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10
– 91화에 계속 –
2부 91화 모로코 위기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요양 회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사상자는 일본군이 더 많다 할지라도, 눈에 보이는 결과는 일본군이 요양을 함락시키고 러시아군은 퇴각했다는 점이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에게 이겨도 득이 되지 않는 ‘피로스의 승리’를 안기고 있었지만, 전쟁 초반의 결과만 놓고 보면 일본군은 연승이고 러시아군은 연패였다.
특히 양군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한 요양 회전의 결과는 일본에 좋은 선전거리가 되었다.
“무적의 황군, 요양 회전에서 대승!”
“황군의 진격 앞에 러시아군은 추풍낙엽!”
“러시아군은 황군의 돌격 구호만 들어도 도망가기 바쁘다!”
러시아는 ‘전략적 후퇴’임을 강조하며 사상자는 일본군이 더 많다는 점을 지적했으나, 일본은 늘 그렇듯이 승리를 과대 포장하여 자국과 전 세계에 뿌렸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한도 끝도 없는데…….”
만주 전선의 실상을 알고 있는 일본군 사령부로서는 누적되는 사상자의 수에 고심했다.
일본군의 누적 사상자는 6만에 이르렀으니, 개전 초기 상비군 20만의 3할에 해당되는 수치였다. 동원령으로 후비군을 대거 동원하면서 전선에 투입된 병력은 30만까지 늘어났으나, 앞으로 전쟁이 길어질수록 사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개전 5개월 만에 전비를 국가 예산 수년 치로 쓴 일본으로선, 전비의 부족도 심각한 문제라 요양 회전의 결과를 과장해서 타국에 지원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요양의 승리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요양 다음은 봉천이요, 여순도 곧 함락될 예정입니다. 한국이 참전한다면 만주 진격을 향한 다시없을 기회가 될 것입니다. 동양의 연대를 만방에 보여 주십시오. 귀국의 참전을 희망합니다.”
일본은 한국군의 참전을 희망했다. 일본은 아시아주의만 아니라 한국의 ‘고토 수복’ 욕구를 자극했다. 그쪽이 한국 여론에 더 효과적이라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대한국군은 아직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보급에 있어서 귀국에 부족함이 없도록 만전을 다하고 있으니, 참전 여부는 확답해 줄 수 없습니다.”
물론 일본군의 실상을 파악하고 있는 대한제국으로선 순순히 응할 생각이 없었다. 국제 정세의 변화를 면밀히 살피고 있는 이선은 참전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일본은 한국에만 참전을 요청하고 있는 게 아니라, 동맹인 영국에도 애걸했다.
“전선에서 일본군이 거듭 승리하고 있습니다만, 전비가 부족합니다. 동맹 영국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부디 전쟁 공채를 매입하거나 차관을 제공해 주시길 바랍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건 영국도 원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사정은 이해합니다만, 현재 유럽의 정세가 심상치가 않아서……. 극동의 전쟁에 집중할 수 없다는 상황임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럽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건, 영국의 단순한 핑계가 아니었다.
일본이 세계를 향해 외친 요양 전투의 승리 전보는 더 놀라운 소식에 묻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바로 카이저의 위협이었다.
* * *
1905년 6월, 독일 베를린.
개전 초기부터 카이저 빌헬름 2세는 러시아의 전쟁 승리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그의 호언장담대로 베를린 금융가가 움직였다.
“우리 독일인들은, 러시아가 유럽 기독교 문명을 대표하여 야만적인 황인종들과 성전을 수행하고 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베를린 금융가는 2억 3천만 루블의 러시아 전쟁공채를 사들였다. 동맹국인 파리 금융가가 제공한 3억 루블에 근접하는 액수였다.
페테르부르크가 베를린의 협조에 기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러시아는 결코 독일의 호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승전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물론 세상에 공짜란 없었다. 연리 5%의 이자가 붙었고, 독일로서는 이자보다 더 중요한 노림수가 있었다.
독일은 러일전쟁의 격화를 바라마지 않고 있었다. 러시아가 극동 전선에서 발목이 묶여 유럽의 정세에 개입할 기회 자체를 막길 원했다.
“러시아가 극동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카이저께서 모로코를 방문함으로써 계획은 시작된다.”
참모총장 슐리펜 상급대장과 외무부 정치국장 홀슈타인이 계획한 예방전쟁.
카이저의 속내가 무엇이든 간에, 그는 ‘여름휴가’를 지중해에서 보내는 데 동의했다.
매년 여름마다 황실 전용 호화 요트를 이끌고 항해를 떠나는 걸 즐기는 카이저였다.
1905년 여름휴가의 중요한 목적지는 바로 모로코였다.
7월 1일, 모로코 탕헤르.
