관은 익문사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데 황제는 익문사보다도 늘 한발 앞서 있었다. 김학우로서는 익문사를 제외하고도, 베일에 쌓인 비밀조직이 더 있으리라고 추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참서관. 스웨덴에서의 업무는 어땠나?”
“예, 노벨 가문의 지원 덕에 수월했습니다.”
이선은 1881년 이래, 러시아 석유산업을 지탱하는 바쿠 유전의 개발자인 노벨 가문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귀국 후에 러시아 제국이 하사한 공작 작위와 국적은 반환했지만, 석유회사 브라노벨의 이사직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황제 즉위 후에는 이사직을 동생 이강에게 넘겨 주긴 했지만, 이는 차명 계좌나 다름없었다.
브라노벨 지분의 5%를 갖고 있는 이선은 정기적으로 배당금을 받았다. 이선은 배당금을 사적으로 쓰지 않고, 브라노벨과 손잡고 러시아 석유산업과 군수산업에 재투자했다.
노벨 가문과 이선은 세대를 넘어 끈끈한 관계였다. 브라노벨의 3대 회장 임마누엘 노벨 3세는 이선의 러시아 대리인이었다.
모신나강이 대한제국군의 제식 소총이 될 수 있었던 건 니콜라이 2세의 호의 덕이기도 하지만, 브라노벨을 통한 산업계의 로비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1904년에 이르러, 이선은 러시아 자본을 서서히 빼내기 시작해, 주거래 은행도 러시아에서 스웨덴으로 변경했다.
“노벨 가문의 추천으로 스웨덴 엔스킬다 은행에 이체를 완료했습니다.”
스웨덴의 떠오르는 신흥 자본가인 발렌베리 가문의 스톡홀름 엔스킬다 은행(Stockholms Enskilda Bank, SEB)이 이선의 새로운 협력자가 되었다.
발렌베리 가문의 2대 당주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Knut Agathon Wallenberg)는, 당대 금융 중심지인 런던과 파리의 금융계 인맥이 두터워 해외 자금 조달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한제국 황제가 거액을 자신의 은행에 이체하고, 한국이 영국과 동맹을 맺자 발렌베리는 재빨리 기회로 파악했다. 런던과 파리의 자본을 서울에 연결하는 역할을 맡으면, 아직 스웨덴 국내 은행에 머물러있는 SEB의 국제적 영향력도 커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해관계가 일치한 이선과 발렌베리는 손을 잡았고, 발렌베리는 이선의 유럽 대리인이 되었다.
“좋아. 모두들 수고가 많았네. 나는 취합한 정보를 황성에 상주하겠네. 다들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되, 보안에 철저하도록.”
“예! 명을 받듭니다.”
요원들에게 보안 철저를 새삼 당부한 김학우는, 황제에게 보낼 비밀 전문을 작성했다.
비밀 전문을 받아든 이선은 화학비사법을 통해 전문을 해독했다.
“음, 다들 잘 하고 있군.”
이선은 일부러 발렌베리를 새로운 파트너로 선택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중립국인 스웨덴은 휘말리지 않을 터이니 자본도 안전할 것이고, 장차 세계적인 대자본으로 성장할 발렌베리의 잠재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러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아카시는 반란을 조장하기 위해 움직이는군.’
일본에서는 러일전쟁기 아카시의 배후 교란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아카시 대좌가 배후에서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으니, 혼자서 10개 사단의 역할을 했다.’는 평도 있다.
‘한번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볼까. 진짜 혁명을 일으킬 순 없겠지만.’
실상은 아카시가 혁명 조직들에게 이용당한 것에 가까웠다. 어디까지나 반(反) 차르 혁명가들에게 일본은 ‘적의 적은 아군’이었을 뿐이었다.
참모본부로부터 막대한 공작금을 받아 여러 혁명 조직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줬지만, 대부분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효과를 본 건 폴란드 봉기 정도였는데,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러시아 혁명은 차르의 정치적 무능, 참사와 패전으로 비롯된 자연발생적인 혁명이지, 배후 조종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과연 러일전쟁 없이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것인가? 과연 1차 세계대전 없이 1917년 러시아 대혁명이 일어났을 것인가?’
전시에 보인 차르 정권의 무능력과 국운을 건 전쟁의 패배라는 요소가 혁명을 앞당긴 건 분명하지만, 수 세기동안 누적된 러시아 사회의 모순이 근본적 요인이었다.
20세기에도 차르와 소수의 귀족·관료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부르주아지에게도 정치적 참여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인구의 절대다수인 노동자와 농민을 천시하고 학대하는 나라에서 아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면 무능력자이거나 시선이 왜곡된 사람이다.
러시아 혁명은 필연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1905년이나 1917년에 일어난 건 우연이었다.
그 시기를 앞당긴 건, 가장 중요한 시기에 왕좌에 앉아 있었던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무능력과 시대착오적인 정세 인식이었다.
노동자·농민 문제는 다른 차르라도 양보하지 않았겠지만, 니콜라이는 부르주아지의 정치 참여 욕구를 억누르고 소수민족에게 러시아화를 강요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부르주아지는 정치 집회를 조직해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을 외쳤고,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계급은 파업으로 맞서며 노동환경 개선과 사회개혁을 외쳤고, 인민주의의 영향을 받은 농민계급은 농촌 소요를 일으켜 토지개혁과 재분배를 외쳤고,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소수민족은 봉기를 일으켜 독립과 민족해방을 외쳤다.
1905년 1월, 차르 정권은 관료와 군대, 경찰의 강력한 지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집단의 지지를 잃는 순간이, 정권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