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62
– 143화에 계속 –
2부 143화 게임 종료
1907년 11월. 3개월간의 유럽 순방을 마친 후, 이선과 대한제국 사절단은 귀국길에 올랐다.
러시아-독일-네덜란드-프랑스-영국 방문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이선은, 미래에 다가올 중국 혁명과 세계대전의 대비책을 세워 두었다.
“영아, 앞으로 영국에서 많이 배워라. 네가 학업을 마치면, 황실의 중요한 책무를 맡기고자 한다.”
“폐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촌음을 아껴 형설지공(螢雪之功)을 하겠습니다.”
이영은 대학 예비과정을 이수한 후,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특별입학하기로 결정됐다. 예전부터 영국에 유학 와 있는 시암의 왕자들은 이미 옥스퍼드-케임브리지의 칼리지에 재학 중이었다. 선례가 있어서 수속도 편리했다.
앞으로 5년에서 10년, 이영은 유럽에 체류하며 이선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이영은 다방면의 공부를 하고, 다양한 사교활동을 통해 인맥을 쌓아나갈 것이다.
「영국과 러시아의 협상에서, 입헌혁명 이후의 페르시아 세력권 분할이 논의되리라 생각합니다. 중국도 혁명을 염두에 두고 같은 조건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이 북경에서 가까운 산동을 거점으로 두고, 홀로 청조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상황을 두고만 볼 수 없지요.」
이선은 그레이에게 이렇게 제안했었다.
영국은 러시아에게 페르시아 세력권을 삼분하자고 제안할 계획이었다. 남부는 영국이, 북부는 러시아가, 중부는 중립지대로. 이와 유사한 논의가 중국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보수당 정부는 러시아의 만주와 북중국 정복을 의심했지만, 독일을 더 위협적인 적으로 판단한 자유당 정부는 달랐다. 러시아와도 충분히 중국 분할을 놓고 타협할 여지가 있었다.
「아마도 영국은 페르시아의 세력권 분할을 제안할 겁니다. 동시에 인도에 인접한 아프가니스탄과 티베트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고 하겠지요. 이를 받아들이되, 러시아도 정당한 몫을 요구해야 합니다. 만주와 몽골은 러시아의 세력권이 되어야 합니다. 설령 장차 청조가 혁명으로 붕괴하게 되더라도, 만주와 몽골을 기반으로 러시아의 보호하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이선은 니콜라이에게는 이렇게 제안했었다.
영국과 러시아의 세계 분할, 그 과정에서 한국도 함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중국 분할에 가담한 후에 세계대전에 휘말리면, 결국 동아시아 문제는 한국에게 위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선은 배로 덴마크를 경유한 후, 폴란드에서 마르가리타와 합류해 귀국길에 올랐다. 결국 그녀의 모친은 별세했고, 마르가리타는 장례까지 마쳤다. 모처럼 재회한 마르가리타는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다.
“고인께서 평화롭게 잠드셨기를.”
“다행히도 고통 없이 돌아가셨어요. 평생 딸 역할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데, 임종은 지킬 수 있었네요.”
이선은 마르가리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어머님께서도 딸의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기셨으리라 생각하오. 의사가 되어, 머나먼 타국에서 의학을 전파하였으니…….”
“그래요. 한국에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있죠. 이제 돌아가요. 아이들이 기다릴 터이니.”
“그럽시다. 안과 라가 목 빠지게 기다릴 터이니.”
“언제 다시 고향에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자유로운 나라가 되면 다시 찾고 싶네요.”
회한과 희망을 담은 마르가리타의 말에, 이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대전의 종결, 유럽의 재편성과 중동부 유럽 독립국가의 수립. 실제 역사대로라면 1919년이려나……. 강화회담이 개최될 테니, 다시 해외순방을 떠날 수 있을 시기도 그때는 되어야겠지.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지켜봐야겠군.’
1900년대, 유럽 문명의 벨 에포크는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 좋은 시절은 끝이 보이고, 지옥의 문턱 앞까지 와 있었다. 단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알지 못했을 뿐이다.
번영하던 유럽에 묵시록적 세계가 펼쳐질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1908년, 광무 12년.
대한제국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고종 퇴위, 군대 해산과 전국적인 의병 투쟁,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잇따를 시기였지만, 안정적인 번영의 궤도에 오른 이선의 대한제국은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혼돈을 거듭하던 일본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정당-해군 연합이 일본의 새로운 방향을 이끌었다.
청나라는 광서제의 주도로 헌정 개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 해에, 청나라도 헌법을 반포하고 입헌군주국으로의 전환을 선포할 예정이었다.
“헌법 만세!”
“혁명 만세!”
과연 입헌은 시대적 대세였다. 카자르 왕조 페르시아에서도,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는 민중의 주도로 1906년 이란 입헌혁명이 발생했다. 1907년 샤(국왕)는 민중의 요구에 결국 굴복하고, 유럽식 헌법을 제정했다.
