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46
– 127화에 계속 –
2부 127화 역사를 바꿀 사람
1907년 8월 현재, 러시아 제국은 표면적으로 입헌군주정이었다. 귀족의 1표가 노동자의 45표라는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선거에도 불구하고, 전국 선거에 러시아 국민의 민의가 반영되었다.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의 정당인 입헌민주당이 제1당, 사회혁명당에서 갈라져 나온 온건 농민 사회주의 정당인 노동당이 제2당,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음에도 노동자들의 대표 정당인 사회민주노동당이 제3당, 폴란드 자치주의자들인 민족민주당이 제4당, 혁명적 인민주의 정당인 사회혁명당이 제5당이었다.
성향은 달라도 모두 정부에 반대하는 야당이었다. 국가두마는 차리즘에 반대하는 의원들의 분노가 표출되는 자리였고, ‘국민적 분노의 두마’라고 불렸다.
정부를 지지하는 정당은 자유주의 우파 10월당과 우익에 불과했다. 다 합쳐도 전체 의석의 20%가 되지 않았다.
“당신들은 위대한 혁명을 원할지 몰라도, 나는 위대한 러시아를 원한다.”
정부의 가장 격렬한 반대파인 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혁명당 의원들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총리 스톨리핀은 당당하게 외쳤다.
현행 헌법에서 정부는 의회의 반대를 무시하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국가두마가 법안을 발의해도 상원에 해당되는 국무원이 무력화시킬 수 있었는데, 국무원은 두마에 적대적인 귀족과 지방 대표들로 구성됐다. 더욱이 차르에게는 제한 없는 입법권과 거부권이 있었다.
즉, 총리는 차르의 신임만 받으면 무제한적인 통치가 가능했다.
“도시는 그렇다 쳐도, 농촌의 민심 이반도 심각하다. 제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인 개혁 정치를 통해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긴요하며, 최선의 방법은 선제적인 토지개혁이다.”
선거 결과에서 드러난 민심은 압도적으로 개혁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스톨리핀은 야당과 화합할 생각이 없었지만, 제정의 미래를 위해 토지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농노에서 해방되어도 여전히 가난한 빈농, 농업공동체(미르)에 종속되어있는 농민들을 해방시켜 사유 토지를 부여, 견실한 자영농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두마가 설립되자마자 스톨리핀 정부가 처음으로 내건 법안이 바로 농업개혁법이었다.
“개혁을 완수할 때까지, 러시아에는 20년의 평화가 필요하다. 이제 모험적인 외교 정책은 필요 없다. 협상으로 평화를 확립한다.”
스톨리핀은 차르의 모험적인 외교 정책을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중요한 건 국내개혁의 완수였고, 이를 위해서 외교 파트너들과 협상으로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런 대내외적 상황에서, 스톨리핀과 이선은 첫 대화에 나서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러시아의 미래를 책임질 총리 각하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명망 높은 황제 폐하를 뵐 수 있게 되어 저야말로 큰 영광입니다.”
이선과 스톨리핀은 힘차게 악수를 했다. 올해 45세인 스톨리핀의 손아귀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비록 머리는 훤하게 벗겨진 대머리지만, 당당한 풍채에서 강력한 힘이 풍겨 나왔다. 마치 야생 불곰 같았다.
“폐하께서는 로마노프 왕조의 벗이시지요. 1881년 선황제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막고, 1891년 황제 폐하의 일본 방문 시에도 암살을 막으셨지요. 생생히 기억합니다.”
“하하, 짐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러시아 국가의 가사처럼 ‘하느님께서 차르를 보호’하셨지요. 짐은 기왕이면 러시아의 벗이 되고 싶습니다.”
스톨리핀의 의례적인 찬사에 이선이 답했다. 스톨리핀이 되물었다.
“로마노프 왕조가 곧 러시아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그래 왔지요. 차르가 곧 러시아였으니까. 다만 국민 선거로 선출된 의회가 확립된 지금은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군주와 정부, 의회와 국민의 뜻이 일치하는 것입니다만.”
왕권신수설을 맹신하는 니콜라이가 들으면 기겁할 말이었지만, 스톨리핀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차르의 충신을 자처했지만, 동시에 민의를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폐하께서는 동양의 전제군주로 즉위하셨는데, 국가와 국민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독특하신 것 같습니다.”
“군주는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군주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을 다하는 게 중요하지요. 예컨대 10년 전의 짐에게 부여된 사명은 자주독립과 근대화의 완성이었습니다.”
“호오.”
