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86
– 67화에 계속 –
2부 67화 예방전쟁(豫防戰爭)
광무 9년 2월 6일 월요일.
총리대신 김옥균과 외무대신 서광범이 경운궁으로 황급히 알현을 요청했다.
“무슨 일이오?”
“주한 일본 공사가 외무부를 찾아 특파대사의 방한을 허가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흠. 특파대사로 누가 온다고 하오?”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라고 합니다.”
이선은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일본 정치인 중의 1인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을 요청했다고?’
“이토는 다리를 잃어 거동도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이가 방한을 요청했다는 건…….”
“공식적으로는 동맹국 방문 요청으로, 특파대사 방일의 답례라고 합니다만…….”
“이 중대한 시국에 뜬금없이 찾아오려는 건 아니겠지.”
“예, 근래 일본에서 일고 있는 개전에 대한 논의가 아닐련지요.”
“이토는 개전 반대파로 알고 있소. 직접 방한을 한다는 건, 외교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걸지도.”
하지만 단순한 외교적 논의라면 외무성이 맡지, 이토쯤 되는 거물이 직접 올 것 같진 않았다.
‘아니면 일본이 정말 전쟁을 결심하고 이토가 총대를 멘 건가.’
이선의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주일특파대사 박영효가 비밀 전문을 보내온 것이다.
「일본 정부, 2월 6일 자로 도쿄 일대에 계엄령 선포. 표면적인 이유는 치안 유지를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지만, 군부는 개전을 결의한 것으로 추정. 원로의 의견은 갈리고 있음. 이토 후작이 방한을 결정. 개전과 관련된 외교적 논의로 추정.」
“결국 이렇게 되는군. 일단 방한은 허가한다고 하시오. 뭐라고 하는지 들어는 봐야지. 속히 영국 공사에게도 문의하시오. 분명히 일본은 영국과도 접촉을 하고 있을 터.”
“예, 폐하!”
이선은 외무부에 훈령을 내리고, 다음 대책을 준비했다.
정확한 정보와 냉철한 판단이 필요했다. 한 번의 판단이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었다.
* * *
독일, 베를린. 프로이센 육군참모본부.
1810년 프로이센 개혁의 일환으로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와 그나이제나우(Gneisenau)에 의해 창설된 참모본부는 세계 군대의 모범이 되었다. 재탄생한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의 패권을 물리쳤고, 1864~71년에 덴마크·오스트리아·프랑스를 상대로 잇달아 승리를 거두며 독일 제국의 산파 역할을 했다. 독일 제국은 철과 피로써 세워진 나라였다.
군제개혁에 나선 국가들은 프로이센을 모델로 신식 군대를 창설했고, 오스만·루마니아·불가리아·일본 등으로 프로이센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었다.
대한제국도 프로이센 모델을 받아들인 나라였다. 지난 15년간, 프로이센 군사고문단이 한국을 찾아 군제개혁을 지도했다.
주한 군사고문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작년 12월 3년 계약을 마치고 독일로 귀국했다.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리오, 소령. 군사고문단은 이 나라 군대의 발전을 위하여 큰 기여를 했소.”
“황공하옵니다.”
팔켄하인은 지난 3년간 열성을 다해 한국군의 근대화에 힘을 보탰다. 육군대학을 통해 양성된 ‘팔켄하인의 제자들’만 수십 명이었다. 이들은 대한제국군의 핵심 근간이 되는 장교였다.
보다 중요한 건, 팔켄하인이 추구하는 ‘인민전쟁(Volkskrieg)’ 교리가 대한제국군의 핵심 교리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었다.
“짐은 소령에게 대훈위 이화대수장을 수여해 고문단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오.”
팔켄하인에게는 대한제국 3번째 훈격인 이화대수장이 수여되고, 고문관 5인에게는 태극장이 수여되었다. 퇴직금 명목의 넉넉한 금일봉도 지급되었다.
“비록 지금은 헤어지게 되었지만,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겠소. 어쩌면 장차 귀관이 양성한 장교들과 함께 전장에서 만날지도. 그래도 우리가 맺은 우의는 영원하길 바랍니다.”
덕담이지만, 뼈 있는 말이었다.
한국이 영국과 동맹을 맺게 된 이상, 독일과의 관계는 장기적으로 악화될 여지가 있었다. 한국과 독일은 여전히 우방으로, 특히 한국군은 ‘극동의 프로이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영독관계가 악화되면 동맹국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독일로 귀국한 팔켄하인은, 중령으로 진급하여 육군참모본부 제4국(Oberquartiermeister IV) 1부에 배치되었다. 4국은 동부 담당이었고, 그중에서도 1부는 러시아 전담부서였다.
4국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팔켄하인은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 상급대장의 호출을 받았다.