보수적인 페르시아에서조차 헌법이 제정되자, 오스만 제국의 진보적 청년들을 자극했다. 이들은 비(非)서양 최초의 헌법이었던 1876년 헌법을 복구시키고, 파디샤(황제)의 전제정치를 끝장내길 원했다. 이들은 무력으로라도 전제정을 타도할 계획을 세웠다.
시암에서는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라마 5세의 주도로, 전국적인 근대화 개혁이 계속 이어졌다. 노예제 폐지, 토지조사, 국민개병이 확립되었다.
청조의 지배를 받길 원치 않는 중국의 혁명가들은 입헌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오직 ‘멸만흥한’의 공화혁명만이 답이었다.
아시아 전역에 입헌과 혁명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유럽 열강, 특히 세계 패권을 놓고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는 아시아의 변혁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페르시아 입헌혁명, 오스만 제국의 혁명 가능성, 청조의 혁명 가능성은 모두 요주의 대상이었다.
개혁과 혁명을 주도하는 아시아의 진보적 정치가들은 분명 서구화에 앞장섰으나, 동시에 민족주의자였다. 궁극적인 목표는 열강의 지배권을 자국에서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열강에게 있어 잠재적인 두려움이었다.
1908년 5월, 페르시아 남부에서 영국 자본이 석유를 발견했다. 샤로부터 특권을 얻은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는 본격적인 유전 개발에 나섰다.
영국 정부는 더더욱 페르시아 세력권 확립에 몰두했다. 페르시아 북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와 타협을 해야 했다.
“그간 ‘세계정복을 꿈꾸는 러시아’의 위협은 과장되었습니다. 실상은 보수당의 정권 유지를 위한 프로파간다에 더 가까웠습니다. 우리 자유당 정부는, 불필요한 갈등을 접고 러시아와 타협해야 합니다. 러시아와 충돌하는 지역, 즉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중국에서 대영제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입니다.”
4월, 캠벨-배너먼이 건강상의 이유로 총리직을 사임하고, 애스퀴스가 총리에 올랐다. ‘자유 제국주의’ 파벌의 승리였다.
총리 애스퀴스, 외무장관 그레이, 육군장관 할데인, 재무장관 로이드조지, 상무장관 처칠이 정책을 주도했다.
이들은 한 세기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와의 ‘그레이트 게임’을 종결시키기로 결정했다.
“과잉 팽창은 불필요하며, 현재 러시아에 무엇보다 필요한 건 안정과 평화입니다. 영국과 타협해야 합니다.”
러시아 총리 스톨리핀, 외무장관 이즈볼스키도 영국과의 협상을 지지했다.
이제 판은 만들어졌다. 영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세계지도에 줄을 그으면서 협상을 이어 나갔다.
프랑스 혁명전쟁 당시 대(對) 프랑스 동맹을 맺은 영국과 러시아는,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한 세기 동안 대립해 왔다.
양국은 서로의 의도를 의심했으며, 의심은 공포와 전쟁으로 이어졌다. 1853-56년 크림전쟁은 영국과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전쟁이었다.
영국은 러시아가 발칸을 정복해 지중해로 진출하고, 중앙아시아를 정복해 인도로 진출하고, 만주를 정복해 중국으로 진출하리라고 의심했다. 오랫동안 영국의 대외정책은 러시아의 남하를 봉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영국의 봉쇄를 뚫고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900년 러시아의 만주 점령, 1904년 영국의 티베트 점령은 양국 간에 전쟁 직전까지 각오하게 했다.
사실상 일본을 내세운 영국의 대리전이었던 러일전쟁이 종결된 후, 양국은 더 이상의 대립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독일이라는, 강력한 공동의 적이 부상하고 있었다.
1908년 6월 9일.
에드워드 7세는 영국 국왕 중 최초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영국 왕실의 요트가 레발(에스토니아 탈린)에 정박하자, 니콜라이 2세가 황후와 함께 황실 요트를 타고 맞이했다.
“폐하, 폐하를 러시아 국내로 맞이하게 되어 짐은 가장 깊은 만족과 기쁨을 느낍니다.”
“초청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만남은 영국과 러시아를 더 가깝게 만들고, 양국의 강력한 유대 위에 세계의 평화를 증진하는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주리라 믿습니다.”
영국 국왕과 러시아 황제, 사적으로는 이모부와 처조카가 힘차게 악수를 했다. 황후 알렉산드라 또한 에드워드 7세의 조카였다.
러시아 근위대 제복을 입은 에드워드와 영국 근위대 제복을 입은 니콜라이는 함께 양국 해군 장교단을 사열했다. 오랫동안 영국 해군과 러시아 해군이 서로를 주적으로 생각했던 걸 감안하면,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양국의 영원한 우호를 위하여 건배!”
