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54
– 135화에 계속 –
2부 135화 왕족이라는 지위
발레 라 바야데르의 막이 내린 후, 이선은 아나스타샤에게 당부했다.
“아가씨, 오늘 일은 놀라게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군인 가문의 영애이니만큼, 내 입장도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사소할지라도 정보는 국가안보와 직결됩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귀국의 오흐라나와 군사정보국을 떠올리면 됩니다.”
한국 황제가 정중한 어조로 하는 말에,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흐라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조직인지는 귀족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의심되는 자는 죽이진 않더라도 끔찍한 고문을 가할 터였다.
“장군인 아버지를 통해 얻는 정보가 있을지라도, 마음속으로만 갖고 있으십시오. 오늘 같은 일이 또 발생한다면, 그때는 아무도 안위를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웅변은 은, 침묵은 금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가씨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명심하십시오.”
아나스타샤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본래 총명했기에, 오늘 자신이 경솔했다는 건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이선과 장무영에게 느꼈던 공포와 불쾌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안도감으로 변했다. ‘장난’이었기에 망정이지, 이선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장무영은 즉각 그녀를 해쳤을 터였다.
“아가씨가 아는 한국 관련 사안은 모두 비밀이어야 하고, 당연히 오늘 일도 비밀입니다. 모두 잊으십시오.”
“물론이지요.”
아나스타샤는 비밀을 지킬 생각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안다면 대경실색할 일이었다. 외동딸의 경솔함을 질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지난 일을 조사하다가, 자신이 드레스에 붉은 리본을 달고 정치집회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집 밖으로 다니지도 못하게 할지도.
“아, 프린스 영이 마치 기사처럼 아가씨를 보호하려 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았으면 하는군요. 처음 보는 사람을 결혼까지 하면서 보호하려고 하다니, 참 내 아우지만 대단한 일입니다.”
“폐, 폐하!”
이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평상시에 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은 너무 드러낸 것 같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 아우는 영국으로 유학 가기 때문에 앞으로 보기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국과 러시아의 거리보다는 가까우니 잘 됐군요. 둘이 종종 편지라도 주고받도록 해요. 기이한 상황에서 만나긴 했지만, 이것도 인연이겠지요. 두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합니다.”
당부의 말을 마친 이선은 이영에게 아나스타샤의 에스코트를 명했다. 로마노프 황실 전용 마차가 두 사람에게 제공됐다.
브론스키 저택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이영과 아나스타샤는 단둘이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오늘 공연 어떠셨나요? 역시 듣던 대로 발레는 본고장 러시아가 최고더군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 보려고 이영이 발레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는 발레에 대해 잘 몰랐지만, 뭔가 대단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예, 그랬어요.”
“그, 그렇죠? 하지만 서양에서 묘사하는 동양은 너무 신비한 측면에만 몰두하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인도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사실 인도는…….”
이영은 갑자기 인도의 문화와 역사로 화제를 돌렸다. 아나스타샤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이영은 자기가 괜한 소리를 했나 싶었다.
“인도보다는 왕자님 나라 이야기를 해 주세요.”
“아, 네! 그럴까요?”
아나스타샤의 요청에 이영은 열정적으로 한국에 대해 설명했다.
러시아에 비하면 작은 나라지만 얼마나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인지, 이영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 왕조는 500년 역사를 내려왔습니다. 국민은 진심으로 왕조에 충성하지요. 아까 뵈었던 제 형님은 27번째 군주이시자 첫 황제이십니다. 러시아에 비유하면 표트르 대제와 같은 분이시죠.”
이영은 자부심을 담아 설명했지만, 아나스타샤는 큰 감명을 받은 느낌은 아니었다.
“동양 왕실에는 하렘이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도 그런가요?”
“후궁이라고 있는데, 서양인들이 상상하는 것하곤 달라요. 엄격한 법도가 지배하는 곳이지요. 그리고 제 형님께선 후궁 제도를 폐지하셨습니다. 저도 태상황 폐하와 황태후 폐하의 소생입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폴란드 출신의 여인이 곁에 계신 거로 아는데요. 후궁이 아닌가요?”
“아, 그건……. 후궁은 아니고, 서양의 그, 뭐라고 해야지, 정부라고 해야 할까요.”
‘정부(情婦, maitresse)’라는 단어에 정숙한 귀족 영애인 아나스타샤는 얼굴을 붉혔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백부만 해도 젊은 정부를 두고 있었으니 잘 알고 있었다. 귀족들 상당수가 정부를 두고 있었고, 애처가인 차르가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동양에서는 첩을 두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죠?”
“지금까지는 그래 왔죠. 하지만 달라질 거예요. 다만 황제 폐하는 예외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다릅니다. 동양에서 군주는 신성한 존재입니다. 러시아에서 차르가 신의 대리인이듯, 동양에서는 하늘의 대리인이죠. 청국 황제나 시암 왕은 후궁만 수백 명입니다. 하지만 전혀 흠 될 게 없죠.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유교에서는…….”
