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63
– 144화에 계속 –
2부 144화 대백색 함대
그레이트 게임을 끝낸 영국-러시아 협상.
하지만 이는 또 다른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협상의 성립에 충격을 받은 나라는 단연 독일이었지만, 당장 국가안보를 위협받을 일은 없었다. 협상국 중 영국은 아직 군사동맹의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본질적인 위기의식을 느낀 나라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오스만 제국이었다.
한때 3대륙에 걸쳐 호령한 오스만 제국이지만, 19세기에 이르면 ‘유럽의 병자’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원하는 러시아는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수차례 전쟁을 벌였고, 오스만은 번번이 패했다.
러시아의 남하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던 영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콘스탄티니예(이스탄불)까지 빼앗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878년에는 러시아군이 콘스탄티니예 코앞까지 밀고 들어왔지만, 영국의 개입으로 진격은 중단되었다.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비웃음처럼, ‘튀르크는 이교도 영국 덕에 사망선고를 유예받고 있다.’
“숙적이던 영국과 러시아가 손을 잡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해외에 망명 중인 오스만 진보주의자들의 조직, 통일진보위원회(CUP)는 영러협상의 체결에 경악했다.
1853-56년의 크림전쟁이든, 1877-78년의 제12차 러시아-튀르크전쟁이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의 지원이 있었기에 오스만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영국이 러시아와 손을 잡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만약 영국이 러시아의 정책에 동조한다면, 오스만은 존망의 위기였다.
통일진보위원회, 이른바 ‘청년 튀르크당’. 정적에 가혹한 탄압을 하여 ‘붉은 술탄’이라는 악명을 얻은 압뒬하미트 2세에 의해 폐기된 1876년 헌법의 부활과 급진적 개혁을 내세워 조직됐고, 1907년 페르시아 입헌혁명의 자극을 받아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동지들, 제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소. 조속히 전제정을 타도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개혁하지 않는다면, 제국은 끝장이오.”
영러협상 체결은 일종의 기폭제가 됐다. 이미 영국과 러시아가 오스만의 분할에 합의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협상에서 논의된 건 페르시아와 청나라였기에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소문을 믿고 있는 통일진보위원회는 분할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무력봉기, 즉 군사 쿠데타였다.
“전우 여러분!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 영국과 러시아가 우리의 조국을 분할하려 한다. 그런데도 무능한 파디샤 전제정권은 열강에 머리를 조아리기 바쁘다. 전우들이여, 조국의 멸망을 지켜볼 생각인가? 선택해야 한다. 파디샤인가, 조국인가!”
마케도니아 살로니카(테살로니키), 제3군 사령부.
통일진보위원회 비밀조직에 속한 장교들이 열정적으로 병사들을 선동했다.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3군 장교단은 빠르게 통일진보위원회에 장악되어 버렸다.
“오스만 제국 만세!”
“가자, 콘스탄티니예로!”
1908년 8월, 3군이 봉기를 일으켜 살로니카를 점령했다. 정변의 주도자, 이스마일 엔베르(Ismail Enver) 소령은 콘스탄티니예를 향해 최후통첩을 보냈다.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고, 헌법과 의회를 복원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콘스탄티니예로 진격하겠다.」
반란 소식에 놀란 압뒬하미트 2세는 제2군을 진압군으로 파견했지만, 전제정에 염증을 느끼는 건 2군 장교단도 마찬가지였다. 진압군은 무기를 거꾸로 들고 반란군에 합류했고, 수도에서도 혁명에 동조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파디샤는 고립무원을 절감해야 했다.
“파디샤 항복! 군사혁명 성공! 통일진보위원회 승리! 헌법 복구! 정치범 석방! 의회 개설! 올해 내로 전국 총선거 실시!”
“자유 만세! 혁명이 승리했다!”
“통일진보위원회 만세! 군사혁명 만세!”
8월 24일, ‘청년 튀르크 혁명’의 승리가 선포되었다. 통일진보위원회는 혁명의 승리자로 당당하게 수도에 입성했다.
“일본을 보라. 그들은 우리보다 더 늦게 근대화에 나섰지만, 빠르게 개혁에 성공했다. 러시아 발트 함대를 전멸시킨 건 놀라운 승리다. 메이지 유신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꿔야 한다.”
“한국을 보라. 불과 25년 전에는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나라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빠르게 근대화에 성공했고, 서구 열강과 대등하게 외교적 협의를 하는 국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우리도 그들처럼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발트 함대를 상대로 거둔 일본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는, 급진적 근대화를 꿈꾸는 비(非)서구 진보적 엘리트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러시아에 번번이 패배하던 오스만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일본의 성공을 분석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성공사례도 주목하게 되었다.