팔켄하인은 놀랐다. 참모본부의 최고위 참모총장이 직접 자신을 부르다니. 참모총장 슐리펜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도 참전하고, 참모총장에 10년 넘게 재직 중인 역전의 노장이었다.
현재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실제 역사에서 팔켄하인은 슐리펜 후임자의 후임자로, 10년 뒤 차차기(次次期) 참모총장이었다.
“팔켄하인 중령입니다, 참모총장 각하!”
“음.”
서류를 읽어 보던 슐리펜이 냉정한 눈빛으로 방문자를 쳐다보았다. 팔켄하인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귀관은 중국과 한국에서 오래 근무했군. 러시아 극동군에 대한 귀관의 보고문은 잘 읽었네. 최근에 귀국도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했다지. 만약 극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단기간에 병력 수송이 얼마나 가능할 것 같나?”
독일 참모본부는 전시 철도 이용을 매우 중시해 왔다. 동원령과 운송을 담당하는 참모본부 산하 철도국은 핵심 부서였다.
시베리아 철도는 난공사 구간인 바이칼 구간을 제외하면 완공되어 운행되었다. 바이칼 구간만 페리를 이용했고, 겨울철에는 얼어붙은 호수에 임시철도를 부설하여 지나갈 수 있었다.
팔켄하인은 1905년 1월 1일을 기해 공식 개통을 선언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한 최초의 독일인 중 한 명이었다.
“시베리아 철도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대사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여기는 일본은 굉장한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공포입니다.”
“어째서 그렇지?”
“장기적으로 볼 때,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러시아의 극동 지배력 강화와 경제 성장에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군사적 이용으로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여기서부터 어조에 힘을 실었다. 군인에게 중요한 건 군사적 가치였다.
“무엇보다 단선이기 때문에 속도가 느립니다. 반대쪽에서 열차가 오면 철로에서 빠져 대기해야 하지요. 자연히 노선 용량이 제한되고 운송 시간이 늘어납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극도의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신병과 무기를 보내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부상병과 교체 병력을 보내야하는데, 독일처럼 완벽한 일정표가 짜여 진다면 모를까, 전시에는 결국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선화되기 전까지는 고질적인 문제로 남을 것입니다.”
팔켄하인의 냉철한 분석에, 슐리펜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귀관은 최근까지 극동에서 근무했지. 만약 일본군이 극동의 러시아군을 공격한다면, 전황을 어떻게 예측하나?”
“초기에는 일본군이 우세를 점할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은 평시 20만, 전시 60만에서 80만을 동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러시아 극동군의 허약한 전력, 지휘권의 난맥상, 시베리아 철도의 운송 부족으로 인한 긴 병참선. 일본군은 필히 단기전에 의한 승리를 노릴 것입니다. 극동 삼국전쟁(청조일전쟁)의 선례를 따르려 할 겁니다.”
“하지만 결코 전쟁이란 건 계획대로 되지 않지.”
“그렇습니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러시아가 유리합니다. 일본은 장기전을 감당할 국력이 없습니다. 유럽에 주둔하는 러시아군이 극동으로 재배치된다면, 일본은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장기전으로 가는 게 가장 좋지. 러시아가 극동의 진흙탕에 오래 빠져 있을수록 좋아.”
슐리펜이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한국은 어떤가? 일본과 동맹이지 않나.”
“한국이 일본과 맺은 조약은 상호방위조약이라, 일본이 선제공격할 시에는 참전할 의무가 사라집니다.”
“독일이 이탈리아랑 맺은 동맹과 흡사하지. 한국이 딱 이탈리아의 위치군.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의 일원이지만, 프랑스와는 전쟁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이탈리아는 공식적으로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체결했지만, 1900년 프랑스와 밀약을 맺어 독일-프랑스 전쟁 발발 시 중립을 약속했다. 독일은 이탈리아가 노불동맹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만 지켜 줘도 다행이라는 입장이었다.
“귀관이 얼마 전까지 군사고문단으로 있었으니 황제와 군부의 심중도 잘 알 것 같은데?”
“황제는 젊지만 현명하고 신중한 인물입니다. 군부 핵심인 참모총장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프로이센 전쟁대학을 졸업한 유학파로, 일본에 호의적이고 러시아를 주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일 뿐, 황제에게 절대 충성합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황제가 확실히 군부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역 사건 이후에는 군부 내 친일적 인사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습니다.”
팔켄하인은 이선 및 박유굉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으므로, 황제와 정부, 군부의 역학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한국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인가? 숫자상으로는 1905년 현재 8개 사단 10만 8천 명이라고 나오는데, 믿을 만한 수치인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되나?”
