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81
– 62화에 계속 –
2부 62화 바르샤바 시민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율리우스력 9일)
실제 역사에서는 차르의 근위대가 겨울궁전 앞에서 시위대를 학살한 ‘피의 일요일’이 발생한 날이다.
러시아 정부와 오흐라나(공안질서수호국), 이선과 제국익문사가 신경을 쓰고 있는 곳도 단연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춥지만 모처럼 햇빛이 화창한 일요일, 수도에서 파업과 시위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로와 운하를 거닐며 주말을 만끽했다.
이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살롱에서는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모임이 열렸고, 일부 공장에서는 노동 쟁의가 발생했으나, 당국이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역사는 변화한 것처럼 보였다.
폴란드 바르샤바.
옛 폴란드 입헌왕국은 1863년 1월 봉기와 독립전쟁의 실패 이후, ‘폴란드’란 이름조차 사라지고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州)가 되었다. 폴란드의 수도였던 바르샤바는 이제 주도에 불과했다.
독립전쟁을 진압한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를 러시아의 일부로 규정하고, 독자성을 완전히 박탈했다. 1815년 러시아 완전 병합 후에도 존중되었던 폴란드의 헌법과 의회는 영구히 폐지되었다. 군인 출신인 러시아 총독이 폴란드를 통치했다.
알렉산드르 3세 즉위 후에는 러시아화가 더욱 강화되어, 공공기관과 학교에서 폴란드어 사용이 아예 금지되었다. 폴란드 역사와 언어에 대한 교육은 러시아 지배에 맞서는 불충(不忠)을 의미했다. 그러나 탄압과 강요는 오히려 더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폴란드인은 충성스러운 러시아 신민이 되든가, 거부하고 떠나든가 둘 중 하나다. 그조차 싫다면 죽음밖에 없다.」
러시아의 강압적인 통치와는 별개로, 폴란드의 산업은 성장일로였다. 러시아의 주된 교역대상인 중부유럽과 인접해 있고, 인구와 산물이 풍부한 폴란드에 집중적인 공업육성이 이뤄졌다. 러시아라는 광대한 배후시장에 무관세로 접근할 수 있는 폴란드 산업은 빠르게 발전했다. 폴란드 공업의 중심지로 떠오른 우치(Łódź)는 ‘폴란드의 맨체스터’라 불리며 영국과 비견될 정도였다.
「폴란드 독립과 사회 혁명을 모두 달성한다!」
20세기 초, 전 유럽에 바람이 불고 있는 사회주의에 더해 민족주의의 강렬한 영향을 받은 폴란드 노동계급은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전투적인 반정부 집단이었다.
전투적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해,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자로 ‘위장’했다. 대표적인 단체가 폴란드 사회당(PPS)이었다. 이들은 총파업을 촉구하고, 산하 무장조직을 이끌고 러시아 관료와 경찰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다.
경쟁자인 극좌파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SDKPiL)과 우파 폴란드 민족민주연맹(ND)에 앞서, 폴란드 사회당은 총파업을 주도했다.
1905년 1월 15일, 바르샤바와 우치에서 총파업이 선언되었다.
폴란드에서 파업이 잦았다지만, 1월 총파업 선언과 동시에 40만의 노동자가 파업에 동참했다.
총독부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성을 느꼈고, 군경에게 비상 대기령이 떨어졌다. 군인과 경찰은 긴장상태로 대기했다.
“노동 조건 개선! 10시간 노동! 임금 인상! 부당해고 철회! 폴란드의 정치적 자유! 헌법과 의회 복구! 폴란드어 교육 허용! 전제 정치 타도! 러시아 제국주의 타도!”
1월 22일은 공교롭게도 1863년 1월 봉기 4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사회당은 이날을 기해 바르샤바에서 대규모 집회를 조직했다.
시위대에는 폴란드 국기와 함께 ‘1794-1830-1863-1905’라는 깃발이 휘날렸다. 1794년 독립전쟁, 1830년 11월 봉기, 1863년 1월 봉기의 뒤를 잇는 투쟁이라는 상징적 의미였다.
집회 참가자는 노동자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노동계급만의 시위가 아니라, 범국민적 시위였다. 대학생과 중산층, 여성과 청소년들도 시위대에 합류했다. 러시아 제국에 대한 반감은 거의 모든 폴란드인이 공유하는 감정이었다.
총파업이라는 보고를 받은 러시아 정부는 진압을 논의했다.
“폴란드인들은 유대인과 함께 가장 위협적인 제국의 적입니다. 저들은 극렬 빨갱이 분리주의자입니다. 강력히 진압해야 합니다.”
“강경 진압은 여론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겠소? 국제사회의 비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데…….”
