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65
– 146화에 계속 –
2부 146화 세대교체
1909년, 광무 13년.
대한제국에는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됐다. 국내 정치와 국제 정세 모두 안정적이었고, 발전 궤도에 오른 한국 자본주의는 착실하게 성장 중이었다.
토착 자본이 형성되어 부를 축적하고, 신기술을 응용해 실생활에 접목시켰다. 자본의 과시와 기술의 발전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근대의 삶’을 체험하게 했다.
철도, 전기, 수도, 각종 사회간접자본의 혜택을 누리는 도시 거주민들은 이전 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다.
여전히 2천만 대한국민의 90%는 농촌에서 생활하며 크게 바뀌지 않은 삶을 살았다. 물론, 그들도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다.
비록 지세(地稅)는 중과세였으나 조선의 온갖 불합리한 잡세(雜稅)가 폐지되었고, 병역과 교육의 의무가 있으나 그만한 권리도 보장되었다. 토지소유권을 확보한 지주와 자영농 중심으로 토지제도가 확립되었다.
광무 13년은 전국의 농지개혁이 완성되는 해였다.
“경들의 노고가 많았소. 이제 대한은 확고한 토지소유권을 토대로, 자본주의적 농업 발전과 경자유전의 대의를 모두 지켜 낼 것이오.”
이선은 총리 유길준, 농림대신 전봉준 이하 관련자들을 모두 치하했다.
광무 5년 북부 지방의 농지개혁을 시작으로, 8년에는 중부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러일전쟁 발발로 일시 중지되었다가, 11년부터 재개하여 13년 최종적으로 남부 지방까지 완료하였다. 6월, 3차 농지개혁법이 민의원과 중추원에서 통과되었고, 황제 이선의 명을 받아 정부는 최종적으로 포고하였다.
“이는 모두 성상의 지극한 은혜이옵니다. 2천만 신민은 기뻐하며 성덕(聖德)을 칭송하옵니다.”
“짐은 그저 방향만 정했을 뿐이오. 방대한 실무를 맡아 어려운 일을 한 건 그대들의 공이지.”
3차 농지개혁은 녹록하지 않았다. 남부, 즉 충청·전라·경상 삼남 지방은 전통적인 농업지대이자 인구도 많았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뜻이었다.
이중삼중으로 복잡하게 엮여 있는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토지는 국유지로 편입하였다가 경작권이 있는 농민에게 분배하고, 토지 취득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지주들의 토지는 유가증권 지급 형태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10년간 5할의 토지 생산량을 받는 조건으로 분배했다. 즉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이었다.
이 과정에서 소유권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몰수 대상이 된 지주들의 저항이 상당했지만, 정부는 흔들림 없이 밀어붙였다. 일부 억울한 피해자들이 발생했지만, 이선과 대한제국 정부에는 농지개혁을 완수하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다양한 법률적 조치로 근대적 사적소유권에 기반한 자영농 중심의 토지제도가 확립되었다.
“나라님의 은덕으로 땅을 가지게 되었으니,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해 보세!”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오랜 숙원이던 ‘자신 소유의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은 감개무량하여 만세를 외쳤다. 인구 절대다수의 농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물론 정부도 농민들을 위해서만 농지개혁을 단행한 게 아니었다. 농촌경제의 안정을 통해서 세수 증대와 경제 발전을 도모하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갑신경장 이후 수령과 이서배의 장난질을 없애고 제대로 된 지방 행정 체계를 확립한 것만으로도 재정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근대적 토지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농민들이 불하받은 농지에는 무거운 지세가 부과되었다. 자신의 땅을 소유하게 된 농민들은 그래도 예전과 비교하면 천국이었으므로 중과세 부담을 견뎠다. 당장 이웃나라 일본과 비교해도 자영농들은 훨씬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 많은 입이 땅만 붙여서 살 수 있나. 도시에 가면 공장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맞아, 좋은 구경도 많이 하고. 도시에는 볼거리가 그리 많다더라.”