청년 튀르크당의 상당수는 전통적인 범이슬람주의 대신에 범민족주의, 즉 범튀르크주의와 투란주의(Turanism)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쿠데타 주도자인 이스마일 엔베르는 투란주의를 신봉했다.
“모든 우랄-알타이계 민족은 형제 민족이다. 서로는 헝가리와 핀란드에서, 동으로는 한국과 일본까지!”
“아시아의 형제 민족들이여! 튀르크 민족과 함께 손을 잡고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자!”
1908년 가을, 동아시아를 방문한 청년 튀르크당 특사는 한국과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과 접촉했다.
대한제국 정부나 일본 정부나 아시아주의를 억제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들에게 투란주의는 신선한 기획처럼 다가왔다.
“대한제국은 고구려의 후예! 오스만 튀르크는 돌궐의 후예! 수나라에 맞선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을 계승하여, 한민족과 튀르크는 형제 민족이다!”
투란주의는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던 한국 강경 민족주의자들에게 새로운 복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시야는 일약 만주를 넘어 유라시아 전역으로 이어졌다.
“튀르크 민족에게 투르키스탄 해방의 역사적 사명이 있다면, 대한 민족에게는 만주와 몽골을 해방시킬 역사적 사명이 있다. 만청과 러시아를 타도하고 동과 서에서 새로운 제국을 결성하자!”
사실 이렇게 떠드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은 전체로 볼 때 한 줌에 불과했다.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정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신경이 쓰였다. 젊은 청년 장교들은 손쉽게 강경 민족주의 이념에 휩싸였다.
특히 소장파 장교들이 주도하여 성공시킨 ‘청년 튀르크당 혁명’은 선례가 될 수 있었다. 한국은 그래도 군부 통제가 잘되어 있어서 이를 직접적인 모범으로 삼지 않겠지만, 청나라와 일본 일각에서는 청년 튀르크당을 본받자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사례의 영향을 받아 봉기한 청년 튀르크당이 다시 동아시아에 영향을 끼치는 역사의 순환이었다.
‘당장 투란주의가 정세에 미칠 영향은 지극히 미미한 해프닝에 불과하고. 문제는 청년 튀르크당 혁명으로 인해 발칸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겠지. 결국 발칸 위기로 전환되겠구나.’
이선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새로 집권한 통일진보위원회는 즉각적인 헌법의 부활과 총선거 실시, ‘제국 모든 국민의 평등’을 약속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친오스만 여론이 형성됐다. 1878년 베를린 회의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명목상 오스만의 주권인 상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호령이 되었고, 30년 동안 현상을 유지해왔다.
굳이 합병을 하지 않아도 보호령 상태로 만족해 오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청년 튀르크당 혁명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안정적 지배를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을 단행해 버렸다.
이른바 보스니아 위기, 발칸 위기의 시작이었다.
* * *
1908년 10월 27일, 경상남도 동래부 부산항.
얼마 전 새로 항만을 크게 넓힌 부산항은, 조선 최초의 개항장이자 대한제국 제1의 항구였다. 대외무역의 비중이 커질수록 항구의 중요성도 높아졌고, 대한제국 정부는 부산·인천·원산·남포 등을 전략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부산은 일본을 가장 가까이 둔 군항도 겸했기에 더욱 중요했다.
과거에 작은 진(鎭)에 불과했던 부산은 근대화의 최대 수혜를 받은 지역 중 하나였고, 30년 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이야,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부산이 놀랄 정도로 바뀌었군.”
“자주 와 보게. 황성에서 부산까지는 겨우 11시간이라, 반나절이면 올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남쪽 끝까지 반나절이라니. 세상이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지 못할 지경이라니까.”
“그게 바로 황제 폐하의 은덕이 아니겠는가!”
수많은 인파가 부산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손에 정부에서 나눠 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있었다.
이선도 경부선을 타고 동행한 관료들과 함께 부산 행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미국 함대가 곧 부산항으로 입항할 예정이라는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음, 알겠네. 여러분, 갑시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관료들도 일제히 일어섰다.
오늘은 미국의 대함대가 입항하는 날이었다.
1907년 12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이른바 ‘대백색 함대(Great White Fleet)’의 세계일주를 명했다.
함대의 명칭처럼, 대백색 함대는 규모도 컸고 매우 특별한 임무를 맡았다. 미국이 대륙국가에서 해양국가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게 이 함대에 부여된 목적이었다.
루스벨트가 추진하던 건함정책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모두 20세기에 건조된 전함 16척은 모두 1만 톤이 넘었고, 1척 당 건조비는 500만에서 700만 달러에 달했다. 미국은 단숨에 제3위의 해군대국이 되었다.