내무대신 플레베의 진압 건의에 니콜라이 2세는 고심했다. 차르는 사실 국민의 반발은 그다지 신경 안 했지만, 영국과 독일 등의 비난을 받는 게 더 걱정이었다. 동맹국인 프랑스가 폴란드에 동정적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1863년에도 그랬듯이, 초기에 강력히 진압하지 못하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전역에 봉기가 확산되어 전쟁이 되고 말 겁니다. 외국의 비난은 형식적인 것일 뿐이고, 어떠한 실효성도 없습니다. 그들은 식민지 분리운동을 탄압하지 않는답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됩니다. 제국 전역에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러시아인은 폴란드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겁니다. 반란에 단호함을 보인 제국 정부의 권위에 복종하게 되겠지요.”
“음, 알겠소. 제국 정부의 단호함을 보여 줍시다.”
차르는 결국 강경 진압을 선택했다. 단호한 조치가 혁명적 위기를 잠재우리라 믿고.
“페테르부르크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1월 9일(22일) 12시를 기해 바르샤바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소요를 일으켜 치안을 위협하는 폭도를 진압한다.”
프리비슬린스키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바르샤바 요소에 파견했다.
총독부 청사로 사용되는 왕궁에 시위대가 접근하면, 가차 없이 발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전제 정치 타도! 러시아 제국주의 타도!”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왕궁 앞 잠코비(Zamkowy) 광장까지 몰려들었다.
16세기말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기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Sigismund III Vasa)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대리석 기둥이 시위대를 내려 보았다. 지그문트의 재위기에 폴란드군은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고 차르를 포로로 잡은 일이 있었기에, 후대인들에게는 폴란드 영광의 상징이 된 국왕이었다.
「우리의 깃발을 용감히 들어 올리자.
대적들의 폭풍이 몰아친다 해도,
오늘날 사악한 힘이 억압한다 해도,
모두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선두에 선 학생 시위대가 깃발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바르샤바 시민(Warszawianka)≫이라는 민중가요였다. 바르샤바 요새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의 시에 노래를 붙인 곡이었다.
「아, 이것은 모든 인류의 깃발,
신성한 부름, 부활의 노래요
노동과 정의의 승리이며,
전 인류가 형제 되는 날이 밝아 오는 새벽이라.」
학생들에 이어 노동자들도 따라 불렀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시위에서 흔히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했지만, 이날만큼은 바르샤바 시민이 주역이었다.
「전진하라, 바르샤바여!
유혈의 싸움으로,
신성하고 정의로운 싸움으로,
전진, 전진하라, 바르샤바여!」
‘전진하라 바르샤바’라는 후렴구가 울려 퍼질 때는, 시위대의 입과 입으로 전해져 제창되었다. 부모를 따라 나온 아이들의 입에서도 노래가 흘러나왔다.
여자와 아이들이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1월 22일의 일요일의 시위는 평화적인 시위였다.
무장봉기를 획책하던 사회당과 전투적인 노동자들도 이날만큼은 폭력을 자제했다. 이들에게는 독립투쟁의 신화가 된 1월 봉기 42주년에 ‘전 인민의 단결’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러시아 당국에 과시하는 게 더 중요했다.
“시위대는 들으라! 너희들은 허가받지 않은 불법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금일 12시를 기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모든 집회는 금지된다. 시위대는 즉각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여기서 해산한다면 불문에 붙이겠다.”
무장한 병사 3천 명과 카자크 기병대가 왕궁 앞을 지키고 있었다. 폴란드인 헌병 대위가 폴란드어로 해산 명령을 외치자, 오히려 분노에 불에 붙인 셈이 되었다.
“선조와 동포에게 부끄럽지도 않으냐, 러시아의 개새끼야!”
“너희야말로 왕궁에서 물러가라! 폴란드는 폴란드인이 통치해야 한다!”
총구를 겨눈 군대 앞에서도 분노를 토해 내는 시위대를 보며 군인이 오히려 더 당황했다.
“제기랄! 해산 명령에 응하지 않고 선을 넘으면 발포하겠다!”
“무장하지 않은 인민의 가슴에 총을 쏠 생각이냐? 너희 부모, 형제, 아내, 자식에게 부럽지도 않느냐?”
시위대는 선두를 시작으로 한 발짝씩, 군대가 정한 선을 넘었다. 용기백배한 시위대는 멈추지 않고 행진을 계속했다.
“우리는 충분히 경고했다. 발포하라.”
“보시다시피 저들은 비무장한 시민입니다. 여자와 아이들도 보입니다. 정녕 발포해야 합니까?”
시위대에게 통역을 하던 폴란드인 대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러시아의 개라는 욕을 먹기는 했어도, 그 역시 동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싶지는 않았다.
