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45
– 126화에 계속 –
2부 126화 세계사의 변화
광무 11년(1907) 8월.
광무호는 경의선과 안봉선을 따라 청국령 봉천까지 나아가고, 봉천에서 남만주철도 본선에 합류하여 동청철도 교차점인 하얼빈으로 향한다.
하얼빈부터는 러시아 관할이었다. 광궤 열차로 갈아탄 후, 만주리(满洲里)에서 러시아-청국 국경을 넘는다. 러시아령 치타에서부터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으로 합류하게 된다.
서울에서 봉천까지 750KM, 봉천에서 하얼빈까지 550KM, 하얼빈에서 만주리까지 940KM, 만주리에서 치타까지 470KM, 치타에서 모스크바까지 6,200KM,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부르크까지 700KM.
도합 9,6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열차가 중간에 쉬지 않고 달려도 2주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까마득하게 긴 시간이지만, 20세기 초 기준에는 교통의 혁신이라 불릴 만큼 빠른 접근이었다.
“11년 전에 페테르부르크로 갔을 때는, 오데사까지 긴 항해를 한 후에 여기서부터 다시 러시아를 종단하는 철도를 타야 했지. 족히 5주는 필요했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동청철도 개통 덕분에, 예전에 비하면 엄청 빨라진 거지.”
이선은 1896년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참석했을 때를 떠올렸다. 이번은 비공식적 방문이었기에, ‘대사절단’을 구성했던 11년 전과 달리 소규모 인원이었다.
유학길에 동행한 영친왕 이영, 전 내무대신이자 시종무관장 민영환, 비서원경이자 제국익문사 독리 김학우, 궁내부 예식원 번역국장이자 익문사 구주국장 현상건, 시종무관 이동휘 부령 등이었다.
여러모로 의도적인 인선이었다. 민영환은 11년 전 대사절단에 동행한 정부 내의 대표적인 ‘친러파’였다. 김학우와 현상건은 대외정보 책임자들로 국제정세의 전문가들이었다. 이동휘는 러일전쟁기에 육군정보국 소속으로, 이선의 명을 받아 관전무관 유동열을 통해 러시아군에게 일본군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었다.
“실로 그렇사옵니다. 대양에서 배를 장기간 타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요.”
11년 전에 동행한 민영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선 2주 만에 유럽까지 간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새삼 느끼지만, 서력 20세기는 참으로 중대한 변혁의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10년 사이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앞으로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을지…….”
이영은 첫 외국행이었지만, 근대 학문을 깊이 익히며 새로운 세상을 배운 청년다운 통찰력을 보였다. 이선은 아우의 말에 빙긋 웃었다.
“10년 뒤라면 네가 이립(而立)이겠구나. 분명 세상이 크게 바뀌어 있을 거다. 영국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국가의 동량(棟樑)이 되길 바란다.”
“예, 반드시 최선을 다하여 폐하의 지극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갑신경장 이후에 태어난 이영은 조선 왕실에서 근대화된 교육을 받은 1세대였다. 이선은 이영을 새로운 시대의 표상(表象)처럼 만들고 싶었고, 이영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성장하고 있었다.
‘10년 뒤, 1917년이라. 역사대로라면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고, 러시아에 대혁명이 일어나는 바로 그 해로군. 이미 역사가 바뀌었으니 어찌 될지는 미지수지만…….’
역사대로라면,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제국의 운명은 불과 10년만 남아 있었다. 1907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선 상상도 못 할 결과였다.
이선이 한국의 역사는 바꾸었지만, 세계의 역사에는 큰 변화가 오지 않았다. ‘역사의 필연성’이라 해도 좋지만, 한 개인의 힘으로 인류 역사를 바꾼다는 건 애초에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이선 자신도 급작스러운 역사 변화를 원치 않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최대 장점, 즉 이 시대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었다. 한국이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완성할 때까지 세계사의 변화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했다.
‘설령 역사에 필연적 법칙이 있다 할지라도, 결국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노력에 달려 있다.’
임오군란 이후 한국의 역사를 바꾼 지 어언 25년, 한국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 위에 올라섰다. 이선은 이제 세계의 역사에도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정은 좀 편안하오?”
“덕분에요. 황실 전용열차는 역시 다르군요.”
이선의 물음에 마르가리타가 미소를 지었다. 광무호의 황실용 귀빈 객차는 움직이는 특급 호텔이었다.
“광무호는 동시대 최고 수준의 설비를 갖췄으니까. 이 시대에는 이만한 열차가 별로 없을 거요.”
“23년 전이었던가요? 바르샤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갈 때. 러시아 황실 객차를 처음 탔죠. 그 화려함이라니.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싶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폐하의 덕에 타는군요.”
이선의 자랑에 마르가리타는 새삼 옛일을 떠올렸다. 이선이 마르가리타를 처음 만났을 때, 바르샤바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러시아 황실이 조선 사절단에게 제공한 열차를 함께 탔다.
