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58
– 139화에 계속 –
2부 139화 공동의 동맹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13개 협약을 체결하여, 각국 대표가 서명했다. 이미 1차 회의에서 육전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이뤄졌기에, 2차 회의는 전쟁 절차와 해전에 초점이 맞춰졌다.
대표적인 사안이 제3조 ≪선전포고에 대한 협약≫이었다. 1907년 이전까지 선전포고는 국제법이 아니라 국제관례상의 행위였고, 일본은 이를 악용해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평화회의를 주도한 러시아는 선전포고가 반드시 절차에 포함될 것을 강조했고, 각국의 동의를 얻어 협약이 체결됐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만국평화회의 만세!”
2차 만국평화회의는 낙관적으로 평화에 대한 전망을 품고, 8년 뒤에 3차 회의를 개최할 것을 천명하며 10월 18일 폐막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열강은 평화회의에 서명했지만, 군비확대는 계속 이어졌다. 독일의 건함경쟁에 의혹을 품은 영국이 군비축소를 평화회의 협약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독일은 완고하게 군비축소를 거부했다. 이는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그 반대편에 있는 프랑스와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각국은 군비가 많이 늘어나므로 이 문제를 또다시 심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지만, 구속력 없는 논의에 불과했다.
열강 간에 경쟁하듯이 증가하는 군비는,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 * *
이선은 만국평화회의 폐막 전에 네덜란드를 떠났다. 어차피 남은 건 요식적인 서명과 요란한 선언뿐이었다. 국제회의나 국제기구는 허울이요, 오직 힘이 정의로 여겨지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실질적인 논의는 각국의 외무부에서 이뤄질 터였다.
10월 3일, 이선과 대한제국 사절단은 벨기에를 경유해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실질적인 논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폐하, 프랑스 공화국과 대한제국 간에 우호적인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각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총리, 하원 의장, 내무장관, 외무장관 등 요직을 역임하고, 2차 만국평화회의 프랑스 수석대표를 맡은 레옹 부르주아(Léon Bourgeois)가 이선의 우군이 되었다.
부르주아는 주불 공사를 지낸 김옥균과 친분이 있었고, 김옥균은 부르주아의 연대주의(Solidarisme)를 번역하여 소개한 바 있었다. 자유방임주의가 주류를 이루는 당대 유럽에서, 최저임금, 사회보험, 소득세, 무상교육 등을 연대주의의 핵심으로 제창한 부르주아는 혁신적인 정치가였다.
1896년 부르주아 내각은 개혁을 위해 누진소득세를 도입하려 했지만,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사유재산에 대해 정면공격을 하는 빨갱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나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위협을 완화하고자 한다. 개혁의 요점은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방임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둘 다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연대와 국가개입이 필수다. 우리는 사회적 도덕의 기초를 발견했다. 나의 고유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지킬 의무를 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의무를 다할 때에만 나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
부르주아는 결국 자유주의 우파의 공세에 실각하고 말았지만, 개혁적 자유주의의 표본이 됐다. 이는 바로 현재 영국 자유당이 추구하는 노선이었고, 작년에 집권한 프랑스 현 정부의 노선이기도 했다.
“연대주의는 짐과 한국에도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짐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도하여 외견적 근대화를 이룩했습니다. 한국에는 자주독립과 근대화라는 시대적 사명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이후, 국민국가의 진정한 완성은 공적 부조(公的扶助)와 사회안전망의 확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개혁을 논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습니다만, 짐의 정부가 추진한 토지개혁은 평등한 국가, 사회적 연대의 첫 출발이라 생각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폐하의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는 아시아, 아니 만국 군주들의 모범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실로 한국 국민의 복입니다.”
민주주의와 대중운동이 진전된 20세기 초라 할지라도, 여전히 개혁을 ‘천것들’에게 시혜적으로 베푸는 것이라 생각하는 유럽 지배계급들이었다. 하물며 전제군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선이 당대 지배계급 중에서 가장 혁신적인 태도를 보이니, 민주공화국의 진보적 정치가도 감탄을 표명했다.
“세계의 자유와 평등, 연대를 위해서는 아시아에서도 혁신적인 진보가 필요합니다. 폐하와 한국은 아시아의 진보를 이끌고 있으니, 유럽 외에는 문명의 진보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인종우월주의자들에게 따끔한 일침이 될 겁니다.”
부르주아는 제국주의 시대를 풍미한 사회다윈주의와 인종주의에서 드물게도 자유로운 정치가였고, 진심으로 국제평화와 인종 간의 평등이 실현 가능하리라 믿은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다.
