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24
– 105화에 계속 –
2부 105화 제국의 침몰
봉천 회전 이후, 일본의 상황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본토의 후비군 5만이 급하게 만주로 향했지만, 만주군이 재기불능 상태라는 걸 정부와 대본영도 깨닫고 있었다. 도쿄에 도착한 고다마는 강화의 필요성을 거듭 설득했다.
“어떻게든 조속히 강화를 해야 한다. 하지만 러시아가 극동군과 발트 함대를 보유한 상태로는 강화 회담에 응하지 않겠지. 극동군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으니, 발트 함대는 반드시 전멸시켜서 협상장으로 끌어내야 한다.”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전비는 이미 18억 엔이나 소모한 상태였다. 대부분 외채였고, 봉천 회전 이후에는 더 이상 돈을 빌려주겠다는 국가나 기업도 없었다.
4월 1일, 일본 정부는 강화 방침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전제조건은 발트 함대의 섬멸이었다.
대본영은 최후의 희망을 해군에게 걸었다. 연합 함대가 발트 함대를 격파하고 제해권을 계속 지배하고 있으면, 러시아의 진격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아군, 봉천에서 요양으로 전략적 후퇴! 비록 중과부적으로 철수하기는 했지만, 적군의 피해가 훨씬 다대했다. 요양에서 대반격을 준비 중!」
아무리 일본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지만, ‘봉천에서 요양으로의 전략적 후퇴’가 패배가 아니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개전 이후 처음으로, 전쟁의 결과를 의심하는 여론이 솟아났다.
“제국 해군의 어깨가 무겁다. 제군, 반드시 발트 함대를 섬멸하여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연합 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 중장은 필승의 각오를 역설했다. 육군이 끝내 패퇴한 상황에서, 해군마저 무너진다면 끝장이었다.
4월 이내로 격돌할 것은 분명했다. 연합 함대는 발트 함대를 격퇴하는 정도가 아니라, 섬멸시키는 승리를 거둬야 했다.
“단 몇 척이라도 살아남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한다면, 제해권을 뒤흔들 시도를 하겠지. 그럼 러시아가 강화에 응할 리가 없다.”
사실 러시아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육군과 해군이 아니라 혁명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고려할 수 없는 일본 해군으로서는 발트 함대의 격파를 종전의 지름길로 여겼다.
“문제는 적이 어느 길로 들어오느냐인데…….”
발트 함대는 4월 초 현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캄란(Cam Ranh)만에 있었다. 머나먼 항해의 끝을 눈앞에 둔 발트 함대는, 후속 함대(제3태평양 함대)를 기다리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최단 경로가 아니겠습니까?”
러시아 함대가 동중국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라면 세 가지 루트가 있다.
1. 대한(쓰시마)해협을 돌파하여 동해를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진입.
2. 태평양으로 우회하여,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진입.
3. 태평양으로 우회하여,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라페루즈(소야) 해협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진입.
역시 가능성이 가장 큰 건 1번이었다. 대한해협이라는 최단 경로를 두고 뺑 돌아가는 건, 반년간 항해를 해 온 함대가 택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회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해군에는 격론이 오고 갔다.
“진해만에 계속 있을 건지, 홋카이도로 북상해야 할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올 초부터, 일본 연합 함대 본진은 대한제국 마산부 진해만에 정박했다.
진해만은 실로 천해의 양항이었다. 평균 수심 20m에, 섬으로 외해(外海)와 차단되고 내부에는 작은 만들이 곳곳에 형성되어 있어 항구 발달에 유리했다.
대한제국 해군은 건군 이후 진해만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함대의 본거지로 삼았다.
러시아와 일본 모두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1903년 러시아가 진해만 사용을 요청했을 때 일본은 개전 사유라고 펄펄 뛸 정도였다.
개전 이후 일본 해군은 진해만의 사용 허가를 받았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지급한 돈에는 해군 기지 사용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합 함대는 여순 함락 이후 나가사키 사세보와 진해만에 주력 함대를 배치하고, 대한해협을 동서 양쪽에서 감제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맙시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으니, 차분히 판단하지요.”
