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399
– 80화에 계속 –
2부 80화 관전무관
1905년 4월 25일, 오쿠 야스카타(奥保鞏) 대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2군 3개 사단과 1개 기병여단이 요동반도에 상륙했다.
제1사단, 제3사단, 제4사단, 제1기병여단으로 구성된 제2군의 목표는 금주(錦州, 진저우) 지협과 대련(大連, 다롄)항을 확보하여 여순 요새를 고립시키는 게 1차 목표였다.
제2군은 대련 점령 후 남만주 철도를 따라 개평-대석교-해성 방향으로 진격하여 1군의 요양 공세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속히 목표를 달성하고 요양으로 진격한다!”
2군이 수월하게 상륙할 때만 해도, 일본군은 빠른 진격을 예상했다.
청조일전쟁에서 금주와 여순을 하루 만에 함락시켰던 일본군은, 이번에도 손쉽게 점령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러시아군은 청군이 아니었고, 금주와 여순에는 일본군의 생각을 뛰어넘는 근대적 요새가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껏 손쉬운 승리만 거둬 온 일본이, 마침내 근대전의 공포를 경험할 때가 온 것이다.
“에잇! 대체 제2군은 왜 이렇게 금주 함락에 오래 걸리는 건가! 하루면 함락시킬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도쿄의 대본영은 지지부진한 공세에 불만을 토해 냈다. 대본영을 이끄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수는 공세를 계속 채근하며 2군 지휘부를 질타했다.
“제기랄, 대본영이 직접 현지에 와 보라고 해! 저 지뢰와 기관총의 산을 뚫기가 말처럼 쉬운지!”
2군 사령관 오쿠 대장은 대본영의 질책에 분통을 터뜨렸다.
금주성은 이미 요새화가 되었고, 금주성 바로 남쪽의 산, 남산(南山)에는 140문의 야포와 맥심 기관총이 버티고 있었다. 남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지뢰, 철조망이 가득한 참호가 있었다.
“돌격! 돌격!”
“적의 방어가 너무 두텁습니다!”
콰콰콰쾅!
타다다다다다다다당!
지뢰와 철조망을 뚫고 어떻게든 참호에 접근해 보려고 하면, 러시아군의 기관총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단 이틀 만에 함락된 남산과 금주성이지만, 개전이 1년 늦춰지고 요새화가 거의 완성되면서 러시아군의 방어가 더 강력해져 버린 것이다.
“좋아! 계속 죽어라, 원숭이 놈들아! 섬나라 원숭이 따위가 어찌 대러시아를 넘보느냐?”
만약 금주와 남산을 지키는 러시아군 사령관이 유능한 장군이였다면, 러시아군은 한 달 이상은 더 버텨주며 일본군의 출혈을 극대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금주 방위를 맡은 러시아 관동군 산하 동시베리아 제4소총보병사단장 알렉산드르 포크(Alexander Fok) 소장은 전형적인 인맥으로 승진한 장군이었다.
헌병대 출신인 포크는 정치범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황실에 바친 아첨으로 신임을 얻었고,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만주에 파견되었다.
폭도나 다름없는 의화단을 때려잡는 데는 유능했을지 몰라도, 일본군을 최전방에서 상대하기에는 부적격이었다.
“각하, 적의 공격이 남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만약 남산이 뚫리면 진저우도 위태롭습니다. 보강해야 합니다.”
“이미 5연대가 잘 막고 있지 않나? 남산에 보강했다가 진저우가 위태로우면 어찌하나? 알아서 잘하겠지.”
2군 사령관 오쿠 대장은 남산 함락이 금주성 공략의 열쇠임을 깨닫고, 3개 사단의 공격을 모두 남산 공세에 집중시켰다. 심지어 연합함대까지 지원으로 합류하여 바다에서 함포사격을 도왔다.
남산을 지키는 동시베리아 제5보병연대장 니콜라이 트레챠코프(Nikolai Tretyakov) 대령이 부하들과 악전고투하고 있음에도, 바로 지척에 있는 사단장 포크는 지원을 외면했다.
