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36
– 117화에 계속 –
2부 117화 연속혁명
사토 히로시 중위는 가쓰라 저택을 빠져나와 무작정 달렸다. 피 묻은 군도를 빼 들고 달려가는 장교의 모습은 도쿄가 아니라 전쟁 중의 만주에 더 가까웠다. 그 광기에 사람들은 질겁하며 길을 비켰다.
히로시를 잡으려 하는 장교들은 쿠데타 계획과는 무관했지만, 눈앞에서 육군의 원로들이 살해당했으니 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히로시는 쫓아오는 장교들과 2km의 추격전을 벌인 끝에 경찰서에 들어가 자수했다.
“9사단 35연대 사토 히로시 중위요. 내 칼로 가쓰라와 데라우치를 베었소.”
히로시는 순순히 범행도구인 군도를 내밀며 자수했다. 경찰은 질겁하며 히로시를 체포했다.
뒤이어 장교들이 경찰서에 뛰어들어 히로시를 잡으려 했지만, 경찰서장이 나서서 막았다.
“저놈은 상관 살해범이다!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가쓰라 총리와 데라우치 대신이 피해자라면, 이미 퇴역했으니 상관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여러분은 헌병도 아니지 않습니까? 헌병이 신병을 인수하는 게 맞습니다.”
옥신각신하며 대치하는 동안, 헌병대가 도착하여 히로시의 신병을 인수했다. 그 사이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경찰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히로시는 이송되며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간적(奸賊)을 처단했다! 수많은 병사를 죽게 만든 장본인, 가쓰라와 데라우치를 내 손으로 베었다! 일본을 정화하자! 유신혁명이다!”
분명 전쟁 후유증에서 근원한 광기의 비계획적 살인이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정치적 암살을 성공시킨 ‘지사(志士)’처럼 보였다. 그것도 메이지 유신 이전의 검객 지사로.
이른바 ‘1.26 사건’은 상당한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피해자의 면면도 엄청났고, 이미 일본 전역에 소문이 쫙 퍼지게 되었으니 헌병대가 적당히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쓰라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중상을 입은 데라우치는 수술을 받았으나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했다. ‘3두’ 중에 둘이 어이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쓰라와 데라우치가 죽자, 쿠데타 세력에 포섭된 근위사단의 장교 하나가 일이 글렀다고 판단하여 육군성으로 달려가 계획을 밀고했다.
“가쓰라 전 총리, 데라우치 전 육군대신, 하세가와 대장이 군사정변을 모의했습니다.”
“이런 미친 조슈 놈들! 정권을 잃었다고 군사반란까지 모의해? 그러고도 군인이냐?”
육군대신을 겸하고 있는 야마모토 해군대신은 격노했다. 그는 즉각 내각에 보고했다.
“결국 조슈 놈들이 미친 짓을 벌였군.”
사이온지도 정부의 개혁에 육군이 반발하리라고 짐작하고 있어서, 가쓰라가 장교들과 자주 접촉한다는 보고를 받고 내무성을 통해 감시하고 있었다. 음모가 구체화되면 제압할 계획을 짜고 있는데, 마침 내분으로 스스로 붕괴해 버린 것이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마침내 육군을 통제할 기회가 왔습니다!”
“그렇소. 즉시 관련자들을 체포하시오!”
내각은 경찰력을 동원해 반란을 모의한 하세가와 대장과 근위사단 장교들을 즉시 체포했다.
일본 정부는 이번 기회를 통해 확고한 문민통제를 확립할 생각이었다. 가쓰라 일당이 꾸민 쿠데타 계획이 드러남에 따라, 육군은 감히 저항조차 할 생각을 못 했다.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서 나라를 위태롭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 정변으로 권력까지 탈취하려 해?”
메이지는 격노했다. 반란군이 기원절에 열병식에 친림할 천황을 봉대(奉戴), 즉 인질로 잡아 정변을 성사시키려 했다는 계획에 굉장한 불쾌감을 느꼈다.
“천황의 군인을 자처하면서, 대원수인 짐을 능멸해? 정치군인은 실로 역적이다!”