“방어전에 한정된다면, 한국군은 침략자를 무찌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관이 군사고문단장으로 중점을 둔 사업도 방어전에 있습니다. 평시 11만, 전시 30만이 동원 가능합니다만, 한국은 유사시 비정규 게릴라까지 동원하여 침략자를 격퇴하고자 합니다. 한국을 공격하는 나라는, 수십만의 병력과 수백만의 적대적인 국민을 전국에서 상대하게 될 겁니다.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처럼 말이지요. 이미 한국은 300년 전에 그런 선례가 있습니다.”
팔켄하인의 호언장담에 슐리펜은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 같은 소국에서 그럴 병참 능력이 되나? 게릴라들에게 무기나 쥐어 줄 수 있나?”
“물론 상비군만 근대적 장비를 갖춘 군대라 할 수 있고, 국민군 동원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공업력과 경제력을 생각할 때, 장기전을 치를 능력도 안 됩니다. 하지만 황제와 군부는 인민전쟁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국력 차이로 끝내 패할지라도, 침략자도 출혈과다로 함께 죽게 만들겠다는 각오입니다.”
“미친놈들이군.”
슐리펜은 한마디로 요약했다. 프로이센 전쟁광이 봐도 놀라운 전략이었다. 팔켄하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공세는?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한다면, 한국도 만주 점령을 위해 달려들 가능성이 얼마나 되나?”
“한국은 만주를 되찾아야 할 조상의 고토로 여깁니다. 한국과 이탈리아가 흡사하다고 하신 것처럼,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실지회복주의자(Irredentismo)들과 비슷한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황제와 정치인들은 모험가들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국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군은 외지에서 공세를 벌일 능력이 안 됩니다. 러시아가 먼저 선제공격하지 않는 이상, 공세에 동참하지 않을 겁니다.”
팔켄하인은 이선의 이성적인 판단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이 영국 및 일본과 맺은 상호방위조약은 최선의 한 수였다. 비록 독일 입장에서는 떨떠름한 조약이었지만.
“황제한테 폴란드 애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폴란드 민족주의자로 정치범이었다지. 바르샤바 학살로 마음이 움직였을 가능성은 없나?”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웃음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냉정한 프로이센 군인 그 자체인 슐리펜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니 팔켄하인은 당혹스러웠다.
“그렇겠지. 하지만 바르샤바 학살이 전쟁 동기를 준 건 분명하네. 한국은 아니고 일본에.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바르샤바 피의 일요일에 이어 혼란이 연쇄적으로 벌어지자, 독일은 재빨리 기회를 포착했다.
카이저의 노력과 달리,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끊을 생각은 없다. 결국 러시아는 앞으로 독일의 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국력을 최대한 약화시켜야 했다.
“귀관의 보고는 잘 들었네. 필요하면 또 부르도록 하지. 아마 곧 다시 부르게 될 것 같군.”
“예, 각하!”
팔켄하인은 거수경례를 하고, 프로이센 군인 특유의 절도 있는 자세로 물러났다.
참모총장 집무실에서 물러나면서, 팔켄하인은 대화의 행간을 다시 떠올렸다.
슐리펜은 말을 아꼈지만, 참모총장이 원하는 게 보였다.
‘전쟁이 머지않았군.’
슐리펜은 서류 더미를 다시 살피고 있었다. 그는 고도로 정밀한 전쟁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카이저 빌헬름 2세는 근시일 내로 프랑스가 보호령으로 삼으려 하는 모로코를 방문해, 모로코의 독립보장을 천명할 것이다.
당연히 프랑스는 반발할 것이고, 영국은 프랑스 편을 들 것이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간에는 우호협약만 있을 뿐, 아직 군사적 동맹은 없다. 프랑스의 군사동맹은 러시아뿐이다.
영불협상 체결은 독일에 포위망이라는 공포를 주었다. 만약 영불협상과 노불동맹이 결합되면 대독 포위망이 완성되는 셈이었다. 어떻게든 영국과 러시아의 연결 고리를 끊어야 했다.
‘해결책은 예방전쟁뿐이다.’
슐리펜은 극비리에 예방전쟁(preventive war)을 계획했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 러시아의 관심은 극동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유럽에 배치한 병력은 상당수가 만주로 갈 것이다. 단선인 시베리아 철도는 병력 배치의 난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가 전쟁에 맞물려 계속 이어진다면, 러시아는 유럽의 분쟁에 끼어들 능력이 줄어든다.
비록 카이저가 보이는 전략적 허세와 달리 그는 전쟁을 원치 않았지만, 군부는 지금 프랑스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장차 노불동맹과 영불협상이 연결되어 포위망이 완성되면 전쟁의 때를 놓칠 것이다.
첫 단추를 극동에서 꿰어야 했다. 러시아를 어떻게든 극동의 수렁에 빠트려야 한다.
프로이센은 전쟁을 위해 태어난 나라다.
극동에서 터지는 포성이, 유럽에서도 새로운 전쟁을 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