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3
– 43화에 계속 –
43화 방을 지배하라
1881년 6월 1일. 모든 준비를 마친 이선은 블라디보스토크행 증기선에 올랐다.
바로 전날인 5월 31일은 양력으로 이선의 만 13번째 생일이라, 환송연을 겸하여 조촐하게 축하를 했다.
이선은 알렉산드르 2세에게 출발을 고한 후, 페테르부르크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초대해 작별을 했다.
이선이 페테르부르크를 떠나는 걸 가장 아쉬워하는 건 동갑내기 친구, 니콜라이 대공이었다.
“이선, 네가 떠난다는 게 너무 아쉽다. 마음만 같으면 나도 극동으로 가고 싶다. 거기도 장차 나의 통치를 받게 될 곳이니까.”
“전하도 언젠가 가게 될 거야. 또, 내가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올 수도 있고.”
‘정말로 1891년에 가지. 일본 갔다가 괜히 칼부림 당하지만…….’
“어차피 다시 올 생각이 있다면, 페테르부르크에 좀 더 있다 가면 좋을 텐데.”
“전하도 아시다시피 내가 할 일이 많잖아.”
“그래, 조국과 백성에 대한 네 의무감은 정말 존경스럽지. 장차 러시아의 황제가 될 사람으로서, 나도 본받고 싶을 정도야.”
얼마 전에 13번째 생일을 맞이한 니콜라이는, 자신과 동갑인 이선이 정말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너무 띄워 주지 마. 전하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될 분이시고, 난 장차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네.”
“조선에 너보다 더 군주에 어울릴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내가 약속하지. 너는 내게 있어 형제나 다름없어. 언제 어디가 되었건, 너와 조선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나와 러시아가 도울 거야.”
지금의 황제뿐만 아니라, 장차 황제가 될 이에게도 변함없는 호의를 약속받은 것이다.
‘내 친구, 오래오래 살아라. 실제 역사처럼 혁명으로 폐위당해 총살당하지 말고, 통치를 대국적으로 해서 왕조를 지켜 나가게. 나도 도와줄 테니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이선은, 웃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우리의 우정이 영원하듯, 조선과 러시아의 우호도 영원하길 희망한다. 니키가 나를 러시아에서 후대했듯이, 나도 니키를 조선으로 초대할 날이 오기를 기다릴게.”
“하하, 반드시 그런 날이 오게 되길 믿는다.”
이선과 니콜라이는 친구로서의 깊은 우의를 담아 악수를 하였다.
이선을 태운 의용 함대 소속 증기선은 페테르부르크 인근의 항구, 크론시타트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증기선 안에는, 노벨로부터 구매한 대량의 무기와 극동 개척에 필요한 식량과 농기구도 가득 들어 있었다.
북해와 대서양,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인도양을 거쳐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향해 나아갔다.
불과 1년 사이에 두 번이나 장거리 항해를 나선 이선은 피로감을 느꼈다.
‘열차로는 2주면 충분할 터이니, 확실히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놓이면 물류의 혁신이 일어나겠군.’
7월 10일, 6주간의 항해 끝에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이다. 이름 자체에서 러시아의 야심을 느낄 수 있었다.
1880년, 러시아 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자유항으로 선포하고, 면세 지역으로 설정했다. 또한 그동안 극동 지역을 관할하던 동시베리아 총독부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沿海州, Primorsky)를 분리해 독자적인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하지만 야심찬 이름과 달리, 1860년에 건설된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직 작은 항구에 불과했다.
21세기에 한국인 관광객이 넘쳐나는 ‘극동의 작은 유럽’ 블라디보스토크는 20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이고, 이때만 해도 인위적으로 건설된 지 20년밖에 안 된 군항에 불과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오니까 정말 깡촌도 이런 깡촌이 없구나.’
항구에 처음 내려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도시 전경을 보자 이선은 순간 한숨이 나왔다. 순간 자신이 제대로 된 선택을 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아냐, 마음 굳게 먹자. 나의 대업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동방을 지배하라! 앞으로 그 지배자가 누가 되는지 두고 보자고.’
이선은 굳게 의지를 다졌다.
안영흠과 장무영은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보이자 반가워했다.
“한복을 입은 걸 보니 우리 조선 사람이 틀림없군요.”
“과연 조선 사람이 아라사로 많이 이주했다더니.”
