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41
– 122화에 계속 –
2부 122화 미래의 군주
광무 11년(1907) 봄.
러시아에서 귀환하여 조선의 정치에 관여한 지 25년 만에 처음으로, 이선은 안정감을 느꼈다.
외부에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위협할 나라는 사라졌다. 불평등조약도 개선되었다. 남만주에 세력권도 확보했다. 열강은 대한제국을 더 이상 약소국으로 보지 않았다. 이제 지역강국의 반열에 서기에 충분한 국력을 보유했다.
내부에서도 개혁과 발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지난 10년 사이에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었다. 사회적 신분제가 사라진 대신에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많아 남아있긴 하지만, 사회개혁의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재위 내에 복지의 초석까지 닦을 생각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1907년에 고종 폐위, 군대 해산, 정미7조약으로 망국의 길을 걸었던 것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만하면 자족을 느끼고 현실에 안주할 만도 하지만 이선은 쉬지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을 기억하는 이선으로선, 실제 역사보다 훨씬 진일보한 대한제국을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준에서 턱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제 마흔이니, 아직 20년은 더 버텨야 해.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몸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느끼니.’
나이 40이 되면서, 이선은 하루가 다르게 기력 저하를 느꼈다. 예전에는 하루에 4시간 이하로 자도 다음날 일하는 데 문제없이 거뜬했다.
그런데 이제는 과로를 했다간 체력이 버텨주지를 못했다. 전에 없이 강한 피로감을 느꼈다.
심각한 운동 부족이었던 역대 조선 군주들과 달리, 이선은 건강관리를 위해 꾸준히 운동을 했다. 군주의 전통적인 운동인 산책과 승마는 물론이요, 골프나 테니스 같은 서양식 스포츠도 즐겼다. 땀을 흘리고 나면 그만큼 성취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조차도 점점 힘겨워지고 있었다. 격렬히 운동을 한 다음 날이면 근육통이 뒤따랐다. 이선은 이제 나이를 먹었음을 실감했다.
‘30대에서 40대로, 앞자리 숫자 하나 바뀐 게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체력 저하일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그동안 이선이 젊음을 믿고 너무 과하게 기력을 썼다는 것이었다. 10대 후반부터 과로를 거듭하고, 황제에 즉위한 지난 10년은 더욱 혹사에 가깝게 일을 해왔다. 30대에는 어떻게 버텼을지 몰라도, 이제 몸이 작작 좀 하라고 저항하고 있었다.
‘세종대왕님……. 성종대왕님……. 정조 선황제시여……. 대체 어떻게 버티셨던 겁니까…….’
조선 국왕 중 과로 안 한 사람이 드물지만, 그중에서도 하드워커라면 단연 세종, 성종, 정조였다. 성종은 38세에, 정조는 49세에, 세종은 54세에 서거했는데, 모두 과로가 직간접적인 사인이 되었다.
그나마 이선은 유교의 영향을 덜 받으면서 하고 싶은 취미 생활이라도 즐기면서 살지만, 군주이자 학자라는 성리학적 군주의 표본과도 같았던 세 임금은 훨씬 힘든 삶을 살았다.
‘그래도 세종께는 문종이라는 훌륭한 후계자와 명신들이 있었기에 업무 분담이 충분히 가능했지.’
후계자가 연산군인 성종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순조를 두고 떠난 정조도 후계자 양성은 실패했다.
문종이라는 영명한 후계자를 둔 세종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재위 후반기를 세자에게 맡길 수 있었다. 그렇기에 훈민정음이라는 최고의 업적도 나올 수 있었다. 문종은 건강만 좋았더라면 충분히 제2의 세종이 될 자질이 있었다.
‘진이 문종대왕처럼 성장할 수 있다면, 내가 뒷일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세종이 문종을 유교적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후계자로 양성하고 싶어했듯, 이선은 자신의 후계자는 근대적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입헌군주로 키울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선은 장남의 교육에 만전을 기울였다. 미래의 기억을 가진 덕에 교육이 따로 필요 없었던 자신과 달리, 자식들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최고의 교육을 시켜주고 싶었다.
“진아, 네가 장차 황위에 오른다면, 어떤 군주가 되고 싶으냐?”
“아바마마와 같은 군주가 되고 싶사옵니다!”
어린 이진은 아버지를 이상적 군주라고 생각했다. 보고 배운 바가 그러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누란의 위치에 놓인 조선을 구하셨고, 만청을 격파하시어 자주독립과 북벌의 대업을 이루셨고, 헌법을 반포하시어 제국의 기틀을 닦으셨습니다. 아바마마가 아닌 누구를 본받겠사옵니까?”
이선은 아들이 자신을 깊이 존경하고 있다는데 기쁨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본받지 않기를 바랐다.