전함 16척, 병원선과 호위함을 포함해 총 28척, 22만 5천 톤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대함대가 편성되었다.
이름 그대로 함대에는 회색 대신 새하얀 도색을 했다. ‘평화의 상징’이라는 의미였다.
“친애하는 해군 장병 여러분, 전 세계에 평화를 향한 미국의 힘과 의지를 똑똑히 보여 주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대백색 함대는 막대한 전함 건조비와 유지비를 감당하는 유권자와 의회에게, 대함대의 위용을 뽐내고 세계에 미국의 힘을 보여 주기 위해 준비된 거대한 이벤트였다.
미국 동해안을 출발한 대백색 함대는 대서양을 항해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다. 아직 파나마 운하가 뚫리기 전이라, 미국의 주력 함대가 태평양으로 가려면 아메리카 대륙을 뺑 돌아야 했다.
엄청난 규모의 대백색 함대는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미국 서해안과 하와이의 국민은 새삼 전함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힘에 놀랐다. 특히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과 뒤따른 1907년 공황으로 신음하던 서해안의 주민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미국뿐만이 아니었다. 함대가 하와이를 출발하여 남태평양을 횡단하여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 기항하자, 전함들을 보려고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대백색 함대는 미국이 ‘보호하는’ 필리핀을 지나, 1908년 10월 18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달했다.
“미합중국 만세!”
“백색 함대 만세!”
일본인들은 요코하마 항에 모여들어 미국 함대를 미친듯이 환영했다. 미국인들조차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의 환호였다.
1906년 포츠머스 조약 이후 미일관계는 한동안 냉각 상태였다. 일본 우익들의 미국 공사관 습격, 뒤이은 미국 서해안 일대에서의 이민 금지 조처 등으로 미일관계는 악화됐다.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함대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루스벨트는 일본 해군을 태평양의 주적으로 상정했고, 일본 해군도 해주육종 북수남진 정책을 추진하며 미래의 주적으로 미국을 상정했다.
명목상 평화사절인 대백색 함대는 루스벨트의 ‘말은 부드럽지만 그 뒤에는 몽둥이를 준비하라’는 정책의 상징이었다.
일본 해군을 압도하는 엄청난 규모의 대백색 함대가 태평양을 항진하자, 해군의 강경파들조차도 미국에 맞서는 건 무리라는 걸 깨달았다.
비록 드레드노트의 등장으로 졸지에 구식 전함이 되어 버렸다지만, 단 몇 년 사이에 1만 톤 이상의 전함 16척을 뽑아내는 미국의 압도적인 생산력 앞에 놀라지 않을 자가 없었다.
일본 정국을 주도하는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와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는 대백색 함대의 방일을 미일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고자 했으니, 일본인들이 열렬하게 환영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O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6개월 전부터 일본 정부는 대백색 함대의 방일을 준비했다. 학생들이 성조기를 들고 미국 국가를 제창하고, 총리와 각료들이 직접 요코하마로 나와 입항을 환영했다.
요코하마에 입항한 미국 전함 16척의 옆으로 일본 전함 6척, 장갑 순양함 6척, 방호 순양함 4척이 열을 맞춰 도열했다.
“이번 방문으로 일본과 미국의 유대가 공고히 되기를 바랍니다.”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세계적 명사가 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침몰됐다가 재개장한 전함 미카사에 미국 해군 장교단을 초청했고, 심지어 메이지 천황도 궁궐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미국 장교단 역시 일본의 환대에 감사를 표하며, 일본 문화를 존중하고 천황과 도고 제독에게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결론은 일본이 미국의 위용 앞에 머리를 조아린 셈이었다. 루스벨트가 기획한 대로였다.
10월 25일, 요코하마를 떠난 대백색 함대는 부산항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1주일 머무른 후 청나라 상해로 향할 예정이었다.
대한제국에서도 손님맞이에 한창이었다. 해군 군함들이 부산항에 집결했고, 황제와 각료들이 친히 부산으로 향했다.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건 이선과 대한제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들어온다!”
“군악대, 연주!”
대백색 함대의 입항에 맞춰, 해군 군악대는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을 연주했다. 음악 그대로 ‘신세계로부터’ 오는 강렬한 힘이었다.
퍼엉! 퍼엉!
한국의 예포가 16발 발사되고, 이윽고 대백색 함대가 위용을 드러내며 부산항에 입항했다.
“미합중국 만세!”
“한미우호 만세!”
대함대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와 함께, 대한제국 해군이 대백색 함대의 입항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