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59
– 140화에 계속 –
2부 140화 협상국
“흥미로운 말씀이시군요. 폐하께서 프랑스를 방문하신 김에 협상을 마무리하자는 말씀이신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근래 독일이 청국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동아시아 질서를 흔들려고 하는데, 양국이 함께 협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선이 프랑스에 오기 전, 전 외무대신 서광범과 주불 공사 홍종우가 이선의 지시를 받아 프랑스 정부와 협상 중이었다. 서광범은 만국평화회의 대표직을 차석 이상설에게 맡기고, 헤이그와 파리를 오고 가며 협상을 진행했다.
한불협상의 주된 논의는, 한영동맹의 일원인 한국과 노불동맹의 일원인 프랑스가 영불협상과 한로협상으로 이해관계를 함께 되었으니, 극동 정책에 있어 협력하자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한국의 남만주 지배권을 인정한다. 프랑스는 한국의 남만주 개발에 필요한 차관을 제공하고, 우호적 지분을 통해 만철 경영에 합류한다.”
“한국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권을 인정하고, 운남·광서·광동이 프랑스의 세력권임을 지지한다. 한국은 영불협상과 노불동맹이 연결될 수 있도록 적극 지지한다.”
프랑스는 이전부터 동맹국 러시아의 우호국인 한국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대외투자에 능숙한 프랑스 자본은 극동에 투자하는 데 아낌이 없었다.
프랑스는 만철 지분과 관련하여 5천만 프랑(1천만 달러, 2천만 원)의 한국 국채를 매입하여 급한 불이 떨어진 일본에 제공한 데 이어, 추가로 1억 프랑을 한국에 ‘만주 개발’에 필요한 차관으로 제공할 뜻을 밝혔다.
프랑스의 만주 투자에 난색을 표했던 러시아도 이선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영국도 동의했다.
근래 일본과 프랑스도 관계 개선에 나섰다. 프랑스가 일본에 차관을 제공하고 복건 세력권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권을 인정하고 운남·광서·광동 세력권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협상이 진행 중이었다.
프랑스는 한국에 같은 요구를 했고, 한국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여기에 이선은 최혜국 대우를 쌍무적으로 하자고 주장했고, 프랑스도 받아들였다.
1907년 10월 10일, 대한제국-프랑스 공화국 우호협약, 즉 한불협약이 타결되었다.
1. 프랑스 공화국과 대한제국은 프랑스-러시아 동맹과 한국-영국 동맹의 일원으로서, 양국 관계가 동맹에 준하는 특별한 관계로 격상되었음을 선언한다.
2. 프랑스 공화국과 대한제국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질서를 지키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하여 양국은 대청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지지하고, 문호개방에 동의한다.
여기까지가 협약의 공개된 부분이었다. 비밀조항에서는 청나라의 분할이 논의되었다.
3. 제3의 국가가 중국 이권을 독점하려 한다면, 이는 공동으로 저지되어야 한다.
4. 프랑스와 한국은 중국에 있어서 각자의 세력권을 인정한다. 프랑스는 한국의 남만주 지배권을, 한국은 프랑스의 운남·광서·광동 세력권을 인정한다.
5. 프랑스는 한국에 1억 프랑(4천만 원)의 차관을 제공한다. 한국은 프랑스가 우호적 지분을 통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영에 합류하도록 한다.
6. 한국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책을 지지한다. 인도차이나 독립운동, 특히 베트남 망명객과 유학생들의 반불 운동을 단속한다.
7. 프랑스는 한국과 최혜국 대우를 쌍무적으로 맺는 데 동의한다.
서력 1907년, 광무 11년 10월 10일.
프랑스 공화국을 대표하여, 외무장관 스테판 피숑(Stephen Pichon)
대한제국을 대표하여, 전권대신 서광범
3조는 ‘제3의 국가’, 즉 독일이 청국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영국이 중국 시장을 독점하는 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4조는 각자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5조에서 재정적 협력을 약속했다.
6조에서 프랑스는 한국에 와 있는 베트남 망명객들을 단속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진보적인 베트남 개화파들은 대개 일본으로 향했지만, 근래에는 한국으로도 향했다. 베트남과 한국은 역사적 친근감이 있었기에, 일부 아시아주의자들은 베트남 독립운동에 동조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제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거리를 두겠다는 의미였다.
7조는 프랑스도 한국이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동등한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다.
“양국의 우호관계가 영원하길 바랍니다.”
“대한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의 우호 친선을 위하여!”
이선의 취향에 맞게 최고급 샹파뉴가 준비되었다. 이선과 클레망소는 우호 친선의 뜻을 담아 건배하고, 악수했다.
한영동맹과 한로협약의 뒤를 이어 한불협약이 체결되었으니, 한국은 이제 ‘협상국(Entente)’의 일원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이선은 프랑스가 주도하는 대독 포위망의 일원이 되는 데 동의했다.
