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07
– 88화에 계속 –
2부 88화 창백한 말
일본군은 1차 여순 공략전의 참담한 결말을 가리려고 애썼다. 현지의 관전무관과 종군기자들은 제한적인 정보만이 주어졌다. 이들은 전선 후방에 있기에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각자 정보원을 통해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끔찍한 피해입니다. 군사적 대재앙이에요. 상부에서 전사자가 6천이고, 부상자는 그 두 배라고 하더군요. 공격 5일 만에 누적된 피해가 그 정도라니. 인력과 포탄을 무지하게 쏟아 부었지만 얻은 건 거의 없죠. 그래서 공세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곧 증원군이 오겠습니다.”
“본국에서 파병 준비 중입니다. 2차 공세를 해야 하니까요. 근데 이런 식으로 가서야 병력과 포탄이 남아날지 의문입니다. 금주 전투에서 대체 뭘 봤는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측했었는데. 아, 아무튼 모두 극비니 이 참령만 알아 두십시오.”
“물론입니다.”
이갑 참령은 친분이 있던 일본 장교에게 정보를 얻었다. 말은 극비라고 하지만, 이갑에게 정보를 내놓은 시점에서 이 장교는 한국군의 귀에 들어가길 바라는 것이었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대본영의 무책임과 지휘부의 무능함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다.
“끔찍해요. 의료 현장에 제법 많이 다녀 봤지만, 이렇게 끔찍한 상황은 처음입니다. 매시간 수많은 병사가 중상을 입고 실려 옵니다. 기관총 총상을 입은 환자는 치료하기도 엄청 까다로워요. 의약품도 감당이 안 되고, 아비규환이 따로 없어요.”
“상황이 그렇게 심각합니까?”
“처음엔 일본 군의대가 알아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결국 우리에게 손을 벌리더군요. 부상자가 쏟아져 들어와서 군의대가 감당을 못합니다. 부상자만 1만이 넘는다는 말이 있어요.”
대한제국군에서 파견한 군의관 김필순(金弼淳) 정위가 안중근 정위에게 상황을 털어놓았다. 김필순은 28세로 나이는 젊지만, 제중원 의학교를 수석 졸업한 유망한 의사였다. 군의관 복무 중에 한국군 파견 군의대를 맡게 되었다.
“막사에 비명소리가 멈추지 않죠. 일본인들도 다 똑같습니다. 오카상, 오카상(어머니) 외치더군요.”
“그렇겠지요. 죽을 때 천황 찾겠습니까.”
김필순의 말에 안중근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도 군인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국적은 달라도 죽어 가는 병사들에게 동정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전상자도 많습니다만, 군의대에겐 질병도 문제입니다.”
“질병이라니요? 전염병이 돕니까?”
안중근은 깜짝 놀랐다. 다수가 밀집된 곳에서 생활하는 군대에 전염병은 후방의 무서운 적이었다.
“전염되는 건 아닙니다. 각기병이니까요.”
각기병(脚氣病, Beriberi)은 체중감소와 무기력증, 말초신경 악화와 근육약화를 동반하는 병이었다. 각기병에 걸리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각기병은 비타민 B1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질병이다. 쌀을 주로 먹는 아시아 문화권에서 주로 발생했는데, 도정된 백미만 먹으면 걸리는 질병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이후 각기병 환자가 폭증한 건, 산업화의 영향이 컸다. 증기식 도정기계가 보편화되면서 쌀의 껍질을 깎아 하얀 속살만 남은 백미가 보급되었고, 부의 상징이 된 백미에 대한 선호도가 강했다. 백미만 먹을수록 각기병의 발병 확률은 컸다.
“각기병은 대한국군에선 해결된 문제 아닙니까?”
“우리 군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배급 식단에 잡곡을 섞는 혼식으로 해서 해결했죠. 황제 폐하께서 군무대신으로 재임하실 때부터 신경 쓴 분야니까요. 지금은 발병이 거의 없습니다.”