“그래, 그렇구려. 그런데 중요한 차이가 있지. 그때는 열강의 힘을 빌리러 가는 처지였지만, 지금은 우리가 이룩한 힘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
이선은 자부심을 담아 말했다.
보빙사로 떠난 1884년 당시만 해도, 조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이 제공한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이 부설한 철도를 한국의 특급열차가 달렸다. 23년 전에는 서양 열강에 구걸하러 다니는 처지였지만, 이제는 대등하게 외교적 논의를 하러 간다.
그야말로 무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폐하는 정말로 많은 걸 이루었죠. 하지만 나는 무엇을……. 부모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군요.”
마르가리타는 씁쓸하게 웃었다.
‘부모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처지.’ 그녀가 이선의 유럽행에 동행하게 된 이유였다.
이선은 애당초 유럽행에 마르가리타를 동행시킬 계획이 없었다. 마르가리타는 예전부터 고국에 돌아가길 원하긴 했지만, 러시아 당국 입장에서는 정치범이라 껄끄러운 존재였다. 이선은 특수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발 저도 유럽에 가게 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부탁하지 않을게요.”
여전히 러시아령 폴란드에 거주하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은 마르가리타는 조바심을 냈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는데, 어머니조차 생전에 찾아뵙지 못하다면 비통함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 당신은 차르의 사면을 받았기에 개인적 방문에 문제는 없겠지만, 하필 시기가 안 좋아서…….”
1905년부터 지속된 폴란드 혁명은 1907년 종료됐다. 러시아 본토가 안정을 찾게 되자, 러시아군이 폴란드에 재투입됐다. 바르샤바와 우치의 봉기는 무력으로 진압됐다. 1831년과 1863년에 이어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제국의 힘에 다시 한번 좌절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마르가리타가 폴란드에 와서 기껏 잠재운 혁명을 들쑤시기라도 한다면, 러시아 당국 입장에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정치적 활동은 일절 하지 않을 거예요. 그저 고향의 어머니만 뵙게 해 주세요.”
마르가리타의 간청에 이선은 ‘인도적 차원의 일회성 방문’을 허용해 달라고 러시아에 요청했다.
러시아 당국은 정치 활동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비밀리에 개인적으로 방문한다는 조건을 갖고 마르가리타의 고향 방문을 허용했다.
이선이 러시아에서 외교 활동을 하는 동안, 마르가리타는 고향에서 노모와 재회할 예정이었다.
“힘내요. 당신에게는 아이들이 있잖소.”
“어머니께 손자들을 보여 드리지도 못하는군요.”
이안과 이라는 아직 어려서 동행하지 않았다. 마르가리타는 어린아이들을 두고 먼 길을 떠나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아영이 친자식처럼 여겨서 다행이었다. 법적으로는 서자도 황후 소생이긴 했지만, 그런 걸 떠나서 아영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꼈다.
“어머님도 이해해 주실 거요. 이 험난한 시국에 당신이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래요. 옛 동지들, 내 동포들은 다시 차르의 군홧발에 짓밟혔지만, 나는 호의호식하고 있으니…….”
마르가리타는 어두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요. 정치적 발언은 하지 않기로 했는데. 러시아 땅에 들어가면 자제할게요.”
“뭐, 어차피 듣는 사람 없는데 어떻소. 여기선 차르 욕 마음껏 해도 좋소. 솔직히 나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거든.”
니콜라이는 이선의 친우이지만, 이선도 피의 일요일 사건과 그 후속 조치에 극도로 실망한 터였다.
이번에는 니콜라이에게 정신을 좀 차리게 해 주고 싶었다. 러시아 제국의 국민들을 위해서도, 니콜라이 그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도.
* * *
하얼빈부터는 러시아가 제공한 특별 열차로 갈아탔다. 만주리를 지나 러시아 영내로 진입한 이후부터 열차는 중간 정차를 최소화한 채로 달렸다.
난코스라 공사가 지체되었던 바이칼 호수 남부 구간도 완성되어,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은 모두 완공된 상태였다. 철도가 단선이라 속도가 지체되기 마련이었지만, 러시아 당국의 배려로 최우선으로 철로를 배정받았다.
창밖으로 시베리아의 풍경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절단은 새삼 러시아의 광대함에 탄성을 흘렸다.
“이렇게 거대한 나라랑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이미 이토록 넓은 땅을 갖고 있으면서, 뭐가 아쉬워서 만주와 몽골까지 노리겠다는 건지.”
러일전쟁으로 남만주를 상실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북만주와 몽골에는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국의 티베트 침공 이후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 망명 중이었다. 종교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합류로 힘을 얻은 몽골 왕공들은, 독립을 청원하는 사절을 계속 러시아로 보냈다. 러일전쟁으로 한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러시아는 몽골 독립운동에 여전히 관심을 가졌다.