역사가 크게 바뀌었다면 그럴 필요가 없겠으나, 이번 유럽 방문을 통해 실제 역사와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어서였다.
‘결국 독일은 고립을 피할 수가 없다. 프랑스는 반드시 독일에 복수하길 원하지. 카이저는 위신이 걸렸기에 절대로 건함정책을 포기 안 할 거고, 영국과의 관계도 결국 훼손된다. 러시아에 손을 내밀려고 해도,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엮인 발칸 문제로 인해 결렬하게 되겠지. 무엇보다 카이저는 독일 군부를 통제하지 못해. 슐리펜은 어떻게든 주저앉혔지만, 다음번에는…….’
카이저가 보이는 허세와 신경증은, 역설적으로 군부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었다. 프로이센 군부-융커들은 강경책을 계속 압박했다. 1905년의 예방전쟁은 어떻게든 막아 냈지만, 군부와 카이저의 간극이 넓다는 걸 입증한 꼴이 되었다. 군부는 카이저의 세계정책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전쟁계획을 짰고, 때가 되면 카이저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군부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다.
“La guerre! C’est une chose trop grave pour la confier à des militaires(전쟁이란, 군인들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다).”
이선이 클레망소의 명언을 인용했다.
1887년 ‘불랑제 위기’ 당시, 클레망소가 한 말이다. 불랑제 장군은 독일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으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불랑제가 우익들과 결합해 군부 쿠데타와 전쟁을 암시하자, 클레망소는 대독 강경파이면서도 전쟁이란 큰 문제를 군인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단언하며 문민통제를 옹호했다. 결국 불랑제는 중도-좌익의 반격에 실각했다.
“하하, 제가 20년 전에 한 말을 알고 계시군요.”
“각하의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 발발은, 일본 군부가 정부를 대신해 전쟁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파탄입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독일군을 모범으로 삼았지요. 일본의 모델인 독일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독일도 같은 실수를 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선은 군대를 강화했음에도, 확고한 문민통제 신봉자였다.
조선의 문치 전통을 계승했든, 일본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든, 군부독재에 대한 혐오가 됐든 간에, 그는 문민통제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대한제국군이 프로이센군을 모델로 받아들였다곤 하지만, 일본처럼 정부에 대한 군부의 독립적 위치와 우위라는 폐습까지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한국군도 군부 폭주의 기미가 없는 게 아니었다. 한국이 청국과 일본을 대신하여 동양의 육군강국으로 떠오르게 되면서, 그럴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다. 북진회로 대표되는 강경 팽창주의자들 파벌은 ‘유약한 정부’를 비판하며 만주 정복을 외쳤다.
북진회에 대한 관대한 처리는 이선이 베푼 마지막 관용이었다. 아직 건군기였기에, 젊고 유능한 장교들을 한때의 실수로 숙청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군내 사조직도 일절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대한제국이 만주로 뻗어 나가는 건 실현될 미래지만, 관동군과 같은 특수집단은 없어야 했다.
“폐하의 인식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예로부터 프로이센은 ‘국가가 군대를 보유한 게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보유한’ 나라였습니다. 능수능란한 비스마르크가 살아 있을 때는 잘 되었지만, 독일은 점점 군부통제에 실패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지요.”
클레망소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프랑스도 남 말할 처지는 못 됩니다. 폐하께서 프랑스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니 말씀드리는데, 20년 전 불랑제 위기부터 최근 드레퓌스 사건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군의 보수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제가 피카르 장군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건, 군부가 공화국 정부의 대의에 복종하기 위해서입니다.”
클레망소는 국방장관 조르주 피카르(Georges Picquart)를 이선에게 소개했다. 이선도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피카르는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 진범을 놔주도록 조작한 군부 상층부에 맞서,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한 드문 장교였다. ‘유대 국제주의 세력의 뇌물을 받았다’는 군부와 우익의 모함에 좌천되고 불명예스럽게 군복까지 벗어야 했지만, 끝까지 진실을 위해 투쟁했다.
마침내 진실이 밝혀지고, 드레퓌스 변호를 주도한 클레망소가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에 취임하자, 피카르는 명예를 회복했다. 중령에서 군복을 벗은 기간을 산정해 바로 소장으로 진급하여 군에 복귀하고, 클레망소 내각의 국방장관이 되어 군제개혁을 이끌었다.
“진실과 정의를 위해 분투한, 진정한 참군인 피카르 장군을 만나 기쁘게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큰 영광입니다.”
“장관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겠습니까? 군부 상층부의 이익이라는 협소한 이해관계를 떠나,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 장관이야말로 진정한 참군인입니다. 장관께 경의를 표합니다.”
피카르는 이선에게 거수경례하고 고개를 숙여 악수했다. 여전히 프랑스인 일부와 유럽의 우파들은 그를 ‘국제 유대인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동양의 군주가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니 내심 감격할 따름이었다.
