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04
– 85화에 계속 –
2부 85화 의용군
총동원령에 회의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광무 군제개혁으로 동원제도가 신설된 이래, 총동원령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금은 농번기입니다. 동원대상인 청년들의 대다수가 농민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주시옵소서.”
농림대신 전봉준이 농번기임을 지적했다. 6월은 모내기 철이었다. 아직 농업국가인 대한제국에서 모내기만큼 국민 대다수에게 중요한 일이 없었다. 모내기는 국가적으로 큰 행사였다.
북부지방을 시작으로 남부까지 전국적으로 모내기가 이어졌다. 지역별로 순차적으로 모내기가 진행되니, 남부에서 온 농민이 고용되어 북부에서 농사를 돕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도 많았다.
“어허, 비상시국에 농번기를 따지게 되었소이까?”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농업은 대한의 근간입니다. 지금은 1년 농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개화파 대신들 대부분이 전봉준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전봉준은 농민의 대변인으로서 언제나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농림대신의 지적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올 가을에는 평년보다 많은 미곡 생산량이 필요합니다. 일본군이 막대한 군량을 수매하고 있습니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수요는 더 늘어날 겁니다. 만약 대한이 전쟁 상황에 돌입할 때를 대비하더라도, 충분한 식량이 비축되어야 합니다.”
뜻밖에도 김옥균이 전봉준의 편을 들어주었다. 총리로서 김옥균은 모든 분야를 살필 의무가 있었다.
“총리대신과 농림대신의 의견에 동의하오. 농민들에게 있어 지금은 가장 중요한 시기지. 전쟁 목적이 아니라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부분 동원령이어도 충분할 터.”
이선은 전봉준과 김옥균의 손을 들어주었다. 과연 올해는 특히 많은 미곡 생산을 필요로 했다. 지금 당장 전쟁을 할 게 아니라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게 목적이라면, 총동원령까지는 필요 없었다.
“그렇다면 농번기가 먼저 끝나는 북부 군관구부터 부분 동원령을 내리도록 합시다. 군무부와 원수부는 동원령의 실무를 맡아 주시오.”
“예, 폐하! 명을 받듭니다.”
군제개혁 이후 경상·전라·충청을 남부 군관구, 경기·황해·강원을 중부 군관구, 평안·함경·요동·연길을 북부 군관구로 전국을 3개 군관구로 나누었다.
“농림대신, 짐은 경을 믿겠소. 자치령의 우리 주민을 잘 부탁하오.”
“예, 폐하! 분골쇄신하여 지극한 성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전봉준은 새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샘솟았다. 농업환경개선, 농지개혁, 토지분배, 징병에 이르기까지 이선은 언제나 농민의 처지를 고려했다.
언제나 정부 내 소수파로서 소외되어 직을 던지고 싶을 때가 수차례였지만, 황제의 신임을 생각하여 굳건히 버텼다.
전봉준 자신에게도 남만주는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당대 주류인 제국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농민의 척식(拓殖)과 안정을 위해서라도 남만주의 토지가 필요했다.
더욱이 자치령은 5년 전 자신과 동학 동지들이 싸워서 쟁취한 곳이 아닌가.
전봉준은 반드시 자치령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다.
6월 4일, 북부 군관구에 동원령이 떨어졌다. 전역한 지 5년 이내의 예비역들은 소집대상이었다.
평양 시내 곳곳에 동원령을 알리는 포고문이 붙었다. 주민들은 포고문을 보면서 웅성거렸다.
“갑자기 동원령이라?”
“흠, 아라사와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더니.”
동원령 포고 동시에 보도관제가 해제되어 남만주 자치령의 소식이 전해졌다.
“호외요! 호외! 아라사, 자치령 침공!”
“뭐? 아라사가 자치령을 침공했다고!”
“이런 호랑말코 같은 양놈들이 미쳤나!”
매파 언론들은 이선과 파블로프의 회견을 과장해서 자극적으로 보도했다.