연합 함대 참모부는 끊임없이 해도를 들여다보고 정보를 파악하며 발트 함대의 경로를 계산했다.
“귀국 해군의 고민이 참으로 많겠습니다.”
“이래저래, 그렇습니다.”
대한제국 해군 제1전단 사령관 이규풍 참장과 일본제국 해군 제2함대 참모장 사토 데쓰타로 정령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돈독한 사이였다.
이순신의 직계 10대손으로, 충무공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대한제국 해군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 된 이규풍이었다.
일본 해군의 두뇌라 불리는 사토는 자타공인 이순신 숭배자로, 이순신에 대한 열렬한 숭배는 이미 국적을 넘어선 상태였다. 사토는 이순신을 찬양하는 걸 넘어서, 일본 해군의 사표(師表)는 이순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역사상 최고의 해군 지휘관은 동양의 이순신과 서양의 넬슨이다. 하지만 넬슨조차도 이순신에 비하면 부족하다. 이순신은 실로 세상을 뒤덮을 영걸이자 동양 유일의 해군 명장으로, 동양평화를 외치는 제국 해군이 어찌 이순신을 사표로 섬기지 않겠는가?」
사토가 진심으로 이순신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해군의 사표로 내세우는 건 정략적인 목적도 컸다.
육군은 전국시대의 다이묘들, 즉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을 내세웠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요토미를 숭배했다. ‘진취적인 기세로 조선과 명나라를 정벌하고, 인도까지 떨쳐 나가려 했던’ 도요토미는 대륙으로 웅비하고자 하는 육군의 모범이었다.
해군은 이를 망상으로 여겼다. 그 도요토미의 야욕을 무너트린 장본인이 바로 이순신이니, 육군의 망상적 전략을 무너트리려면 이순신을 내세워야 했다. 해주육종의 상징으로 이순신이 소환되었다.
「이순신은 그 자신의 힘으로 태합(太閤, 도요토미)의 야망을 격파하여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균형을 지켜 냈으니, 넬슨이 나폴레옹의 야망을 격파하고 영국의 독립과 동양의 균형을 지켜 낸 것과 진배없다. 태합과 나폴레옹이 지상에서 아무리 승리해 봐야 소용없었다. 제해권의 장악으로 인한 전쟁의 승리. 실로 제국 해군이 나아가야 할 길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전쟁 이전부터 이순신을 열렬히 찬양하던 사토였지만, 러일전쟁이 심화되자 신봉은 더 강해졌다. 러일전쟁이야말로 사토의 복안, 즉 이순신의 전략을 계승하여 승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진해만에 주둔하게 되자, 사토는 휘하의 장교들을 데리고 통영 충렬사를 방문하여 참배했다.
“제군, 모두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라! 이분이 있었기에 동양의 해전사도 서양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이규풍도 자신의 선조를 숭배하는 외국 군인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300년 전 충무공이 수많은 왜병을 물귀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역설적이지만, 이규풍이 이순신의 직계손이라는 걸 알게 된 사토는 반가워하며 의형제를 맺자고 했다. 이규풍이 1865년생으로 한 살 위라, 사토는 그를 형님으로 대접했다.
“작금의 일본 육군은 도요토미의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궤멸당할 위기지요.”
“제국 해군은 마치 300년 전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였던 충무공의 상황과 같습니다. 육전에서의 패배를 극복할, 해전의 승리와 제해권의 장악.”
사토는 진심으로 일본 해군의 상황이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발트 함대를 섬멸해야 하는데, 그들이 어떤 경로를 택할지 고민이겠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제독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참모장은 어찌 생각합니까?”
“제 의견이라면, 단연코 대한해협, 그중에서도 쓰시마 동편 수로입니다. 그런데 참모부에서는 쓰가루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사토는 이규풍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이규풍 개인도 러시아와 일본 중에 택하라면, 일본이 차선이었다.
1903년 러시아 함대가 진해만에 주둔할 당시에 상국 노릇 하는 것이 여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일본 해군은 처신을 조심했고, 진해만에 주둔해도 수병들은 대민 마찰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군함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더욱이 도고가 이끄는 연합 함대는 맹연습으로 한국 해군을 감탄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황제가 이규풍을 올해 초에 전단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은밀히 명한 바가 있었다.
