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03
– 84화에 계속 –
2부 84화 자치령 위기
1905년 6월, 남만주 자치령.
“개전 이후 자치령으로 몰려드는 피난민이 수십만에 달합니다.”
“지금 피난민이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군이 자치령으로 쇄도한다면, 대체 어찌 막아야 한단 말인가?”
자치령 고등판무관 이재완(李載完)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황족으로서 고등판무관에 임명되어 부임했지만, 자치령에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자치령을 방어하는 병력은 대한제국 제7사단과 옛 만인대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자치령 의용군이었다. 만약 러시아군이 작정하고 진입하려 한다면, 자치령을 방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치령의 법적 소유주 청나라와 실질적 소유주 대한제국이 모두 중립을 선언했으니, 러시아가 이를 존중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6월 2일,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러시아군은 일방적인 통보를 날리고 진격을 개시했다.
고등판무관 이재완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급히 본국을 향해 훈령을 요청했다.
러시아군이 남만주 자치령을 점령하기로 나선 건, 물론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서였다. 자치령은 러시아가 중시하는 동청철도와 인접해 있으므로, 만약 일본군에 의해 접수된다면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이리되면 한국의 중립을 존중하겠다는 선언에 위배되는 게 아닙니까?”
“자치령은 엄밀히 말하면 청국령이지 한국령이 아니다. 만주는 청국과 한국도 모두 전쟁 구역으로 선포한 곳이 아닌가? 점령해도 무방하다.”
“애초에 한국은 일본과 협약을 맺고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군은 한국 영토를 버젓이 행군하여 만주로 들어오지 않나? 우리라고 자치령을 접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러시아 군부는 한국의 전시 중립을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분명 일본과 조약을 맺고,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걸 보면 일본 편인 건 틀림없는데…….”
“일본의 참전 요구를 끝내 거부한다거나, 교전을 결사 회피하는 거로 봐선 러시아와 적대할 뜻이 없다는 것 같다.”
“모티엔 고개(마천령)의 사례를 보면, 한국은 러시아에 맞서 싸울 뜻이 없다. 그때 한국군이 고지를 비우고 사실상 점령하라고 했는데도, 스스로 걷어차고 일본군의 진격을 허용하지 않았나?”
“그렇다. 만약 아군이 먼저 점령하지 않는다면, 결국 적이 점령하게 될 것이다.”
만주군 총사령관 쿠로파트킨 대장은 자치령 점령을 결정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재가를 요청했다.
니콜라이 2세는 고심 끝에 승인했다.
“점령을 승인한다. 사전에 한국 정부와 자치령 고등판무관부에 통보하고 점령하라.”
차르는 마천령 전투를 보고받고, 한국이 러시아와 싸울 뜻이 없다고 확신했다. 한국군이 내준 마천령 고지를 제때 점령하지 않아 전투의 불리함을 자처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사자인 켈러 장군이 전사하는 바람에 문책할 수도 없었다.
“자치령이 한국령도 아닌데, 군사적 필요성에 의한 일시적 접수라면 이선도 이해해 주겠지.”
니콜라이는 이선이 보낸 친서 내용대로, 한국이 지금은 부득이하게 일본과 협력하고 있지만 내심 러시아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치령 점령은 충분히 양해가 될 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차르는 주한 러시아 공사관에 전문을 보내도록 했다.
6월 2일 오후, 평양 흥경궁.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긴급히 알현을 요청했다. 파블로프는 건원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마침 평양에 체류 중이었다.
개전 이후 파블로프의 처지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이 중립을 선포함에 따라 여전히 러시아 공사관은 존재했지만, 교전국인 일본군이 노골적으로 불신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파블로프는 일본군 정보를 입수해 페테르부르크에 보내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에게 완전히 스파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재한 일본인들조차 러시아 공사관을 위협했다. 파블로프와 러시아 외교관들은 한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급히 알현 요청이라니, 어인 일입니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 정부에 보내는 전문이 도달했습니다.”
파블로프는 러시아 정부의 통고문을 낭독했다.
“소위 만주 의군을 자처하는 청국 마적들이 러시아군을 습격한 후, 빈번히 자치령을 경유해 이동하고 있다. 만주의 치안을 안정시키고, 향후 예상되는 일본군의 진격으로부터 안전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략적 필요성에 의해 남만주 자치령을 러시아군이 일시적으로 접수한다.”
요컨대 자치령을 러시아군이 점령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선은 냉정함을 유지한 채 파블로프에게 물었다.
“귀국은 한국인들에게 만주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만주에 대한 열망을 모르는 러시아 본국과 달리, 파블로프는 만주 문제가 한국 여론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자치령을 점령하겠단 말이오?”
“전략적 필요성에 의한 부득이한 조치입니다.”
“이는 대한제국을 향한 중대한 도발로 받아들여질 텐데?”
“이미 만주 전역이 전쟁 구역으로 선포되었고, 자치령은 엄밀히 말하면 국제법적으로 청국 영토입니다.”
