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18
– 99화에 계속 –
2부 99화 가쓰라-태프트 회담
이선의 특명에, 김옥균은 난색을 표했다.
“하오나 폐하, 이리되면 일본과의 관계가…….”
“일본은 모를 거요. 그러니 밀약이지. 외교라는 게 다 그렇소. 일본은 미국에 밀약을 제안하지 않을 것 같소? 반드시 할 거요. 대한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본래 영국은 일본을 먼저 선택했소. 그렇다면 미국은 우리가 먼저 끌어들여야 하오.”
이선은 실제 역사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짐의 생각에 20세기의 패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갈 것이고, 특히 태평양에서는 더욱 그렇소. 이 전쟁은 그 시기를 앞당기게 되겠지. 미국에 얼마나 더 매력적인 제안을 하는가, 여기에 미국의 파트너가 결정될 거요. 러시아와 일본의 국력이 소모되고, 대한의 국력이 상승한 지금이 절호의 기회요.”
황제의 특명을 김옥균은 곰곰이 생각했다.
국가 대 국가 간의 조약도 아니고, 황제인 이선이 대통령도 아닌 전쟁장관 태프트와 대등하게 밀약을 맺을 수는 없으니, 총리인 김옥균이 나서야 했다.
‘잘 풀리면 국운을 바꾼 혜안이 되겠지만, 만약 일이 안 되면 총리가 모든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리되면 사임만으로는 부족할 터. 정계 은퇴를 각오해야겠지.’
김옥균은 고심 끝에 결정했다.
“폐하, 신은 언제나 하명하신 바를 따를 뿐이옵니다. 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고맙소, 총리. 경이 아니면 짐이 누구를 신뢰하겠소? 짐의 고굉(股肱)은 언제나 경뿐이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의 치하에 김옥균은 정중히 예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내심 쓴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나는 국가의 머리가 아니라 팔다리일 뿐인가.’
고굉지신(股肱之臣)은 신하에게 쓸 수 있는 최고의 칭송이지만, 결코 머리가 될 수는 없었다.
‘임오년 이래, 25년째 섬겨 온 주군이다. 사반세기를 지도자로 떠받들었다. 비록 내 생각과 다르다 할지라도, 어심을 따르는 것이 신하된 도리일 터. 성상은 언제나 옳았고, 누란의 위기에 놓여 있던 조선을 오늘날 반석의 자리까지 올려놓았다. 이번에도 현명한 성단이시길.’
젊었을 때는 그 자신이 조선의 머리가 되길 원했던 김옥균이었지만, 팔다리로 만족해야 했다.
김옥균은 개화당이 떠받드는 지도자, 자신이 선택한 주군을 믿었다.
1월 하순, 미합중국 전쟁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의 동아시아 순방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을 떠난 태프트는 25일 요코하마 항에 입항했다.
태프트의 방일에 일본 정부는 열렬히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장관 각하. 일본제국은 각하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총리 각하.”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이하 각료들이 태프트의 방일에 매달렸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현재 미국은 일본의 물주나 다름없었다. 달러가 아니면 전쟁을 수행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막대한 차관을 일본에 제공했다. 일본이 발행한 전쟁 공채의 대부분은 미국 자본이 사들인 것이었다.
1월 27일, 도쿄에서 본격적인 회담이 개시되었다. 통역 한 사람만을 두고, 가쓰라와 태프트의 단독 회담이었다.
“장관 각하,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은 미국을 통해 전쟁을 중재하길 원합니다.”
“미국은 적극적으로 중재에 협력하겠습니다. 일본이 원하는 강화 조건을 들려주시지요.”
“여기 있습니다.”
1. 러시아는 일본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것. 최소 5억 달러.
2. 만주를 청국에 환부하고 군대를 철수할 것.
3. 한국과 남만주가 일본의 세력권임을 인정할 것.
4. 동청철도 남만주지선, 하얼빈-여순 구간을 일본에 양도할 것.
5. 요동반도 관동주 조차지에 관한 특권을 일본이 계승할 것.
6. 만주에서 각국의 상공업의 문호개방을 선언할 것.
7. 사할린 및 연해의 도서를 일본에 할양할 것.
8. 연해주 연안 및 오호츠크 해에서 어업권을 인정할 것.
9. 블라디보스토크는 군항이 아닌 자유무역항으로 삼고, 군비를 제한할 것.
일본이 내미는 청구서를 보고 태프트는 놀랐다. 이는 완전한 승리자, 정복자의 요구였다.
여순 함락과 태평양 함대 소멸이 대단한 결과임에는 틀림없었으나, 일본이 이 정도 요구를 러시아에 강요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는 당연히 묵살할 것이다.
“귀국의 제안은 접수하겠습니다. 다만 러시아가 현재로선 강화에 응하지 않으려고 하는군요. 최소한 만주군과 발트 함대가 있는 이상.”