「아라사 공사의 일방적인 통보에 황제 폐하께서는 단호히 맞설 것을 천명!」
「황제 폐하, 아라사 공사의 전쟁 협박에 ‘그렇다면 전쟁이다!’라고 외치시다!」
호외를 받아든 주민들은 분노했다.
“일개 공사 따위가 감히 황제 폐하를 겁박해!”
“아라사가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어찌 이토록 무례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전쟁이다!”
“10년 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황제 폐하께서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단호히 외세에 맞서고 있소이다! 대한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 어찌 지켜만 보고 있겠는가!”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북부 지방, 그중에서도 평안도 평양은 유독 만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지역이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만주에 대한 열망은 낮았다. 남부지방에서 만주란 ‘이주를 하면 토지 분배를 해 준다는 북쪽의 넓고도 머나먼 땅’ 정도였다.
같은 북부에서도, 러시아와 인접해있는 함경도는 친러적 여론이 높았다. 특히 두만강 유역, 개항장인 원산·성진·청진 일대에는 러시아와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이 많았던 만큼, 러시아에 맞서는 전쟁을 반대했다.
고구려의 적통을 자처하는 평양으로서는 만주는 고토이자 대한이 수복해야 할 영토였다.
청나라 침략을 대파한 평양 전투의 승전이라는 공통된 기억,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라는 자부심, 제2 도시로서 수도인 황성을 제치기 위해선 북방 진출을 서둘러야 한다는 경쟁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가자, 군대로! 대한국군 만세!”
“예비역은 모두 군대로! 동원령 대상자가 아닌 이들은 자치령 동포를 구제하기 위한 의용군을 조직합시다!”
“북방 동포여, 우리가 간다!”
평양을 중심으로 의용군 열풍이 불었다.
황성을 기반으로 하는 아시아주의자들도 이에 질세라 의용군에 동참했다.
“마침내 때가 왔다! 백인 침략자를 몰아내자!”
“동양 평화 만세! 한청일 삼국 연대 만세! 대아시아주의 만세!”
강경한 여론은 전염되기 일쑤라, 삽시간에 수천의 자원병이 모여들어 의용군이 결성되었다.
물론 강경한 여론은 도시만의 이야기일 뿐, 농번기에 바쁜 농촌에서는 소 닭 보듯이 했다.
대한제국이 정식으로 참전했다면 모를까, 이들에게 만주의 전쟁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 * *
남만주 자치령.
자치령 주민의 절반은 한인(韓人)이요, 절반은 만주인과 한인(漢人)이었다. 자치령 고등판무관부는 한인, 만인(滿人), 화인(華人)으로 민족을 구분했다.
원주민인 만인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이주한 한인과 화인이었다. 한인은 집단이주한 동학교도와 옛 만인대가 주류를 차지했고, 화인은 의화단과 전쟁을 피해 이주해와 근래 들어 숫자가 급증했다.
자치령에는 민족 분규가 거의 없었다. 한인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했지만, 화인들은 청나라나 ‘중국’에 대해 귀속감이 없었다. 중국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중국인’은 아니었다.
이들을 느슨하게나마 하나로 묶어 주는 건 종교였다. 남만주 일대에는 특히 천도교가 강세였다.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후천개벽의 세상은 온다!”
동학 교주 손병희는 교단을 재정비하고,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했다.
일본과 미국을 유람하며 ‘세계의 대세’에 눈이 뜬 손병희는 동학을 근대적 종교로 재편하고자 했다.
배외적 성격을 지녔던 동학은 빠르게 친서구화되었다. 의화단 전쟁을 겪은 후에는 반서양은 무의미하다는 걸, 일반 신도들도 깨달았다.
“세계의 대세는 진보요! 단발 양장하고 신문물을 따릅시다!”
“진보하자, 앞으로 나아가자!”
천도교의 새로운 교리는 ‘진보(進步)’였다. 천도교의 외곽 단체로 진보회가 결성되었다. 진보회는 남만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도교의 교리를 전파하고 문명개화를 설파했다.