“계엄령하에서 해산을 거부하고 불법 집회를 지속하며 총독부를 위협하는 자들은 시민이 아니라 폭도들이다! 명령대로 진압해!”
러시아인 헌병 대령이 버럭 화를 냈다. 대부분 러시아 출신인 헌병들은 발포 명령을 따랐다.
“발포!”
“사격 개시!”
탕! 탕! 탕! 타다다다당!
총알이 어지러이 시위대를 향해 쏟아졌다.
선두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예상치 못한 발포에 시위대는 비명을 지르며 대열에서 이탈했다. 잠코비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야 말았다.
“카자크, 돌격!”
“부대, 발도!”
빰빠라바바밤-!
나팔 소리와 함께 카자크 기병대가 전열이 흐트러진 시위대를 향해 돌격했다.
시위 진압용으로 투입되는 카자크 기병대는 보통 채찍만을 들고 있지만, 이날은 사브르를 빼 들었다.
기병대는 보병대를 향해 돌격하듯, 전방으로 달려가며 칼을 휘둘렀다.
“카자크다, 도망쳐!”
“으아아악!”
“꺄아아악!”
“이 개새끼들!”
한번 피맛을 본 진압군은 거침없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가급적 여자와 아이를 상대로 총칼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눈먼 총알이 성별과 나이를 구분하여 날아갈 리가 만무했다.
겨울인데도 유독 그날따라 맑은 날에 떠오른 태양은 광장을 내리쬐고 있었다.
지그문트 3세의 동상이 내려 보고 있는 잠코비 광장에는, 수백 명의 시신과 수천 명의 부상자가 쓰러져 있었다.
화창한 겨울날에 벌어진 끔찍한 참극이었다.
“바르샤바의 폭도들을 진압했습니다.”
“사상자는?”
“공식 집계를 해야 알겠습니다만, 현재까지는 대략 사망자 100여 명에 부상자 20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총독부는 ‘폭도 진압’이 성공했음을 페테르부르크에 보고했다. 이들이 보고한 사상자 수도 실제보다 훨씬 적었다.
“유감스러운 일이긴 합니다만, 필요불가결한 일이었습니다. 수만 명이 죽은 1863년 반란에 비하면, 100여 명이 죽어 대규모 반란이 예방된다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내무대신 플레베가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보고를 듣고 있던 국무회의 의장 비테는 기가 막혔다.
“폐하, 현재의 정세는 1863년과 같지 않습니다. 강경 진압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붙인 꼴이나 다름없습니다.”
“의장, 폴란드에서 반란은 늘 있었소. 1794년, 1830년, 1863년, 그리고 오늘까지! 저들은 언제든 러시아에 반역할 궁리만 하고 있소. 조기에 단호히 진압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저 때처럼 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반란에 휩싸이게 될 거요!”
니콜라이 2세가 강경 진압을 옹호했다. 소심한 성격의 니콜라이는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보고에 마음이 걸리긴 했지만, 더 큰 반란을 막기 위해 폭도는 단호히 진압해야 한다는 내무대신의 주장에 동의했다.
“오늘날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발트와 핀란드를 넘어, 러시아까지 반란이 전이될 수 있습니다!”
“대체 그 무슨 말이오? 폴란드에서 늘 반란은 있었지만, 다른 지역이 동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소!”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그때는 러시아에 노동자라 불릴 만한 계급이 거의 없었지요. 지금은 가득합니다. 저들이 뭐라고 외치는지 아십니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저들에게는 국경이 없습니다. 분명히 반란은 이곳 페테르부르크까지 미칠 것입니다.”
비테의 우려에 플레베가 코웃음을 쳤다.
“폐하, 물론 각 도시별로 산발적인 시위는 있으리라 추정합니다. 하지만 신이 국내 치안을 책임지는 내무대신으로 있는 이상, 결코 반란이 수도에까지 확대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음, 짐은 경을 믿도록 하지.”
비테는 더 경고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차르에게 예의를 갖추고 물러나긴 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비서관에게 말했다.
“앞으로가 걱정일세. 대규모 반란이 러시아로 전이될 수 있어. 선제적으로 개혁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데. 일단 저 빌어먹을 내무대신부터 경질해야 해.”
“폴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난 건 종종 있었던 일인데, 설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설마 별일이야 있겠는가, 그런 태도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지. 군대의 지지만 확고히 유지된다면 제국이 버티긴 하겠지만…….”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제외하면, 러시아에서 아직까지 군대가 동요하는 일은 없었지만, 민심의 이반에 동조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강경 진압으로 혁명적 위기가 잠재워지기를 바랐다면, 차르와 당국의 어처구니없는 오산이었다.
“우리는 잠자고 있던 괴물을 깨운 거야. 혁명이라는 괴물을.”
비테는 신음을 흘렸다. 혁명이라는 이름의 거인이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