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9
– 39화에 계속 –
39화 재벌의 꿈
“어서 오십시오. 초대에 응해 줘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이선은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유수포프 공작과 힘차게 악수를 하였다.
“동양의 고귀한 혈통이자, 황제 폐하의 구원자이신 이선 공께서 우리 가문을 찾아 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공작은 아주 호의적인 어조로 말했다.
“본래 유수포프 가문도 아시아에서 왔는데, 알고 계십니까?”
“오, 그렇습니까?”
본래 유수포프 가문의 뿌리는 14세기 노가이(Nogay) 칸으로, 크림 칸국의 왕족이었다. 즉 몽골계 귀족으로 칭기즈칸의 후예란 의미였다.
17세기에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 귀족 사회에 편입된 이후 러시아를 대표하는 명문가가 되었다.
공작의 설명에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 귀족들 중에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계가 많다더니.’
완전히 러시아에 동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뿌리는 아시아에 있었기에 유수포프 가문은 동양 애호적인 취미도 있었다. 하물며 황제의 구원자이자 사교계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조선 왕자라면, 유수포프 공작 입장에서도 환영의 대상이었다.
“이미 콘스탄틴 대공 전하의 궁전에서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만, 제가 다시 소개시켜 드리지요. 장녀 지나이다, 차녀 타티야나입니다.”
“지나이다 유수포바입니다.”
“타티야나 유수포바입니다.”
“반갑습니다, 숙녀 여러분.”
소개를 마친 이선과 유수포프 일가는 함께 오찬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곁들인 홍차까지, 러시아 최고 갑부로 유명한 유수포프 가문답게 정찬(正餐)이 황실에 밀리지 않았다.
이선은 공작가의 사람들과 이런 저런 환담을 나누었다. 교양 있고 사교적인 걸로 유명한 지나이다가 주로 이선의 말 상대가 되었는데, 그녀 역시 이선의 교양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그럼 공작께서는 조선 국왕 폐하의 큰아들이란 말씀이신지요?”
가급적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으려 했던 이선이지만, 황제를 구한 이후에는 더 이상 거리끼지 않았다.
“예, 러시아에선 편의상 ‘공작(князь)’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만, 제 본래 신분은 ‘왕자(принц)’가 맞습니다.”
“조선 국왕 폐하의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에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찌하여 왕의 장남이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러시아에 오셨는지?”
“저는 서자입니다. 단, 동양은 서양과 달리 서자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적자가 우선시 되는 건 같지요. 왕세자 저하와 왕비 마마께 누가 되고 싶지 않아 떠나온 것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왕자께서 조선에 있는 게 왜 세자와 왕비께 누가 되는지 여쭤봐도……?”
이선은 조선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지요.”
그 말에 공작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놀라워했다. 이선이 인용한 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었던 것이다. 지나이다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왕자께서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 보셨군요?”
안나 카레니나가 출판된 게 1877년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출판과 동시에 전 러시아에 상당한 충격을 일으켰고, 지식층의 필독서가 되었다. 1881년에도 여전히 최고의 인기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였다.
“예, 번역본으로 읽어 보았습니다. 『전쟁과 평화』도 읽어봤죠.”
“동양에서도 톨스토이가 유명한가요?”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유명해질 겁니다.”
19세기 말 러시아는 훗날 ‘은의 세기’라고 불릴 정도로 예술이 꽃핀 시대였다.
작가로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체호프. 음악가로는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무소륵스키. 화가로는 레핀, 베레시차긴.
‘훗날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가들이지. 시간만 넉넉하면 이 사람들을 다 만나 보고 싶다.’
이선우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있었고, 이는 이선의 지식이 되어 자연스럽게 러시아인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공작가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선의 폭넓은 지식과 교양에 감탄했다.
“혹시 조선 왕족들은 결혼 적령기가 어찌 됩니까?”
이야기를 주로 듣는 쪽이든 유수포프 공작이 갑자기 물었다.
“조선은 조혼 풍습이 있어서 결혼을 빨리합니다. 특히 왕족은 더 빠릅니다. 보통 10대 초반에서 중반에 결혼하지요.”
“그럼 왕자께서도 이미 결혼을 하셨는지?”
“아뇨, 그랬다면 제가 러시아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개인적으로 저는 조혼에 반대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선과 그 맞은편에 앉은 차녀 타티야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왕자께서 보시기에 제 딸들은 어떻습니까?”
이선은 예의상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정말 아름답고 현명하고 고귀하신 분들입니다.”