전통적인 경험론은 잡곡을 먹으면 각기병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대적인’ 사고를 추구하던 일본 의학계는 경험론이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배격했다.
이때는 비타민이 발견되기 전이었고, 각기병의 원인으로 세균설과 영양분 부족설이 충돌했다.
“사실 혼식이 각기병의 특효라는 건 일본 해군이 먼저 발견한 겁니다. 이미 해군에선 20년 전에 해결한 문제에요.”
“알겠습니다. 해군이 하니까, 육군은 못 받아들이겠다 그거군요.”
특히 군대에서는 병역의 상징으로 백미를 보급하였는데, 부식을 먹는 장교들과 달리 밥만 먹는 사병들은 각기병에 극도로 취약했다.
이미 일본 해군은 1880년대 이후 각기병의 원인으로 영양분 부족설을 지목하고, 혼식을 배식했다. 그 결과 해군의 각기병 발병률은 급감했다.
하지만 육군은 여전히 세균설을 주장하며 혼식을 거부했다. 당대 최고라는 독일 의학에서 주장하는 세균설을 따랐다고 하지만, 실상은 ‘육군 체면에 해군의 해결책은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겁니다. 환장할 노릇이에요. 각기병 특효라고 지사제인 정로환을 처방하고 있습니다.”
“효과가 있습니까?”
“당연히 전혀 없죠. 저도 일본 해군과 한국군의 사례를 따라 식단을 개선하라고 건의했는데, 바로 거절하더군요. 하긴 해군 말도 안 듣는데, 외국 군의관 말을 듣겠습니까?”
“미치겠구만. 일본의 육·해군 대립에 심각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병사들이 질병으로 죽어 나가도 체면을 앞세우다니.”
안중근은 한심하다 못해 분노가 느껴졌다.
그 자신도 해군 장교로, 육군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한국군의 상황이 썩 달가운 건 아니었다. 한국군의 군비는 9할이 육군에 배정되어 있고, 해군은 서자 취급이었다. 군무부가 아니라 ‘육군부’라고 불려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육군에 반감을 가지거나, 해군이 육군의 위에 서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대한제국은 현재 안보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대한제국의 육·해군은 그 뿌리가 같지만, 일본제국의 육·해군은 조슈와 사쓰마라는 다른 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근원적인 문제였다.
“개전 수개월 만에 각기병 환자가 쏟아지는데, 앞으로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공세가 계속될수록 부상자들도 계속 늘어날 터인데.”
“1차 공세를 보니 요새의 방어가 보통 두터운 게 아닙니다. 앞에는 대포와 기관총, 뒤에는 각기병과 무능한 지휘관. 이래서야 공세가 성공할지나 의문이군요.”
김필순과 안중근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숨을 쉬었다. 20대 후반인 두 청년은 모두 자유주의와 아시아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심정적으로 서양 전제군주국 러시아보다는 동양 입헌군주국 일본에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일본이 이길지나 의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보라, 그것은 흰말이었다. 그 위에 탄 자는 활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관이 주어졌고, 그는 승리자로서 나아갔으니 승리하려는 것이었다.”
김필순이 갑작스레 어느 구절을 시적으로 읊었다. 일반적인 한국인이 들으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은 이해했다.
“그러자 또 다른 불같이 붉은 말이 나왔다. 그 위에 탄 자에게 사람들이 서로 살육하도록 땅 위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이 주어졌고, 또한 큰 칼이 그에게 주어졌다.”
안중근이 다음 구절을 읊자 김필순이 빙긋 웃었다.
“요한 묵시록 6장. 잘 알고 계시군요.”
“성당에 다닐 때 인상 깊게 읽은 구절입니다.”
“왠지 이 상황과 어울려서 생각이 났습니다.”
“과연, 인세에 강림한 묵시록적 세계로 볼 수 있겠군요.”
묵시록의 4기사 중 ‘하얀 말’, 혹은 ‘정복의 백기사’는 승리와 지배, 혹은 역병을 상징한다.
