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38
– 119화에 계속 –
2부 119화 김옥균-송교인 밀약
광무 11년(1907) 3월, 황성의 모처(某處).
전 총리대신 김옥균은 청나라에서 온 보고문을 읽었다.
“흠, 정녕 청국의 소생 가능성은 없단 말인가…….”
광서제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화단 전쟁 이후 청조는 사실상 연명치료 상태에 놓여 있었다.
광서제는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을 통해 민의를 흡수하는 것이 청나라를 살릴 수 있는 최후의 방도라고 판단, 내년에 헌법을 공표하려 했지만 반청 공화파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공화파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의화단 전쟁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지방 통제의 붕괴는 청조의 몰락을 암시했다. 지방 총독과 군 사령관들은 사실상 반(半) 자치상태였다.
이 상황에도 만주 권귀(權貴)들은 개혁에 저항하고 있었고, 그나마 개혁과 입헌을 지지하는 근황 세력의 정치적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문제는 개혁의 중심인 광서제가 병약하고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4세에 즉위했지만 나이 30에 이르러서야 처음 실권을 잡고 만기친람에 나선 광서제. 그의 건강은 본래도 병약했는데, 과로가 겹치면서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광서제는 청조를 되살려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정무에 몰두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무너져가는 천명을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다.
청조의 권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구심점인 광서제가 쓰러지는 순간, 청조의 몰락은 기정사실이 될 터였다.
“대감,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모시게.”
젊고 깔끔한 용모의 송교인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미야자키 도라조가 모처에 들어섰다.
“고균 선생, 간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미야자키 군. 한 10년 만인가?”
“예, 그 사이에 선생의 머리가 하얗게 물드셨군요.”
“허허, 나도 벌써 쉰일곱이니 늙었지. 그대는 여전히 산적 같군.”
“이왕이면 지사라고 불러 주시지요, 하하.”
김옥균과 미야자키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김옥균은 주일공사 시절에 일본 정계를 넘어 재야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미야자키도 한때 김옥균의 ‘문하’에 있었다.
“중국동맹회의 총아, 송교인 씨입니다.”
“명망 높은 김 공을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반갑소. 듣던 대로 총기(聰氣)가 가득하군요.”
“과찬이십니다. 저는 일개 서생에 불과합니다.”
인사를 마친 김옥균은 중·일 혁명가들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내가 여러분을 초청한 이유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있기 때문이오. 뭐, 물론 나는 총리에서 물러난 뒷방 늙은이로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심임을 말합니다.”
김옥균의 현재 공식적인 신분은 입헌개화당 소속의 중추원 의관이었다.
하지만 총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황제의 신임을 받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에 실질적인 2인자였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를 ‘뒷방 늙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한때 구체제를 타도하는 혁명을 꿈꿨던 사람이오. 다행히도 현명한 지도자를 만나 우리의 뜻을 펼칠 수 있었지만, 만약 그러지 못했더라면 무력혁명도 고려했었겠지.”
김옥균도 이선을 만나기 전까지는 비밀결사 개화당의 지도자로서, 필요하다면 외세와 손을 잡고 구체제를 타도할 계획을 세웠다.
그렇기에 혁명을 위해 외세의 지원에 목말라하는 중국동맹회를 이해 못 하는 바가 아니었다.
“말씀하신 대로 조선, 아니 한국에는 유능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국가를 개조하는 유신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자주독립과 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오직 답은 혁명뿐입니다.”
“대청 황제께서도 신정(新政)을 선포하고 개혁에 매진하고 있지 않으시오? 예정대로라면 내년에 헌법도 반포한다던데.”
“신정 선포가 아니라 제국이 무너지기 전에 외치는 단발마의 비명에 더 가깝습니다. 이민족인 만주 압제자들이 계속 지배하는 이상, 중국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송교인은 만주 황실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송교인뿐만 아니라, 장강 이남의 강남 태생들은 청조와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강렬했다. 특히 광동과 호남은 혁명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컨대 동맹회를 주도하는 손문과 왕정위(汪精衛)는 광동, 송교인과 황흥은 호남 출신이었다.
