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67
– 148화에 계속 –
2부 148화 거대한 환상
1910년 봄, 영국.
대한제국 친왕 이영은 대학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예비과정을 거쳐, 유서 깊은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Cambridge King’s College)에 입학한 이영은 역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왕자 전하, 오늘 수업은…….”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냥 영이라고 불러.”
이영은 ‘코리안 프린스’로 통했고, 영국 왕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물론 대학에서 왕족이라고 수업까지 특별대우를 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이영은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이영은 대학을 늦게 들어왔기에 동급생들보다 3-4살 정도 많기도 했고, 한국에 있을 때부터 최상의 교육을 받았기에 단숨에 우등생으로 치고 올라왔다. 그는 동서양의 역사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 데 있어서도 지적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 결과 이영은 동양인 최초로, 우수한 학생들만 추천제로 들어갈 수 있는 학생모임인 케임브리지 사도회(Cambridge Apostles)의 일원이 되었다.
사도회는 일종의 대학생 비밀결사로, 엘리트인 케임브리지에서도 최고 엘리트라는 자부심과 동지의식을 갖고 맹렬히 공부하고 토론했다.
“오늘은 아시다시피, 킹스 칼리지 졸업생이자 사도회의 일원으로, 현재 경제학과 강사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 선생님의 지도로 토론회가 있겠습니다.”
훗날 위대한 경제학자로 기억될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이때 20대 후반의 젊은 경제학 강사였다.
본래 케인스의 전공은 수학이었고, 경제학은 대학원 시절에 청강으로만 들었지만 비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인도에서 재직했으나, 모교의 부름을 받아 경제학 강사로 돌아왔다.
케인스는 모교와 사도회에 강한 소속감과 동지애를 갖고 있었고, 사도회의 젊은 후배들을 지도해 달라는 부탁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최근, 세계의 경제적 연결로 인해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경제를 통한 영구평화론이죠. 과연 이게 가능한지 토론해 보도록 합시다.”
1910년, 경제학자이자 언론인 노만 에인절(Norman Angell)은 ≪거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20세기에 왜 전쟁이 불가능한지를 인상적이고 세련된 논리로 집필된 책이었다.
거대한 환상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영국의 대학가에서는 ‘교리 전파’를 위한 스터디 그룹이 수십 개나 생겼다.
의외로 영국 군부에서도 인기를 끌었는데, 제국방위위원회의 위원장인 에셔(Esher) 자작이 대표적인 신봉자였다. 에셔는 독일에서도 이 이론을 받아들여 무한정 지속되는 군비 경쟁을 끝내길 원했다.
「오늘날 밀접해진 국가 간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똑같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므로, 전쟁은 이미 채산성을 잃었다. 어떤 국가도 어리석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공격적인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는 새로운 경제적 변수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다.
…… 20세기의 전쟁은, 너무나 거대해진 경제력으로 인해, 상업적인 재난과 재정파탄을 고려하면 각국으로 하여금 전쟁을 생각하게 만들 수 없는 억지력을 갖고 있다. 전쟁은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일어나기 어려워지고 있다. 단언컨대, 전쟁은 불가능하다.」
에셔는 케임브리지에서 거대한 환상을 지지하는 특별 강연을 했고, 교수와 학생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사도회의 토론 소재로 나오는 당연했다.
“에인절 씨와 에서 경의 이론을 지지합니다. 열강 간의 전쟁은 잃을 게 너무나 많습니다. 영국과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공업이 발전한 나라이며, 상호 간에 무역의존도 굉장히 높습니다. 각국의 자본가들은 이런 파멸적인 전쟁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거대한 환상은 구체적으로 러일전쟁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18개월의 전쟁이, 양국 재정과 경제에 얼마나 파멸적인 피해를 입혔는지를 증명하고 있죠. 일본은 전쟁에 8년 치 예산을 쓰고, 막대한 채무를 짊어지고 파산 위기에 놓였습니다. 인적 손실도 심각합니다. 그 대가로 얻은 건 사할린이라는 동토의 땅일 뿐이죠. 만약 우리 영국이 동맹국으로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이미 파산했을 겁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가 공격적인 극동 정책을 쓴 결과 전쟁이 발발했는데, 얻은 건 없이 막대한 인적·경제적 손실만 입었습니다. 쓰시마 해전으로 차르 정권의 정치적 위신이 무너졌고, 혁명까지 발발하여 대위기를 촉발했죠. 전쟁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러시아는 두 번 다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일부 군인과 언론들이 과거에는 러시아, 지금은 독일을 적으로 삼아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영국도 군비 증강에 몰두하게 하여 개혁을 막으려는 거겠죠. 더 이상 그들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학생들 대부분은 ‘거대한 환상’의 이론에 동조했다. 바로 얼마 전, 러일전쟁이 생생한 사례였다.