스톨리핀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즉위한 동갑내기 군주이건만, 자신의 주군 니콜라이와는 크게 달랐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토지개혁이었습니다.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농민의 안정만큼 중요한 문제가 없습니다. 과거의 인습에 얽매인 소작농과 빈농을 견실한 자영농으로 육성하는 것, 여기에 국운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전근대적 농촌사회에서 국민국가와 산업사회로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각하께서도 고심하시는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이선의 말에 스톨리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구의 85%가 농민인 나라에서, 토지개혁은 필수과제였다. 러시아처럼 전근대적인 귀족의 토지 장악이나, 농민공동체가 지배적인 나라에서는 더욱 그랬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전근대적 토지제도는 산업화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요, 농민의 토지 소유는 근대화로 가는 길입니다. 소유권이 확립되면, 서유럽처럼 체제의 보루가 되는 자영농 계급이 형성되겠지요. 튼튼하고 진취적인 농민은 자기 몫의 토지를 정리하고 도시로 떠나 노동자나 기업가로 변신하고, 남은 이들은 착실한 자본주의적 자영농이 되는 게 제 구상입니다.”
스톨리핀은 프랑스나 미국처럼 자영농, 부농, 소지주 계급을 창조하려고 했다. 번영하는 농민은 체제에 감사하고, 혁명을 막는 체제의 보루가 될 것이다.
다만 혁명의 유산인 프랑스나 미국과 다른 점은, 경제적 권리는 보장해 주되 정치적 권리는 배제하는 것이었다. 토지개혁과 산업화의 목적은 정치개혁을 최소화하고 제정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선제적인 위로부터의 개혁만이 혁명을 막을 수 있습니다. 짐이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추진한 토지개혁이 각하의 정책에도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10년간 이 문제로 골치 아팠지만, 이제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관련 문서들을 번역하여 가져왔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현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이선과 스톨리핀은 서로에게 최적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이선은 이미 국가 주도의 토지개혁을 성공리에 진행한 바 있었다. 러시아에 비해 규모가 작고 반발이 적은 덕에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지만, 스톨리핀에게 있어 중요한 모범이 될 수 있었다.
“폐하의 조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로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를 살피고 있습니다만, 한국의 사례도 참조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도 토지개혁은 프랑스와 덴마크의 사례를 주로 참조했지요. 한국과 러시아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낡은 사회를 탈피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는 같습니다. 짐은 진심으로 우리 두 나라가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이선과 스톨리핀은 타협이 가능했다. 스톨리핀은 니콜라이 2세처럼 ‘신항로 정책’을 고집할 생각이 없었고, 만주와 몽골로의 팽창을 원하는 강경파들의 주장도 무시했다.
“러시아의 만주를 향한 과도한 팽창은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공격성에 불을 지르게 된 결과가 되었으니까요.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전쟁으로 일본의 공격성이 꺾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동양의 평화와 안정을 이룰 때가 되었습니다.”
일부 강경파들은 전쟁을 다시 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만주와 사할린을 되찾아 오자고 외쳤지만, 스톨리핀과 외무대신 이즈볼스키는 불필요한 마찰을 빚을 생각이 없었다.
스톨리핀은 발칸, 페르시아, 티베트와 몽골 등에서도 강경책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20년의 평화’였고, 이를 위해 숙적 영국과도 타협할 생각이 있었다.
“동양뿐만이 아닙니다. 평화를 위하여 세계적인 타협을 이룰 때가 왔습니다. 만약 각하께서 영국과의 타협을 원한다면, 한국은 영국의 동맹국으로서 대화를 주선할 용의가 있습니다. 일본 또한 러시아와 더이상 적대할 의사가 없습니다.”
이선은 스톨리핀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었다.
이선과 스톨리핀이 회담한 1907년 8월 31일은, 실제 역사대로라면 영국-러시아 협상이 체결된 날이었다. 영러협상의 체결로 한 세기 동안 진행된 ‘그레이트 게임’도 종결되었다.
그런데 이미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에, 영러협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패전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과 러시아는 타협할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차르가 독일과의 협력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었다.
“영국과의 대화가 필요하긴 하지요. 폐하께서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짐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후에,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에드워드 7세 국왕 폐하, 총리 및 외무장관과의 회담도 예정되어 있지요. 협상을 적극적으로 주선해 보겠습니다.”
러시아 입장에선 굳이 한국이란 중재자를 거치지 않고 동맹국 프랑스를 통해 영국과 협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데, 정치적으로까지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독 포위망의 일원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싶어 했지만, 스톨리핀은 영국과 타협할지언정 독일과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때마침 영국의 동맹국인 한국이 ‘정직한 중재자’를 자처한다면, 한번 맡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폐하의 중재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겠지요?”