“만주에 대한 반감이 크군요. 동맹회의 4대 강령만 봐도…….”
“그렇습니다. 구제달로, 회복중화, 창립민국, 평균지권.”
구제달로(驅除韃虜), 즉 만주족을 축출한다.
회복중화(恢復中華), 즉 중화국가를 회복한다.
창립민국(創立民國), 즉 공화국을 수립한다.
평균지권(平均地權). 즉 토지 소유를 균등히 한다.
4대 강령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동맹회는 공화국 수립과 토지개혁이라는 정치·경제적 혁명 이전에 만주족 축출과 ‘중화’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혁명 세력에게 ‘중국’이란 오직 본토 18성이었고, 만주족은 이민족 압제자에 불과했다. 청조의 지배 260년은 외세 강점기였다.
“만약에, 그대들 열망대로 반청 공화혁명이 성공한다고 칩시다. 그럼 만주족의 운명은 어찌 되는 겁니까?”
송교인은 한국의 실력자인 김옥균이 중국 공화혁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지만, 침착하게 답했다.
“우리는 압제자 만주 황실을 적대하지만, 청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만주족이 한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학살을 벌이진 않을 겁니다. 다만 중국을 떠나 그들의 본향으로 되돌아가야겠지요.”
“요컨대, 본토 18성에 한족들만의 국민국가를 수립할 생각이다?”
“그렇습니다. 만주족은 민국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민국이라면, 정치체제는 미국식 연방제와 프랑스식 중앙집권제 중에 어디를 더 선호합니까?”
“제 개인의 의견이라면, 각 성의 연성자치(聯省自治)를 통한 미국식 연방공화국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손문은 프랑스식 중앙집권제를 더 선호했지만, 연성자치 담론이 처음 등장한 호남 출신인 송교인은 미합중국의 연방제를 더 선호했다.
“자치라, 좋군요. 우리 대한 역시 자치와 자결권을 선호합니다. 독자적인 민족은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할 권리가 있지요. 혁명 이후의 만주, 몽골, 티베트 등은 어찌 되겠소?”
송교인은 김옥균이 묻는 저의를 이해했다. ‘자결(自決)’이라는 세련된 근대적 단어를 들고 나왔지만, 결국에는 만주와 몽골의 독립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이나 러시아는 결코 만주와 몽골이 통일 중화민국의 영역으로 남기를 원치 않을 터였다.
“제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합니다만, 그들 또한 자치의 권리가 있습니다. 청조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세운다면 중국을 넘어 아시아 전체에 바람직한 일이겠지요.”
송교인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계속 ‘개인적 의견’을 전제로 깔았다.
하지만 이는 중국동맹회의 입장이기도 했다. 본토 18성, 옛 명나라의 강역만을 회복해야 할 ‘중화’로 여겼다.
청조의 본향인 만주, 청나라가 정복한 몽골·신강·티베트는 민국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동맹회의 지도자 손문 역시 이런 입장을 고수했고,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 정치가들을 만나 제안을 했다.
‘일본이 중국 혁명을 돕는다면, 만주는 독립시켜 일본의 영향권으로 두어도 좋다.’
결국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만주에서 손을 떼게 되면서, 중국 혁명에 대한 관심도 접게 되었다. 하지만 손문은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향하는 송교인에게 이런 지침까지 내릴 정도였다.
‘돈초(敦初, 송교인의 호), 이번 기회에 한국의 요인들을 설득해 보게. 만약 한국이 중국 혁명을 돕는다면, 만주는 독립시켜 한국의 영향권으로 두어도 좋네. 우리는 혁명을 원하고, 한국은 만주를 원하지 않는가? 민국은 만주를 원치 않고, 필요도 없네.’
제안을 받는 대상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뀌었을 뿐이지만, 손문은 진지했다.