메이지는 사이온지 내각에 비상대권을 내렸다. 이제 조슈 번벌은 1864년처럼 ‘조적(朝敵)’이었다.
“육군, 그중에서도 조슈벌이 국가를 제멋대로 농단하기 위해 전쟁을 계획했고, 정변까지 모의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육군의 망동을 제압합시다!”
의회와 여론도 쿠데타 계획에 격노했다. 중의원은 육군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육군이 과거와 단절하지 않으면 단 한 푼의 예산도 배정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언론도 육군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언설을 쏟아 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육군을 비난했다.
“미친 조슈 놈들, 전쟁도 이놈들이 일으켰지! 이놈들의 망동으로 얼마나 많은 청년이 죽었나!”
“이놈들이 정권을 잡았더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겠나?”
“가쓰라, 데라우치 이놈들은 천벌을 받은 게야!”
사람들의 비난은 이윽고 ‘피의자’ 사토 히로시 중위를 향한 옹호로 이어졌다.
“사토 중위가 아니었더라면 이놈들이 정권을 잡았을지도.”
“난 이 사람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네.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전쟁 영웅 아닌가! 전우들의 원한을 갚으려고 칼을 빼 들 수도 있지.”
“지사야, 진정한 지사. 국민을 대신해서 간적들에게 천벌을 내린 게 아닌가!”
“맞아! 이런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야 있나?”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정치적 암살을 행한 ‘지사’를 숭앙하는 문화가 있었고, 히로시는 전쟁 영웅의 후광까지 받아 더욱 칭송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나는 비록 사람을 죽였지만, 내 마음은 당당하고 깨끗합니다. 이미 만주에서 죽음은 각오한 바입니다. 전우들의 원수를 갚고, 간적들을 처단한 것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군사재판을 받는 히로시의 당당한 태도에 여론은 더욱 열광했다. 군사법원에 감형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쏟아졌다.
“사실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곤란했겠지.”
여론의 강력한 압박에, 정부도 히로시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따지고 보면 정부 입장에서도 히로시는 공로자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건 사람을 죽였으니 실형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극형은 면할 수 있었다.
군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지만, 군사법원은 ‘전쟁 공로자이자, 부상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감안하여’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관대한 처벌이었다.
결과적으로 히로시의 ‘거사’는 사이온지와 입헌정우회 정권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었다.
쿠데타 진압을 명분으로 문민정부는 확고하게 육군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원로들의 정치적 개입도 막을 수 있었다.
야마가타는 정변 계획에 동참하지 않아 처벌을 받진 않았지만, 사실상 춘산장에 유폐되었다.
거대한 면적의 춘산장은 이제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야마가타는 허탈하게 웃었다.
“40년 대업이 물거품이 되었도다. 어디 네놈들이 일본을 어디로 이끄는지 두고 보자.”
반란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하세가와 대장 이하 쿠데타 모의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일대 숙청의 바람이 불었다. 파벌에 속해 있는 정치군인들이 일제히 쓸려 나갔다.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장교들만이 직위를 유지했다.
“해군은 결코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방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입니다.”
정부에 충실히 협력할 의사를 밝힌 해군의 목소리는 더욱 강해졌고, 육군은 완전히 추락했다.
육군성은 해군성으로 통합되지는 않았지만, 해군대신 야마모토가 계속 겸직하며 육군의 군축을 지시했다.
“의회정치의 공적이었던 육군과 번벌이 쓸려 나갔으니, 이제 진정한 입헌군주제를 이룩할 때가 왔소.”
여당인 입헌정우회와 제1야당인 헌정본당은 의회제 강화에 나섰다.
선거권이 확대되어 중산층의 의견도 반영하고, 정당 중심의 총리 선출을 확립하며, 의회의 예산권을 군부가 침해하지 못하도록 장치를 확실히 마련해 두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호헌론자, 의회주의자들의 승리였다.
“지금은 사회혁명을 일으킬 때가 아니오. 먼저 정치개혁을 완수하도록 합시다.”
