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32
– 113화에 계속 –
2부 113화 개혁이냐 혁명이냐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렇다면 전쟁 당사국인 러시아에도 평화가 와야 했다. 하지만 즉시 평화는 오지 않았다.
피의 일요일 이후, 러시아 전역이 정치적 시위와 총파업으로 혼돈에 빠졌다. 차르 정권은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해 막아 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흑해 함대 반란 이후에는, 정권 최후의 보루인 군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빠른 강화로 그나마 혁명의 여파를 덜 받는 만주 전선군을 유럽으로 다시 되돌려야 했다.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고 귀국길에 오른 비테와 대표단은 프랑스를 경유했다.
“동맹국 러시아의 정정 불안으로 프랑스인들은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쟁이 끝난 이상, 러시아는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겁니다.”
프랑스 정부는 우려를 표명했다. 러시아에 막대한 차관을 제공했는데도, 막상 모로코 사태로 독일과 전쟁 위기까지 확산됐는데 러시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만약 러시아의 혼란이 지속된다면, 프랑스 입장에선 최악이었다.
프랑스 국민도 차리즘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20세기에 전제정을 고수하겠다고 자국민에게 총을 쏘다니, 혁명의 나라 프랑스라면 이미 정권이 10번은 뒤집혀야 할 일이었다.
“동맹국의 내정에 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충고로 들어주십시오. 더 이상 강경책은 안 됩니다. 정치적 타협이 필요합니다.”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각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돌아가면 폐하께 개혁의 필요성을 진언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러시아는 달라질 겁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재정 안정이 시급합니다. 부디 동맹국인 귀국에서 도와주십시오.”
비테는 개혁과 변화를 약속했다. 비테의 설득으로 프랑스 정부는 3억 루블의 차관을 추가로 더 제공했다. 그만큼 파리는 러시아의 혼란을 원치 않았다.
‘망명자의 천국’ 파리는 러시아 제국의 압제를 피해 망명한 혁명가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1906년 봄, 망명 조직들은 파리에서 연합 회의를 개최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러시아 사회혁명당,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 폴란드 사회당, 폴란드 민족민주당, 핀란드 사회민주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그루지야 사회민주당, 아르메니아 민족해방전선 등 이념과 민족에 따라 갈라졌던 여러 정파가 모였다.
각 정파별로 간극이 너무 커서 목표했던 연합에는 실패했지만, 공통의 의견은 도출되었다.
“차리즘을 타도하라! 인민 해방 만세!”
“제헌의회 설립! 소수민족 자결권 부여!”
“1906년을 혁명의 해로 선포한다!”
혁명 조직들은 공통의 적인 차리즘에 대한 투쟁을 천명했다.
파업, 시위, 암살, 농민 반란, 군대에 대한 반란 선동, 무장 봉기 등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해 볼 것을 결의했다.
각 정파들은 혁명 이후의 세상에 대해선 동상이몽적인 생각을 품었지만, 일단 공통 목표인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혁명의 시간이 임박했다.
러시아 정부는 초조함을 느꼈다. 정부는 잇달아 유화적 조치를 발표했다.
“두마(의회) 설립, 헌법 제정, 언론의 자유 보장, 종교적 관용, 소수 민족, 특히 폴란드의 문화 존중, 대학의 자치권 보장, 노동 환경 개선, 농민들의 토지 상환금 감액!”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양보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명의로 유화적 조치가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격노한 민심은 진정되지 않았다. 유화책 발표는 너무 늦고, 유심히 살펴보면 허점이 많았다.
인구의 다수인 농민들이 원하는 건, 토지 상환금 감액이 아니라 상환금을 청산하고 토지를 평등하게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두마가 설립된다고 해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는 국민은 1% 정도였다. 오직 귀족과 지주, 자본가만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양보’에 사회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중산층 자유주의자들까지 정권에 등을 돌렸다.
도시에는 시위와 파업이 빈발하고, 농촌에는 농민들의 토지 점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진압도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세르기에 율리예비치(비테), 경의 노고가 많았소. 러시아가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건, 경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오.”
차르는 귀국한 비테의 공로를 치하했다.
러시아는 죄수들의 유배지로 쓰이는 극동의 오지 사할린 섬만 상실했을 뿐, 거의 손해를 보지 않았다.
요동반도와 남만주 철도를 포기한 건 아깝지만 감내할 수 있는 손해였다. 남만주 철도는 공짜도 아니고, 미국이 1억 달러(2억 루블)에 매입하고 1억 달러를 차관으로 제공했다. 프랑스가 추가로 제공한 3억 루블의 차관도 비테의 공로라 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으로 분명히 러시아는 제국의 위신에 타격을 입었지만, 적어도 외교적으로는 참패하지 않았다.
“이에 짐은 세르게이 율리예비치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하는 바이오.”
“폐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폐하와 제국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좋소, 백작. 계속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짐을 보좌해 주길 바라오.”
차르는 비테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공로를 인정한 것도 있지만, 비테를 고위 귀족의 반열에 포함시켜 ‘귀족 계급의 이익에 손실’이 될 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외치지 않을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비테는 그 정도로 넘어가지 않았다.