광동 출신 손문에게 있어 만주는 이민족 압제자의 땅이었다. ‘혁명에 우호적인 외국’에 얼마든지 넘길 수 있었다.
더욱이 미국 유학파인 손문으로선, 한국과 미국이 연합하여 남만주로 진출하는 걸 기회로 생각했다. 한국에 만주를 넘기는 대가로 혁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어 낼 수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협상이었다.
송교인은 손문보다 외세 지원의 가능성에 회의적이었지만, 다름 아닌 한국 정계의 실력자 김옥균과 접촉하게 되자 손문의 제의를 전해야 할지 가늠했다.
고심하던 송교인은 결단을 내렸다.
“동맹회의 지도자인 손일선 선생께서는, 만약 귀국이 중국 혁명을 돕는다면…….”
손문의 제의를 전달받은 김옥균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도 성상의 예측이 정확하셨군. 중국 혁명파들은,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만주 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고 하시더니…….’
김옥균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구체제를 파괴하기 위해, 외세와 접촉했다. 일본은 물론이요, 수교 이전임에도 영국과 미국의 외교관들을 만났다.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외세와 연합하는 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전술이다. 만약 주권이 침해받더라도, 혁명 이후에 힘을 키워 되찾아 오면 된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김옥균은 현실정치가가 되었다. 혁명가의 구두약속 같은 건 흥미로워도 신뢰할 수 없었다.
“흥미로운 제안이오만, 대한은 대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소. 특히 대한 황제 폐하와 대청 황제 폐하는 매우 친밀한 관계이시오. 어찌 그 우의를 저버릴 수 있겠소?”
김옥균이 애를 태우자, 옆에서 침묵하고 있던 미야자키가 갑자기 열을 올렸다.
“어찌 군주 간의 우의가 민족 간의 대의보다 더 중요하겠습니까? 조선인이 상국으로 군림하던 청조의 압제를 무찔러 마침내 자주독립국을 세웠듯, 중국의 한인(漢人) 역시 청조의 압제를 무찌르고 자주독립국을 세울 권리가 있습니다. 몽골인, 서장인(티베트), 회회인(위구르)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조는 실로 동양 인민의 공적입니다!”
미야자키의 열변에 김옥균은 씩 웃었다.
“미야자키 군은 여전히 열렬하군.”
“혁명에 대한 믿음은 더 강해졌지요. 선생께서도 독립을 위해 싸우니 청조에서 제거하려 들지 않았습니까?”
1894년 조청일전쟁 직전, 김옥균은 홍영식과 함께 북양함대에 의해 납치된 바 있었다.
“그랬소. 다행히도 살아남았지만, 내 벗이자 동지인 금석(홍영식)은 훗날 의화단 폭도들에게 살해당했지.”
“의화단의 폭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만청 권귀들은 모조리 사라져야 할 반동집단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북경에 남아 있지요. 민중의 힘으로 쓸어 버려야 합니다!”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송교인과 달리, 일본인 미야자키가 더 강경하게 혁명을 외쳤다.
“뭐, 내 개인의 의견을 말하자면, 동양의 미래를 위해서는 한·중·일 세 민족이 화합을 이뤄야 하고, 한국과 일본이 국민국가를 수립하였듯이 중국도 국민국가로 나아가야 하오. 만청 체제로는 달성할 수 없겠지.”
“실로 그렇습니다.”
“나 역시 내 개인적인 의견을 전제로, 중국 혁명의 필요성에 공감하오.”
“오오, 고균 선생!”
미야자키가 바로 감격을 표하자, 김옥균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물론 황제 폐하나, 대한국 정부와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릅니다.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사견일 뿐이오. 대한과 대청은 우호국이고, 대한 황제 폐하와 대청 황제 폐하는 친밀한 관계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께서 도와주신다면 그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송교인은 김옥균의 강조를 이해했다. 김옥균은 ‘개인적으로’ 중국 혁명을 지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황제나 정부와는 무관한 일이다.