실제 역사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의 제창자로서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실패로 끝난 ‘인종 간의 완전한 평등’을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짐은 군주이기에 공식적으로 말하긴 어렵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유·평등·연대라는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믿습니다. 언젠가는 유럽을 넘어 아시아에서도 진정으로 민주주의가 꽃필 날이 오게 될 겁니다. 다만 짐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알려지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터이니, 각하만 알아 주십시오.”
“폐하의 말씀에 감격했습니다. 반드시 그런 날이 오리라 믿고 싶습니다.”
이선의 말은 어느 정도는 현재 프랑스 정국을 주도하는 프랑스 진보 좌파, 민주주의야말로 인류가 도달해야 할 당연한 이념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긍정적인 뉘앙스를 주기 위한 외교적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선이 추구하는 미래의 한국 사회는 일종의 코포라티즘(Corporatism, 협동조합주의)이므로, ‘자유방임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인 프랑스 연대주의에 흥미를 갖고 있는 건 진심이었다.
“프랑스 공화국 정부와 국민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각하.”
파리에 도착한 이선은 프랑스 공화국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와 비공식적으로 회견했다.
1906년 10월에 출범한 클레망소 내각, 즉 급진공화당(PRRRS)-민주공화동맹(ARD)-독립사회당(SI) 좌익연립정부는 이른바 ‘드레퓌스파’ 정부라고 불렸다.
유대계 육군 장교 드레퓌스(Dreyfus)가 독일 스파이로 몰려 억울하게 복역한 사건은 지난 10년간 프랑스 사회를 양극단으로 분열시켰다. 클레망소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드레퓌스의 무죄를 변호한 정치가였고,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신문에 공표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마침내 드레퓌스의 결백이 밝혀짐에 따라 정치가클레망소의 주가가 치솟았고, 1906년 총선에서 승리해 65세의 나이로 처음 총리가 되었다. 클레망소 내각은 8시간 노동제, 민주화, 세속주의를 내세워 사회개혁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진보 좌파, 국외에서는 강경 민족주의자.’
국내 정책만 보면 굉장히 진보적인 정치가라는 느낌을 주지만, 국외 정책은 달랐다. 클레망소는 독일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민족주의자이자, 프랑스의 ‘문명화 사명’을 믿는 제국주의자였다.
여러모로 단호하고 냉철한 인물이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손을 잡기도 했지만, 노동자 파업은 가차 없이 진압했다.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 지도자인 장 조레스(Jean Jaurès)와 클레망소는 함께 드레퓌스의 무죄를 위해 싸웠던 옛 동지임에도 불구하고, 조레스가 군비 증대에 반대하자 클레망소는 바로 ‘반역자’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호랑이’라고 불릴 이 노회한 정치가는, 훗날 강력한 전쟁수행의지로 총력전을 실행으로 옮겨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이번 유럽 방문에서 스톨리핀, 클레망소, 로이드조지와 처칠의 호의를 얻으면 앞으로 편리하겠지.’
니콜라이처럼 호감을 얻기 쉬운 군주들과 달리, 이 노회한 정치가들은 상대하기 까다로웠지만, 이들이 바로 미래 세계정치의 주역들이었다.
“진실과 정의를 향한 각하의 분투를 머나먼 동양에서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드레퓌스 사건이 동양에서도 관심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세계적인 사건이었으니까요. 우리 한국인들은 언제나 진실과 정의를 지지합니다. 드레퓌스 대위가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고, 진실을 위해 분투한 사람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 건, 마침내 역사의 정의가 구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의 군주로부터 뜻밖에 드레퓌스의 승리를 칭송받자, 클레망소도 놀라워했다.
“폐하의 말씀에 놀랍습니다. 이 프랑스에서도 아직 드레퓌스 대위가 스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모두 반유대주의적 편견과 음모론에 불과합니다. 각하와 동지들은 반동주의자들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지켜 냈습니다.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이 노회한 정치가도 예상치 못했던 찬사에 기뻐했다. 이미 급진당 동지인 레옹 부르주아로부터 ‘한국 황제의 진보성’에 대한 칭송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 예상하진 못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큰 광영입니다. 동지들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각하와 동지들의 투쟁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 정신의 구현이라 생각합니다. 짐은 비록 군주이지만, 프랑스 혁명을 인류 공동의 위대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선의 말은 프랑스 혁명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급진공화주의자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하지만 찬사가 지나치면 조롱이라는 의미가 있다. 노회한 정치가 클레망소는 이선의 말이 100% 진심이 아니라는 걸 파악했다.
‘동양의 전제군주로서 이런 찬사를 외교적으로 구사할 줄 안다면, 무서울 정도로 유능한 자다. 만약 진정으로 믿고 있다면 더 무서운 자고.’
