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90
– 71화에 계속 –
2부 71화 전쟁 협의회
2월 11일 오후, 주한 일본공사관.
이날은 공교롭게도 일본의 소위 ‘기원절(紀元節)’로, 일본이 건국되었음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천황의 주관 하에 기원절 행사가 열리고, 해외에서도 재외공관이 행사를 주재했다. 대한제국에서는 개국기원절이 비슷한 기능을 했다.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외무부 관리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공사관에 초대해서 축연을 개최했으나, 겉으로는 웃는 것과 달리 마음은 초조했다.
‘어전회의 진행은 어찌 되고 있는 거지?’
그때,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가까이 다가와 건배를 청했다.
“일본 정계의 원로이신 후작께서 직접 한국까지 오시다니 별일입니다. 더군다나 몸도 편치 않으시면서.”
“시국이 험난하니, 동양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몸소 나섰습니다.”
이토의 답변에 파블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는 이토를 대러 협상파, 온건파로 인식했다. 이토가 지금까지 줄곧 그 입장에 섰던 건 사실이고, 니콜라이 2세도 양국 우호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하사한 바 있었다.
일본의 전쟁 분위기가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토가 방한했다는 건 전쟁보다는 한국을 통한 평화 중재 쪽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이토는, 본의와 다르게 러시아 공격이라는 목표를 갖고 한국을 찾은 것이었다.
“동양 평화를 위해 건배합시다.”
“동양 평화를 위하여!”
사실 이토가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속내가 있었다.
본래 일본 군부의 전쟁 목표는 이랬다.
가라후토(사할린)할양, 연해주를 러시아에서 분리하여 자치령 설립, 여순 조차, 동청철도 운영권, 만주 세력권 확보, 태평양 함대 군함 인도, 전쟁 배상금 지불.
‘말이 되나? 얼마나 크게 이겨야 달성할 수 있는 거냐?’
전쟁에서도 이길까 말까 한데, 이겨도 러시아가 납득할 수 없는 요구라고 보았다.
이는 파벌마다 요구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었다. 육군은 여순 조차와 연해주 분리를 원했고, 해군은 사할린 할양과 군함 인도를 원했다. 정부는 동청철도 운영권과 전쟁 배상금 지불을 원했다.
‘이걸 달성하려면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라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까지 함락시켜야겠군.’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목표였다. 군부의 목표대로라면, 이겨도 러시아뿐만 아니라 한국과 청국과도 대립을 이어 나가야 했다.
이토는 자신의 외교적 재량으로 명분과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선에서 조율하려 했다.
그 첫 목표가 한국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청국도 끌어들이고, 영국과 미국의 지지도 얻어야 했다.
“총리대신께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만찬이 끝나갈 무렵, 김옥균이 일본 공사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원절 축연에 전례 없이 외무대신도 아니고 총리가 직접 나타났다는 사실에 이토는 반가웠다.
김옥균은 여러 외교관과 인사를 한 다음, 이토에게 유창한 일본어로 축하했다.
“각하, 귀국의 국경일을 맞이하여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귀국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께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라고 하셔서, 제가 직접 공사관을 찾았습니다.”
김옥균의 말에 이토가 바로 반색을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무어라고 하십니까?”
“대한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준수할 것입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경운궁으로 입궐해서 하시지요. 방한에 동행한 인사들과 함께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각하. 기원절에 훌륭한 선물이 되었군요!”
“허허, 별말씀을요.”
이토는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기원절에 내린 하늘의 가호’에 감사를 드렸다.
2월 12일 일요일 오전, 경운궁 중명전.
이토 히로부미는 방한 사절단을 대동하고 입궐했다.
동행한 인사들은 알현실 밖에 기립한 채, 이토는 단독으로 황제를 알현했다.
“후작, 대한국은 어전회의에서 상호방위조약을 준수하여 전시 우호적 중립을 결의했소. 귀국의 승전을 기원하는바, 귀국에 필요한 항구와 철도를 개방하고, 군수 보급에 협력하도록 하겠소.”
“대일본제국 정부를 대리하여 감사드립니다, 폐하! 대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의 호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협력에 대한 양국 간 구체적인 협의가 있어야 할 것이외다. 전시 군사통행권 부여와 군수 보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물론입니다, 폐하. 응당 보답이 있어야지요. 대한제국의 지원은 전쟁 승리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동양 평화, 한국과 청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토는 깊이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이선은 속으로 냉소했지만, 정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하필 을사년에, 중명전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황제에게 지원을 구걸하고 감사한다라.’
실제 역사에서는, 1905년 11월에 이토가 바로 이 중명전에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서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현재 이토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이는 이토가 일본 내에서 비교적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제국주의적 본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국력이 약했더라면, 실제 역사처럼 일본은 거리낌 없이 한국의 중립을 짓밟고 강제로 조약을 압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국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일본은 협상을 구걸했다. 한국은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좋소. 그럼 구체적인 협의를 시작해 봅시다. 오늘이 비록 일요일이긴 하지만.”
