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26
– 107화에 계속 –
2부 107화 중재자
광무 10년 6월 초순.
러시아가 강화 중재를 요청하는 극비 전문이 한국에 도달하여, 주한 러시아 공사가 전달했다. 이선은 즉각 반응에 나섰다.
“미국과 함께 즉시 강화 중재에 착수하도록 하지요.”
일본 역시 강화에 동의했다. 애초에 국력의 한계에 도달해 미국에 강화 중재를 의뢰한 일본이니만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강화 협상 장소를 놓고 이견(異見)이 오고 갔다.
“국제회의의 선례가 많은 프랑스 파리, 혹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가 좋겠소.”
“전쟁이 벌어진 곳은 아시아인데, 어찌하여 유럽에서 강화를 논의한단 말이오? 청국의 상해나 천진이 좋겠소.”
러시아는 동맹국인 프랑스가 됐건 네덜란드가 됐건, 유럽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반대로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려 했다. 어느 쪽이건 자국에서 가까운 쪽으로 기싸움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 국가들은 개최지로 모두 난색을 표했다. 마침 스페인 알헤시라스에서는 4월부터 주요 열강이 참석하는 모로코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리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유럽에서는 러일 강화 회담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러시아가 아시아에서는 절대로 강화 회담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니,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미국이 나서기로 했다.
“미합중국에서 강화 회담을 개최하도록 하지요. 미합중국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정직한 중재자가 되겠다고 약속합니다.”
결국 강화 회담은 미국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됐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정직한 중개인’을 약속한 비스마르크에게 외교적 농락을 당한 선례가 있는 러시아는, 루스벨트가 비스마르크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장소만 제공하고 중재자로서의 역할은 최소화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외교적 판을 짜 놓은 루스벨트는 순순히 수락했다.
“미국의 중재 없이 러일 양국이 대표를 파견해 직접 담판하는 거로 합시다. 다만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청국과 한국도 옵서버(observer, 발언권은 있으나 의결권은 없는 참관인)로 초청할까 합니다만, 어찌 생각하시는지?”
“굳이 옵서버가 왜 필요합니까? 두 나라 모두 전시중립을 선포한 나라인데.”
“전쟁의 원인이 만주 문제요, 전장이 된 곳도 만주요, 전후 처리에도 만주 문제가 필수인데 관련국을 배제할 수 있겠습니까?”
러일전쟁의 전장이 만주가 되었으므로, 유관국가인 청나라와 대한제국을 초청한다는 건 명분상 충분했다.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와 일본을 모두 따돌리고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미국의 계획이었다. 이미 한국과는 밀약을 맺어 두었고, 만주의 주권국인 청나라는 명분용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사실상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승인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난색을 표했다.
“한국은 헤이그 협약과 제네바 협약에 모두 조인한 국가이니 옵서버로 동의합니다만, 청국은 아직 조인하지 않았으니 자격이 부족합니다.”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을 선포했을 무렵, 『전장에서 군대 부상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네바 협약(1864)』에 가입했다. 1899년 러시아의 제안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도, 대한제국은 창립 25개국 중 하나로 참여해 협약에 서명했다.
아시아에서 두 협약을 모두 조인한 나라는 시암(태국), 일본, 한국뿐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한국만 옵서버로 초대하지요.”
러시아는 한국만 옵서버로 초대할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사실 국제 협약은 핑계고, 러시아로부터 만주 수복을 원하는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일본 편을 들 것이라 예상해서였다.
비록 한국은 일본과 동맹 관계이기는 하나, 전쟁 이전까지 한국과 러시아는 우방이었고, 이선이 중재자를 약속한 이상 러시아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 주리란 기대가 있었다. 일본에 전비를 4억 달러나 대 준 미국을 의심하는 러시아로서는, 그나마 한국이 균형을 맞춰 주리라고 기대했다.
1906년 7월 중순, 미국 동부의 포츠머스에서 러일전쟁의 강화 회담이 개최되기로 최종 결정됐다. 당사국인 러시아와 일본 외에도, 회담 개최국인 미국과 옵서버로 한국이 참여하는 국제 회의였다.
일본 정부는 강화 회담이 성립된 것에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쓰시마 해전에서 압승해 강화 회담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었으나, 만약 이대로 전쟁이 계속되면 일본은 파산 확정이었다.
이미 사상자는 20만을 넘어 30만에 육박했고, 전비도 20억 엔에 근접했다.
해전의 압승이 육전의 패배를 가려 주지 않았다. 러시아군의 남하는 요양 북쪽에서 일시 정지됐으나, 기병대의 맹공은 계속되었다.
“전군, 진격하여 일본군을 바다로 처넣는다!”
4월 하순, 중장으로 진급한 브루실로프가 이끄는 러시아 기병집단은 일본군의 방어선이 집중된 남만주 철도와 혼하를 우회해 우장과 영구(營口, 잉커우)를 습격했다.
이른바 ‘브루실로프의 만주 공세’라고 불릴 이 작전은, 만주 최대의 항구이자 일본 만주군의 제2보급선으로 물자가 집적되어 있는 영구를 탈환하며 종료되었다.