에드워드 7세의 러시아 방문은, 2박 3일 동안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에드워드는 입헌군주였으므로, 공식적인 외교가 논의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영국-러시아 협상이 합의에 도달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벤트였다. 1903년 에드워드의 파리 방문이 이듬해 영불협상의 진전에 상징적인 역할을 했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국빈 방문을 마치고, 에드워드는 니콜라이를 이듬해 영국으로 초청했다. 니콜라이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 역시 황태자 시절 사촌인 조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한 바 있었으나, 러시아 군주로서는 영국을 방문한 전례가 없었다.
1908년 7월 13일.
영국과 러시아는 합의에 도달했다. 양국의 외무부는 지난 몇 달간 세계지도에 줄을 그어 가며 세력분할을 추출했고, 마침내 그 결실이 이뤄졌다.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1. 페르시아 문제.
1-1. 영국과 러시아는 페르시아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지지한다. 공동으로 제3국의 개입을 막는다.
1-2. 러시아의 독점적 영향권. 북부, 캅카스-카스피해-러시아령 투르키스탄에 인접한 영토에서 이스파한에 이르는 지역.
1-3. 영국의 독점적 영향권. 남부, 영국령 인도제국에 인접한 영토에서 시라즈에 이르는 지역.
1-4. 중부, 중립지역. 양국의 국민이 상업적 특권을 위해 경쟁할 수 있다.
2. 아프가니스탄 문제.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의 보호령임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3. 중국 문제.
3-1. 영국과 러시아는 청조의 주권을 지지하며, 몽골-신강-티베트의 명목상 종주권을 인정한다.
3-2. 중국의 문호개방을 지지한다. 제3국이 독점적으로 중국 이권을 장악하려 한다면, 공동으로 대응한다.
3-3. 러시아의 독점적 영향권. 외몽골 전역과 북위 44도 이북의 북만주.
3-4. 영국의 독점적 영향권. 홍콩과 위해위. 티베트, 사천-호북-호남-안휘-강소의 장강 유역.
3-5. 이외의 지역은 중립지역. 특히 청국령 투르키스탄(신강)과 화북 일대는 중립지역임을 보장한다. 양국의 국민이 상업적 특권을 위해 경쟁할 수 있다.
4. 영국의 동맹인 일본과 한국,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와도 공동으로 논의한다.
5. 만약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정치 체제 변경의 시도가 있을 경우, 관련 국가들과 함께 공동으로 대응한다.
1908년 6월 30일(율리우스력), 7월 13일.
러시아제국을 대표하여, 외무대신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대영제국을 대표하여, 주 러시아 전권대사 아서 니콜슨.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815년 이래 한 세기 가까이 대립해 온 영국과 러시아는, 마침내 협상에 도달했다.
비록 양국이 정치적·군사적 동맹관계에 도달한 건 아니었고, 제3국을 겨냥한 협약도 아니었으나, 중대한 합의에 도달한 건 분명했다.
두 세계 제국은 유라시아 지도를 그림판으로 삼아, 자신들 멋대로 색칠하고 선을 그었다.
해당 지역의 주권자와 국민들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 분할이었다.
“충격적인 뉴스! 영국-러시아 협정 체결!”
1주일 후, 영국-러시아 협정이 국제사회에 공개되었다.
당연히 세력분할을 논의하는 비밀조항은 공개되지 않았고, 그저 우호협약이 체결되었다는 발표뿐이었다.
그럼에도 숙적 영국과 러시아가 협상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독일은 큰 충격에 빠졌다. 비록 영국과 러시아가 동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독일을 따돌리고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협상(Triple Entente)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었나.”
영러협상을 예상하고 있었던 이선으로선, 전혀 놀랍지 않았다.
영국과 러시아 모두 이미 동맹국들에게 협정 체결을 미리 통보했었고,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으나 대략적인 내용은 전달받았다.
영국은 어차피 곧 정식 절차를 밟아 동맹국인 한국에게 내용을 전달해 줄 터이고, 그 이전에 이선은 이미 니콜라이의 친서를 통해 세력 분할에 대해 귀띔을 받았다.
‘실제 역사에서는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티베트 논의로 끝났지. 영국과 러시아간에 구체적으로 중국의 세력 분할이 논의된 건 처음이다.’
실제 영러협상과 다른 점은, 이선의 개입으로 중국 문제가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는 점이었다.
명목상 청조의 종주권은 인정되었으나, ‘변강’은 각자 러시아와 영국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변강’을 ‘중국’에서 분리하려는 계획, 즉 만주-몽골-신강-티베트를 모두 중국에서 분리하려는 이선의 복안이 마침내 첫발을 떼게 된 셈이었다.
유라시아 전역을 무대로 한 거대한 경쟁, ‘그레이트 게임’이 종료를 맞이했다.
동시에,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더욱 장대하고 위험한 게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