5월 8일, 일본군은 남산을 향해 단 하루 사이에 포탄을 4만 발, 탄환을 무려 220만 발이나 발사해, 그때까지 일어난 모든 전쟁의 군사적 기록을 경신했다. 후방의 대본영에서는 경악할 만한 수치였다.
일본군은 인정사정없이 남산을 향해 포탄을 쏟아부었고, 선발대가 죽어 나가도 계속 축차 돌격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 5연대는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천황 폐하 만세! 대일본 제국 만세!”
5월 10일, 숱한 피해를 입고 마침내 일본군은 산 정상에 일장기를 꽂고 만세를 외쳤다.
일본군의 손실은 전사 3천 여에 부상 6천여 명에 달해, 거의 1개 사단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특히 4사단의 손실이 컸다.
그에 비하면 러시아군 전사자는 200여, 부상 800여, 포로 90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군의 승리이긴 했지만, 피해가 뼈아픈 승리였다.
남산이 함락된 후에야, 포크 소장은 그때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일본군이 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포격하면 금주성은 버틸 수가 없었다.
포크는 싸우지도 않고 금주를 포기하고 대련으로 퇴각했다.
이만해도 충분한 추태인데, 일본군이 추격해 오자 러시아 관동군 사령부는 대련 방위조차 포기했다.
“다르니(대련)를 포기하고 속히 포트 아르투르(여순)로 퇴각하라!”
5월 14일, 러시아 관동군이 싸우지도 않고 항구를 포기함에 따라 일본군은 대련을 손쉽게 접수했다.
러시아 공병대는 속히 항구 파괴 작업에 들어갔지만, 시간과 인원이 부족하여 항구에 적재된 물자의 대부분이 일본군 손아귀에 들어갔다.
여순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남만주 철도, 항구 창고의 군량과 석탄, 화물선이 고스란히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금주와 대련의 함락은 러시아 관동군에게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켰다. 만주군과 연결하는 철도가 끊겨 여순에 고립되어 버렸고, 일본은 대련항을 확보한 덕에 육군을 위한 해상 보급이 더욱 수월해졌다. 여순항을 포위하던 일본 연합함대는 대련항을 기지로 쓸 수 있었다.
전쟁 초기 3개월은 일본군의 승리요, 러시아군의 오판과 실패가 거듭되었다.
이제 일본군 제3군이 대련에 상륙, 고립된 여순을 공격하여 점령할 계획이었다.
여순을 함락시키면, 러시아 관동군과 태평양 함대가 무력화되니 러시아 육·해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었다.
비록 금주 함락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제3군도 곧 여순을 함락시키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오판이었으니, 요새화된 여순에 돌격할 제3군에게는 지옥도가 펼쳐질 예정이었다.
“근대전이란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저 기관총, 대포, 지뢰, 참호……. 공격자에게는 압도적으로 불리하고, 방어자에게는 굉장한 이점을 준다. 이를 무력화시키려면 어마어마한 포탄을 쏟아부어야 하고.
일본 제2군 관전무관 이갑 참령은 금주 전투를 지켜보며 중대한 전훈(戰訓)을 얻었다.
대한제국 육군대학 1기를 차석으로 졸업한 이갑 참령은 군부 내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참모장교였다.
육군대학을 이끈 팔켄하인의 직속 제자인 이갑은 프로이센의 최신 군사교리를 쑥쑥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의화단 전쟁이 유일한 실전 경험인 이갑은 러일개전 초기만 해도 참전론자였다.
하지만 금주 전투를 관전무관으로 경험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고야 말았다.
“20세기의 전쟁은 19세기의 단기전과 다르다. 과연 팔켄하인 교관의 말이 옳았구나. 충분한 공업력과 무기를 갖추지 않으면 절대 전쟁을 할 수가 없다. 이건 일본도 감당 못 할 전쟁이다. 극심한 소모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갑과 대한제국 관전무관단은 제3자의 위치였기에,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할 수 있었다.
일본은 금주 전투를 ‘육군의 감투(敢鬪)끝에 얻은 위대한 승리’로 포장했다.