영구 함락은 일본군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만약 발트 함대의 소멸과 흑해 함대의 반란으로 러시아가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6월경에 만주의 러시아군은 분명히 대공세로 전환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만주의 일본군은 끝장이었다.
페테르부르크의 공세 중지 명령에 일선 사령관들은 불만과 아쉬움을 느꼈지만, 국내 정세의 격화로 인해 어쩔 수가 없었다.
“영구가 함락됐다는데, 이러다 지는 거 아니야?”
“애초에 러시아 같은 열강과 싸우려고 한 것 자체가…….”
“어허, 자네들은 로탐인가! 쓰시마 해전의 압도적인 대승을 보고도 어찌 승전을 의심하는가!”
“암, 황국이 질 리가 없지 않나! 러시아가 발트 함대의 전멸에 기겁해 강화를 구걸하겠지!”
“그렇고말고! 최후의 승리는 황국의 몫이다!”
일본인들 대부분은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부의 정보통제와 여론조작에 넘어간 탓도 있지만, 그들은 승리가 아니면 납득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지난 10년간 그토록 고생해 가면서 중세(重稅)를 감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수많은 청년이 외국에서 죽어 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반드시 이겨야 했다. 패배는 곧 자기부정이었다.
일본인들 대부분은 인지부조화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강화하지 않으면, 일본은 패망이외다. 조속한 강화를 체결합시다. 이의 없지요?”
“…….”
그나마 정부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이들은 최후의 승리 같은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해군의 압승이 만주의 육군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총리 가쓰라는 물론이요 육군의 영수인 야마가타도 더 할 말이 없었다.
해군의 협력으로, 문민 정치인들이 정치와 외교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강화를 진두지휘했다.
“10년 전 시모노세키 조약처럼, 이토 후작께서 직접 미국으로 가 강화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이 늙은이가 직접 미국까지 가기에는 너무 늙었소. 고무라 군과 다카히라 군이 잘해 줄 거요.”
일본은 전권대표로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를, 차석대표로 주미공사를 지낸 다카히라 고고로(高平小五郎)를 임명했다.
이토로서는 자신이 직접 미국으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미쳤냐? 이번 조약에 서명하면, 전황을 제대로 모르는 국민에게 똥물을 뒤집어쓰는 처지가 될 텐데. 관동주와 가라후토(사할린)도 모자라, 연해주와 배상금까지 잔뜩 얻어내자는 의견이 다수인데……. 러시아가 퍽이나 내놓겠다. 강경파 놈들이 싸 놓은 똥은 직접 치워야지.’
일본인 중에 그나마 가장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이토는 강화 회담 전망에 극히 부정적이었다. 외교관 중에서는 대러 강경파로 개전을 주도했던 고무라가 그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진짜 책임은 춘산장 영감(야마가타)과 그 꼬붕들이 져야겠지만. 양심이 있으면 영영 은퇴하겠지. 그나마 육군 놈들이 정치판에서 물러나게 되는 건 다행이지만…… 제기랄, 결국 그 대가로 이 어리석은 놈들이 유신의 대업을 망쳤구나!’
이토는 분통을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전쟁을 시작하는 바람에 이 꼴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개전 결의? 군부가 사이온지를 실각시키게 내버려 둔 것? 거슬러 올라가 야마가타가 육군의 영수가 된 시점에서? 아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과거를 곰곰이 거슬러 올라가던 이토는 문득 근본적인 문제를 떠올렸다.
「에조(蝦夷, 홋카이도)를 개척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류큐를 합병하고, 조선으로 하여금 조공을 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여 지나(중국)를 제압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여송(필리핀)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 개국진취의 기세를 드높아야 한다.」
메이지 유신의 기획자, 조슈파 유신지사의 이데올로그였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이미 1854년 미일화친조약 직후에 써 놓은 주장이다.
바로 조슈 번벌의 망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요시다의 학숙, 즉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함께 학문을 익힌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기도 다카요시 등은 조슈파 유신지사의 핵심이었다.
그 밑에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가 18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일본을 좌지우지하게 됐으니, 요시다 쇼인의 영향력은 길고도 깊었다.
정작 이토 본인은 출신이 천하여, 쇼카손주쿠에서도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이토는 요시다의 영향을 깊게 받지 않았으나, 조슈 번벌은 저 ‘개국진취론’에 심취했다.
‘정작 요시다 선생도 살아서 오늘날을 지켜봤다면, 그냥 만국전도(萬國全圖) 보고 해 본 소리였다고 했을걸? 그걸 그대로 따르고 있는 놈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었을 거야.’
방구석 제갈량이었던 요시다 쇼인의 ‘개국진취론’에 심취한 결과가 오늘날의 이 꼴이었다.
‘50년 대업이 허망하구나. 이제 유신지사의 시대는 끝났다.’
정복욕과 노욕의 화신과도 같은 번벌과 원로의 시대도 이제 저물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일본과 동아시아의 정세를 저들이 주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동시에, 일본의 대륙 정벌이라는 망상도 종말을 맞이했다.