남만주는 동학을 혐오하는 유림도 없었고, 경쟁자로 여기는 불교의 세도 약했다. 기독교는 선교 초기 단계에 불과했다.
경자농민전쟁을 시작으로 자치령이 수립된 만큼, 자치령에서는 이들이 곧 새로운 주류였다.
“상제 한울님 아래 우리는 모두 형제요!”
천도교의 만민평등사상과 동양적 이상은, 기독교에 거부감을 느꼈던 화인들에게도 손쉽게 다가왔다. 어려운 삶을 견디다 못해 자치령으로 이주한 이들은 천도교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손병희와 천도교 교단은 미국 유타 주를 장악한 모르몬교도들처럼, 남만주에서 종교적 농촌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 계획은 고등판무관부와의 유착 속에서 착착 진행 중이었다.
“아라사가 자치령을 침략했는데, 이걸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합니까?”
“대체 7사단은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자치령 보호는 그들의 의무인데,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다니!”
“러시아군이 아직 무순과 본계에만 머물러 있고, 농촌으로는 진격을 하고 있지 않으니…….”
“여기까지 언제 밀고 들어올지 모릅니다. 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만인대가 맞서 싸웁시다!”
“미쳤소? 그때는 오합지졸 청군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라사 대군이라고!”
“화인들로부터 아라사가 점령지에서 저지르고 있다는 만행에 대해 못 들었소? 다음은 우리 차례가 될 거요!”
천도교 지도부에서는 옥신각신 이견이 분분했다. 강경론과 온건론이 서로 대립했다.
“포덕(布德) 46년,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소.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하오. 아마도 이 전쟁은 일본이 이길 터.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뒷배를 봐준다면, 일본은 승리할 것이오. 대한과 천도교의 앞날도 이 전쟁에 달려 있소.”
손병희는 일본의 승리를 예견했다. 종교인답지 않게 예민한 정치적 감각을 지닌 손병희는, 20세기가 미국의 세기가 되리라고 예감했다. 영미가 일본으로 기울어진다면, 일본은 승리할 것이다.
“농림대신으로부터 서한이 왔습니다!”
때마침 옛 동지 전봉준으로부터 서한이 당도했다. 전봉준이 농림대신에 입각해 만주를 떠난 후에도, 손병희와 전봉준의 친교는 계속되었다.
“전봉준 공이 신임 자치령 판무관으로 임명되어 부임한다는군. 자치령의 통치권도 당분간 전 공에게 주어진다고 하오.”
“오오! 이제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오는군요.”
“또한 7사단도 의용군의 일원이 된다는군. 그 말인즉, 정부에서는 의용군이 아라사와 맞서 싸워도 좋다는 뜻인가.”
“그럼 만인대가 다시 일어설 때가 왔군요!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좋소! 천도교는 아라사 침략자에 맞서는 성전에 동참합시다! 결코 의화단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되오. 우리는 철저하게 서양의 방식대로, 서양 침략자에 맞서 싸워야 하오!”
자치령 의용군, 구 만인대의 무장은 의화단과 비교할 수 없었다. 이들은 대한제국 2선급 부대가 쓰는 베르단 소총과 레밍턴 롤링블럭으로 무장했다.
“결과적으로 왜놈 편드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다시 녹두의 지휘를 받게 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무기를 들 수 있다는 건 마음에 드는군.”
개남 김기범은 만인대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경자농민전쟁 당시 지도부와 달리 끝까지 해방전쟁을 주장했던 김기범은, 전후에 자치령에 정착하여 의용군 연대장을 맡았다.
천도교 지도부와 자치령 고등판무관부에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인물인 김기범은, 여전히 해방전쟁의 꿈을 꾸고 있었다.
“백인 놈들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왜놈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주는 우리 한화(韓華) 농민의 땅이 되어야 해. 그러려면 당연히 우리도 침략자에 맞서 무기를 들어야지!”