“지상은 러시아가 승리하더라도, 해상만큼은 일본이 승리해야 균형이 맞소. 경은 일본 해군의 승리를 위해 협조하도록. 그들이 진해만에 머무는 동안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시오.”
“예, 폐하.”
“짐은 해군에 문외한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일본은 발트 함대의 경로를 놓고 고민하리라 생각하오. 경은 어찌 생각하오?”
“아마 대한해협을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직항하지 않겠습니까?”
“짐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소. 러시아는 혁명적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에, 일본 못지않게 심리적 여유가 부족하지. 하물며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함대면 오죽하겠나. 일본이 헛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귀관이 적절히 배려해 주도록 하시오.”
황제의 특명이 아니어도, 해군 지휘관으로서의 촉은 대한해협으로 가 있었다.
“내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로 합니다만, 당연히 대한해협이지요. 러시아로선 태평양 우회를 택할 여유는 없습니다. 귀국 해군이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랍니다.”
4월 23일, 2함대 사령관 가미무라 히코노조 소장과 참모장 사토 데쓰타로 대좌는 연합 함대 기함 미카사의 사령부를 찾았다.
“연합 함대의 행로는 어찌 결정되었습니까?”
“지금까지 발트 함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황이라, 홋카이도로 이동하는 걸 고려하고 있습니다.”
연합 함대 선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좌가 대신 답했다.
‘연합 함대의 책사’라고 불리는 사네유키는 봉천 회전에서 활약한 요시후루의 동생으로, 도고의 전폭적인 신임 하에 작전을 구상했다. 하지만 사네유키조차도 조급함을 느끼며 북상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만큼 일본 해군이 받는 중압감은 심했다.
“반년간 대서양과 인도양을 넘어온 함대가 태평양까지 우회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쓰시마 해협을 확실히 통제해야 합니다.”
“계속 대기했다가 적이 우회하면 완전히 놓치게 됩니다. 함대를 분산시킬 수도 없고…….”
“움직이면 안 됩니다! 적은 반드시 쓰시마로 옵니다!”
사토가 강력한 목소리로 외쳤다.
가만히 듣고 있던 도고가 나직한 목소리로 결정했다.
“나 역시 쓰시마가 옳다고 생각하네만, 변수도 고려해야겠지. 25일까지 기다려 보고, 그때까지 정보가 없으면 홋카이도로 북상하도록 하지.”
운명은 4월 25일에 결정되었다. 이날 오전, 이규풍은 사토에게 극비정보를 전달했다.
“우리 정보부에서 확보한 극비정보에 따르면, 전날 밤 상해에 발트 함대의 석탄 운반선이 입항했다는군요.”
“정말입니까? 천금 같은 정보입니다! 고맙습니다, 제독!”
사토는 즉시 이규풍에게 사의를 표하고, 연합 함대 참모부에 보고했다.
일본 해군은 마침내 확신을 얻게 되었다.
“석탄 운반선이 상해에 들어갔다는 건, 항속 거리가 짧으니 함대에 필요 없다는 의미다. 즉, 발트 함대는 쓰시마 해협을 돌파한다! 연합 함대, 쓰시마 해협으로 항진한다!”
* * *
러시아 제2태평양(발트) 함대는 무려 29,000km를 지나온 대항해의 끝이 보이려 하고 있었다.
작년 10월에 발트 해를 출항, 대서양을 종단해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을 횡단해 마침내 황해에 진입했다.
전함의 배수량이 너무 커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19세기 이전처럼 긴 우회의 길을 택해야 했다.
그 과정은 지난한 여정이었으니, 오직 프랑스령 식민지와 독일령 식민지에만 기항해가며 보급받고 움직일 수 있었다. 세계에 촘촘히 박혀 있는 영국령 식민지에선 입항과 보급 금지를 당했다. 영국이 일본과 손잡고 함대의 동진에 온갖 방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발트 함대는 신경과민 상태로 항해해야 했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황해에 도착했다.