김옥균이 한국 정계의 실력자임을 감안하면, 완전히 ‘개인적’일 수는 없었다.
“좋소. 그럼 내가 이것저것 알아볼 테니, 며칠 뒤에 다시 만납시다.”
며칠 뒤, 김옥균은 모처에서 송교인과 미야자키를 다시 만났다.
“나는 귀 단체, 즉 동맹회를 도울 용의가 있소. 하지만 대한국 내에서는 동맹회를 도울 수 없소. 대한은 청국의 내정에 간섭할 생각이 없으니까.”
“이해합니다.”
“다만 남만주 자치령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지. 그렇게 되면 청국 국내의 문제가 되는 거니까.”
남만주 자치령은 실질적으로 한국의 지배권에 놓여있지만, 법적으로는 청국령이었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법적으로는 ‘청국 국내 문제’였다.
“무력과 군사훈련을 시킬 기지가 필요하지요? 내가 손을 써서 자치령, 그중에서도 간도에 면한 돈화 쪽에 동맹회의 기지를 제공하겠소. 그쪽이라면 청국의 감시도 덜할 거요.”
“오오, 감사합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한국인은 청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소. 하지만 청국 국적이라면 상관없겠지. 만주 마적들이 협력해 줄 거요.”
일본이 끌어들인 만주 마적들, 소위 장작림의 ‘만주 의군’은 일본과 손을 잡고 러시아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일본이 패퇴하자 장작림과 마적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몰락의 위기였으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능수능란한 장작림은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철수한 후 남만주의 공백은 한국이 메우게 되었음을 파악했다. 장작림은 재빨리 ‘친한파’로 돌변하여 한국에 협조했다.
장작림과 만주 마적들은 한국으로선 귀찮던 존재였으나, 쓸모가 있다고 판단하여 일단 ‘귀순’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중국 혁명의 ‘전위대’를 원하는 동맹회에 선물로 안겨 주게 되었다.
졸지에 장작림은 만주 마적에서 중국 혁명의 전위대가 될 판이었다.
“감사합니다만, 만주 마적이 중국 혁명에 동참하려고 하겠습니까?”
“어차피 그들은 한족이 아니오? 만주에 살지만 그 출신은 대개 산동이나 하북 출신이지. 병력은 3천 정도 되는데,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데다 청조에 대한 반감도 큰 자들이니 동맹회에 도움이 될 거요.”
송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이 없는 동맹회로서는 3천에 달하는 마적을 혁명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미래를 위한 기반으로 만들 수 있었다.
“각하의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자금도 지원해 드리겠소.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협조임을 명심해 주시오.”
“실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혁명이 성공한다면, 반드시 각하께 보은하겠습니다.”
송교인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내게 보은할 건 없고, 귀공이 약속한 혁명의 대의를 지켜주길 바랍니다. 한·만·몽·장(티베트)·회(위구르), 오족에 각자 자결의 권리를. 특히 만주족에게는 본향인 만주로 돌아가 독자적인 국가를 세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생이 비록 어리고 불초하지만, 만약 혁명이 성공하여 손일선과 소생이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된다면,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대한제국 전 총리대신 김옥균과 중국동맹회 간에 밀약이 체결되었다.
정부 각료 간의 각서였던 김옥균-태프트 밀약과 달리, 김옥균-송교인 밀약은 아무런 강제성이 없는 ‘개인적인 약속’에 불과했다.
그래도 김옥균은 동맹회로부터 혁명 이후의 신질서를 약속받았다. 동맹회의 지도자 손문과 실질적인 두뇌 송교인으로부터 ‘오족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특히 만주는 독립국이자 한국의 세력권으로 인정받았다.
현 단계에서는 손문이나 송교인 모두 일개 망명객에 불과했으나, 앞날은 어찌 알겠는가?
이선의 추측대로라면, 청조의 천명이 다할 혁명의 시간까지는 채 5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이선은 최대한의 준비를 해둘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