갑신경장 이후 의학의 발전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감소하고,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되면서 농촌 인구가 증가하였다. 가문을 이을 장남을 제외한 차남 이하에서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도시로 가려는 이들이 늘어났다.
자본주의 근대 문명은 이 순박한 청년들의 노동력을 골수까지 빨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초등교육을 통해 근대 문물을 약간이나마 체험한 젊은이들에게 도시의 유혹은 참기 힘든 것이었다.
이촌향도 현상은 1900년대부터 꾸준히 발생하여, 주요 도시의 인구는 상승 일로였다.
소수의 지주는 정부의 유도대로 상업형 지주이자 자본가로 재탄생했다. 조선에서 전통적인 대지주는 드물었고, 반드시 저항이 거셌던 것도 아니었다.
“선조 대대로 가르치시길, 언제나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게 선비 된 자의 의무라고 하셨네. 하물며 조정의 시책이 그러하다면야 따르는 게 신하된 도리.”
만석꾼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댁’처럼 자발적으로 농지개혁에 동참한 이도 있었다.
젊은 종손 최준(崔浚)은 농지개혁의 소식이 들리자마자 토지의 상당수를 처분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데 협조하고, 확보한 자본을 투자하여 동료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를 건립했다. 영남의 젊은 지주들의 자본을 모아 만든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단숨에 부산 제1의 무역회사로 떠올랐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다시 지역 교육 사업을 위해 아낌없이 써서 후학을 양성했다. 전통적인 유학을 고집하지 않고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학문을 배움에 있어 성별과 신분의 차이를 따지지 않았다.
“세상의 가진 자들이 모두 그대와 같다면, 어찌 탐욕에 의한 문제가 발생하겠는가? 그대는 모든 부자의 모범이 될 것이네.”
황제를 대리해 전국을 순행하며 농지개혁의 정당성을 알리던 의친왕 이강도 최준의 넓은 도량에 감탄하여 막역지우가 되고, 문파(汶坡)라는 호도 직접 지어 주었다.
“좋은 기회다. 우리 가문은 농토로 부를 축적했지만, 이제는 상공으로 확대할 때다.”
전라북도 일대의 대지주인 ‘고창 김씨가’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직계 후손으로, 유학자이면서도 재산을 축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김인후의 11대손 김요협(金堯莢)은 처가의 재력을 바탕으로 고창 일대에서 대지주로 성장했고, 개화의 흐름을 타고 개화당과 연을 맺어 정계에도 진출하여 중추원 의관을 역임했다.
김요협의 장남 김기중(金祺中)과 차남 김경중(金暻中)은 더욱 재산을 불려 호남의 대부호로 발전했다. ‘고창 김부자의 땅만 밟아도 전라도 전역을 다닐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들이 정부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지주에서 근대적 자본가로의 전환’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김기중-경중 형제는 대규모 농토를 처분하여 교육 사업에 뛰어들어 후학을 양성하고, 국립은행장과 상공부대신을 역임한 이용익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 방직회사인 를 설립했다.
“성수야,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는 자들은 죽고, 타는 자들은 살기 마련이다. 너는 신학문을 익히고 자본가로 대성해야 하느니라.”
“예, 아버님.”
김경중의 아들이자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어 장손이 된 김성수(金性洙)는, 황성대학 상학과 학생이었다. 본래 사대부는 상업을 천시했다지만, 부안 김문은 상공업에 거리낌이 없었다.
김성수는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오사카의 대규모 방직단지와 도쿄의 중공업단지를 보고 감탄했다.
“대한의 미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호남의 드넓은 지평선을 보다가, 여기저기 솟은 높은 굴뚝에서 구름 같은 연기를 쏟아 내는 공단은 기이한 풍경이었다. 이는 자본주의 문명의 원초적 체험이었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열강 러시아를 향한 일본의 전쟁은 바로 이 신생 공업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성수는 근대적 공업을 육성하는 것만이 한국이 살길이라고 확신했다.