“워낙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 협의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중명전에서는 즉각 전쟁대책협의회가 개최되었다.
한국에서는 황제 이선의 주관으로 총리 김옥균, 내무대신 민영환, 외무대신 서광범, 탁지대신 어윤중, 군무대신 한규설, 법무대신 유길준, 상공부대신 이용익, 원수부 참모국 총장 박유굉이 배석했다.
일본에서는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군부를 대표해서 함께 방한한 포병감 이지치 고스케(伊地知幸介) 육군 소장, 상비함대 사령관 우류 소토키치(瓜生外吉) 해군 소장이 배석했다. 사실상 정부는 이토 혼자 대표했다.
“먼저 중요한 건 전쟁 구역(區域)의 설정입니다. 대한국 본토 13도는 전쟁 구역에서 제외하고 중립 구역으로 삼되, 만주에 접하는 요동도와 연길도는 전쟁 구역으로 허용하겠습니다. 전쟁 구역에서는 일본군의 주둔과 작전을 허용하되, 민간에 최대한 피해가 없어야 합니다.”
“좋습니다. 남만주 자치령은 어찌 됩니까?”
“자치령은 명목상 청국 영토이니, 청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전쟁 구역으로 삼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남만주가 전쟁에 휘말리는 건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특히 러시아 만주군 사령부가 있는 봉천과 요양에 인접한 지역은 주전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본 육군은 과거 부설에 동참한 경부선과 경의선을 군용으로 사용하길 원합니다. 안봉선도 속히 완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설을 돕겠습니다.”
“귀국 해군이 서해와 동해의 제해권을 제압한다면, 굳이 중립 구역을 통과할 이유가 있습니까? 경부선과 경의선은 국가의 근간 철도라 제한을 둘 수 없습니다. 군용철로는 경의선의 평양-의주 구간, 평남선 평양-진남포 구간만 개방하겠습니다. 안봉선 부설을 함께하는 건 환영합니다.”
일본은 10년 전 독립전쟁 당시 경부선과 경의선 부설에 일본 자본이 합작한 것에 대해 생색을 내려 했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게 따지면 미국과 프랑스 자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압록강 철교는 완공됐고, 압록강 너머 안서와 봉천을 연결하는 안봉선은 현재 안서-봉황성 구간까지 부설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제해권만 신속히 확보한다면, 전쟁이 귀국에 미치는 영향도 적을 겁니다. 일본 해군은 조속히 제해권을 확보하리라 다짐합니다. 철도보다는 항구 개방이 시급합니다. 귀국의 부산, 마산, 인천, 진남포, 원산, 청진을 개방해 주길 바랍니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동절기에 주둔했던 진해만 해군기지 사용을 허가해 주십시오.”
이선의 예상대로, 일본 육군과 해군은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육군이 한반도 전체를 질주하는 것보다야, 해군이 항구를 통해 수송하는 게 훨씬 부담이 적었다. 요구사항을 보니 동서남해에서 각 2개 항구였다.
“좋습니다. 전시 이용을 전제로, 6개 항구의 개방과 진해만 해군 주둔을 허용합니다. 대신 군용철로는 경의선과 평남선, 안봉선으로 한정합니다. 군수 보급은 항구를 중심으로 진행하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육군은 불만이 역력했지만, 해군은 만족감을 표명했다.
“세상에 공짜란 없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지요. 군수 보급은 품목별로 가격을 책정해 거래한다고 치고, 주둔지 설치와 항구·철도 이용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 주길 바랍니다. 귀국이 군용으로 이용하게 된다면 그만큼 정부와 민간에서 손해를 보게 되는 거니까요.”
탁지대신 어윤중이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어전회의에서 거의 침묵을 지켰지만, 가장 강력한 참전 반대론자였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랬다간 기껏 확보한 재정이 파탄 납니다. 전시 중립을 유지하면서 재정적 이득을 꾀해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재정개혁을 주도해 오며 재정의 근대화를 이끌어 낸 어윤중은, 전쟁에 휘말려 재정을 파탄 낼 생각이 없었다. 그에겐 영토 확장보다 재정 건전이 더 중요했다.
“물론입니다. 일본 정부는 주둔지와 철도·항구 사용을 대가로, 100만 엔(円)을 귀국에 공여하겠습니다.”
“100만 엔이요? 너무 적습니다. 400만 엔은 되어야 합니다.”
이토가 협상의 여지를 두려고 일부러 적게 불렀다지만, 400만 엔은 그의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바였다.
“400만 엔이요? 너무 과합니다. 150만 엔.”
“아니, 귀국은 대한보다 10배는 부유한 거로 압니다만, 400만 엔 가지고 그러십니까?”
어윤중은 일부러 일본의 재정 규모를 과장했다.
