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44
– 125화에 계속 –
2부 125화 유라시아 횡단
광무호는 북쪽을 향해 정차 없이 계속 달렸다. 이선과 사이온지는 열차 안에서 밀약을 맺고, 회담을 계속 이어 나갔다.
“고토 장관께서 만철의 이사진에 합류하면 좋겠습니다. 장관은 대만에서 뛰어난 능력을 입증했으니, 만철 운영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고토는 10년간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으로 재임하며 실질적인 식민정책을 총괄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초대 만철 총재로 취임해, 탁월한 행정력으로 철도 제국 만철의 기반을 쌓았다. 일제의 대만 지배와 만철의 기틀을 모두 고토가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뀐 역사에서는 대한제국과 함께 만철 지배에 일익을 담당하게 될 터였다. 일본이 한국에 단단히 신세를 지고, 북수남진 정책을 계속 추진하는 이상 동맹국 한국의 남만주 지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일한 양국에 도움이 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고토가 진작부터 주장하던 아모이-복주 조차를 한국의 주선으로 성사시킬 수 있었으니,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고토 장관은 제가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저와는 25년째 벗이지요.”
“호오, 고균과 장관은 어떻게 시작된 인연이오?”
이선은 새삼 김옥균의 친화력에 흥미를 느꼈다.
“괴한에 의해 자유당 총재 이타가키 선생이 암살당할 뻔했는데, 그때 제가 선생을 치료했습니다. 마침 그 무렵에 고균이 일본에 왔었습니다. 자유당 총재이신 이타가키 선생께서 고균을 조선의 자유를 이끌 인재라고 소개하셨지요.”
이 유능한 식민지 관료 고토 신페이도 1880년대에는 과격한 자유민권주의자였으니, 실제 역사에서는 자유당 총재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개화당의 갑신정변을 배후에서 지원한 바 있었다.
이유인즉, ‘이웃 나라 조선에서 혁명의 깃발이 올라가면, 단숨에 일본도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라는 흥아론에 기반한 연속혁명론이었다.
고토는 김옥균의 부탁을 받고 이타가키와 함께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찾아가 개화당의 ‘조선 혁명’을 지원해 달라 요청한 바 있었다. 청불전쟁을 앞둔 프랑스는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공작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바뀐 역사에서는 한국이 프랑스 차관을 빌려 일본의 대미 종속을 막아 주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관세자주권은 무역의 자유와도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서양도 일본에 내지잡거(內地雜居)를 요구하고 있지요. 관세자주권은 내지잡거가 함께 가야 합니다.”
사이온지의 지적에 이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무역 체제는, 외국 상인은 개방된 항구와 도시에서만 무역할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인천·부산·원산·마산·목포·군산·진남포·의주·성진·청진 10대 개항장과, 내륙도시는 황성·평양·대구·개성에서만 가능했다. 관세자주권을 얻으면 이 제한을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미 1899년부터 내지잡거를 실시했다.
“좋습니다. 관련 법령을 마련하여, 최대 5년 이내로 내지잡거를 허용하도록 준비하지요.”
“폐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한국의 상공업도 충분히 자생적인 체력을 키웠으므로, 내륙을 개방해도 일본 상인과의 경쟁에서 반드시 밀리라는 법도 없었다. 외국 제품이 품질이 더 좋을지라도, 외국 상인은 관세장벽을 뚫고 들어와야 했다.
한국은 관세로 획득한 수익의 일부를 다시 식산흥업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자본의 선순환이었다.
마침내 대한제국은 관세자주권과 내륙시장개방이라는 완전한 근대적 무역체제에 첫발을 떼었다.
“이제 한일 양국은 진정으로 대등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동양의 평화는 두 나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육지와 바다에서, 함께 동양의 평화를 지켜 나갑시다.”
“동양 평화와 한일 우호 만세!”
1907년, 광무 11년.
실제 역사에서는 정미 7조약과 고종 폐위, 군대 해산이라는 비참한 굴욕의 해가 되었던 해.
변화한 역사에서는 대한제국과 일본이 국제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완전히 대등한 국가가 되었다.
일본이 영국처럼 해군력을 토대로 강남으로 진출한다면, 한국은 프랑스처럼 육군력을 토대로 만주로 진출하고자 했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도 영국과 프랑스의 협력관계와 유사했다.
25년 전 김옥균이 막연히 구상했던, ‘일본이 동양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마침내 현실로 이뤄진 것이었다.
* * *
1907년 6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가 공식출범했다.
명예 이사장에는 의친왕 이강이, 총재(대표이사)에는 국제 신디케이트를 대표하는 해리먼이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일본 대표 고토 신페이와 한국 대표 이용익이 공동으로 선임됐다.
이사회는 10인으로 구성되었다. 대표이사 해리먼을 의장으로, 이사는 지분에 따라 국제 신디케이트 몫 3인, 한국 몫 3인, 일본 몫 3인으로 구성되었다.