“하하, 바로 보셨습니다. 유수포프 가문의 자랑이지요.”
‘혹시, 이거 설마…….’
이선은 문득 생각이 미치는 바가 있었다. 이선도 유수포프 공작가를 방문하기 전, 가문의 현황에 대해 조사했었다.
니콜라이 유수포프 공작은 아들이 있었지만 유년기에 죽었고, 장성한 자식은 오직 딸 둘뿐이었다. 막대한 자산을 보유한 공작 가문의 추정 계승자가 된 지나이다는 러시아, 아니 유럽 전체에서 손꼽는 신붓감이 된 것이다.
공작은 이왕이면 사윗감으로 왕족을 원했다. 황제의 처조카로, 러시아 덕에 불가리아 대공으로 선출된 알렉산더 폰 바텐베르크가 지나이다 공녀에게 열렬히 구애했다.
결과적으로 1880년의 황제 암살을 막았던, 알렉산더 대공의 겨울 궁전 지각 이후 알렉산더는 지나이다에게 푹 빠져 버렸다.
하지만 지나이다는 왕좌보다는 사랑을 원했고, 정략결혼을 원치 않았다.
공작은 딸이 불가리아 대공과 결혼하길 원했지만, 바로 대공을 환영하는 파티에서 만난 황실 근위기병대의 장교와 사랑에 빠진 상황이었다. 지나이다는 결국 아버지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공작은 지나이다의 선택에 몹시 화를 냈지만, 이미 딸의 마음은 떠난 뒤였다. 똑똑하고 주체적인 삶을 원하는 장녀에게 억지 정략결혼을 강요할 수 없었다.
왕족 사위, 이왕이면 국왕이 될 사위를 얻겠다는 공작의 야망은 끝나지 않았다.
가장 좋은 건 유럽 왕실과 통혼하는 것이었다. 황제의 막내아들인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의 혼인도 추진해 봤지만, 황족은 외국 왕족하고 결혼하는 게 법도라 그들에겐 유수포프 공작가조차도 격에 떨어졌다.
그래서 신생 국가인 불가리아 대공을 눈여겨본 것인데, 지나이다 쪽이 걷어찼다.
대신 공작은 막 15살이 된 차녀에게 눈을 돌렸다. 타티야나는 언니에 비해 훨씬 순종적이었고, 아버지의 말을 잘 따랐다.
근데 때마침 동양에서 온 왕자, 이선이 나타났다. 황제의 구원자가 되고,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총아가 되자 공작의 마음도 동했다.
불가리아 대공과 조선 왕자는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황제 암살을 막았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동양인에 이교도인 게 좀 아쉽지만, 그거야 폐하께서 귀화와 개종을 권했다니 해결될 문제고. 따지고 보면 우리 가문도 그 뿌리는 아시아인데 안 될 것도 없지.’
마침 이선은 타티야나와 나이도 비슷했다. 그래서 이선을 초대해 사람됨을 살펴본 것인데, 나이에 비해 교양이 풍부하고 진중했다.
‘역시 타고난 왕자는 다르군. 이 소년이 앞으로 조선 국왕이 되면 내 딸은 왕비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조선은 잘 모르는 나라지만, 동양의 군주들은 권력이 강하지. 조선 국왕이 못 돼도 황제 폐하의 총애를 얻는 소년이니, 나쁠 건 없다.’
유수포프 공작은 노골적으로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차녀 타티야나에게 계속 이선과의 대화를 유도했다.
“얘야, 왕자께 묻고 싶고 싶은 게 없느냐? 너 왕자님과의 만남을 고대하지 않았니?”
“아, 아버지……. 와, 왕자님, 그, 그게 저…….”
타티야나는 수줍어하면서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이선은 친절하게 응대해 주긴 했지만, 눈치가 빠른 그는 공작의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불가리아 대공 대신 나인가?’
이선은 여전히 긴가민가했다.
‘에이, 설마. 그래도 불가리아 대공은 유럽 왕족에 기독교 군주인데 난 동양인에 이교도잖아. 아니지, 실제 역사에서 어차피 곧 대공에서 폐위되니 내 쪽이 더 낫겠군.’
이선은 맞은편에 앉은 타티야나를 쳐다보았다.
‘나이는 15세. 어리지만 언니를 닮아 예쁘고……. 근데 지나이다는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의 어머니라 알겠는데, 둘째 딸도 있었나? 왜 역사에 남지 못했지? 하긴 뭐, 내가 그런 것까지 어찌 알겠나.’