“고맙구나. 하지만 나의 시대와 너의 시대는 다를 것이다. 달라야만 하고. 나는 비상시국에 필요한 비상한 군주다. 내가 제국을 창건했다면, 너는 수성을 해야 한다. 나에게는 강요받은 시대적 의무가 많았지만, 너는 좀 더 자유롭기를 바란다.”
이선은 의도적으로 영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가정교사를 이진에게 붙여주었다. 단순히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칠 목적이 아니었다. 입헌군주제인 영국, 민주공화국인 미국과 프랑스의 체제에 친화감을 주기 위함이었다.
‘차기 황제는 영국의 군주들처럼, 국가를 대표하고 민의를 대변할 군주가 되어야 한다.’
자신은 비상시국으로 인해 표트르 대제나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계몽전제군주라고 해도, 후계자는 영국의 조지 5세나 조지 6세처럼 정치를 조율하고, 국민에게 용기를 부여하며, 국가원수로서 외교를 하는 역할이면 충분했다.
지금은 인재풀이 좁아 황제와 개화당의 독재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진이 황제가 될 시기에는 넓은 인재풀이 형성되어 믿고 맡길만한 정치세력도 많아질 터였다.
“진이 총명하고 공부하길 좋아하니 황실의 복이오.”
“부친을 닮은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남편의 말에 아영이 웃으면서 답했다. 그런데 이선은 뜻밖에도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진은 나와 다르오. 그 아이는 나와 출발점부터가 다르지. 황제의 장남이라는 자의식이 너무 강해.”
군주의 장남이라고 해도, 서장자로 태어나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 이선과 달리, 황제의 적장자로 태어난 이진은 출발점부터 달랐다.
좋게 말하면 자부심과 의무감이 충만했지만, 동시에 오만함과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이진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황제의 적장자요, 제국의 후계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인의 숭배와 존경을 받는 아버지처럼, 황제가 되어 대한제국을 빛내고 싶었다.
“진이 아우들을 어찌 생각하오?”
“우애로서 대하지요.”
“희나 은이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안은 어찌 생각하오?”
“역시 형제로서 우애를…….”
아영은 말을 삼켰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성격이 되지 못했다.
“별로 내키지 않겠지. 이해는 하오.”
“제가 부덕하여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아니, 어찌 황후의 탓이겠소? 내 책임이 크지.”
자신을 탓하는 아영을, 이선이 만류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진은 총명한 아이다. 아직 어리니까, 개선의 여지가 충분하겠지…….’
이진은 이복동생 이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은이 태어나서 기뻐. 드디어 나도 남동생이 생겼으니까.”
작년 9월, 아영은 황자 은(銀)을 낳았다. 황실의 경사에 온 나라가 크게 기뻐했다. 모두가 기뻐했지만, 진은 동복동생의 탄생을 특히 더 기뻐했다.
“오라버니, 안도 우리 남동생이잖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누이 희에게 진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답했다.
“안은 우리랑 생긴 거부터가 다르잖아.”
희는 어릴 적부터 마르가리타를 잘 따랐기 때문에, 그녀 소생인 안과 라도 좋아했다.
하지만 진은 달랐다. 5살 어린 혼혈 이복동생을, 본능적으로 경쟁자로 인식했다.
“그건 이유가 안 돼. 어머니가 달라도 아바마마의 아들인 것 같잖아.”
“안도 법적으로는 어마마마의 자식이야. 법도에 따르면 모두 황후의 소생이지.”
서자도 법적으로는 정궁의 소생으로 여기는 게 조선의 법도였다.
“그럼 뭐가 문젠데?”
“넌 역사를 모르니? 바보야?”
“나 바보 아냐! 아바마마가 오라버니만 특별히 공부시켜서 그런 거잖아!”
오라비의 말에 희가 발끈했다. 이선은 딸을 위해 전통적인 아녀자 교육 대신에 궁중에 유치원과 학교를 만들었다. 종친과 대신의 여식들이 학우가 되었다. 근대적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제왕학을 익히는 오라비와는 교육의 영역이 완전히 달랐다.
“그러니까 넌 바보라는 거야. 당연히 나와 네가 배우는 건 다르지. 황제의 적장자인 나와 공주인 네가 같을 수가 있어?”
“흥, 잘난 척은! 오라버니는 장남이라 좋겠네!”
아이들의 치기 어린 장난처럼 보였지만, 이진은 나름 심각했다.
진은 외국인 가정교사로부터 근대 학문만 배우는 게 아니라, 궁내부 시강원(侍講院)에서 유교적 전통과 역사도 배웠다.
역사를 보면 왕위를 놓고 형제간의 갈등, 특이 이복형제간의 갈등은 비일비재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아버지랑 숙부만 봐도 그렇지 않나?’
할아버지 태상황의 적자인 세자 이척을 대신해, 증조할아버지 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아버지가 즉위했다. 그 과정에서 중전 민 씨는 폐비되어 사라지고 끝내 할아버지도 퇴위했다.