이영은 기독교에 뿌리를 둔 서양 문화와 유교-불교에 뿌리를 둔 동양 문화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
“그럼 전하께서도 첩을 둘 생각인가요? 군주의 아들이자 황제의 아우니까?”
“아, 아뇨! 저는 그게 인습이라고 생각해요. 동양도 앞으로는 달라질 겁니다. 저도 변화한 세상을 체험하려고 서양에서 공부하려는 거죠.”
“좋은 생각이에요, 왕자님.”
아나스타샤는 그때야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지으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영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아, 너무 아름답다.’
이영의 나이 만으로 스물, 동년배 여성과 대화를 나눈 것은 손에 꼽았다. 어머니와 여동생, 궁녀들을 제외하면 여자랑 접촉할 일도 없었다.
이영은 진보적인 교육을 받은 첫 왕실 인사였지만, 동시에 엄격한 궁중 예법도 익혔다. 외간 여성을 조심스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왕족은 일찍 결혼했겠지만, 조혼 금지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영은 스물이 넘도록 여자를 만날 일이 없었다.
황실의 이단아인 이강이 숙맥인 막내를 딱하게 여겨 자신이 즐겨 가는 기루(妓樓)나 서양식 무도회에 불러내기도 했지만, 이영은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유교적 예법에 밝고 처신을 조심하는 황태후의 영향으로 인해 이영은 구설수에 오를 행위를 일체 배격했다.
지식의 폭이나 생각의 깊이는 조숙한 이 황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귀여운 왕자님이네.’
열여덟 살 아나스타샤는 역으로 신선함을 느꼈다.
자신의 가문과 미모에 무작정 들이대는 남자들이라면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장교들이 많았는데, 그들만 채워도 1개 중대는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지위와 야망을 내세우며 으스대는 남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바람둥이로 유명한 모 대공도 그녀에게 접근해 막대한 재산을 약속하며 정부의 자리를 제안한 바 있었다. 당연히 뻥 차 버렸지만.
그에 비하면 이 동양 왕자는 얼마나 순수한지! 왕족이라는 지위, 어마어마한 재산, 아나스타샤에게 베푼 호의, 기타 등등을 따져 봐도 부족할 게 전혀 없건만. 마치 가정교사 앞의 제자처럼 소심하게 굴고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이 선량하고 성실한 남자라면,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는 매우 희귀한 존재였다.
“이제 도착했네요.”
“아, 네. 벌써…….”
이영은 진한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붙잡거나 더 말할 용기는 내지 못했다.
“오늘 일은 정말 감사드려요.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서 무한한 호의를 베푼 왕자님의 마음을 깊이 간직할게요.”
“별말씀을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리고 호의적인 결정을 내리신 건 제가 아니라 폐하이십니다.”
아나스타샤의 감사 인사에 이영은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영국으로 가신다고 들었어요. 앞으로 종종 편지 주세요. 제 주소랍니다.”
아나스타샤는 브론스키 가문의 문장이 찍힌 명함을 건넸다. 이영은 기쁘게 받았다.
“꼭 편지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왕자님도요.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원하며, 건강하시길 바랄게요.”
아나스타샤는 장갑을 벗어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영은 작고 새하얀 손을 한참 쳐다보다가, 비로소 서양 예법을 떠올리고 허둥지둥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그의 행동에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꾹 참고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아나스타샤가 손을 흔들고 저택 안으로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이영은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뒤늦게 이영은 그녀가 장갑을 마차에 떨어트리고 갔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장갑을 돌려주겠다는 핑계로 저택으로 들어가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한국 친왕 체면에 외간 여인의 집안까지 쫓아가다니, 그럴 수는 없겠지. 그 댁 부친이 어찌 생각하시겠어. 일단 편지를 주고받은 것만으로 충분하겠지. 장갑은 보관했다가 나중에 돌려줘야겠다. 나중에 찾아올 명분이 되겠어.’
이영은 아나스타샤의 비단 장갑을 조심스럽게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영은 영빈관으로 돌아온 후에도, 아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날 때까지도 황홀한 기분이었다.
페테르부르크 역에서 떠날 때 차르가 친히 환송하는 성대한 행사가 벌어졌지만, 이영은 혹시 아나스타샤가 오지 않았을까 싶어 주위를 흘긋거렸다.
이선은 아우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좋은 형제이신 폐하, 남은 여정도 부디 편안하길 바라오. 폐하의 앞날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감사합니다. 폐하의 치세에 존엄과 영광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아마도 이선이 향후 10년 이내로 다시 유럽에 올 일은 없었으므로, 니콜라이는 깊은 아쉬움을 느끼며 이선을 환송했다.
두 황제는 악수하고, 친밀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선의 러시아행은 그 여느 때 못지않은 성공적인 외교 행보였고, 니콜라이에게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한국과 러시아는 유라시아의 앞날을 함께 논의했고, 니콜라이는 황태자의 건강이 회복된 데에 안도감을 느꼈다.