이는 1900년대 농업 경제의 안정 이후 경공업을 육성하고, 1910년대 이후 중공업으로의 발전을 예정하고 있는 대한제국의 시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성수는 부친에게 방직회사 창립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고창 김씨는 정확히 흐름을 타고 있었다. 상업적 대토지 경영으로 축적한 부를 방직으로 상징되는 경공업에 투자하고, 더 나아가 철강으로 상징되는 중공업에 눈독을 들였다.
“저 서북에서는 뜻 있는 청년들이 기업가들과 손을 잡고 여러 가지 일을 하더군요. 우리 영호남은 본래 나라의 근본이었는데, 이에 밀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유림 개신, 국민 계몽, 상공업의 육성이라는 목표가 일치하니 함께 손을 잡으시지요.”
‘기호(畿湖, 경기-충청) 출신의 독점’에 반감을 갖고 있는 건 서북(평안-함경-황해)만이 아니었다.
본래 영남과 호남은 유림의 양대 산맥이었으나, 정여립의 난 이후의 호남, 이인좌의 난 이후의 영남은 정치적으로 소외되는 만년 야당 신세였다. 그럴수록 성리학적 세계관에 집착하며 ‘경화사족의 저속함’을 비웃었지만, 시대의 격변 앞에서 젊은 세대는 생각이 달라졌다.
하다못해 500년간 무시당하던 서북조차도 힘을 모으는데, 한때 나라의 근본이라 평가받던 영호남이라고 옛 세계에만 남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호남 자본을 대표하는 황성방직과 영남 자본을 대표하는 백산무역이 손을 잡았다.
유림들의 개신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박은식과 신채호 등이 이끄는 대동회에도 아낌없이 후원했다.
유림과 지주의 고장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었다. 개화기의 과도기를 넘어, 1885년생 최준과 안희제, 1891년생 김성수는 전통적 유림-지주에서 근대적 신학문-자본가로 변신하는 1세대였다.
“성학(聖學, 유학)이 비록 우리의 토대이나, 어찌 옛것에만 집착하겠는가? 서양의 발전도 기물만이 아니라 철학에도 토대를 두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안동의 개신 유학자 이인재(李寅梓)도 세대교체의 상징과도 같았다. 본래 그는 퇴계 이황의 주리론을 정통으로 계승한 성리학자였다.
시대의 변화는 성리학자도 바꾸었다. 유학적 관점에서 서양을 비판적으로 살피려다가, 서양 철학을 탐독하게 되었다.
유학자들은 서양에는 사상적 기반 없이 물질만 숭배한다고 깔보았지만, 이들도 고대 희랍(그리스) 이래 유구한 철학적 전통이 있지 않은가?
“필로소피아라는 것은 본래 그리스어로 ‘예지(叡智)를 좋아한다.’는 뜻으로, 이제는 ‘철학’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인재는 서양 고대 철학을 집중적으로 탐독하여 ≪희랍고대철학고변(希臘古代哲學攷辨)≫을 출간하고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정통 성리학자들에게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인재는 칸트 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호남의 유학자 이정직(李定稷)과 함께 서양 철학을 연구하는 개신 유림의 상징이 되었다.
성리학의 영구불멸을 믿던 성리학자들에게도,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렇다면 겸허한 자세로 새로이 배워야 했다.
그럼에도 어떤 의미로는 참 성리학적인 것이, 시급히 필요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려는 개화파들과 달리, 이들은 서양을 근원적으로 탐구하려고 하였다.
영남의 이황과 호남의 기대승이 25세의 나이 차이에도 편지로 사단칠정을 논의했듯이, 호남의 이정직과 영남의 이인재도 29세의 나이 차이를 초월해 교류하며 서양 철학을 논했다.
주리론과 주기론을 가지고 논쟁하던 유학자들이, 데카르트와 칸트 철학의 정합성을 가지고 열렬하게 토론을 하는 신선한 풍경이 펼쳐졌다.
“중대한 국가의 대업을 마쳤으니, 신은 이제 맡은 바 직에서 물러날까 하옵니다.”
농지개혁, 국민교육 확대, 노동 관련 입법을 마친 후 총리 유길준은 사임 의사를 밝혔다.