이선은 머리를 굴렸다.
‘유수포프 공작가는 러시아에서 제일가는 부호 가문이지. 당장 이 궁전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이런 영지가 전 러시아에 깔려 있다니. 저쪽에서 날 둘째 사윗감으로 원하면 내 입장에서도 좋은 거 아닌가? 장녀에게 재산을 다 몰아주지 않을 거고 분할 상속 될 터이니.’
이선은 잠시 망상에 빠졌다.
‘장인이 돈이 너무 많다. 재벌가 데릴사위 인생 역전. 엥? 이거 완전 소설 속 이야기 아니냐?’
행복한 상상을 하던 이선은, 자신에게 곧 정색했다.
‘……나 자신도 왕자잖아.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일국의 왕자지. 이미 황제 암살을 막아 내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린 상황인데, 일찌감치 결혼으로 소모할 필요가 없지.’
이선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지금은 결혼할 때가 아니다. 사업의 시기지. 재벌의 사위가 되는 것보다 내 스스로 재벌이 되는 걸 목표로 해야지.’
그때, 집사가 공작을 찾아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공작 각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누구신가?”
“루트비히 노벨 남작이십니다.”
순간 이선의 귀가 쫑긋 뜨였다.
‘노벨? 그 노벨 가문이란 말이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게.”
“사업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하셔서…….”
“보다시피 난 귀빈을 맞이하고 있지 않나.”
그때 이선이 끼어들었다.
“전 좋습니다. 공작께서 괜찮으시다면 노벨 남작을 이곳으로 모셨으면 합니다. 저도 남작과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그럼 노벨 남작을 모시고 오게.”
잠시 후,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공작님. 아름다우신 영애분들. 그리고…….”
유수포프 공작이 루트비히 노벨에게 이선을 소개했다.
“남작도 들었지요? 조선에서 온 이선 왕자이시오.”
“저는 바쿠에 있다가 며칠 전에 막 들어왔습니다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의 구원자시라지요.”
“저도 노벨 가문의 명성은 잘 알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가 잘 아는 건 알프레드 노벨 쪽이지만, 그 형 쪽도 보통 사람은 아니지.’
루트비히(Ludvig), 로베르트(Robert), 그리고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이자 노벨상으로 유명한 셋째 알프레드 외에도, 첫째 로베르트와 둘째 루트비히도 유명한 발명가이자 사업가였다.
“저를 알아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군요. 더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만, 먼저 유수포프 공작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괜찮으시겠습니까, 공작님?”
“예나 지금이나 남작은 성격이 급하군. 먼저 식사라도 하지 그러시오?”
유수포프 공작은 이선과의 대화가 끊긴 것에 약간의 불편함을 표시했지만, 천성이 공학자이자 발명가인 노벨은 둔감했다.
“공작 각하, 본래 저와 오늘 약속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시간 맞춰 온 것입니다.”
노벨의 잘못은 아니었다. 본래 유수포프와 노벨 간의 약속이 있었는데, 갑자기 이선과의 약속이 추가된 것이었다.
그런데 유수포프는 노벨에게 약속 지연을 통보하지 않았고, 노벨은 이를 모른 채 제시간에 온 것이었다.
“아, 그랬었지. 근데 남작, 우리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사이고, 동양에서 온 손님을 모실 시간은 흔치 않소.”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괜찮으시면 두 분이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두 분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선은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루트비히 노벨이 하는 말이 궁금했다.
“뭐, 왕자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니…….”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벨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석유 산업의 미래는 매우 유망합니다. 제가 이번에 바쿠에 다녀오니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카스피해와 바쿠 유전은 향후 세계의 석유 산업을 선도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또한 이는 러시아 제국의 재정에도 크나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노벨은 지도를 꺼내 바쿠 유전을 가리켰다.
“러시아 최고의 부호이신 공작께서 우리 회사에 투자를 해 주신다면, 러시아 제국과 유수포프 가문, 우리 회사 모두에 이익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노벨의 말은 유수포프 공작을 향해 있었지만, 그 확신은 이선이 갖게 되었다.
이선은 노벨의 말처럼 석유 산업이, 바쿠 유전이, 20세기를 대표하는 부(富)가 되리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역시 여기 오길 잘했다.’
“노벨 남작님.”
이선은 노벨의 말이 멈추자 손을 들었다.
“괜찮으시면, 저도 투자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