더 빨리 갈 수도 있었지만, 본국에서 여순 함락과 태평양 함대의 전멸 소식을 듣자 구식 전함들을 긁어모아 제3태평양 함대를 구성해 본대와 함께 가도록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3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발트 함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다.
“시간을 엄청나게 지체했다. 최대한 신속하게 대한해협을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항진한다.”
발트 함대 사령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Zinovy Rozhestvensky) 중장은 함대의 보전을 목표로 했다.
전함 8척, 구식 해방(海防) 전함 3척, 장갑순양함 3척, 방호순양함 6척, 구축함 9척 등으로 구성된 함대를 여태까지 전력 이탈 없이 무사히 항해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긴 했다.
“가능한 교전을 회피하고 진격하라.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에만 도착하면 우리의 승리다!”
1906년 4월 28일 오전, 쓰시마 동쪽 해상.
전함 6척, 장갑순양함 8척, 방호순양함 14척, 구축함 20척 등으로 구성된 연합 함대는 발트 함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합 함대 선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좌와 2함대 참모장 사토 데쓰타로 대좌는 필승의 전략을 짜놓고 대기했다.
“참모장,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이충무공 탄일(誕日)입니다. 361주년이지요.”
“오오, 그렇지요!”
관전무관 신순성 부령이 사토에게 일깨워 줬다.
본래 이순신의 탄일은 음력 3월 8일이었다. 그런데 1898년 서거 300주기를 기념해 대한제국에서 대대적인 충무공 선양 사업이 이뤄지면서,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해 매년 4월 28일을 ‘충무공 탄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황제와 선대왕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탄일이 기념되는 신하였다.
대한제국 해군에서는 4월 28일을 해군 기념일처럼 여겼으니, 신순성이 이를 신성하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뜻밖인 건 사토의 반응이었다.
“동양 제일의 제독, 충무공의 영령께서 굽어살펴 주시길. 만약 연합 함대가 패배하면 동양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맙니다. 반드시 동양이 서양 침략자를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기를!”
하늘의 이순신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의아스럽지만, 사토 대좌와 그 휘하의 일본 해군 장교들은 진심으로 충무공의 영령에 승리를 기원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4월 28일 오후, 마침내 연합 함대와 발트 함대는 쓰시마 동편 수로에서 조우했다.
“敵艦, 發見(적함 발견)!”
“Экипаж, В бою(수병들, 전투태세로)!”
“戰艦, 砲擊 開始(전함, 포격 개시)!!”
“ПЛИ(발포)!!!”
도고 제독과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명령과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근대적 해전이 시작되었다.
포탄이 불을 뿜고, 강철이 짓이겨졌다. 무시무시한 철의 폭풍 속에서 인간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함선 곳곳에 신체가 잘려나간 사체가 뒹굴고, 하얀색 군복의 시신들이 바다 위를 떠다녔다.
전투는 몇 시간 만에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연합 함대가 비록 전함은 부족했지만, 순양함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월했고, 무엇보다 발트 함대가 6개월 동안 바다 위를 떠돌며 고생하는 동안 충실하게 훈련을 받으며 이날을 준비해 왔다.
대개 영국 유학파인 해군 참모들은 육군 참모들과 달리 훨씬 냉철하고 합리성을 지향했으며, 대한해협 전역에 걸쳐 촘촘한 덫을 설치해 놨다.
발트 함대는 완전히 함정에 걸린 것이었다.
“전함 「황제 알렉산드르 3세」 격침! 전함 「수보로프 공작」 격침!”
불과 반나절 사이에, 러시아 군함은 태반이 격침되거나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발트 함대와 러시아 해군의 창시자이자, 러시아를 열강으로 이끈 표트르 대제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후손의 무능함에 경악을 금치 못할 터이다.
200년 역사의 발트 함대는 단 하루 만에 소멸하고 말았다.
함대의 기함 ‘황제 알렉산드르 3세(Imperator Aleksandr III)’의 침몰이 상징하듯, 이는 단순히 전함의 침몰, 발트 함대의 침몰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차르의 침몰, 러시아 제국의 침몰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대륙을 향한 일본 제국의 야욕과, 태평양의 패권까지 장악하겠다는 러시아 제국의 야망은 순차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