유길준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태도와 쌀쌀맞은 성격으로 인해 지지자들을 끌어모으지 못해, 개화당 내에서도 정치적 입지가 약했다. 이선의 지지가 아니었더라면 총리직을 수행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선이 유길준을 발탁한 이유는, 미국 유학 이후로 형성된 확고한 사회개혁 의식이 있었다. 지난 20년간 국민교육 확립과 사회개혁 확대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1909년에 정점을 찍었다.
총리에 재임하는 동안 유길준은 건강을 크게 해쳤고, 사회개혁이 일단락되자 사의를 표했다. 이제 학문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고 싶어 했다.
“경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하겠소. 경은 국가의 원훈이니, 총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원훈으로서 조언을 아끼지 말아 주길 바라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유길준이 총리에서 사임하자, 이윽고 농림대신 전봉준도 사의를 표했다.
“농민들이 땅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더욱 나라에 충성하며 국가의 역군이 될 것입니다. 신은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경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농민의 입장에서 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겠소? 무수히 많은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들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한 경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이선의 치하에, 전봉준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어리석고 불초한 신을 발탁하시어 농지개혁의 중대한 사명을 맡겨 주셨으니, 신은 죽어서라도 성상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전봉준은 고향 고부군으로 돌아가 농민계몽운동에 전력하기로 했다.
물론, 농지개혁 이후 ‘농민의 벗’ 전봉준의 지지자는 많았고, 특히 호남에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주인은 성상이시고, 떠받드는 이들은 9할이 농민이라. 그렇다면 농민이 나라의 주역이 되어야지.”
전봉준도 내심 북유럽이나 동유럽 사례를 참고하여 농민당을 결성하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천도교를 기반으로 정치세력화하길 원하는 손병희와 손잡고 전국정당으로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선거권만 확대된다면, 집권도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다.
“후임 총리로는 금릉위 박영효를 임명하니, 경은 즉시 조각(組閣)에 나서도록 하시오.”
“대임을 맡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위로는 성상을 높이 받들고, 아래로는 국민을 아우르는 내각을 확립하겠습니다.”
이선은 제5대 총리대신으로 49세의 박영효를 지명했다. 최초의 40대 총리였다.
개화당 내부의 권력 서열로 볼 때, 사실 박영효는 진작 총리에 올랐어야 했다. 품계 상으로는 어릴 적부터 언제나 정1품 금릉위였고, 개화당 내의 서열도 김옥균에 다음가는 위치였다.
그럼에도 이선이 박영효에게 총리직을 맡기는 걸 미뤄 왔던 이유는, 명문 반남 박문 출신이자 군주의 사위라는 특수한 지위로 인해 가졌던 박영효의 엘리트주의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하인과도 흔쾌히 어울렸던 김옥균과 달리, 박영효는 개화를 부르짖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엘리트주의적 오만함을 유지했다. 정치적으로도 점차 경화사족의 이해관계를 대표했다.
이선의 몇 차례 경고가 있고 난 뒤에, 박영효는 변화했다. 그도 국민국가라는 목표에 있어서 다르지 않았다. 황제가 스스럼없이 신분 차별을 깨려고 하는데, 자신이 구분을 지어선 안 될 일이었다.
박영효의 변화를 지켜본 후에, 이선은 그에게 총리라는 대임을 맡겼다.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화당은 박영효의 총리 취임을 적극 찬성했다.
‘개화당이 영구히 집권하는 모양새는 좋지 못하지. 개화당의 시대정신도 끝나가고 있다. 개화당 출신 총리는 가급적 박영효가 마지막이었으면 하는군.’
이선은 자주독립과 외견적 근대화라는 목표를 달성했으니, 개화당의 역사적 사명도 이제 슬슬 종장에 돌입했다고 판단했다. 25년 전에는 가장 급진적이었던 개화당도, 이제는 기득권이었다.
장차 대한제국은 근대화의 완성, 진정한 국민국가의 확립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선 새로운 시대정신, 새로운 정치 지도자, 새로운 지식인, 새로운 국민이 필요했다.
1880년대의 개화 이후 새롭게 형성된 세대.
이들이 성장한 1910년대는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