“노동자 계급의 힘이 강해지면, 입헌정우회 일파와 결전을 벌입시다.”
일본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아직 취약했고, 번벌 정권 대신에 호헌 정권의 개혁을 일단 지지하는 방향을 택했다. 이들은 후일을 기약했다.
“유신 혁명이 윗대가리 몇 놈 죽인다고 쟁취되는 게 아닌데, 광인 하나 때문에 대업을 망치겠군. 먼저 중국 혁명을 쟁취한 후에 돌아옵시다.”
“중국 혁명을 완수하면, 일본의 혁명도 앞당길 수 있소. 먼저 청조를 타도해 아시아의 변화를 이끕시다.”
사토 히로시 재판 과정에서 가 ‘거사’에 영향을 미쳤던 거로 드러나자, 사건과는 무관하지만 기타 데루지로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기타는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해외로 도주했다.
유신혁명에 공감하는 아시아주의자들은 일본 대신에 청나라로 건너가 혁명을 지원한다는 방략을 결정했다.
아시아판 연속혁명, ‘혁명의 연쇄’ 전략이었다.
* * *
연속혁명, 혹은 영구혁명(Permanent revolution)이란 개념은, 러시아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가 창안한 개념이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론에 따르면, 먼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유주의) 혁명으로 봉건제를 철폐하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전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2단계로 발생한다.
트로츠키는 이런 전망을 거부했다.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는 너무나 취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차르와 귀족을 타도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쟁취할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연속혁명으로 전환하고, 러시아 일국의 혁명이 아닌 유라시아 전역으로 혁명을 연쇄적으로 확대하여 ‘세계 혁명’을 완수한다.
트로츠키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전망을 내놓게 된 데에는, 1906년 혁명의 실패와 중대한 관련이 있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엄숙히 선언한다. 모든 인민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보통·평등·직접·비밀투표에 의한 제헌의회의 소집을 요구한다. 모든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라. 러시아 전역에서 계엄령을 해제하고, 시내에서 군대와 경찰을 철수시켜라. 민주공화국이라는 당면한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소비에트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 트로츠키는 선언문을 단호한 어조로 낭독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이 주도하고 있는 소비에트는 현 단계에서 민주공화국의 설립을 최우선으로 했다.
아직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충실히 신봉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현 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해했다. 프랑스 혁명과 같이 군주정 타도, 정치적 자유, 봉건제의 타파를 우선시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대를 야멸차게 저버렸다.
“10월 선언으로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는데, 굳이 제정과 더 대립할 이유가 있나?”
“올해 사태에서 분명히 드러났소. 차리즘과 귀족들이 역겹기는 해도, 노동자와 농민들의 폭력적인 요구보단 감내하기 쉽소.”
“미래의 적은 차리즘이 아니라 저 사회주의자들이오. 우리는 위보다 아래를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10월 선언이 발표되자, 비테가 예상한 대로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의 대열에서 빠르게 이탈했다. 부르주아지는 점점 과격화되는 노동자와 농민의 요구에 불안함을 느꼈다.
정치개혁을 주도하던 입헌민주당이 분열하여 10월 선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10월당’이 창당됐다. 10월당은 입헌군주국 러시아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비테와 손을 잡고 헌정 수립에 나섰다.
정치적 목표를 달성한 부르주아지와 달리, 혁명의 최전선에 서서 정권을 압박한 노동자와 농민은 도저히 뭘 얻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결성의 자유만 얻었을 뿐, 8시간 노동제, 임금 인상, 노동 환경 개선, 인권 대우, 토지개혁과 같은 조치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원한다!”
“동지들, 다시 총파업으로!”
1906년 11월,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총파업을 결의했으나, 10월과 달리 힘이 빠져 있었다.
총파업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자본가나 전문직들은 물론이요, 노동자들조차 장기화된 파업으로 임금을 받지 못해 힘겨워하고 있었다.
소비에트가 총파업이란 효과적인 무기를 활용하지 못하자, 정부는 즉각 압박에 나섰다.