“프린스 영은 러일전쟁을 지척에서 지켜본 사람이죠. 그의 의견을 들어 봅시다.”
케인스는 말없이 경청하고 있던 이영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시선이 일제히 모두 그에게 쏠렸다.
이영은 언제나, 가급적 침묵을 지키며 경청했다. 아무리 영어가 유창해도, 모국어인 영국 학생들보다 뛰어날 순 없었다. 더욱이 자신은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걸 늘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가급적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에게 발언권이 주어진다면, 사양하지 않았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러일전쟁 당시 대한제국 대표단장으로 전선의 일본군 사령부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이영의 말에 학생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왔다. 그들도 장차 미래의 영국을 좌지우지할 엘리트들이지만, 이영은 이미 국제 정치의 한복판에 있었다.
“맞습니다. 전쟁은 미친 짓이죠. 일본군은 언제나 위대한 승리를 자랑스럽게 포장해서 선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병사가 죽어 나갔습니다. 그들은 애써 감추려고 했지만, 일본이 군비가 얼마나 부족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들었는지 저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왜냐면 일본은 저를 통해서 끊임없이 한국 정부에 군수품 보급을 요청했거든요. 덕분에 한국 전시경제는 호황을 맞이했습니다만…….”
이영이 접반사로서 겪었던 생생한 경험담을 풀자, 학생들의 흥미는 더욱 높아졌다.
보불전쟁 이후 큰 전쟁이 없었던 유럽이었다. 물론 보어전쟁이 있기는 했지만, 머나먼 아프리카의 일이었다. 전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고, 흥미로운 소재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일본이 전쟁에 뛰어든 건 말이 안 됩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국력 차이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죠. 하지만 그들은 전쟁을 했습니다. 그게 바로 제국의 영광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운명을 걸고 거대한 도박을 건 거고, 실제로 거의 이길 뻔했습니다. 끝내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영은 일본이 도박을 벌였다 실패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은 물론 미친 짓이고, 비합리적이죠. 합리주의자의 눈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책 결정자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의외로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영광에 눈이 먼 국가 지도자, 혹은 야심에 가득 찬 군인들의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전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는 일본과 러시아 사례에서 충분히 증명됩니다. 유럽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만약 이영이 이선에게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더라면, 그도 ≪거대한 환상≫에 동조했을 터였다.
이선은 영국에서 체류할 아우에게 ‘유럽에서 대전쟁이 5년에서 10년 내로 일어날 가능성이 크며, 대한은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침을 내렸다. 이선은 구체적인 논증으로 왜 전쟁이 불가피한지를 설명했고, 이영은 납득했다.
“유럽은 러시아나 일본과 다릅니다. 경제가 모든 걸 결정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의 정책 결정자들도 경제 파탄을 각오하고 전쟁을 벌일 리가 없습니다.”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입헌군주정, 민주공화정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만, 군주와 일부 엘리트들이 모든 걸 결정하는 구조에선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러시아라면 모를까, 독일만 해도 그런 비합리적인 짓을 할 리가 없다니까요.”
“아시아적 전제와 유럽적 합리성은 다르죠.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아시아입니다.”
“옳소!”
자신들이 이성과 합리의 최고봉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영국인들은, 유럽의 지도자들이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그건 ‘아시아적 전제’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최고 엘리트층에서도, 인종적 편견과 이념적 편향성은 여실했다.
토론회는 ≪거대한 환상≫이 옳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벨 에포크 시대를 살고 있는 유럽인들은, 이성과 합리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이영도 굳이 그들에게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소수자라는 걸 염두에 두었다. 어릴 적부터 처신에 관해선 늘 교육받았던 터였다.
“프린스 영,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말로만 듣던 대한제국 황자를 직접 만나니 영광이기도 합니다.”
토론회가 끝난 후, 케인스는 이영을 따로 불러 인사를 청했다.
“그냥 영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도 전설로만 듣던 선생님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킹스 칼리지와 사도회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라고…….”
“천재는 무슨. 아무튼, 한 가지 알아 둘 게 있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거대한 환상에 동조하는 건 꼭 경제적인 요인만 판단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국내 정치의 요소도 있습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계속되는 군비 증강에 우려를 느끼고 있죠. 군비 증액을 핑계로 자유당 정부의 개혁을 무너트리려는 게 아닌가 하는.”