의결 과반을 넘기려면 반드시 2개국의 협조가 필요한 구조였다.
4인의 이사를 보유한 미국이 가장 유리해 보였으나, 실상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일본 측 이사 3인 중 1인은 영국인이었는데, 사전합의에 따라 당분간 한국 쪽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한국도 4인의 이사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한·미·일 삼국 간에 대립하는 일은 별로 없었으나, 사안마다 간간이 이견이 발생하면 합종연횡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소수파에 속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웬만한 사안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만철 장악을 기도했던 루스벨트로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동안 미국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했던 이선으로선 상당한 도박을 한 셈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죽 쒀서 미국에 바칠 수야 있나? 만약 만철 장악과 동아시아 경제권을 달러로 종속시킨다는 계획이 미국의 일관된 대계(大計)라면, 일단 납작 엎드려서 팍스 아메리카나에 복종해야겠지. 하지만 이건 여당인 공화당도 아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개인의 야망에 불과하다. 현재의 미국은 여전히 고립주의가 대세인 나라다. 임기 1년 남은 대통령을 위해 간, 쓸개 다 내줄 수는 없지.’
이선이 생각하는 미국의 적극적 동아시아 정책 기한은 최대 5년, 즉 1912년이었다.
예상대로라면 미국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될 시점이었다. 이 시대의 민주당은 공화당만큼 아시아-태평양 정책에 관심이 없었다.
당장 내년 대선에서 태프트가 루스벨트를 계승한다면, 보다 온건하게 정책을 추진할 터였다. 태프트를 사실상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루스벨트는 상왕으로 계속 군림하며 정책에 관여하고 싶겠지만, 권력의 속성상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역사대로 루스벨트와 태프트는 분열하고, 민주당에 정권을 내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때문에라도 중국 문제에 집착하지 못한다. 러시아는 힘이 한풀 꺾인 상황. 하지만 만주, 몽골, 신강 문제에는 개입하고 싶어 하지. 만주 분할에 합의하든, 중국 혁명에 대비하든, 역시 러시아와 합의를 이뤄야 해.’
이선이 예측한 중대한 전환점은 1912년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청나라가 중화민국으로 대체된 해이다. 청나라는 역사가 이미 바뀌었으니 어떻게 전개될지 미지수였지만, 불안정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니콜라이를 직접 만나야겠다. 서한으로는 한계가 있어. 직접 대면해서 얻어 내야지. 설득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도 준비되어 있고…….’
이선은 11년 만의 유럽행을 고려했다. 황제 신분으로 출국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러일전쟁 종전과 만철 창립,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없는 지금이 오히려 적기였다.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본래 1905년 개최를 예정했으나, 러일전쟁 발발로 인해 2년이 미뤄졌다.
2차 만국평화회의는 전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소집을 주창했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고, 졸지에 ‘평화의 사도’로 이름을 드높였다.
만국평화회의는 본래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만들어진 만큼,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의장도 러시아 대표가 맡았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초청을 받아 1899년 1회 회의에 서명한 창립국 25개국 중 하나였다.
2회 회의에도 초청을 받아, 국제법에 능통한 이들로 대한제국 대표단이 선임되었다. 정사에 전 외무대신 서광범, 부사에 학무대신 이상설과 법무대신 이준이 임명되었다.
대표단은 5월에 출국하여 러시아를 경유해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크게 중요한 외교적 사안은 없었으나, ‘만국평화회의’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만큼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유럽행을 타진해 볼까. 의장국인 러시아로선 반길 일이지.’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2차 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에 시암(태국) 국왕 쭐랄롱꼰(라마 5세)이 방문할 예정이었다.
시암의 근대화를 이끈 라마 5세는 이미 1897년에 군주의 신분으로 유럽 방문을 단행한 바 있었고, 각국 군주들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라마 5세는 1907년에도 유럽을 방문했고, 4월말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순방 일정에 돌입했다.
전통적인 국가에서 급진적 서구화를 추진했다는 점에서, 이선은 라마 5세와 유사했다. 이선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었다.
대한제국 황제의 방문 타진에, 러시아와 네덜란드 정부는 놀라워하면서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공식적인 국빈 방문은 아니었지만, 러시아와 네덜란드는 환대를 약속했다.
“중대한 외교적 사안을 직접 논의하기 위해, 짐이 유럽을 방문하고 올까 하오.”
황제의 선언에 대신들은 놀랐다. 이선이 왕자 신분으로 해외를 여러 번 다녀왔다지만, 군주가 직접 나서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본조(本朝) 500년 이래 지엄한 군주의 신분으로 해외를 방문한 전례가 없사옵니다.”
“전조(前朝, 고려)로 거슬러 올라가면 많지. 대한은 새로운 예법을 토대로 세워진 나라이거늘, 어찌 전례에 집착하시오? 이미 짐은 6년 전에 북경을 방문하여 청국 황제와 회담한 일이 있소.”