“폐하, 더 늦기 전에 진언을 드립니다. 현재 우리는 키예프 루스 이래 1천 년의 역사를 쓸어 버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개혁이 시급합니다. 억압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흑해 함대의 반란에서 알 수 있듯이, 군대의 충성심이 흔들리게 되면 체제가 위태롭습니다.”
일체 아첨을 하지 않고 잔혹한 현실을 지적하는 비테의 솔직한 화법에 차르는 충격을 받았지만, 금방 내치지 않고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흑해 함대의 반란은 진압되었소. 두 번 다시 그럼 참사는 없을 것이오.”
오데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루마니아로 피신한 전함 포템킨과 게오르기.
러시아 정부의 강력한 압박에 굴복한 루마니아는 반군의 항복을 받아 내고 전함을 러시아에 돌려주었다. 항복하는 조건으로 수병들에게는 망명을 허락하였다.
차르는 일단 전함을 돌려받았다는 데 만족했다.
“폐하, 흑해 함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육군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 더 큰 문제입니다. 현재 나라 전체가 대격변, 혁명의 목전에 있습니다. 과감한 개혁만이 급진 혁명주의자들로부터 대부분의 국민을 떼어 낼 수 있습니다! 개혁과 혁명 중에 우리는 개혁을 택해야 합니다. 부디 가납하여 주십시오.”
정부 인사들조차 혁명에 두려움을 느꼈는데, 오직 차르만이 심각성을 느끼지 않았다. 전러시아가 혼란에 빠지는 8월의 위기 동안, 차르는 전쟁이 끝났다고 휴가지에서 사냥이나 하면서 시간을 소일했다.
“글쎄, 러시아의 충성스러운 군대가 그렇게 쉽게 반란을 일으키라 보시오? 짐은 이미 충분히 양보를 많이 한 것 같소. 다음에 다시 논의합시다.”
차르는 여전히 황실 수구파들의 조언만 받아들여 상황을 가볍게 보았다.
백작 작위는 받았지만, 또 다시 진언은 무시당했다. 비테는 강한 불만을 품고 궁전을 나왔다.
“정말이지 최악의 무능과 고집이야. 책임을 다하려하지 않는 비겁함, 사태를 정확히 바라보지 않는 맹목성, 해결책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의 혼합물이지.”
비테는 측근에게 노골적으로 차르를 비판했다. 차르는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정타가 필요했다.
9월, 마침내 위기는 절정에 도달했다.
지금까지의 파업은 도시 단위, 직종 단위 파업이었다. 그런데 이제 전국적 총파업으로 확대되려 하고 있었다.
9월 6일(19일)에 시작된 모스크바 인쇄공 노동조합의 파업이 기폭제가 되었다. 인쇄공은 도서를 다룬다는 점에서 모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가장 많이 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이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대학생들과 접촉했고,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무기를 들라, 시민들이여! 대열을 갖춰라! 전진하라, 전진하라!”
“동지들, 모두 거리로 나오시오!”
시위대는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의 번안곡을 부르며 ‘동지들’의 구역을 지키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마치 1848년 2월 혁명 당시의 파리가 모스크바에 나타나고 있었다.
“총파업! 동지들이여, 부당한 정권에 맞서 총파업을 결의하자!”
“일어나라, 노동자들이여! 적에게 맞서라, 굶주린 형제들이여!”
“전제정을 타도하라!”
사회민주노동당 모스크바 위원회가 총파업을 결의하자, 도시의 모든 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했다.
모스크바 총파업은 삽시간에 페테르부르크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른바 ‘9월 총파업’의 파도가 몰아쳤다.
“전러시아 철도노조연맹은 총파업에 동의한다! 이제부터 모든 철도는 운행을 중단한다!”
정권에 가장 치명타가 될 노동자 파업, 철도파업이 총파업의 대미를 장식했다.
핵심 간선인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 노선이 중단되고, 잇달아 모든 철도가 마비됐다.
“동지들, 총파업이 시작됐소! 모두 기차에서 내리시오!”
“전러시아 철도노조연맹의 결의에 따라, 진압에 악용될 군대는 결코 수송하지 않습니다!”
역마다 파업위원회가 조직되어 열차 운행을 중단시켰다. 기관사들이 파업하면 기차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총파업에 정부는 대체인력을 확보할 수 없었고, 군대의 수송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건, 역시 철도와 통신의 마비였다. 우편·통신 노동자들도 총파업에 돌입했다.
9월 말까지,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양대 수도에서 90%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심지어 중산층 전문직들조차도 파업에 동조하여 출근을 거부했다.
양대 수도의 파업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으로 기차 운행이 중단되고, 통신이 마비되었으며, 공장의 기계가 멈춰 섰다. 농촌에서는 수확기에 이르렀는데도, 농민들은 지주들의 땅을 갈기를 거부했다.
9월 총파업은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총파업이 러시아 전역을 강타했다.
그동안 억압받던 민중의 설움과 분노는 한순간에 화산처럼 폭발해 버렸다.