1905년도 예산을 비교하면, 일본과 한국의 예산안은 5:1 정도였다. 인구비가 2.5:1이고, 실제 역사의 같은 시기에 20:1 정도 차이 나는 것과 비교하면 격차가 급격히 줄어든 셈이었다. 이조차도, 일본이 전쟁을 대비해 과도한 증세로 국민을 쥐어짰기에 큰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10배라니요, 일본은 가난합니다. 메이지 38년 예산안이 2억 엔입니다. 200만 엔으로 하죠. 200만 엔이면 전체 1%에 해당됩니다.”
“400만 엔.”
“250만 엔.”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시지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400만 엔이 아깝습니까?”
어윤중의 어조에는 아쉬운 건 그쪽이 아니냐? 라는 말이 숨겨 있었다.
이토는 어윤중의 강경함에 질려 황제와 다른 대신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들도 내심 이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300만 엔! 특파대사로서 내가 낼 수 있는 재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면 전후에 차관을 제공할 테니 이대로 합의합시다!”
“좋습니다. 그럼 300만 엔으로 하시지요.”
이토의 절박한 태도에 어윤중이 큰 인심을 썼다는 듯이 합의했다.
“대신 3년간 분할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3년은 너무 길고, 1년으로 하시죠.”
“그럼 2년.”
“2년, 좋습니다. 단, 지폐가 아니라 금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아니, 금은 안 됩니다!”
“금이 어렵다면 은으로라도. 지폐는 안 받습니다. 지폐로 할 거면 처음부터 협상 다시 하시지요.”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은 화폐를 찍어 낼 것이고,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니 어윤중은 금이나 은을 고집했다.
금본위제 국가에서 신용의 상징인 금을 외국에 넘길 수 없다는 건 이토도 마찬가지였다.
“…… 좋습니다. 그럼 은으로.”
“은으로 300만엔, 2년 분할 지불.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 돈은 무상 공여가 아닙니다. 귀국의 전쟁에 필요한 철도 부설, 항만 시설 확보, 군수 생산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군사통행권과 재정 문제를 협의한 뒤, 오찬을 하고 오후에 회의를 속개하도록 했다.
“이게 무슨 동맹입니까? 이웃나라의 위급을 틈타 돈을 갈취하려는 장사치가 아닙니까!”
이지치가 분개해서 소리쳤다. 이토는 꾹 참고 있다가, 결국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큰소리치지 마시오! 아쉬운 건 일본이라는 말이 틀릴 게 없잖소! 만약 한국과 협상이 결렬되면 어떡할 거요? 그럼 군부는 전쟁을 포기할 거요? 아니면 한국을 침공해서 총칼로 협력을 강요할 거요?”
“…….”
이지치는 입을 다물었다.
한국의 지원이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건 일본이니, 아쉬운건 일본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부재한 사이에 군부가 일을 저지를까 봐 두려운 이토는 한시라도 빨리 협상을 마쳐 돌아가야 했다.
“아주 잘했소. 과연 일재(一齋, 어윤중)는 대담하오. 이토 후작의 넋이 나가더군.”
“신은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관료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한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불만이 역력했지만, 이선과 대신들은 어윤중의 협상력에 감탄했다.
어윤중은 대한제국 1년 예산의 7%를 단기간의 협상으로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군사협정을 논의하겠지. 저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군사적으로는 중립을 지켜야 하오.”
“예, 알겠습니다.”
“아마 저들은…….”
이선은 일본과 전시 협력을 결정했지만, 이는 동맹이라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결정이 아니었다.
‘일본 육군의 공격성이 한번 된통 꺾어 봐야 해. 근대전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고, 수많은 병사가 죽어 나갔는데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후방에 있는 최고위 지휘부는 바꾸지 못해도 전방의 징집된 병사들은 깨닫겠지.’
어차피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면, 일본군은 공격성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전투에서 철저하게 소모되어야 했다. 러시아군이 일본군을 전멸시킬 수는 없어도, 기관총과 참호의 발달로 공격자에게 소모전의 끔찍함은 맛보게 해 줄 수 이을 터였다.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참전세대가 2차 세계대전을 두려워해 전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대외정책이 소극적으로 변한 것처럼, 일본이 최초로 경험할 끔찍한 소모전은 전후 세대의 변화를 이끌 수도 있었다.
실제 일본은 한반도라는 대륙으로 향하는 전리품을 얻어 더욱 공격성을 날뛰게 되었지만, 바뀐 역사의 일본은 그럴 수도 없었다.
‘어디 체험해 보라지. 20세기 전쟁의 끔찍함을.’
청나라를 꺾고 기고만장해져 전쟁을 너무 쉽게 여기는 일본군이, 19세기와는 확연히 다른 20세기 전쟁의 뜨거운 맛을 봐야 했다.
장차 발발할 세계대전, ‘총력전’이라는 묵시록의 서막을 알리는 전쟁이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