러시아라는 확고한 지지대를 얻은 이선은, 다음 목적지인 독일과 네덜란드로 향했다. 중간에 러시아령 폴란드를 경유할 예정이었다.
이선과 대한제국 사절단을 태운 특별열차는 바르샤바로 향했다.
“이제 러시아를 떠나는군요.”
“아쉬운가?”
“아닙니다. 다음에는 어떤 새로운 배움이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이선의 물음에 이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선은 화제를 전환했다.
“여성용 장갑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있던데.”
“아, 그, 그건, 브론스카야 양이 떨어트렸는데, 돌려주질 못해서…….”
이영은 뜨끔하여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이선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 아가씨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떨어트린 것 같구나.”
“그, 그런 걸까요?”
“고전적인 방법이로구나.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기법이지.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의 귀부인이 기사에게 손수건이나 장갑을 떨어트렸다는 일화가 많지.”
“아하…….”
이영은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1900년대야! 연애방식도 어쩜 이렇게 상투적인지!’
풋풋한 두 청춘남녀가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선은 19살 어린 막내아우에게 유독 관대했다. 9살 터울의 이강에게는 종종 따끔한 질책을 하거나 엄격하게 대한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였다.
이선이 이영을 아끼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영은 이선이 스무 살 때 태어나 유아기부터 커 가는 걸 직접 보기도 했고, 신식 교육을 받은 최초의 조선 왕족으로서 기대 이상으로 성장했다.
“브론스카야 양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아,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보니 더욱 현명하고 지적인 아가씨입니다.”
이영이 이래저래 이유를 댔지만, 결국 한눈에 반한 건 그녀의 미모였다. 이선도 처음 봤을 때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으니.
“서양 여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습니다마는,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21세기의 기억이 있는 이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인 조선 사람과 달리 일찌감치 서구화의 세례를 받은 이영은 서구적인 미를 아름답게 여겼다. 조선의 전통적인 미인도 대신에 보티첼리와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며 그리스-로마 여신들의 미에 익숙하게 된 이영이었다.
“그래, 서양은 아름답지. 그게 우리 동양인들을 괴롭히는 문제다.”
단순히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20세기 초, 서양의 위세가 절정에 달해 있던 시대였다.
제국주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비서구 국가는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철두철미하게 서구의 방식을 흡수하고 외양을 흉내 냈다. 오직 그렇게 한 나라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바로 일본, 시암(태국), 대한제국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면까지 변화했다. 메이지 일본처럼 극단적인 구화주의(歐化主義)도 나타났다. 강렬한 서구 콤플렉스는 인종적 열등감으로 이어졌고, 서구에서 만연하던 우생학까지 도입되며 ‘잡혼(雜婚, 국제혼)’을 통해 인종개량을 하자는 헛소리가 공공연히 나타났다.
“뭐, 사랑에 국적과 인종이 무슨 상관있겠냐마는. 무슨 국제혼이 근대성의 표현이라고 여기는 세태(世態)가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근대화 정책이 옳았다는 게 증명되면서, 서구에 대한 숭배는 한국 지배층과 지식인 사회로 확산되었다. 결혼만큼 당장 와닿는 것도 없었으니, 미국 상류층 여인과 결혼한 서재필은 개화파 청년들의 흠모 대상이었다.
이선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었다. 당장 위대하신 황제 폐하부터 서양 여인을 사랑하지 않은가? 서양 애인이 여럿인 의친왕 전하는 어떻고? 진정 진보적이고 개화된 한국인이라면 서양인 배우자를 얻어야 하지 않을까?
보수파들은 이런 인식에 혀를 차며 개탄을 금치 못했지만, 서구 숭배가 그만큼 만연해 있었다.
물론 99%의 평범한 한국인들과는 무관한 세상이었다. 대부분은 서양이 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폐하, 저는 결코 그런 마음으로…….”
“안다. 너는 총명하니까. 친교는 자유다만, 연애와 혼인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황실은 곧 국민의 모범이니까.”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이선은 맞은편에 앉은 막내아우를 쳐다보았다. 결코 자신의 뜻을 거스를 아이가 아니었다.
‘만약 내게 자식이 없었더라면, 후계를 너로 염두에 두었을 터.’
이영은 이 말에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지만, 이선은 단순히 떠보려고 해 본 말이 아니었다.
만약 자신에게 자식이 없었더라면, 진심으로 이영을 후계로 고려했을 터였다. 그만큼 교육도 잘 받았고, 총명하고, 선량하고, 성실했다. 막내지만 적자라는 후광도 있었다.
그러나 이선에게는 자식들이 있었다. 이영은 자연히 후계구도에서 탈락이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영이 가진 장점들은 역설적으로 단점이 되었다.
왕족은 위험하다. 정통성과 능력을 지닌 왕족은 더욱 위험하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내려온 암묵적인 묵계였다.
군주와 왕족 양쪽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낄지라도, 세상이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