‘붉은 말’, 혹은 ‘전쟁의 적기사’는 전쟁과 살육을 상징한다.
‘검은 말’, 혹은 ‘기근의 흑기사’는 기근과 아사를 상징한다.
‘창백한 말’, 혹은 ‘죽음의 청기사’는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하는 초월적인 존재다.
“기근과 죽음이 닥쳐도 전쟁이 계속될까요?”
“얼마가 죽든,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의 의지에 달려 있겠죠. 쉽게 끝내려고 하진 않을 겁니다.”
두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경례를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전쟁 의지라고 한다면, 일본인들은 여전히 충만했다. 이들은 전쟁에 국가의 운명을 걸었고, 끝내 러시아군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최후의 승리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당사자, 러시아인들은 어땠는가 하면…….
놀라울 정도로 극동의 전쟁에 무관심이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하지에 접어들자, 북방의 도시에는 백야(白夜)가 돌아왔다. 자정이 가까워져도 하늘은 여전히 환했다.
페테르부르크 생활이 2년 차에 접어든 주러 한국 외교관 이위종은 여전히 러시아의 백야가 신기했다.
하지만 더욱 신기한 건, 러시아 그 자체보다 러시아인들이었다.
“지금 여기가 전쟁 중인 나라가 맞는지 의문이군.”
백야의 계절이 오자, 귀족들의 무도회는 더욱 성행이었다.
신문에는 전황이 전해졌지만, 만주 전선은 페테르부르크에서 9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귀족들은 그런 멀리 떨어진 지역의 전쟁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가문의 누군가가 장교로 만주 전선에 배치된 경우에나 관심이 있는 정도였다.
‘만주는 머니까 안 보인다고 쳐. 도시 외곽에만 나가도 비참함이 눈에 보이는데, 귀족들은 부가 넘쳐흐르고 무도회 삼매경에 빠져 산다. 어떻게 같은 도시에서 이럴 수가 있지?’
프랑스 유학파로 러시아 상류층이 선호하는 프랑스어에 유창하고, 사교성이 타고난 이위종은 익문사의 지시대로 상류층과 친분을 트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내심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에서 익힌 유교적 가르침이든, 미국과 프랑스 유학 중에 익힌 자유주의적 가르침이든, 제정 러시아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였다.
러일전쟁 발발로 일치된 ‘국민적 단결’은 불과 석 달도 되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폴란드, 발트, 핀란드에서는 파업과 저항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바르샤바 학살이 발생한 폴란드에서는 국민적 저항이 수개월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 여파는 러시아 본토까지 이어졌다.
전쟁은 군수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에 혜택을 주기는 했지만, 섬유를 비롯한 경공업과 수공업 생산, 신병과 식량의 공급자인 농업에 상당한 부담을 가져다주었다.
만주에서 전해 오는 초기 전황 중에서 좋은 소식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최후의 승리를 위한 지연전’이라는 정부의 설명은 러시아인들에게 별로 와닿지 않았다.
이미 4월부터 정부가 전쟁을 잘못 수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고, 개전 이전부터 꾸준히 악화되어 가는 경제 상황에 불만이 고조됐다.
“노동시간 감축! 임금 인상! 부당해고 철회! 공장 환경 개선! 자유노조 허용!”
“정부는 극동의 전쟁에만 신경 쓰지 말고, 국내의 열악한 환경에 더 관심을 가져라!”
5월 1일 노동절, 파업과 집회 금지 명령에도 주요 대도시에서는 파업이 발생하였다.
한동안 무풍지대였던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도 파업 행렬이 이어졌고, 이는 경찰이 조종하는 어용노조의 힘이 약해지고 사회주의자들의 힘이 강해졌다는 걸 의미했다.
정부는 가차 없는 탄압으로 무마시키기는 했지만, 이제 강경책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했다.
“헌법 제정과 기본권 보장, 선거로 선출된 대의제 의회 개설은 인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통치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유로운 러시아 만세!”