정부는 수도와 주요 도시의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믿을 건 오직 군대의 충성뿐인데, 이조차도 철도와 통신의 파업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국의 운명은 순식간에 위기에 빠져들었다.
* * *
러시아로부터 시시각각 전보문이 한국으로 날라들었다. 공사관이 정식으로 보낸 전문보다 익문사가 보내온 비밀 전문이 더 심각성을 나타냈다.
러시아 혁명 조직들과 접촉하고 있는 익문사 요원 조한민은 혁명의 가능성이 임박했다고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도대체 니콜라이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대체 이지경이 되도록 왜 양보를 하지 않는 거지?”
역사대로라면 러시아 제국은 무너질 때가 되지 않았다. 결국 차르는 굴복하고, 입헌군주국으로의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하는 선언을 발표하여 혁명의 위기를 누그러트렸다.
하지만 차르는 계속 미적거렸다. 역사와 달리 러일전쟁에서 육군이 참패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에서 ‘승리와 함께 귀환할’ 군대를 믿고 버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무리 군대의 충성심이 유지된다고 해도, 수송이 안 되면 대체 어떡할 거냐고! 애초에 전국적 총파업을 총칼만으로 어떻게 막나? 이 멍청한 놈!”
이선은 니콜라이의 상황 판단력에 치가 떨렸다. 그 완고하다는 대원군과 부왕(고종)조차도 정치적 위기 앞에서는 얼마든지 현실과 타협했건만, 니콜라이는 전제정의 화신답게 타협을 죄악처럼 여겼다.
“분명히 러시아에 변화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대로 제정이 무너지는 것도 곤란해.”
설령 러시아의 혁명이 역사의 필연이라 할지라도, 1906년은 제정이 무너져야 할 때가 아니었다.
니콜라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제국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제정이 무너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지면, 기껏 만들어 놓은 세력구도가 한순간에 박살 날 수 있었다.
적어도 중국에서 공화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될 때까지는 러시아가 버텨 줘야 했다. 제국주의 러시아가 북쪽에서 웅거하고 있어야만 만주·몽골·신강의 분리 독립이 가능할 터였다.
이선은 대책을 모색했다. 페테르부르크로 보낼 전문은 그 어느 때보다 상세하고 치밀하게 작성되었다.
“마침내 차리즘의 몰락이 임박했군요.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 당연한 일이에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폴란드도 독립하겠죠. 해방의 날이 머지않았어요!”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소식에 마르가리타는 기뻐했다. 전직 폴란드 독립운동가인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 그 후계국가는 주변국을 넘보지 않을 것 같소? 이미 프랑스 공화국이 무력으로 혁명을 전파한 선례도 있군. 프랑스가 벨기에와 라인란트를 국가 안보의 필수로 여겼던 것처럼, 러시아도 폴란드와 발트 연안을 국가 안보의 필수로 여기오.”
현실정치가인 이선은 혁명 이후의 냉혹한 국제질서를 예측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됐건, 러시아 민주공화국이 됐건, 자신들이 내세운 ‘소수 민족의 자결’이란 대의는 저버리지 않겠지만, 구 제국령의 세력권을 포기하려고 들지는 않을 터이다.
‘대러시아’를 유지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도 특히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해 민족자결을 부르짖는 울리야노프(레닌)가 집권해도 마찬가지였다.
“혁명 러시아가 쇼비니즘에 굴복한다면, 폴란드와 독립국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물론 가만히 안 있겠지. 그러니 폴란드는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고토수복에 나서지 않을까? 대한제국이 만주를 수복해야 할 고토로 여기는 것처럼,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를 그렇게 여길 텐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것 같소? 그럼 전쟁이지.”
중국도 혁명 이후 분리된다면, 필연적으로 중화 통일주의자가 나타나 재통합에 나서려 할 것이다. 그러니 러시아가 한국과 함께 북방에서 만주-몽골 독립국의 공동 후견인이 되어야 했다.
“당신은 모든 걸 세력다툼으로만 보는 군요. 혁명이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 낸다면, 인민의 대의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당신의 이상은 높이 평가하오. 하지만 권력을 잡으면 현실의 냉혹함을 인지하게 되오. 혁명가라고 다를 것 같소?”
청년기의 꿈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마르가리타가 거듭 이상을 외쳤지만, 이선은 현실을 직시했다. 그는 20세기라는 ‘극단의 세기’ 역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러시아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오. 정치적 권리, 사상의 자유, 사회경제적 평등, 소수민족의 자결권은 모두 존중받아야지.”
이선은 총론에서 마르가리타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각론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유혈 혁명이 아닌 무혈의 개혁으로 쟁취할 수 있으면 좋겠소.”
“그야말로 이상이군요. 차르와 귀족들이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고 개혁에 나설 것 같아요?”
“안 하겠지. 그러니 하게 만들어야지.”
진심으로 혁명을 피하고 싶다면, 사전에 뼈를 깎는 개혁으로 예방하는 수밖에 없다.
혁명의 시대, 개혁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