1909년, 자유당 정부의 재무장관 로이드조지는 ‘빈곤과의 전쟁을 위한 인민예산’을 밀어붙였다. 교육법, 노령연금법, 국민보험법, 여성-청소년 노동법을 잇달아 발의했다. 사회보장제도 확립과 복지국가로 가는 최초의 법안들이었다.
이를 위한 예산은 군비 삭감과 누진세 도입, 토지귀족들의 불로소득을 징세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로써는 생각지도 못하던 파격적 제안이었다.
“의원 동지 여러분! 국민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한 전쟁이야말로, 대영제국이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야 할 전쟁입니다!”
당연히 보수당과 군부, 자본가와 지주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8척으로 예정된 드레드노트급 전함 예산을 6척으로 줄이려고 하자, 이를 트집 잡아 자유당과 로이드조지가 비애국자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We want eight, we won’t wait(우리는 8척을 원한다, 기다리길 원치 않는다)!”
결국 판가름은 1910년 1월 총선에서 드러났다. 자유당은 국민 여론에 호소했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1906년 총선과 비교하면 의석을 많이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1당을 유지했다.
선거에서 승리한 자유당은 개혁 입법을 밀어붙였다. 보수당은 귀족원(상원)의 거부권을 통해 서민원(하원)의 법안을 막으려 했지만, 애스퀴스와 로이드조지는 상원 개혁안까지 들고나왔다. 예산·입법과 관련한 하원의 결정에 상원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회법을 관철시킬 생각이었다.
“보수당이 이런 식으로 개혁을 막으려 든다면, 실업자 500명을 무작위로 뽑아 자유당 소속 귀족원 의원으로 만들겠다!”
로이드조지의 위협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실업자 운운은 과장되었어도, 장차 상원의 후보가 될 청년 엘리트들도 보수당보다 자유당에 더 공감했다.
자유당과 보수당은 귀족원 임명권을 지닌 국왕 에드워드 7세에게 호소했다. 건강이 악화된 국왕은 결정을 유보하고 휴양지인 프랑스 비아리츠로 떠났다.
“예, 이해합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자유당의 개혁을 지지하니까요.”
“물론 영의 말처럼, 카이저나 차르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군부는 더 위험하고요. 그러나 지나치게 독일의 위협을 강조하면 안 됩니다. 자신들이 포위됐다고 여길수록, 독일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더욱 전쟁에 불을 붙이려 할 겁니다. 상호 피해의식이에요. 먼저 건함 경쟁부터 중단해야 합니다.”
케인스의 말에 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인 측면에서나 실제적인 측면에서나 그의 말이 옳았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선생님의 지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별말씀을. 혹시 경제학에도 관심 있으면 다음 학기에 내 수업 들으러 와요. 경제학원론 개강하니까. 경제학이야말로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사회과학이 될 겁니다. 다만 수학에 대한 사전지식은 좀 있어야 하는데.”
“제 형님이신 황제 폐하께서도 경제학을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꼭 들으러 가겠습니다. 필요한 수학은 미리 공부해 두겠습니다.”
“과연, 동양의 계몽군주라더니. 훌륭한 자세군요. 그럼 또 봅시다.”
케인스는 이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영은 스승을 대하는 예로 겸손히 고개를 숙이며 악수했다.
며칠 뒤, 이영에게서 정기 보고를 받던 이선은 흥미로운 이름을 보았다.
“그 유명한 케인스가 이때 케임브리지 강사로 있었나? 이건 나도 몰랐네.”
이선은 흥미를 느꼈다. 케인스는 20세기의 경제사를 바꾼 위대한 경제학자이기도 했지만, 현실 정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케인스는 실제 역사에서 1919년 파리강화회의 영국 재무부 대표였다.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배상금이 경제회복과 평화유지라는 두 과제를 모두 놓치리라 보았고, 독일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두 번째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결국 그의 우려는 20년 뒤에 현실이 되었다.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든, 앞으로 케인스의 역할은 더욱 커지겠지. 미리 인맥을 터면 좋겠군. 역시 영국 유학을 보내길 잘했어.’
이선은 아우에게 케인스의 수업을 꼭 듣고, 그와 학문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조언하는 전문을 보냈다.
1910년, 전쟁은 과연 거대한 환상처럼 보였다. 경제는 번영하고, 평화는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구해 보이리라고 믿었던 번영과 평화야말로 오히려 ‘거대한 환상’이었다.
1910년 5월 6일,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서거했다.
‘평화 조정자(피스 메이커)’라는 별명을 가진 국왕의 죽음이, 유럽의 번영과 평화의 종말을 상징하게 되리라고는, 이 시점에서 예측하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