자유주의자들은 이른바 ‘해방 연맹’을 결성, 헌법 제정과 시민적 자유, 선거권 부여와 의회 개설을 청원했다.
집회 금지 명령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은 ‘연회’를 개최, 마치 1848년 2월 혁명 전야의 프랑스처럼 정치적 모임을 가졌다. 연회 운동은 제정에 반대하지 않는 자유주의 성향의 전문직들조차도 러시아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정부의 실세인 내무대신 플레베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러시아는 신성한 전제군주국이다. 신이 군주에게 부여한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
“전쟁 중에 개혁을 빙자하여 이기적인 요구를 하는 자들은 모두 엄단하겠다!”
사회주의자들의 투쟁도, 자유주의자들의 개혁 요구도 모두 정부에 의해 짓밟히거나 묵살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인민주의자들의 테러였다. 1887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래 가장 강력한 테러가 준비되었다.
인민주의자들의 정당, 사회혁명당(SR)은 산하 조직으로 ‘전투 조직(Combat Organization)’이 1902년 결성되었다. 전투 조직은 인민주의의 전통인 테러리즘 노선을 따랐다.
이들은 경찰과 헌병, 고위 관료들을 주 타겟으로 삼아 암살했다. 이미 전임 내무대신 드미트리 시피아긴(Dmitry Sipyagin)도 암살한 전력이 있었다.
플레베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SR 전투 조직은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이들은 어둠 속에서 계속 칼을 갈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는 이들의 혁명을 이루는 수단이었다.
“동지들. 중앙위원회의 지령이 떨어졌소. 우리는 죽음으로써 압제자를 청산하고, 압제받는 러시아 인민을 해방시킬 것이오.”
전투 조직은 대부분 2-30대 청년들로, 조직을 이끄는 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도 26세의 젊은이였다.
망명 중인 전투 조직 수장 아제프(Yevno Azef)를 대리하여 러시아 현지에서 테러를 지휘하는 사빈코프는 냉정하고 무자비했다. 일명 ‘죽음의 기수’였다.
“압제자는 새로운 해를 보지 못할 겁니다.”
“좋소. 이번에는 실패가 없어야 하오. 작전에 돌입합시다.”
SR 전투 조직의 최우선 타겟은 내무대신 플레베였다. 내무부는 모든 압제의 근원이었고, 특히 플레베는 1903년 키시네프 학살과 1905년 바르샤바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악명 높은 인사였다.
인민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소수민족이 한마음으로 그를 증오했다.
플레베를 노린 암살 기도는 이미 3번이나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공하고야 말리라.
6월 8일(그레고리력 21일), 이즈마일롭스키 대로.
플레베는 여름궁전에 있는 황제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내무부를 떠났다.
내무대신을 태운 마차가 역을 향해 이즈마일롭스키 대로를 지나갔다. 경호대가 마차를 호위했다.
그 순간, 일단의 청년들이 마차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폭탄을 던질 4인의 테러리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신호와 함께, 첫 번째 청년이 신문에 싼 폭탄을 들고 돌진했다.
“테, 테러다!”
콰아아앙!
경호대가 필사적으로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폭탄은 정확히 마차 위에서 폭발했다.
대로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마부와 마차에 타고 있던 내무대신은 즉사했다. 플레베는 몸에서 머리가 잘려나가고 산산 조각나 죽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빈코프는 천천히 돌아서서 대로에서 벗어났다.
그는 가방 속에 폭탄을 짊어진 4번째 테러리스트였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 중절모를 쓰고 신사복을 입은 사내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보라, 그것은 푸르스름한 말이었다. 그 위에 탄 자는 그 이름이 죽음이었으며, 저승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땅의 사분의 일에 대한 권력이 주어졌으니, 그것은 칼과 기근과 죽음의 전염병과 땅의 맹수들을 가지고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사빈코프는 요한 묵시록 6장 8절을 속으로 되뇌었다.
내무대신의 죽음은 시작에 불과했다.
창백한 말을 탄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수가 거대한 낫을 들고 죽음을 추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