아버지가 서자였지만 능력으로 군주가 되었듯이, 자신이 적장자라고 해서 꼭 황제가 되란 법도 없었다.
막내 은은 그렇다 쳐도, 차남 안은 본능적인 경쟁자였다. 황위 경쟁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데 있어서 경쟁자였다.
‘아버지는 내게는 엄격하시면서, 안은 총애하시지. 다 그 여의사 때문이야! 어머니는 너무 착해서 아무 말도 못하시지. 투기는 황후의 법도가 아니라고.’
이선은 가능하면 매주 일요일마다 ‘파란양저’를 찾아 시간을 보냈다.
이선이 장남에게 좀 더 엄격하게 황실의 법도로 대하고, 차남에게 좀 더 부드럽게 대하는 건, 호오(好惡)의 문제라기보단 후계자 후보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차기 군주가 될 황자와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황자를 대하는 게 같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11살, 교육의 영향으로 나이에 비해 조숙하기는 해도 아직 어린 진은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 혼혈아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라처럼 여자면 상관없어. 그랬더라면 아버지의 관심이 나에게만 쏠렸을 텐데.’
진에게는 이복동생이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이 태어나는 바람에, 진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고 여겼다.
“혹여 새로 제정되는 황실전범에서, 후계구도에 혼혈아가 끼어들지는 않겠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황가의 후계는 오직 순혈이어야지요.”
“또 모르지요. 성상께서 그 아이를 총애하시니…….”
“성상께서는 공과 사를 명백히 아십니다. 적장자가 버젓이 있는데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더욱이 황실 종친들은 적장자인 진은 높이 떠받들면서, 혼혈아인 안에게는 거부감을 드러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어도, 이왕가는 보수적이었다. ‘성상의 권위’가 지엄하여 감히 말은 하지 못했지만, 고려 충목왕 이래 왕실에서 사라진 혼혈이 후계구도에 낀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이선의 귀에도 들려오는 게 있었다. 정작 자신은 안을 후계경쟁에 끌어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마르가리타는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저는 이 아이가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을지언정, 운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이선은 안의 갈색 고수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얀 피부에 갈색 눈, 갈색 머리. 분명히 한국 아이들과는 외관상으로 달랐다.
“이안 혹은 얀, 이라 혹은 이리나. 두 이름을 가진 것처럼, 동서양의 장벽에 가로막히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안과 라는 어머니를 닮아 아름다운 아이들이었다. 답답하고 보수적인 이왕가보다는,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하는 게 아이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이선은 장남을 후계자로 이미 마음을 굳혔다. 다만 후계자로 확정하기 전, 다짐을 받고자 했다.
광무 11년 5월, 경복궁.
이선은 장남과 함께 경복궁 근정전을 산책했다.
“보아라, 태조 고황제께서는 이곳에서 이 나라 조선의 기틀을 만드셨다. 문헌공 정도전이 그 이름을 경복(景福)이라고 지었다. 그 근원을 아느냐?”
“《시경》 주아(周雅),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이진이 배운 바를 충실히 기억해 답했다.
“맞다, 정확하다. 그로부터 우리 왕조가 시작되었다. 태종과 세종께서 그 기틀을 완성하셨고, 어느새 500년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아바마마께서는 제국을 창건하셨지요. 태조 고황제와 세종대왕에 비견될 장구할 업적입니다.”
이진은 눈을 빛내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진에게 아버지는 위대한 군주의 화신이었다.
“어찌 그게 나 한 사람의 공이겠느냐?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역사의 진보라는 흐름을 탔을 뿐이라고. 천명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여, 천하의 대의를 따른 것이다.”
아이에게는 어려운 말이었지만, 이진은 한자 한자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장차 내 후계자는 너다. 너도 네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여, 천명을 따라야 한다.”
“반드시 그러하겠사옵니다, 아바마마!”
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게 네가 내 장남으로 태어났기에 거저 쟁취한 것으로 여기면 아니 된다. 군주는 천명을 따라야 하며, 작금의 시대는 국민국가야말로 천명이다. 군주는 국가를 대표하고, 민의를 대변하며, 헌법과 의회를 존중해야 한다.”
이선은 입헌군주로서의 자세를 설명하다, 장남의 손을 꽉 잡았다.
“너는 장차 모든 국민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네가 군주가 아닌 이상 당장 그럴 필요는 없다. 너의 주변, 네 동기(同氣, 형제자매)부터 사랑하고 존중함에서 시작될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이진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자신의 치기 어린 마음을 아버지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진은 부끄러워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반드시 그리 하겠사옵니다. 동기를 사랑함을,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너를 믿는다. 너는 장차 대한을 대표하는 사람이 될 거다. 그 누구보다 넓고 훌륭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는 네가 대한의 입헌군주로서 군림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
이선은 다짐했다.
대한제국과 미래의 군주를 위하여, 이선은 앞으로도 쉼 없이 계속 앞으로 전진해 나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