“육군과 해군이 모두 적을 격파할 것입니다. 그러면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난 러시아가 강화에 응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가쓰라는 태프트에게 호언장담을 했다. 사실상 야마가타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가쓰라로선, 앵무새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선, 미국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1906년도 전쟁 공채를 발행하였으니…….”
“이번에는 얼마가 필요합니까?”
“최소 5천만 달러는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께서 주선해 주실 겁니다.”
최초로 전쟁 공채를 사들인 유대인 자본가 시프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형 자본가들이 움직였다.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는 단독으로 3천만 달러의 공채를 구매했고, J.P 모건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못지않게 공채를 사들였다. 대형 자본가들도 잇달아 거액의 달러를 준비했다.
이들은 모두 대통령 루스벨트의 보증을 받아 일본에 돈을 빌려주었다.
이렇게 미국이 조달한 전쟁 자금은 3억 달러(6억엔)에 달했다.
「일본인의 피로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만주의 문호를 미국에 개방한다. 전후 미국 자본은 만주에 적극적으로 침투한다.」
당연히 세상에 공짜란 없었다. 미국의 강력한 지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지만,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싸워 줘야 했다.
“중간 정산이 필요합니다. 본인이 이번에 일본을 방문한 바는, 미합중국 대통령께서 일본 정부의 확실한 보증을 원하길 때문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귀국의 일부 아시아주의자들은 필리핀 망명자들을 부추기는 모양입니다만, 필리핀은 미국의 세력권이며, 전쟁 결과에 상관없이 일본은 결코 필리핀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령 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 일본이 끼어드는 바람에, 미국은 필리핀을 완전히 병합하지 못했다. 미국이 병합한 괌을 제외한 마리아나 제도는 일본령 남양군도가 되었다.
미국은 자주 성향의 필리핀 제1공화국을 친미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외교권과 재정권을 빼앗아 사실상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바로 그 역할을 담당했던 이가 주 필리핀 민정장관 태프트였다.
“물론입니다. 필리핀 문제에 관여하려는 자들은 극소수의 정신 나간 재야인사에 불과합니다.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어떠한 적대적인 의도가 없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1안은 가볍게 정리한 뒤, 태프트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전후 동아시아의 평화는 공조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미국과 영국, 일본과 한국 4개국이 주도하여, 원만한 합의를 통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4국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주도하게 될 겁니다.”
“미국과 영국, 일본이 함께해야 한다는 건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아닙니다.”
가쓰라는 한국에 대해 분명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한국은 명목만 영일동맹에 합류했을 뿐, 황제의 내심은 여전히 러시아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건 지나간 일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일본이 간절하게 거듭 참전을 요청하고 있음에도, 한국은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끝내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게 벌써 1년째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그럴 수도 있지요. 한국의 근대화는 귀국보다 20년 정도 늦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0년 전의 전쟁에서 일본은 청국의 압제를 받는 한국을 도와 독립시켜 주었건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가쓰라는 한국이 얼마나 동맹으로서 불성실한지, 여러 사례를 들어 태프트에게 거듭 호소했다.
마치 선생님께 짝꿍을 혼내 달라고 고자질하는 소학교 학생의 태도 같았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군요. 한국은 일본의 승리를 위해서 꽤나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돈도 받지 않고 무기와 각종 군수품을 제공한다고 들었습니다.”
“당장 현금은 지불하지 못해도, 공채로 사들여 전후에 지급할 예정입니다. 한국 군수상인들이 일본인의 피로 돈을 벌고, 그 결과 공업이 크게 발전했음에도, 한국 정부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국력을 소모시킨 뒤에, 러시아와 단독 협의하여 만주를 양분하려는 속셈이 아닌지? 어쩌면 은밀히 러시아에 군사정보를 제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방을 거듭하는 가쓰라의 태도에 태프트는 내심 졸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태도가 일본이 보기에 도의가 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국제적으로 문제 될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한국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고, 러시아와 내통 중이라는 건 일본 군부의 피해망상에 불과해 보였다.
“그런 관점도 있을 수가 있겠군요.”
“그러니 한국은 전후 문제를 논의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러시아의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가쓰라는 전후 질서에 한국을 배제하고 영미일 3국으로 국한하자고 요청했다. 태프트는 확답을 주지 않은 채 일단 듣고만 있었다.
“러시아를 몰아내고, 전후 만주의 문호를 개방하여 열국에 동등한 기회를 지공하겠습니다. 미국에도 굉장한 기회가 될 겁니다. 남만주 철도의 운영에도 미국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일본의 지도를 받는 남만주는, 번영하는 지역이 될 것입니다.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는, 영국과 미국에도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부디 귀국은 일본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 대통령께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쓰라는 태프트와 회담을 했지만, 완전한 의견일치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태프트는 한국을 거듭 비방하는 가쓰라의 태도에 불성실함을 느꼈다.