탕헤르에 상륙한 카이저는, 백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모로코 술탄 압델아지즈(Abdelaziz)는 카이저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모로코인들은 독일 국기를 휘날리며 환호했다. 프랑스의 경제적·군사적 압박으로 주권을 위협받고 있는 모로코로서는, 카이저의 방문이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열렬한 환대에 카이저는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독일-모로코 정상회담이 끝난 후, 빌헬름 2세는 엄숙한 어조로 선언했다.
“오늘 짐은 술탄과 우애로운 회담을 가졌다. 모로코는 자유로운 독립국가의 지위를 갖고 있다. 짐은 모로코가 술탄의 주권 아래, 모든 국가들의 평화로운 경쟁이 있기를 희망한다. 한 국가의 독점 혹은 병합 없이 절대적 평등의 원칙이 유지되는 바란다.”
마치 독일이 반(反)식민주의 후원자라도 된 것 같은 자주독립과 문호개방 선언이었다.
이는 명백히 영불협상으로 모로코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킨 프랑스를 겨냥했고, 프랑스의 배후에 있는 영국을 향한 선언이기도 했다.
“카이저의 선언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일방적인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초기 대응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이미 모로코가 프랑스의 세력권이라는 건 대부분의 열강이 동의했으니, 즉흥적인 카이저가 늘 그렇듯이 환영 분위기에 취해 떠든 것이라고 치부했다.
“모로코는 자주독립국이다. 프랑스가 요구하는 소위 내정개혁 요구는 모로코의 주권을 침해한다. 이에 단호히 거부하는 바이다.”
카이저의 지지에 고무된 술탄은, 프랑스가 요구한 ‘내정 개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때서야 프랑스는 모로코가 세력권에서 이탈할 가능성을 감지하게 되었다.
마침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민족주의적 감정이 분출되는 날이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굴욕적인 패배 이래, 프랑스에는 보복주의(Revanchism)가 득세했다. 독일에 원수를 갚고 알자스-로렌 수복을 열망하는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의 행진이 이어졌다.
“프랑스는 1871년의 복수를 원한다!”
“알자스-로렌의 동포들이 독일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날을 기다린다!”
“프랑스 만세! 공화국 만세!”
“일어나라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 우리에 대항하여, 압제자의 피 묻은 깃발이 일어났도다!”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은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르며 대독(對獨) 보복을 외쳤다.
프랑스 여론이 독일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상황에서, 독일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주권국가 모로코의 개혁은 프랑스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 모로코에 진정 필요한 개혁이 무엇인지, 열강이 참여하는 국제회의 개최를 제안하는 바이다.”
모로코 사태가 국제적 문제로 비화되길 원치 않았던 프랑스 정부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독일은 일을 크게 부추기고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제회의를 거부한다. 대신 모로코 문제 논의를 위한 프랑스와 독일의 양자회담을 제안한다.”
정작 위기를 촉발시킨 장본인인 카이저는 지중해에서 요트 여행 중이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방문한 후, 그리스 코르푸 섬의 궁전에서 망중한(忙中閑)을 보내고 있었다.
8월이 되어서야 카이저는 베를린으로 복귀했다.
“모로코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독일의 온건한 제안은 프랑스에 의해 거부되었다. 프랑스는 정녕 독립국가 모로코의 주권을 박탈할 것인가? 독일은 다음에 대한 회답을 요구한다.
첫째, 프랑스는 모로코의 독립을 침해하겠다는 의도를 포기하라.
둘째, 모로코의 문호를 개방하여 열국에 경제적 평등을 보장하라.
셋째, 모로코 문제를 논의할 국제회의 개최에 동의하라.”
독일의 거듭되는 요구는 프랑스에 분노를 촉발시켰다.
프랑스인들 대부분은 모로코에 어떤 이권이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숙적 독일이 간섭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독일이 무슨 자격으로 모로코 문제에 끼어드는가!”
“정부는 독일의 부당한 간섭에 단호히 대응하라!”
민주공화국인 프랑스는 여론의 향방이 중요했고, 내년 선거를 앞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현재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좌익 연합(Bloc des gauches)은 우익 못지않게 독일에 강경했다.
영불협상을 주도한 외무장관 델카세는 영국의 지지를 확인하고, 독일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프랑스 공화국은 단호히 거부한다. 이미 양자회담을 제안했음에도, 굳이 모로코 문제를 국제회의에서 다루겠다는 독일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8월, 여름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안 위기도 고조되었다.
“독일 제국은 모로코의 주권을 지지하고, 독일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할 것이다. 프랑스가 독일의 제안을 끝내 거부한다면, 뒷일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제국총리 베른하르트 폰 뵐로우는 제국의회에서 전쟁을 암시하는 연설을 했다. 총리 자신은 전쟁을 원치 않았지만, 프랑스를 굴복하기 위한 전략적 허세였다.
9월 2일은 스당 전투 기념일로, 독일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분출되는 날이었다.