전쟁 초기라고는 해도 일본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열강인 러시아를 상대로 연승하고 있으니, 자화자찬할 만도 했다.
‘비록 일본이 러시아보다 객관적인 전력은 부족할지라도, 정신력과 투쟁력이 앞지르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외쳤다.
하지만 이갑이 냉정한 눈으로 볼 때 그건 개소리였다.
“1개 연대로 3개 사단의 공세를 이렇게 오래 버텨 내다니, 정신력과 투쟁력은 러시아 측도 만만치 않았던데. 결국 더 많은 군대, 더 많은 군수품을 확보하고, 전쟁에 대비를 잘하는 쪽이 이긴다.”
물론 일본군이라고 해서 모두 정신력의 승리를 외치진 않았다.
그들도 지뢰와 기관총으로 가득한 참호의 위엄을 똑똑히 보았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포탄과 총탄을 하루 만에 220만 발을 소모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었다.
“일본의 공업 생산량을 생각할 때,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포탄도 대지 못할 상황인데.”
“모든 공장을 군수 생산 체제로 돌리고, 부족분은 한국에 외주를 맡깁시다. 만주까지 운송하기에는 한국이 가깝지. 최대한 많은 군수품을 확보해야 하오.”
“일본군으로부터 또 새로 주문 들어왔어! 6월 말까지는 생산 완료해 달라는군!”
“이만한 분량을 6월 말까지요? 지금 작업 생산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럼 더 많이 고용하고, 더 많이 기계를 확보하고, 더 많이 만들어!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 것 같나?”
아직 기초 단계에 불과한 한국 군수공업의 활황은 개전 초기부터 기대된 바였으나, 일본이 생각보다 빨리 군수물자를 소모함에 따라 황성과 평양의 군수공장이 쉼 없이 돌아갔다.
일본의 피와 돈으로, 생각지 못한 한국 공업의 호황과 도약이 이루어졌다.
* * *
도쿄 대본영과 만주 야전군 간의 마찰이 계속됨에 따라, 만주 현지에서 전군을 지휘할 만주군 사령부가 속히 만주로 떠났다.
참모총장 오야마 이와오 원수가 만주군 총사령관, 참모차장 고다마 겐타로 대장이 총참모장이었다.
오야마가 원로로서 대본영과 교섭하는 정치가에 더 가깝다면, 독일 유학파인 고다마가 실질적인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었다.
“전군은 만주 작전에 집중한다.”
당초 연해주에서 양동 작전을 벌이기로 계획했던 제4군은, 진로를 바꿔 의주 용암포에 상륙해 1군의 진격을 보조하기로 했다. 2군의 손실이 생각보다 커 1군과 2군만으로 요양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상 일본군 13개 상비사단 전체를 만주에 투입시키는 것이었다.
대본영은 2개 상비사단을 추가로 편성하고, 후비군을 대거 동원했다.
양동작전은 본토의 후비사단으로 하여금 7월에 사할린을 공격하도록 했다. 사할린의 러시아 수비병은 적었으므로,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일본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히로시마를 출발해 진남포에 도착한 만주군 총사령부는, 일단 평양에 대기했다.
대한제국 황제 이선이 친히 평양에서 만주군 사령부를 격려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인 것이다.
고다마는 하루빨리 만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급했지만, 일본군에게 편의를 아끼지 않는 동맹국 황제가 친히 격려하러 오겠다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광무 9년 5월 15일, 평양.
황제 이선은 친히 근위사단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거동했다. 명목상의 이유는 일본 만주군 사령부를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5월 15일에 열병식을 개최할 터이니, 모두 참석해 주길 바랍니다.”
때마침 5월 15일은 청조일전쟁이 조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시모노세키 조약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을 맞이하여, 평양에서 근위사단의 대규모 열병식이 개최되었다.
보통 열병식은 5월 31일 이선의 탄일인 건원절에 황성에서 진행됐지만, 올해는 특별히 5월 15일에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평양은 독립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소였다.
만주군 총사령부뿐만 아니라,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미국 등에서 파견한 관전무관단도 열병식에 초대되었다.