항구 주변에 짐꾼으로 일하는 사람은 거의 한복 차림의 조선인이었다. 개중에는 단발하고 양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상투를 틀고 한복 차림이라서 금세 눈에 띄었다.
그때 짐꾼 하나가 이선 일행을 보고 재빠르게 달려왔다.
“Здравствуйте, господин.(안녕하십니까, 나리.)”
매우 어설픈 억양의 러시아어에 이선이 조선말로 답을 했다.
“조선 사람이오?”
소년에게서 뜻밖에도 유창한 조선말이 나오자 짐꾼은 깜짝 놀랐다.
“맞습니다. 나리도 조선 사람입니까?”
“그렇소.”
짐꾼은 이선 일행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제복 차림의 소년을 양복 차림의 사내 둘이서 호위하는 걸로 보아, 높은 사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와아, 보통 이런 옷은 관리들이 입던데. 나리, 러시아 관리이신가요?”
짐꾼 사내가 너무 가깝게 다가오자, 장무영이 노려보았다.
“이분이 뉘신 줄 알고…….”
“됐다, 무영. 그대는 이곳에 살고 있소?”
“예에, 몇 년 되었습죠.”
“본래 고향은 어디요?”
“함경도 회령입지요.”
“아예 러시아에 정착을 한 것이오?”
“그, 그러면 좋겠지만…….”
사내는 말하기를 꺼렸다. 이선은 품에서 금화 하나를 건네주며 말을 권했다.
“아유, 뭘 이런 걸 다.”
금화를 본 사내는 입이 함지박처럼 걸렸다.
“나는 러시아 정부를 대리해 조선인에 대해 조사하러 온 사람이오. 그대 이야기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조선 사람 이야기를 해 보시오.”
조선 조정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 사내는 속 편히 이야기했다.
“예, 나리. 저는 봄에서 가을까지 날품팔이를 하다가, 겨울에 조선으로 돌아갑니다.”
“근데 그건 불법 아니오? 월경을 조선에서 허용할 리가 없는데…….”
“나리, 물론 불법이죠. 하지만 뇌물만 좀 찔러 주면 얼마든지 넘어올 수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허다합니다. 족히 수천 명은 될 겁니다.”
“조선 땅에서 그렇게 살기가 어렵소?”
“말도 마십시오. 함경도는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땅입니다. 흉년과 풍년을 가릴 것 없이 관리들이 죄 뜯어가기 바쁩니다. 기회만 된다면 아라사로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이선은 한숨이 나왔다.
‘나라 꼴 하고는…….’
“그럼 왜 아라사에 정착하지 않는 거요?”
“가진 재산이라곤 이 몸뚱어리밖에 없는데 정착을 어찌하겠습니까요. 예전엔 아라사 당국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땅도 나눠 주고 그래서 먼저 정착한 사람들이야 농사짓고 살지만, 요샌 그런 혜택이 없습니다.”
사내는 이선이 묻는 대로 모두 답을 해 주었다.
“소원이 있다면 뭘 하고 싶소?”
“저도 돈을 좀 더 모으면 가족들을 데리고 아라사로 오고 싶습니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조선과 러시아를 오고 가는 수천 명의 임노동자들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했다.
“이야기해 줘서 고맙소. 참고하리다.”
이선이 금화를 하나 더 건네자, 사내는 거듭 고개를 숙이며 굽실거렸다.
“감사합니다, 나리! 정말 대단하신 분인가 봅니다.”
“이제 뭔가 대책이 세워질 거요. 그러라고 내가 여기 온 거니까.”
이선은 곧장 블라디보스토크 시청사로 향했다. 황제의 특사, 극동 전권 위원이 온다는 말에 관리들이 대기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군정장관 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알렉산드르 펠드가우젠(A.F.Feldgausen) 해군 소장과 연해주 지사 이오시프 바라노프(I.G.Baranov) 육군 소장이 직접 영접을 나왔다.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는 변경이라는 특성상, 육해군 장성이 군정장관으로서 행정을 겸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블라디보스토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두 장군이 이선에게 악수를 청했다.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공작에 대한 소문은 이 머나먼 극동에서도 자자합니다. 황제 폐하를 구한 영웅이라고.”
“과찬이십니다. 이는 신께서 황제 폐하를 보호하신 것이지,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하하, 겸손하시군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이들은 겉으로 하는 환대와 달리, 이선의 존재를 약간 성가시게 여겼다.