“주권은 청국에 있지만 통치권은 한국에 있소. 자치령의 국제법적 지위는 크레타 자치국 혹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자치령에 준하오. 만약 러시아가 크레타를 점령한다면, 그리스는 어떻게 받아들이겠소? 러시아가 보스니아를 점령한다면, 오스트리아는 어떻게 받아들이겠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878년 베를린 회의 이래 명목상 오스만의 자치령으로 남았지만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통치했고, 크레타는 1896년 이래 오스만 주권 하의 크레타 자치국이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그리스가 통치했다. 두 사례 모두 오스만을 약화시키려는 러시아의 지지를 받았다.
남만주 자치령은 국제법적으로 크레타 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준한다는 게 한국의 입장이었다.
“폐하, 러시아는 1901년 자치령 설립에 큰 도움을 주었던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자주독립과 영토 확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오. 하지만 그게 점령을 해도 된다는 건 아니오.”
“일본군에게는 한국 영토를 군사적으로 활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한국과 일본이 조약상의 동맹국이라 그렇지 않소! 그리고 일본은 그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소!”
이선은 목소리를 높였다. 러시아가 자치령 점령을 강행하면 여론은 급격히 참전 쪽으로 기울어질 터였다.
“최소한 일본은 전쟁 전에 협상이라도 시도했소. 러시아는 한국과 협상을 하고 싶은 거요, 통보를 하러 온 거요?”
파블로프는 난처했다. 자신은 통보를 하러 왔지, 협상의 권한은 없었다.
“…… 조건을 협상하도록 본국에 건의하겠습니다.”
“자치령의 무순 탄광과 본계 철광이 대한제국의 산업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그건 안산 철광의 전례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무순 탄광과 본계 철광은 한국 공업화의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러시아군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결국 한국 군수공업에서 생산한 무기는 일본군을 위해 쓰였고, 러시아군을 향해 날라 오고 있었다.
“그래도 짐이 러시아군의 진주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귀국은 어찌하겠소?”
“으음…….”
파블로프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답변이 궁색하여 잠시 생각을 하는데, 원수부 참모국 총장 박유굉이 급히 들어왔다.
“폐하, 알현 중에 황공하오나 만주에서 급보가 있어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개의치 마시오. 무슨 일이오?”
자치령 고등판무관 이재완과 7사단장 권동진 참장이 보내온 급보였다.
봉천에서 지척인, 자치령의 행정 중심지이자 공업지대 무순과 본계가 러시아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공사! 이게 어찌 된 거요? 이미 러시아군이 무순과 본계를 점령했다는데!”
점령 시간을 보건대 통보하기 이전에 러시아군은 이미 진격에 나선 것이었다.
파블로프는 더욱 난처해졌다. 외교관이 나서기 전에 군부가 먼저 점령해 버렸으니, 외교는 이미 파탄이었다.
“본국에서는 6월 2일을 기해 작전을 개시한다고 했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Alors, c’est la guerre!”
이선은 통역을 건너뛰고 외교 공용어인 프랑스어로 내질렀다.
‘그렇다면, 전쟁을 의미한다.’
“폐하!”
“귀국의 행보에 대해 실망을 금할 길이 없소. 한국이 러시아에 우호적 태도를 저버린다면, 그건 우리가 아니라 귀국의 책임이오. 귀국 정부와 군부에 짐의 분노를 똑똑히 전해 주시오.”
이선은 자리에서 일어서 형식적인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갔다.
“폐하, 정녕 전쟁을…….”
박유굉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팔켄하인의 조언대로, 한국은 러시아와 당장 전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여기선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네. 러시아에 아무 조건 없이 자치령 점령을 승인한다면, 일본도 똑같은 짓을 하겠지.”
이선의 분노는 절반 정도 과장된 연기였다. 러시아에 한국의 단호함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비록 이선이 마천령을 비어주어 러시아군에게 유리한 방어 지점을 제공해 주려고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러시아군의 방어로 일본군의 소모를 늘리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군사적 요인을 내세워도 자치령 전체를 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하오면 당장 대책은 어찌해야 할지요?”
“러시아군의 숫자가 얼마나 된다던가?”
“봉천에 주둔하는 러시아군은 약 15만으로 추정됩니다. 7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점령에 나선 러시아군은 약 5만으로, 7사단은 일단 무순과 본계의 방어를 포기하고 후퇴했습니다.”
“러시아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면 탓할 일은 아니지. 정규군이 교전에 휘말리면 그때부터는 진짜 전쟁이니. 일단 7사단에게 교전을 피하고 퇴각하라고 명령하시오. 고등판무관부는 무순에 계속 잔류하면서 러시아 당국과 교섭하도록 하고.”
“하오면 이대로 자치령을 포기해야 할지요?”
“그럴 수야 있나? 정규군이라면 모를까, 의용군이라면 싸울 수 있지. 이제 진짜 의용군을 내세워야겠어.”
자치령에는 새로 편성된 7사단 말고 의용군도 이미 존재했다. 만인대의 후신이었다.
“즉시 정부와 원수부 핵심 인사들을 흥경궁으로 소집한다. 당분간 평양이 정부 소재지가 될 것이다.”
“예, 폐하!”