“35년 전에 우리의 부친들이 숙적 프랑스를 굴복시켰듯, 조국을 위해 싸우자!”
“사랑하는 조국이여, 안심하라. 방비는 굳건히, 충실히 유지되고 있다. 라인 강의 방비는!”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인 ‘라인 강의 파수꾼(Die Wacht am Rhein)’이 제창됐다.
군국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여론이라면 세계에서 이 당시 독일을 따라갈 나라가 없었다.
프랑스가 독일의 패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군사력으로 다시 굴복시키면 그만이었다.
모로코에서 촉발된 위기는 9월 중순에 절정을 맞이했다.
9월 15일, 프랑스는 전군에 휴가를 취소하고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동원령은 최후의 수단이기에 유보되었지만, 전쟁을 각오한 태도였다.
1주일 후, 독일이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프랑스가 끝내 타협하길 거부한다면, 독일은 모로코와 군사동맹을 체결하겠다. 모로코 문제로 전쟁까지 각오할 것인지, 회담에 응할 것인지 잘 판단하라.”
독일의 노골적인 위협에 프랑스 정부는 고심했다. 동맹인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 휘말려 극동에 발이 묶여 있고, 영국과는 우호협약을 맺긴 했지만 군사동맹 관계는 아니었다. 영국이 외교적 지지의사는 밝혔지만,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개입할 의무는 없었다.
“대영제국 정부는 프랑스 공화국을 확고히 지지합니다. 독일의 전쟁 위협은 전략적 허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독일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일단은 국제회의에 응하도록 하시지요.”
영국은 국제회의 개최에 동의하라고 조언했다.
프랑스 정부는 분노를 삼키며 외교적 해결을 선택했다.
“모로코 문제로 인해 독일과 전쟁까지 할 수는 없소. 일단 일보후퇴 하도록 합시다. 영국이 우리를 확고히 지지하기로 했소. 국제회의가 개최되면 대부분의 열강은 프랑스를 지지할 것이오.”
10월 1일. 강경론을 외치던 외무장관 델카세가 사임하고, 프랑스는 국제회의 개최에 동의했다.
문제는 독일의 태도였다.
“폐하,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프랑스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극동의 수렁에 빠져 있고, 현재 프랑스는 고립무원입니다. 프랑스를 상대로 예방전쟁을 벌여 굴복시켜야 합니다.”
참모총장 슐리펜과 외무부 정치국장 홀슈타인은 카이저에게 거듭 예방전쟁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프랑스가 이미 국제회의에 동의했는데, 대체 무슨 명분으로 전쟁을 하잔 말이오?”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입니다. 폐하께서 결단만 내려 주시면,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영국이 가만히 있겠소? 영국은 결코 독일의 프랑스 공격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오.”
“영국이 보어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재, 프랑스를 위해 전쟁까지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건함경쟁으로 인해 영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이 완성되기 전에 공격해야 합니다.”
카이저는 고심했다. 우호적 관계였던 영국과의 관계를 박살 낸 건 카이저의 건함정책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카이저는 영국과 결정적으로 대립하는 걸 원치 않았다.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나라, 영국에 대한 찬탄과 열등감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이 카이저를 지배했다. 독일이 영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제국으로 떠오르게 하고 싶지만, 영국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제국은 평화 위에서 번영해야 하오. 전쟁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어야만 하지. 회담 수락이 프랑스의 기만전술일 수도 있으니 전쟁 대책은 세워 두되, 짐의 명령 없이 움직이지 마시오.”
카이저는 언제나 강한 허세를 보였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까지 각오할 용기는 없었다.
조건을 붙여 두긴 했지만, 카이저는 일단 전쟁 대신에 평화를 선택했다. 제국총리 뵐로우와 내각도 국제회의를 지지했다.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던 슐리펜과 참모본부는 카이저의 우유부단함에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 프랑스를 꺾어 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터인데! 모로코 위기를 촉발시키는 걸로 폐하께서도 전쟁에 동의하는 거라고 생각했었건만!”
“폐하께서 입장이 바뀌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프랑스와 대화가 제대로 안 되면, 폐하의 생각이 언제 바뀔지 모릅니다.”
“열강을 소집하는 국제회의 개최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적어도 6개월은 걸리겠죠. 내년 봄까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 차라리 더 잘됐네. 그동안 러시아는 극동으로 병력을 더욱 빼돌릴 테니까. 일본의 선전을 기대해야겠어. 6개월간 전쟁 준비를 하고, 내년 봄을 기약한다.”
카이저와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도, 독일 군부는 전쟁 가능성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1906년 봄에 예방전쟁을 벌이겠다는 계획을 남겨 두었다.
독일 참모본부는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관계를 촘촘히 분석하여 전쟁 계획을 짰다.
하지만 전쟁기계라는 이들도 간과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대서양 건너편에 있기에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은 나라, 바로 미합중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