“하하, 대가랄 것까지야. 한국과 러시아, 양국 모두를 위해 도움이 될 타협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선은 만주의 세력권 분할과 몽골 독립 문제를 의제로 가져왔다.
다만 외교 정책은 차르가 직접 관장하는 만큼, 스톨리핀보다 니콜라이에게 먼저 제의할 생각이었다. 이미 5년 전에 비테와 사전합의를 했다가 차르의 변덕으로 무산된 전례가 있는 만큼, 이선도 조심했다. 전제군주에 집착하는 니콜라이는 ‘신하가 자신보다 위에 있는’ 상황을 참지 못했다.
이선과 스톨리핀은 예정된 면담 시간을 넘겨, 국내외의 정세에 대해 한참 논의했다.
“짐은 표트르 대제와 알렉산드르 2세를 모범으로 삼아 국가를 총체적으로 대개혁하고자 했지요. 배움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선은 서양의 호사가들이 자신을 ‘동양의 표트르 대제’라고 부르는 걸 적절히 사용했다. 러시아 제국의 국부인 표트르 대제는 위대한 표상 그 자체였다.
“각하는 국가의 현실을 정확히 보고, 장대한 미래를 구상하는 드문 정치가입니다. 200년 전 러시아에 표트르 대제가 꼭 필요하였듯이, 지금의 러시아에 필요한 건 각하와 같은 정치가입니다.”
“과찬이십니다. 폐하와 같은 군주를 모시고 있는 한국은 참으로 복 받은 나라입니다.”
이선과 대화를 나눠 본 후, 스톨리핀은 솔직히 감탄을 표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요, 러시아의 현실에 대해서도 어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보다 이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니콜라이의 러시아 인식은 17세기에 머물러 있었고, 궁궐 밖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는 동화 속 세계를 살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선은 현재의 러시아에 뭐가 필요한지 정확히 분석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은 나를 신뢰하고 있지만, 언제 그 신뢰를 거둘지 모르니…….’
전임 총리 비테나 스톨리핀은 니콜라이 못지않게 절실하게 제정을 구원하길 바랐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개혁만이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한 반면, 차르는 약간만 변화를 허용해도 체제 전체가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다.
비테는 1906년 혁명을 막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 차르와 수구파들이 개혁 그 자체를 불신하기 때문이었다.
「신뢰할 수 없는 통치자, 오늘 승인한 것을 내일 거부하는 통치자는 국가라는 배를 조종해서 폭풍우를 뚫고 잠잠한 항구로 들어갈 수 없다. 황제의 가장 두드러진 단점은, 비참할 정도로 의지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공을 세우고도 토사구팽당한 비테는 차르에 대해 악담을 쏟아 냈다.
스톨리핀도 언제든지 비테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개혁이 아무리 제정을 위한 일일지라도, 차르는 갈수록 개혁 자체를 견디지 못하게 될 터였다.
“각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이선은 스톨리핀의 우려를 짐작했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혹여, 근래 황실의 주위에 정체불명의 신부가 있지 않습니까?”
“…… 알고 계시군요. 시베리아에서 온 신부가 황후 폐하의 총애를 얻어 황실을 기웃거립니다.”
스톨리핀은 이선이 자질구레한 사항까지 알고 있다는 데 놀라워했지만, 이선은 나름 심각했다.
‘역시, 결국 라스푸틴이 등장한 건가.’
희대의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i E. Rasputin)이 결국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었다.
“혹시 그 신부가 무슨 문제라도?”
“사생활에 의혹이 많기는 합니다만,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자로 인해 혹여 황실의 위신과 체면에 영향이 미칠지 염려가 되지요. 뭐, 그래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재작년에 처음 수도에 등장한 라스푸틴은, 신통한 치료능력을 지닌 신부로 명성을 떨쳤다.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추종자를 얻게 된 라스푸틴은 마침내 추천을 받아 황실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극비사항인 알렉세이 황태자의 혈우병 ‘치료’에 성과를 보이면서, 라스푸틴은 황후 알렉산드라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황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귀족 사회에서 성추문을 일으키는 정도였다. 아직 정치적 영향력은 전혀 없었다.
스톨리핀은 라스푸틴의 추문을 염려하여 오흐라나에 명해 감시하고 있긴 했지만, 영향력을 경계하진 않았다.
‘라스푸틴 같은 놈이 앞으로 황실의 벗이자 예언자로 날뛰게 내버려 둘 순 없지. 로마노프 왕조의 벗이자 예언자는 나 한 사람이면 족해.’
스톨리핀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바꿀 사람이라면, 라스푸틴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바꿀 자였다.
결국 라스푸틴은 장기적으로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전체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칠 존재였다. 이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이선은 니콜라이 2세와의 회담을 앞두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