“소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불법 조직에 해당된다. 즉각 해산하라.”
10월 선언 이후에도 군대에서 산발적인 반란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지만, 수도의 병력과 만주에서 귀환하는 병력들이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정권은 믿을 만한 병력을 다수 확보했다.
차르를 대신하여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비테는 부르주아지의 지지도 확보했다.
내심 차르와 귀족들로부터 ‘권력 찬탈’을 의심받고 있는 비테는 어디까지나 사회주의 혁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유주의 개혁에 나선 거지, 진심으로 동조하는 게 아니었다.
“소위 노동자 소비에트는 무장봉기를 도모하며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근위연대를 동원하여 노동자 소비에트를 해산한다!”
노동자 소비에트가 해산을 거부하자, 총리 비테는 무력으로 해산을 결정했다.
12월 2일, 친위 쿠데타가 개시되었다. 근위연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로 들이닥쳤다.
“비록 우리는 지금 소비에트를 해산하지만, 더 높은 단계의 혁명으로 가기 위한 중대한 경험을 얻었다. 그렇기에 1906년 혁명은 실패하지 않았다! 혁명은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불사조처럼 되살아날 것이다! 연속혁명 만세!”
소비에트 부의장 트로츠키가 연속혁명을 선언하고 체포되었다. 소비에트는 해산되고 위원들은 군대에게 체포되었다.
“차르 정권의 친위 쿠데타에 맞서 노동자 소비에트를 수호하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붕괴 소식을 전해 들은 모스크바에서는, 반목하던 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혁명당이 연합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노동자들은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확보했고, 일부 병사들이 탈주하여 봉기군에 합류했다.
“반란세력은 한 줌에 불과하다. 모스크바 주둔군의 충성심은 믿기 어려우나, 페테르부르크에서 근위사단을 투입시켜 제압한다.”
정부가 철도를 다시 통제하게 되면서, 수도의 병력이 모스크바로 진군했다. 차르에게 충성하는 근위사단은 무장봉기를 효율적으로 진압했다.
의기는 투철해도 무장이 빈약한 모스크바 봉기군은 잔혹하게 제압당했다. 수백 명이 즉결 처형되고, 수천 명이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로써 1차 러시아 혁명은 유혈로 종결되었다.
1906년이 가기 전에 제국 정부는 양대 수도에서 ‘질서’를 되찾았다.
지방의 농민반란, 소수민족의 저항, 일부 군대의 소요는 1907년까지 계속되었지만, 정부는 핵심 지역에서 권위를 유지했다.
제정이 붕괴할 위기에 놓였다가 질서를 되찾은 니콜라이 2세는 마침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자유주의자와 손을 잡고 사회주의자들을 진압하라는 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부르주아지는 충분히 군주정과 공존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러시아 제국은 철저하게 ‘차르-귀족-관료’의 정권이었지만, 부르주아지에게도 권력의 문호를 개방하여 우군으로 삼는다.
니콜라이는 돈은 있을지 몰라도 혈통은 ‘천한’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의 일부를 내놓는다는 게 역겨웠지만, 타협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철도 서기원’ 출신인 비테가 총리의 자리에 앉은 게 여전히 차르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건 혁명의 위기를 넘긴 공을 세운 건 분명했다. 평민 출신이어도 차르에게서 백작 작위를 받은 이상 비테도 귀족이라 할 수 있었다.
1907년, 러일전쟁과 그 여파인 혁명적 위기는, ‘타협’과 ‘질서’를 동시에 강조한 보수적 개혁가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보수적 개혁가들의 조치로 러시아와 일본은 혁명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용암처럼 분출하던 혁명의 폭발성은 여전히 지면 아래에 잠들어 있었지만, 일단 중요한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개혁의 성공 유무에 따라 국가와 왕조의 운명도 바뀌게 되리라.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 개혁을 해도 역사의 시운(時運)을 놓치면 소용이 없다.
바로 청나라가 그랬다. 중국은 개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연속적으로 불타오르던 혁명의 불길은, 거대한 중국 대륙을 향해 서서히 불씨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