“제국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거든. 마침 전쟁으로 기세가 꺾인 기회에 이야기를 잘해 봐야지.”
러시아와 타협이 필요했다. 이선은 북만주와 몽골의 세력권은 러시아에게 넘겨 주더라도, 남만주는 대한제국의 확고한 세력권으로 인정받을 계획이었다.
8월 29일(율리우스력 16일), 마침내 열차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2주 만이었다.
“여기 달력으로는 여전히 8월 16일이니, 하루 만에 도착한 기분입니다.”
“하하! 정말로 미래에는 하루 만에 가는 세상이 올 거요.”
“유럽까지 하루라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비행기만 상용화된다면, 하늘을 통해서 얼마든지.”
이 시대 사람들은 아직 상상 속의 영역이지만, 이선은 이미 알고 있는 미래였다.
‘그 시대 올 때까지 살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내 생애에 최대한 많은 진보를 이끌어 내야 해.’
이선은 언제나 교통의 혁신을 준비했다. 항공망이 전 세계를 뒤엎을 시대까지 사는 건 무리여도, 비행기 상용화는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폐하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네요. 배려에 감사드려요.”
“별말씀을. 어머님께 안부 전해 주시오. 그럼 바르샤바에서 다시 만납시다.”
마르가리타는 모스크바에서 바르샤바로 바로 떠났다. 이선과 대한제국 사절단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마친 후, 바르샤바와 베를린을 경유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선은 러시아,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순으로 방문해 각국과 외교적 논의를 한 후 귀국할 예정이었다. 본국을 오래 비울 수 없는 관계로 최대한 빨리 교섭을 마칠 예정이었다.
이선과 한국 사절단은 8월 30일(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Alexander P. Izvolsky) 백작이 이선 일행을 맞이했다. 주일공사를 지낸 이즈볼스키는 대외 온건파를 대표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한국 황제 폐하의 영접을 맡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폐하께서는 평안하십니까?”
“평안하십니다. 양국 황제 폐하의 회담은 모레 페테르고프 여름궁전에서 예정되어 있습니다. 먼 길에 노고가 많으셨는데, 이틀간 푹 쉬시길 바랍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물론 이선은 니콜라이를 만날 때까지 가만히 쉬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먼저 총리를 만날 생각이었다.
11년 만에 도착한 페테르부르크의 공기는 예전과 달랐다. 1906년 혁명을 겪은 러시아는 예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1907년 3월, 10월 선언으로 약속한 국가두마(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전국 대표가 페테르부르크로 모였다.
다만 보통선거가 아니라 25세 이상 남성 중에서 계층별 선거로 이뤄졌다. 귀족-지주의 1표가 도시 거주민(부르주아지) 2표, 농민 15표, 노동자 45표와 맞먹을 정도로 불공정한 선거였지만, 어찌 되었건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국민 선거로 의회가 구성되었다.
4월, 국가두마는 기본법(헌법)의 제정을 선포했다. 기본법에서도 여전히 ‘하느님이 부여한 신성한 전제군주권의 불가침성’은 강조되었고, 차르는 두마의 입법권에 무제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두마의 소집과 해산, 계엄령 선포권도 제약이 없었다. 모범이 된 프로이센은 물론이고, 메이지 일본보다도 못한 헌법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러시아는 헌법과 의회를 가진 입헌군주국으로 체제를 전환했다.
기본법 제정과 국가두마가 개설된 직후, 10월 선언을 집행한 총리 비테가 사임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당면한 목표를 모두 달성하여 총리 스스로 사임’이었지만, 차르와 보수파가 여전히 비테를 불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수반동으로 회귀하진 않았다. 1906년 혁명의 여파가 생생한 탓이었다. 비테를 대신하여 유능한 보수적 개혁가가 권좌에 등극했다.
“차르의 충실한 백성으로 인식되었던 농민들이 1906년에는 반기를 들었습니다. 저들이 급진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충성심을 되찾아야 합니다.”
사라토프에서 격렬히 일어났던 농민반란을 효율적으로 제압했던 주지사 표트르 스톨리핀(Pyotr A. Stolypin)은 1907년 초 신임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스톨리핀은 자영농 육성의 농업개혁 프로그램을 갖고 최고 권력으로 진입했다.
유능함과 비전을 동시에 입증한 스톨리핀은, 비테를 대신해 실권을 가진 2대 국무회의 의장(총리)로 임명되었다.
“러시아는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혁명을 방지할 길은 선제적 개혁뿐이다. 자영농 중심의 농업개혁은 러시아의 산업발전과 제정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다.”
스톨리핀의 개혁 프로그램은 단순한 농업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보수파의 선제적 개혁이었다. 비유하자면, 스톨리핀은 제정 러시아 최후의 구원투수였다.
어쩌면 러시아 혁명이라는 20세기 세계사의 중대한 분수령을 바꿀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1907년 8월 31일.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두 인물, 이선과 스톨리핀은 첫 만남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