한국은 미국이 구상하는 4국 협력체제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는데, 일본은 굳이 한국을 러시아의 대리인으로 몰아 배제하려고 들었다.
태프트로서는 일본이 한국의 배제를 시작으로 동아시아의 이익을 독점하려고 하는 게 아닌지, 그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국 다음에는 미국도 배제하려는 게 아닌가? 역시 일본은 영국의 하수인에 불과한가? 아니면 모든 이권을 독점하려는 군국주의적 발로인가?’
태프트는 오히려 일본의 배후에 영국이 있는지 의심했다. 영미가 최근에 협력관계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본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미국으로선 영국은 언젠가 뛰어넘어야 할 산이었다.
국내정치의 측면에서 보아도, 일본계 이민자들이 계속 서부에 늘어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장차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으로 밀착해서,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미국을 압박하려 한다면 불쾌한 가정이었다.
태프트는 루스벨트처럼 친일적인 인사는 아니었고, 일본을 지나치게 키워 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한국을 4국 협력체제로 끌어들여 일본을 은근히 견제할 국가로 삼으려 하는데, 일본이 기를 쓰고 반대하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프트는 가쓰라와의 회담 이후 메이지를 알현하고, 이토를 비롯한 원로들과 회견했다.
“4국 협력체제에 동의합니다. 근데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승리가 중요합니다. 승리를 위해 한국이 참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관께서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토는 훨씬 합리적인 제안을 들고 와, 가쓰라보다 좋은 인상을 받았다. 다만 태프트로서는 의구심이 들었다. 정부, 원로, 육군, 해군 모두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달랐던 것이다.
‘골치 아프군. 일본은 단일 협상 창구가 없나? 과연 한국이 정말로 러시아의 대리인인지, 아니면 미합중국의 대리인이 될지, 직접 살펴봐야겠군.’
* * *
1주일간의 일본 체류를 마치고, 태프트는 2월 2일 인천항에 입항했다.
한국의 환대는 일본 못지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이상이었다.
“대한제국에 방문하심을 환영합니다, 장관 각하. 저는 황자 이영이라고 합니다.”
접반사를 맡은 이는 다름 아닌 영친왕 이영이었다.
“허허, 황자 전하께옵서 직접 맞이해 주시다니요. 큰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제가 각하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황성으로 가는 경인선 기차도 황실 전용 객차가 제공되었다. 태프트는 크고 뚱뚱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황송해했다.
“이거야 원, 이 뚱보가 타도 이렇게 널찍하고 좋다니.”
“각하의 거구는 정말로 듬직합니다.”
“하하, 전하의 영어 실력이 아주 훌륭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연기하였습니다만.”
“프린스 강(의친왕)께서는 미국에서 공부하셨던 거로 기억합니다만, 전하께서는 영국이십니까?”
“저도 형님처럼 미국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만, 황실에서 그리 정한 일이라서요.”
“미국으로 오시지요. 최상의 환대를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기차는 머지않아 황성역에 도착했다. 역에는 총리 김옥균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관 각하, 대한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총리 김옥균입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총리 각하.”
김옥균은 이영과 교대해 태프트를 영빈관으로 지정된 호텔로 안내했다.
전차 역시 이화 무늬가 새겨진 황실 전용 객차였다.
“저기 저 큰 건물은 뭡니까?”
“세브란스 병원과 의학교입니다. 한국의 현대적 의료를 대표하는 기관이지요. 미국인이 세운 의학교를 통해 양성되는 한국인 의사들. 바로 한미우호를 상징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최초로 수교한 서양국가, 미국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배웠습니다.”
김옥균은 한껏 미국을 치켜세웠다. 외교적인 표현이라 할지라도, 과히 듣기 좋은 이야기였다.
전차 밖으로 서울 풍경을 구경하던 태프트가 솔직한 평가를 내렸다.
“서울은 아름답군요. 동서양의 미가 잘 조화된 것이, 도쿄 못지않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도쿄보다 더 낫군요.”
“서울은 워싱턴을 모델로 도시계획을 했습니다. 전기, 수도, 철도, 전차, 전화 등 각종 기반시설이 미국에서 들어왔지요. 과연 대한국의 모범은 미합중국입니다.”
찬사가 거듭 이어졌다. 지나친 아부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김옥균의 사교적인 태도가 워낙 자연스러워 역겹지 않았다.
청년 시절부터, 김옥균은 서양 외교관들이 가장 어울리기 좋아하는 조선 관료였다. 김옥균의 친서양적인 태도, 사교성과 빼어난 화술은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좋았다.
태프트가 황성에 체류하는 동안, 이선과 김옥균은 어떻게든 최고의 외교적 성과를 낼 생각이었다.
한미 밀약을 향한 한국의 환대 외교는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