어느 쪽이 되었건, 클레망소는 이선이 마음에 들었다.
동맹국 군주로서 존중해 주긴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에, 극우적 반동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신봉하는 차르는 대하기 껄끄러웠다.
차르도 프랑스를 동맹국으로서 신의를 지키고 존중했지만, 민주공화주의를 혐오하기로 유명했다.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독일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으로 인해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지만, 반동의 온상인 차리즘과 손을 잡는다는데 이념적으로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차르의 벗’이자 동양 군주인 이선이 진보적 자유주의에 공감을 표하니,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이 군주국을 상대할 때 갖고 있는 내심의 찜찜함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
“대한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은 공동의 동맹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동맹 영국은 프랑스와 협약을 맺은 우방국이고, 프랑스의 동맹 러시아는 한국과 협약을 맺은 우방국입니다. 이제 양국의 관계도 동맹에 준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프랑스 공화국은 대한제국에 특별한 우호를 맺고 있습니다.”
노불동맹과 한영일동맹이 연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불협상과 노불동맹을 모두 맺고 있는 프랑스는 영국과 러시아를 잇는 축이었다. 한국 또한 영국과의 동맹과 러시아와의 협상으로 축의 일원이었다.
“프랑스의 교육과 사회제도는 한국에 중요한 모범이 되고 있고, 프랑스의 투자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혁혁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귀국의 우호협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근대 국가는 학교와 병영에서 창출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군사는 독일군을 모범으로 받아들였지만, 교육은 프랑스식 국민교육을 모범으로 받아들였다.
프랑스 사범학교가 배출한 ‘공화국의 검은 경기병’과 국민교육이 공화주의 이념을 프랑스 전역에 전파했다면, 이를 모범으로 한국 사범학교에서 배출한 교사들이 한국 전역에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전파했다.
개화당 지도부, 특히 실권자인 김옥균이 프랑스 모델을 선호했기에 프랑스식 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노불동맹 체결 이후에 프랑스 자본이 러시아의 우호국인 한국에 많이 들어왔고, 프랑스는 일본과 미국의 뒤를 이어 대한(對韓) 투자국 3위였다. 이선은 특히 일본의 비중을 낮추기 위해 서양 자본의 투자를 적극 환영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와 한국 정부가 프랑스에 특별한 우호를 가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프랑스로서도, 이선과 한국은 중요한 협력자였다. 프랑스에 러시아는 독일을 견제할 소중한 동맹이지만, 이념적으로는 상극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우려를 느끼면서도 10월 선언에 프랑스 정부가 즉각 지지를 표명한 것도, 러시아가 좀 더 ‘민의’에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프랑스는 내심 비테와 스톨리핀과 같은 개혁적 관료들이 전권을 행사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선이 차르의 10월 선언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스톨리핀 정부의 개혁에 힘을 실어 주라고 조언을 했다는 극비정보가 프랑스 외무부의 귀에 들어왔다. 프랑스는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이선이 대신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특히 러시아는 양국 공동의 동맹이자 우방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러시아가 혁명에 휘말리지 않도록 정부가 개혁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이익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정확한 지적이자, 옳은 말씀입니다.”
프랑스에 있어 러시아 혁명은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독일 견제라는 목적 외에도, 프랑스의 대외투자 25%가 러시아로 향했다.
러시아에 있어도 프랑스 자본은 국가 개혁의 필수적인 존재였다. 혁명가 울리야노프가 냉소적으로 비평했듯이, ‘차르는 파리 금융시장의 연금 수령인’이었다.
만약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서, 신정권이 프랑스에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줄줄이 도산할 프랑스 금융가들이 허다했다.
실제 역사에서, 여러 자본주의 국가 중 프랑스가 볼셰비키 혁명에 가장 격렬히 반대했던 원인이었다.
만약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어디까지나 프랑스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어야 했다.
“그런데 최근 독일의 대청 정책은 한국의 우려를 부르고 있습니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 한국의 대청 정책을 분할 추구라고 싸잡아 비난하더군요. 귀국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중국의 분할을 부르짖던 독일이 이제 와서 청국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으니, 가소로울 따름입니다. 모로코보다 더 뜬금없지요. 독일의 과대망상을 견제해야 합니다.”
이선이 은근슬쩍 독일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자, 클레망소가 바로 동의했다. 독일 견제는 클레망소의 신념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습니다. 종합해 보면,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이해관계는 일치하는 측면이 많습니다. 이제 양국의 관계를 동맹에 준하는 관계로 격상시켰으면 합니다만, 귀국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선은 프랑스 방문의 본래 목적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