이선이 경의를 표한 덕에, 피카르는 지극히 우호적인 태도로 대한제국 사절단의 프랑스군 시찰에 협력했다.
‘이제 독일과의 관계는 자연히 멀어질 터이니, 프랑스와의 군사 협력을 강화해야겠군.’
러시아식 제식 소총과 프로이센식 군사 제도에 프랑스 자본을 받아들인 대한제국군은 키메라와도 같았다.
팔켄하인을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은 독일군 군사고문단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한국 장교단을 독일로 군사유학을 보냈지만, 한불협약이 체결된 걸 안 카이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이 됐다. 카이저가 일본을 대하는 태도를 봐도 알 수 있었다. 카이저는 어제까지 협력하다가, 오늘 적대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선이 사절단과 함께 프랑스 육군대학을 방문하자, 교장이 직접 영접했다.
“육군대학 총장 페르디낭 포슈입니다. 황제 폐하를 영접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장군. 장군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육군대학(École militaire) 총장은 51세의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준장이었다.
포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예수회 수사인 형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 반가톨릭 세속주의를 외치는 좌익 연립정부에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장교였다. 그럼에도 클레망소와 피카르는 포슈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육군대학 교장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군사이론을 펼치도록 했다. 과연 포슈는 총리와 장관의 기대에 부응했다.
“감사합니다. 폐하께서 소관을 아신다니 놀랍습니다.”
포슈는 훗날 프랑스군 총사령관에 이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는 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새로운 이론가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아, 짐이 군사이론에 관심이 많아서요. 얼마 전까지 독일의 팔켄하인 중령이 한국 육군대학에서 최신 군사이론을 가르쳤지요. 짐도 직접 청강을 했었습니다. 그 이후로 군사이론에 관심을 가지게 됐지요. 그래서 장군의 이론도 알게 되었습니다.”
포슈는 동양의 황제가 직접 육군대학에서 청강을 하며 군사이론을 공부한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폐하의 열의에 감탄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한국과 프랑스가 협약의 일원이 되었으니, 이제 양국 관계는 군사적으로도 긴밀히 협력해야 합니다. 미래가 촉망되는 한국 장교단을 프랑스 육군대학에 유학시켜서 최신 이론을 공부하게 하고 싶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이선의 제안에 피카르와 포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의 동맹국이자 러시아의 우호국이요, 극동의 육군강국으로 떠오르는 한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두는 건 환영이었다. 지금까지 친독 일변도였던 한국 육군 장교단을 친불로 전환할 수 있었다.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하, 아주 좋습니다.”
한국과 프랑스는 한불협약에 이어 군사협력에도 서명했다. 매년 촉망받는 한국 장교들이 프랑스 육군대학에서 공부하고, 반대로 프랑스 장교단도 한국을 방문하여 조언을 해 주기로 했다.
1908년도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 프랑스 장교단의 단장은 육군대학 보병전술 겸임교수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중령이 선발되었다.
장차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역적이 되는 페탱은 이때만 해도 진급이 적체된 중령에 불과했다.
‘힌덴부르크와 팔켄하인에 이어 포슈와 페탱이라. 참 기묘한 조합이군.’
1차 세계대전을 대표할 장군들이 공교롭게도 한국에 모두 방문하여 군사 지도를 하게 되었다.
한국은 그야말로 최신 군사이론이 전수되는 장이었다.
프랑스 방문을 마치고 영국으로 떠나기 전, 이선은 프랑스 정부의 환송연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선은 특별한 건배사를 했다.
“Les hommes naissent et demeurent libres et égaux en droits(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서 살아간다).”
이선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조를 읊었다. 동양의 전제군주가 인권선언을 극찬하니 기이한 일이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았으니, 장차 출신, 계급, 인종과 상관없이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향유해야 할 것입니다.”
절반은 진심이고, 절반은 위선이었다. 이선은 진심으로 천부인권의 권리를 믿었지만, 1907년 현재에는 허구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혁명의 종주국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계몽과 문명’의 이름으로 어떤 짓들을 저지르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유색인종은 동등한 인간’이 아니었다.
이선은 동양인이지만 협상국의 일원이자 군주로서 ‘명예 백인’ 대우를 받을 뿐이었다.
그는 언젠가 진정으로 인종과 민족을 뛰어넘는 평등한 국제질서를 구상했지만, 지금은 때를 기다리며 서양 제국주의와 협력할 시기였다.
“황제 폐하의 진보적인 시각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자유, 평등, 우애 만세!”
“프랑스와 한국의 우호여 영원하라!”
이선의 속내가 무엇이든 간에, 프랑스 혁명의 위대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을 만족시켰다.
마치 볼테르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군주야말로 국민의 제1종복’이라고 선언했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을 떠올리게 했다.
프랑스인들은 이 동양의 ‘계몽군주’를 향해 만세를 외쳤다.
이제 대한제국은 제국주의 국가 클럽이자, 협상국의 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