* * *
“대한이 참관국이 되었으니, 전권 대표를 파견해야겠소. 회담 당사국이 아니니 대규모 사절단을 보낼 필요는 없지만, 중량급 인사가 참석하는 게 좋겠소.”
이선은 김옥균을 염두에 두었다. 총리급 인사가 참관인으로 미국까지 가기에는 격이 너무 높지 않냐는 주장도 있었지만, 김옥균-태프트 밀약의 당사자인 김옥균이 미국과 현지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게 가장 바람직했다.
“마땅히 신이 미국으로 가겠나이다.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국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우니, 총리대신에서 사임하겠습니다.”
김옥균은 미국행을 위해 총리직도 내려놓았다. 마침 내각을 개편하기에 적절한 때이기도 했다.
광무 10년 5월, 제2회 민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전쟁 중, 더군다나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실시된 총선이니만큼, 큰 변수 없이 여당인 입헌개화당이 200석 중 130석을 얻으며 압승했다.
“후임 총리로는 구당(矩堂, 유길준)이 좋겠습니다.”
“좋소. 구당이라면 현 시국에 자격이 충분하지.”
법무대신 유길준에게 조각(組閣)하라는 칙령이 떨어졌다. 유길준은 입헌개화당-독립당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그간 제1야당이었던 독립당이 입헌개화당과 재통합됐다. 애초에 독립당 지도부가 대부분 개화당 출신인 것을 제외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차이가 있다면 독립당이 영미식 자유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인데, 개화당 내에서도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김옥균이 총리로 취임하고,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며,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으니 독립당으로서는 더 이상 갈라질 이유가 없었다. 독립당의 핵심인 서재필과 윤치호가 주미 공사와 주영 공사로 파견되어 외교 정책을 수행하는 시점에서 양당은 이미 통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익 야당인 제국당도 관제 야당 역할을 수행했으므로, 사실상 입헌개화당 1당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유림 출신 무소속 의원들이 ‘유림당’을 결성하여 반대파를 구성했지만, 전체 의석에 비하면 미미한 수치였다.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 후에도, ‘개화당 독재’는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총리, 짐은 경을 4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힘써 주길 바라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국무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광무 10년 6월, 4대 내각총리대신 유길준 내각이 출범했다.
유길준은 능력과 경륜 면에서 충분히 입증됐다. 학무대신, 법무대신, 내무대신 등을 역임하며 행정개혁, 국민교육, 사법개혁, 헌법제정 등에 고루 공을 세웠다. 어떤 면에서는 김옥균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기에, 새로운 내각의 출범에 국민들은 기대를 걸었다.
“구당, 성상께서 공에게 총리를 맡긴 이유를 짐작하시지요?”
“물론이지요. 지극한 성은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균은 안심하고 미국에 다녀오십시오.”
김홍집이 은퇴한 이후, 개화당 내 1인자가 김옥균이라면 2인자는 박영효였다. 권력 구도를 생각하면 박영효가 후임 총리가 되는 게 마땅했으나, 유길준이 선택된 이유가 있었다.
혹자는 ‘광무 8년 대역(大逆) 음모’에 역적들이 박영효의 이름을 언급한 것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유길준은 조선인 중에서 미국 유학파 1호고, 미국을 모범으로 국가를 개혁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친미파’라 할 수 있겠으나, 그러면서도 중도적 자세를 유지하여 다른 열강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본의 아니게 ‘친일파’로 찍힌 박영효에 비하면, 러시아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고균, 짐을 대리해 미국에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길 기대하오.”
“예, 폐하! 대한의 국위를 떨치고 오겠나이다.”
“대한은 강화 회담의 참관인이자 정직한 중재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열강을 중재하여 국익을 극대화해야 하오. 짐은 경을 믿소.”
김옥균은 ‘대한이 곧 아시아의 프랑스’를 자처하지만, 이선이 생각하는 현실적인 목표는 영국·프랑스·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라는 5대 열강 사이에서 교묘한 외교술로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었다.
사르데냐는 크림전쟁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편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프랑스 편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프로이센 편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프로이센 편을 들어 동맹을 오고 가며 이익을 쟁취하고 통일을 완성했다.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르데냐는 언제나 이기는 편에 속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원한을 사 적대국이 된 나라가 없다시피 했다. 군사력과 국력의 부족함을 교묘한 외교술로 극복한 것이다.
한국도 조청일 전쟁, 의화단 전쟁, 러일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의 지역 강국으로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 피는 대부분 주변국에서 흘렸다. 이탈리아 반도의 군소국가에서 세계 7대 열강으로 떠오른 사르데냐의 교묘함 이상이었다.
“폐하의 성명(成命)을 높이 받들어, 전후 동양의 질서를 대한이 주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김옥균은 전 외무대신 서광범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현지에서는 주미공사 서재필과 공사관 일원들이 협력할 예정이었다.
전후 질서를 새롭게 확립할 판이 준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