열강 각국은 러일전쟁을 새로운 전쟁의 전훈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피로, 각국은 20세기 첫 전쟁의 전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관전무관뿐만 아니라, 각국의 종군기자들도 한국으로 왔다.
각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종군기자들은 모두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동아시아로 몰려들었다.
일본군 역시 서양을 향해 대대적인 선전전을 벌였으므로, 관전무관과 종군기자를 환영했다.
예컨대 일본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기자 베델은 일본 야당과 연대해 호헌운동을 벌였으므로 일본 정부 입장에선 눈엣가시였지만, 그가 종군기자로 한국으로 떠난다니 쌍수 들고 환영했다.
한국은 각국과 우방인 데다, 만주로 향하는 중간 지점이었으므로 관전무관과 종군기자들도 한국으로 몰려들었다.
황성과 평양에는 갑작스러운 서양인들의 등장으로 호텔이 만원이었다.
“장군, 독립전쟁 승전 10주년을 기념하여, 짐은 대한국을 대표해 과거에 청국과 함께 싸운 전우이자 현재에도 동맹인 일본군의 선전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동양의 영걸이신 황제 폐하께옵서 친히 소장을 환영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선의 격려에 오야마와 고다마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동맹국 국가원수로서 예의상 하는 말도 있지만, 일본의 정치가와 군인들도 이선을 높이 평가했다.
“대원수 폐하께- 받들어 총!”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원수부 참모국 총장이자 전(前) 근위사단장 박유굉 부장이 직접 열병식을 지휘했다.
근위사단이 보무도 당당하게 열병식 행진을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엄정한 군기와 신무기로 무장한 근위사단은 일본군 사령부와 각국 무관 앞에서 보였다.
엄밀히 말하면 최고 정예를 엄선하여 최고의 지원을 받는 근위사단을 대한제국군 전체와 비교할 수 없으나, 근위사단은 대한제국군을 상징했다.
대한제국군 최고의 정예인 근위사단의 위용에, 일본군 사령부와 각국 무관들도 내심 감탄을 했다.
‘과연 한국군은 충분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 러시아와 싸우기 전에 한국과 대립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역시 한국군을 동맹으로 전쟁에 끌어들여야겠는데……. 어떻게든 전방으로 내세울 수 없을까?’
청조일전쟁과 의화단전쟁 이후 일본인들의 한국관은 변화했다.
‘아시아에서 단 둘뿐인 개화된 민족’,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삼아 급진 개혁을 이룬 바람직한 동료’라는 평가가 잇달았다.
특히 이선과 김옥균은 일본에서도 굉장히 고평가를 받는 지도자였다. 이선을 계몽전제군주 표트르 대제에 비교한다든지, 대원군을 메이지 유신의 흑막인 이와쿠라 도모미와 비교한다든지, 개화당의 ‘3두’라 불리는 김홍집, 김옥균, 박영효를 ‘유신삼걸’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등과 비교하기도 했다.
여전히 ‘일본보다 20년 정도 뒤떨어진’ 나라로 보기는 했지만, 한영일동맹의 체결 이후 우호적인 반응은 늘어났다.
특히 아시아주의자들에게는 한국은 일본과 함께 동양 평화를 이끌어 나갈 동반자였다.
‘대등한 관계라면 모를까, 일본이 우월하다는 건 가당치도 않지.’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우월의식은 가당찮기 짝이 없었다.
한국이 명확히 모범으로 삼고 있는 서양이라면 모를까, 일본은 먼저 개혁한 덕에 잠시 앞서 나갔을 뿐, 결국 머지않아 따라잡는 걸 목표로 하는 나라였다.
한국인도 근대화의 성공과 연이은 승전으로 자신감이 충분해졌고,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치고 최강국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물론 한국의 아시아주의자들 역시 일본은 함께 동양 평화를 이끌어 나갈 동반자였다. 이들은 한영일동맹에 열광했다.
정작 정권을 이끌고 있는 이선의 속내는 ‘한국이 일본을 앞지르려면, 한국이 힘을 축적시키는 동안 일본을 끌어내린다.’는 쪽이 더 가까웠지만.
참으로 동상이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