“중국은 이웃 나라고, 본래 한 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오나 유럽은…….”
“시대가 바뀌었소. 영국 국왕이 친히 프랑스를 방문하여 대통령과 협상의 중요한 물꼬를 트고, 독일 황제가 친히 러시아 황제를 만나 중대한 외교적 사안을 논의하는 시대요. 시암 국왕 역시 현재 유럽을 방문하고 있는 중이오.”
“…….”
“전에 없이 중요한 변화의 시대이니만큼, 짐이 직접 방문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오. 만주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개통한 덕에 왕복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거요.”
이선이 차분하게 설명하자, 총리 유길준 이하 대신들은 납득했다.
“그럼 폐하께서 부재하시는 동안 지엄한 대권은 누가 대리하오리이까?”
일시적 대리청정이었다. 장남인 이진이 좀 더 장성했더라면 맡길 법도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어렸다.
“12년 전, 순친왕은 대리청정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한 바 있소. 이번에도 그에게 맡길까 하오.”
“삼가 황명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일부러 순친왕 이척에게 맡겼다. 황자들을 제외하면 아우 중에 계승권이 제일 높기도 했고, 의례에 밝은 만큼 대리청정으로는 적당했다. 1895년 태상황이 밀서 문제로 실각했을 때도 이척이 대리청정을 맡았다.
“순친왕, 짐은 그대를 믿고 가겠다. 중대한 사안은 이미 짐이 유럽에서도 보고를 받아 결정할 터이고, 세부적 사안들은 대신들이 논의하는 대로 따르면 된다. 그러니 큰 부담은 갖지 말길 바란다.”
“예, 신 이척, 삼가 지엄한 황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척은 처음에는 고사하다가, 이선이 거듭 요청하자 결국 대리청정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이척은 야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물이기에, 이선이 맡겨 놓은 일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시키는 대로 따를 터였다.
“원훈 여러분들께서 순친왕과 총리를 도와주시오. 짐은 경들을 믿습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선은 ‘원훈’ 칭호를 받은 전 총리들, 즉 김홍집, 박정양, 김옥균에게 중대한 정무를 일임했다.
김홍집과 박정양은 이미 정계에서 은퇴한 지 오래이므로, 이선의 복심(腹心)인 김옥균이 실질적으로 정무를 주도할 터였다.
“고균, 짐이 잠시 부재하더라도, 경이 어련히 알아서 잘 조율하리라 생각하오. 짐은 언제나 경을 믿고 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지극한 어심을 받들어, 순친왕 전하와 총리를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김옥균이라면 믿고 떠날 수 있었다. 이선의 신뢰 표명에 김옥균이 고개를 조아리며 명을 받들었다.
“황후,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금방 다녀오리다.”
“황실의 일은 걱정하지 마시옵고, 먼 길 평안히 다녀오시옵소서.”
이선은 아영에게 황실의 일을 맡겼다. 황제가 부재해도, 아영은 황후로서 황실의 중심을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의친왕, 그대는 식견과 경험이 다양하니 순친왕과 황후를 잘 도와주길 바란다.”
“예, 폐하.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옵소서.”
이강은 귀국 후에 남만주철도 명예 이사장이자 대한적십자 총재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오랜 유학과 외교 경험으로 다져진 이강은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태상황 폐하, 황태후 폐하. 소자는 당분간 태서(泰西, 유럽)에 다녀오고자 하옵니다. 당분간 문후를 여쭙지 못하는 불효를 용서해 주시옵고, 돌아오는 날까지 강녕하시옵소서.”
“허허, 황상께서는 별말씀을 다하시오. 원로에 무사히 잘 다녀오시길 바라오.”
11년 전만 해도 이선의 부재 시 경계대상 1호는 태상황이었지만, 이제는 해탈한 상태인 그로선 권력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이선에 반대하는 소수의 극단적 수구파들조차도, 이 시점에서는 태상황을 진지한 대안으로 여기는 이도 없었다.
“영친왕을 잘 부탁드립니다, 황상.”
“예, 함께 영국까지 갈 예정입니다.”
영친왕 이영은 이선의 유럽행에 동행했다. 이영은 영국 대학으로 유학할 예정이었다. 황태후는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이 맏형과 동행하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광무 11년 8월 14일.
조선 창업 515주년 개국기원절이자, 헌법 반포 8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개국기원절 행사를 마친 이선은, 바로 이튿날인 15일 황성역에서 북방으로 떠나는 특급열차 광무호에 몸을 실었다.
관료와 황성 시민들이 역에 도열하여 만세를 외쳤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먼 길 무사히 다녀오시옵소서! 2천만 국민이 한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서울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라시아 반대편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철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2주면 페테르부르크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철도로 유라시아 대륙 횡단이라는 장대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선은 여정의 끝에 외교적 승리를 얻고 돌아올 각오가 되어 있었다.
국민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광무호는 북방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