지난 5년 사이에 손병희와 교단 지도부가 미국 진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면, 러시아 인민주의의 영향을 받은 김기범의 사상은 더 과격해져 있었다.
“러시아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청국 봉건세력을 타도하여, 만주에 농촌 이상향을 건설하자!”
“오오!”
한편, 무순과 본계를 내주고 퇴각하던 7사단에 원수부의 전문이 도달했다.
7사단장 권동진 참장은 5년 전, 경자농민전쟁을 막후에서 지원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전후에 일시 전역하여 자치령 의용군 사령관을 맡았다가, 7사단이 신설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사단장이 되었다.
“전 사단의 군모와 군복에서 태극과 이화 표식을 떼거나 가리게.”
“장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관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태극 마크와 이화(李花, 오얏꽃) 문장은 대한제국군의 상징이었다. 그걸 떼버리면 대한제국군이란 표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시간부로 7사단은 남만주 자치령 의용군에 소속된다. 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만인대와 연계하여 유격전을 준비한다!”
“예!”
권동진은 원수부의 방침을 이해했다. 정규군의 교전을 대신하여, 의용군은 게릴라 형태로 러시아군의 진격에 맞서라는 의미였다.
권동진에게는 자치령 의용군 사령관으로서 상당한 재량권이 주어졌고, 유사시에는 일본군과도 연계할 수 있었다.
6월 초, 남만주 자치령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비공식적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
한인 의용군 결성은 만주와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한인이 상당수 거주하는 러시아령 연해주에서도 의용군의 바람이 불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우리의 뿌리는 조선이지만, 동시에 충성스러운 러시아 제국의 국민이기도 합니다. 일본 침략자들이 러시아를 기습 공격했으니, 우리도 러시아 국민의 일원으로서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소!”
연해주 한인지역 도헌을 맡고 있는 표트르 세묘노비치 초이, 혹은 최재형.
그는 연해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선이 연해주에 체류할 당시 부관 역할을 수행했고, 조선으로 돌아가자 그의 역할을 대리하게 되었다.
이선은 러시아 정부와 교섭하여 한인 자치구를 확보했고, 한인 자원병으로 구성된 이른바 ‘고려 대대’도 설립했다.
최재형은 이선의 후임으로 자치구의 실무와 고려 대대의 지원을 도맡았다.
동시에 자신의 사업도 번창했다. 고려 대대의 군납업자로 시작하여, 의화단 전쟁으로 극동군의 대대적인 진격이 시작되자, 군납을 확대하여 군수상인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번 돈을 동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페치카(난로)’라는 별명을 가진 최재형은 연해주 한인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설마 대한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진 않겠지…….”
러시아는 ‘고려인’으로 통칭되는 연해주 한인을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여기고 있었고, 그들 역시 자신들을 우대한 러시아에 충성해 왔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한인사회는 고민에 빠졌다. 그들의 모국인 대한제국이 일본과 조약을 맺고 러시아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극동 러시아에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솟구쳤고, 동양인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다. 연해주 한인들은 자신들의 충성을 의심받을까 두려웠다.
“스스로 충성을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 공채를 사고, 군대에 자원하여 러시아를 돕자!”
최재형의 군수공장은 러일전쟁 발발로 큰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최재형은 번 돈을 모두 정부가 발행한 전쟁 공채를 사들이고, 군대 설립을 청원했다.
“고려인은 조국 러시아 방위를 위해 헌신하고 싶습니다!”
최재형과 한인들의 청원은 받아들여졌다. 러시아 국내의 전쟁 지지가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참전하겠다는 민족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삽시간에 지원자가 폭증하여, 2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고려 대대’는 ‘고려 연대’로 확장되었다. 장교와 지휘부는 모두 러시아 백인이었지만, 병사들은 한인이었다. 이들은 프리모리예(연해주) 방위부대의 일원이 되었다.
대한제국, 남만주, 연해주.
20세기 초 한민족이 살아가는 터전에,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의용군 결성의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