펠드가우젠과 바라노프는 이선보다 훨씬 관료로서의 경력이나 관등이 높았지만, 이선은 그들의 통제를 받는 위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선은 ‘황제의 특사, 극동 전권 위원’으로 페테르부르크의 황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니, 권한 밖의 존재였던 것이다.
눈치가 빠른 이선은 그런 공기를 읽었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통제하기 힘든 전권 위원이 오면 저들 입장에서 귀찮은 존재겠지. 그럴수록 내가 겸허히 대해야 한다.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최소한 방해는 되지 않게 해야지.’
“저는 폐하의 특사이자 극동 전권 위원 자격으로 왔습니다만, 아직 어리고 경험이 일천하여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폐하께 부족하다는 보고가 들어가지 않도록, 부디 제독과 장군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이선은 겸손함을 표함과 동시에, 자신이 황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이임을 암시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황제 폐하의 특별 명령을 받은 만큼, 서로 도와가며 잘해 나가야지요. 하하하.”
두 장군은 이선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껄껄 웃으면서 협조를 다짐했다.
“제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미리 전문을 보내드렸습니다만, 연해주의 고려인에 대한 현황 보고를 듣고 싶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남우수리 지역 국경 위원회 전권 위원 마튜닌이 설명해 줄 겁니다.”
마튜닌(N.G.Matyunin)이라면 이선도 알았다.
‘훗날 대한 제국 주재 공사를 지내는 인물이지. 베베르 못지않은 친한파고.’
“각하, 남우수리 국경 위원회 전권 위원 니콜라이 마튜닌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마튜닌은 이선에게 예의를 표한 다음, 바로 보고에 들어갔다.
“1881년 현재,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총 10,379명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국경 지대인 남부 우수리 지역의 3개 관구에 거주 중이며, 이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 8,385명보다 더 많은 인구를 차지합니다. 정리하자면, 연해주의 개척에 있어서 고려인은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선의 건의를 받아들인 내무부는 인구 재조사를 명령했고, 그 결과 고려인의 수는 1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러시아 행정당국에 포착된 인구로, 불법체류자나 일시적 거주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 인구는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이들을 제외하고도, 매년 3천 명의 조선인이 러시아로 들어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역할은 다양한데, 상인, 수공업자, 잡역부, 소작농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튜닌은 이 문제에 가장 정통한 러시아 관리답게, 정확한 정보를 보고했다.
“또한 조선과의 무역 규모는 매년 상승하고 있습니다. 1881년 현재, 러시아와 조선 간의 무역 규모는 총 45만 루블입니다. 45만 루블 중 20만 2,500루블은 바로 가축 거래 가격입니다. 매년 조선의 상인들이 러시아로 입국하며, 한번 올 때마다 소 수백 마리를 이끌고 옵니다. 연해주 지역의 육류 공급은 이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선과 정식 수교가 체결되지 않은 이상, 이 모든 건 밀무역에 지나지 않습니까?”
이선의 지적에 마튜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현재 단계에서 조선은 러시아와의 어떤 대화도 원치 않습니다. 작년 3월, 본관이 직접 두만강을 넘어 경흥부로 들어가 국경 무역 협의를 했지만 ‘러시아와 가까운 교류를 금한다’는 조선 조정의 입장만 들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외무부의 훈령을 대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군사적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선의 물음에 마튜닌이 펠드가우젠과 바라노프를 쳐다보았다. 군사기밀까지 이야기해도 좋냐는 표정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 우수리 지역에 주둔하는 병력은 보병 2개 대대, 카자크 기병 3개 중대, 포병 2개 중대로 총 2,500명입니다.”
“하지만 국경 연변에 중국에서 온 마적들이 횡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로 인해 이주민들이 빈번히 피해를 보는 걸로 압니다.”
마튜닌은 순순히 인정했다.
“현재 병력으로 인구가 희박하고 광범위한 국경 지대를 모두 관할하는 건 무리라서, 정착지와 요충지를 중심으로 국경 방위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연해주에서 고려인의 존재와 조선과의 무역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군요. 그리고 현재 연해주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안정적인 식량 공급과 국경 방위.”
이선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이걸 해결하기 위해, 황제 폐하께서 저를 연해주로 보내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