황성에 있던 김옥균과 내각 일원이 부랴부랴 평양으로 달려왔다. 경의선 덕에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6월 3일, 흥경궁에서 어전 회의가 개최되었다.
“대한의 통치권으로 공인받은 자치령을 사후 통보하고 점령하다니, 러시아가 어찌 이토록 무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건 전쟁을 의미합니다, 전쟁!”
내각과 군부의 매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마침내 개전의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 말은 이미 짐이 러시아 공사에게 했소. c’est la guerre.”
“오오!”
매파는 기대감에 넘치는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강대국 러시아에 전쟁을 외친 황제의 패기에 진심으로 감격하는 듯했다.
“하지만 진짜로 전쟁을 하겠다는 건 아니오. 대한의 의지가 단호하다는 걸 러시아와 일본에 보여 주기 위함이니까.”
“지당하십니다. 대한의 주권을 침해하려는 행동에는 단호히 맞서야 하지만, 전쟁은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비둘기파는 온건한 해결책을 희망했다. 러시아와 싸우는 건 시기상조였다.
“자치령의 상황은 어떻소?”
“보고에 따르면 무순과 본계를 내주고, 7사단은 퇴각 중입니다.”
“주민들이 러시아의 진주를 반길 리가 없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들의 터전이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자치령에 이주한 한국인들은 대개 농민이었다. 무순과 본계에는 탄광과 철광에서 일하는 광부들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새로운 땅에 이끌려 온 농민들이 많았다. 특히 단체로 이주한 동학교도들, 만인대 출신이 주류였다.
북방에서 독자적인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던 동학교도들이 러시아의 점령을 반길 리가 없었다.
본래 거주하던 만주인, 의화단과 전쟁을 피해 자치령으로 이주한 중국인들도 러시아에 적대적인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다면 자치령 의용군은 정부가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저항하려 들겠군.”
“경자년의 전례도 있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뚜렷하고 교주 손병희가 정부와 유착한 덕에 맞서는 일은 없었지만, 만인대의 독자성은 고등판무관부도 통제하기 힘들었다.
“농림대신.”
“예, 폐하.”
“경이 5년 전처럼 북방으로 가 줘야겠소. 자치령 주민들과 의용군의 관리를 맡겨도 되겠소?”
전봉준은 북방개척위원을 맡은 바 있고, 만인대를 이끌고 자치령에 해당되는 영토에서 농민전쟁을 치른 경험도 있었다.
그 후 농림대신으로 입각하여 만주를 떠나긴 했지만, 만주 농민들에게 여전히 전봉준은 전설적인 존재였다.
“신은 오직 황명을 받들 뿐입니다.”
“좋소. 경을 자치령 정무관으로 임명하니, 고등판무관을 대리해 자치령을 책임져 주길 바라오.”
“삼가 황명을 받자옵니다!”
전봉준이 고개를 숙였다.
“외무대신. 자치령은 법적으로 청국령이니, 청국 정부와 교섭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시오.”
“예, 폐하!”
자치령의 주권은 대청 황제에게 있지만, 통치권은 대한제국에 있는 2중 체제였다. 자치령 주민은 명목상 청나라 국적이긴 했지만, 판무관부터 일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공직을 맡고 있는 이는 절대 다수가 한국인이었다.
“내무대신. 당분간 보도관제를 내렸지만, 자치령 점령 소식이 전해지면 여론의 반응이 어떠하리라 생각하오?”
“다수야 잠잠하겠지만, 흥아론자와 국수주의자들은…….”
“물론 시끄럽겠지. 의용군 결성하겠다고 난리 칠 거고. 내버려 두시오. 하지만 그렇게 모집된 의용군이 전력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군.”
국민개병의 영향으로 18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청년들은 군대 경험은 대개 있었지만, 의용군의 효용성은 의문이었다.
“군무대신. 7사단을 일시적으로 해산하는 건 어떻겠소?”
“예? 어인 하교이신지…….”
작년에 창설된 7사단은, 기존의 자치령 의용군을 대신하는 부대였다.
어쩌니저쩌니해도 민병대는 정규군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자치령 의용군으로 편입시키자는 말이오. 기존의 의용군으로는 군사적 효용성이 얼마나 있겠소?”
“예, 즉시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김옥균을 쳐다보았다. 김옥균은 참전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매파에 동조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총리대신.”
“예, 폐하.”
“일본, 영국, 미국 정부에 통보하여 러시아의 자치령 점령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준비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일본은 이번 기회를 틈타 참전을 종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겠지. 하지만 짐은 자치령 일부 점령까지는 개전 사유로 여기지 않소. 만약 러시아군이 사전 합의 없이 대한제국령을 점령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개전 사유가 되겠지.”
“알겠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의용군의 존재가 충분히 역할을 대변하리라 생각합니다.”
김옥균은 이선의 생각을 읽었다.
‘의용군’ 형태로 자치령을 방어하게 한다면, 국제법적으로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교전은 피할 수가 있었다. 동시에 일본에게도 발언권을 낼 수 있었다.
“6월 4일을 기해 전국에 동원령을 선포하겠소. 대한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