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70
– 151화에 계속 –
2부 151화 황제 붕어(崩御)
광서 36년 7월 17일, 1910년 8월 21일.
북경 자금성은 혼란스러웠다. 급히 소집된 황족과 대신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어렸다.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어, 병석에 누운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광서제는 와병 중에도 어떻게든 정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황제는 극심한 가슴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간신히 의식을 찾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일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황제의 심장은 치명적인 심근경색을 일으켰고, 당대의 의학 수준으로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
먼저 황족들이 입궐했다.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 재풍, 역시 이복동생이자 유럽에 군사유학을 다녀온 종군왕 재도, 황실의 원로인 경친왕 혁광, 내각총리대신 숙친왕 산기 등이었다.
침전에 누워 있는 황제는 파리한 안색에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져 있었다.
“폐하! 이 어찌 황망한 일이옵니까!”
광서제는 최후의 힘을 짜내어 유언을 읊었다.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그는 유조(遺詔)를 작성해두었다.
“유조를……, 남겼소. 재풍의 장남인 부의가 대통을 이을 것이오. 재풍은 감국섭정왕으로…….”
광서제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조카 부의(溥儀, 푸이)가 후계자로 지명됐다. 후계자의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다.
원칙적으로 청 황실의 종법은 한 대에 한 항렬만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미 선제인 동치제(재순)가 서거한 후에 ‘부’ 항렬에서 나왔어야 했으나, 서태후가 예외를 내세워 여동생의 아들인 4살의 재첨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 험난한 시기에 겨우 5살 난 후계자를 지명하려니 광서제도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믿는 바가 있어서였다. 광서제는 섭정왕으로 지명한 아우 재풍을 가까이 불러 귓속말로 말했다.
“정치는……, 내각에 맡겨라. 만한의 협력 없이……, 대청의 사직을 유지하기 어렵다. 결코 옛 방식대로 다스려선 안 된다…….”
“예, 폐하! 삼가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재풍이 울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나이 28세에 섭정왕으로 지명된 재풍은 막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경들은……, 새 황제와 섭정왕을 도와 대청의 사직을 지켜 주시오.”
“예, 폐하! 신등은 목숨을 바쳐 대청의 사직을 지키겠습니다!”
숙친왕 산기가 울면서 맹세했다. 그는 반드시 청조의 사직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황족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한 광서제는, 대신들도 불러들여 유조를 남겼다.
“내각과 군부는……, 새 황제와 섭정왕을 보좌하여 국가를 지켜 주시오. 참으로 어려운 시기이니, 천명과 민심을 거스르면 아니 될 것이오…….”
“예, 폐하! 신등은 삼가 황명을 받들어 반드시 국가를 지켜 내겠습니다!”
대신들이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청조를 향한 한족들의 충성심은 갈수록 믿을 수 없었지만, 광서제가 직접 발탁한 사법대신 강유위와 북양대신 장훈만큼은 충심으로 가득했다.
“경은 무술년 이래, 짐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 주었소. 대청의 사직을 지키려면 입헌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오. 부탁하겠소.”
“신, 유위는 황상께 맹세합니다. 천명과 민심을 조화하여 대청의 사직을 튼튼히 하겠습니다!”
무술변법을 주도했다가, 기해정변으로 실각하여 홍콩을 경유해 일본으로 망명했던 강유위.
‘과격한 변법파’의 대명사였던 강유위는 망명 중에 혁명파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공화제는 시기상조였고, 군주제만이 중국의 전통과 개혁에 부합했다. 영국과 일본 사례를 받아들여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여 청조를 지키겠다는 강유위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광서제가 다시 정권을 잡은 후에도 한동안 재야에 머무르며 후학 양성에 힘썼던 강유위는, 사법대신으로 임명되어 사법제도를 일신했다. 그는 자신을 발탁한 광서제를 위해서라도 입헌군주정을 확립할 생각이었다.
“신군의 개혁은 완성되어야 하오. 전군이 북양군처럼 양성된다면, 대청의 사직과 국방의 안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이오.”
“신, 훈은 황상께 맹세합니다. 대청이 곧 중국이오, 중국이 곧 대청입니다. 역적들은 결코 천명을 넘볼 수 없을 것이며, 대청의 사직은 영구불멸할 것입니다!”
북양대신 장훈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충성을 다짐했다. 지나친 거조로 보였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북양군을 맡고 있는 장훈은 가장 확고한 대청의 충신이었다.
“고맙소. 짐은 경들을 믿고 눈을 감을 수 있겠소…….”
광서제는 후계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섭정왕과 황실 원로들, 내각 대신들이 어린 황제를 보좌하여 제국을 지켜 나갈 터였다.
그래도 광서제의 가슴에는 원통함이 가득했다. 너무 이른 죽음, 너무 늦은 개혁. 자신이 죽은 후에 청조가 과연 사직을 지켜 낼지 의문이었다.
‘아, 하늘이란 어찌 이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나는 하늘의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광서제는 하늘을 원망했으나, 무심한 하늘은 답이 없었다. 이미 하늘은 청조의 천명을 거두었다. 광서제는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구시대의 마지막 버팀목이 되고야 말았다.
“황제 폐하 붕어!”
“폐하!”
이튿날, 8월 22일. 광서제가 자금성에서 붕어(崩御)했다. 재위 36년, 향년 40세. 한창 나이였다.
4세의 어린 나이에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즉위하여, 36년을 재위했다. 이중에서 그가 진정으로 권력을 행사한 건 10년뿐이었다.
광서제는 최후의 구심점이었다. 이미 재위는 36년에 달했고, 통치의 정통성에 의문을 재기하는 자는 드물었다.
의화단전쟁 이후 만주 수구파는 정치적으로 제거되었고, 보수파는 개혁군주인 광서제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유교적 충심을 유지했고, 지방의 실권을 장악한 양무파는 관성적으로 충성했으며, 입헌파(변법파)는 변법을 지지하는 광서제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런데 그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최후의 구심점이 사라졌으니, 이제 혁명과 분열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대행황제(大行皇帝)의 유조를 받들어, 순친왕 재풍의 장남 부의로 하여금 대통을 계승한다. 재풍은 감국섭정왕이 되어 황상께서 성년이 될 때까지 보정(輔政)한다. 내각은 섭정왕을 보좌하여…….”
부의의 즉위와 재풍의 감국섭정왕 취임이 발표되었다. 5살 부의가 성년이 될 때까지, 재풍은 섭정왕으로 황제의 역할을 대리했다.
내각은 만한 동수로 구성되었다. 총리와 협리(協理, 부총리) 1인, 탁지(재무)·민정(내무)·육군·해군은 만주인이었다. 협리 1인과 외무·학무·사법·농상공·우전(우정통신)은 한인이었다. 유일하게 이번(理藩, 몽골·티베트·신강·청해 담당)은 몽골인의 몫이었다.
일정부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사례를 참고했지만,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은 한족으로서는 불만스러운 구조였다. 명목상으로는 만한동수라지만, 핵심 요직은 모두 만주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급증하는 한족 민족주의 요구에서, 과연 만한동수의 지배구조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의문이었다.
대행황제에게는 덕종(德宗)이라는 묘호가 추존되었다. 능호는 숭릉(崇陵)이었다.
1910년 9월 2일, 자금성 태화전에서 대청 제12대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아빠, 지루해! 언제 끝나?”
다섯 살 소년 부의는, 전통 예법에 따라 거행되는 길고도 엄숙한 황제 즉위식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칭얼거렸다. 부친 섭정왕 재풍이 거듭 달랬지만, 얼마 못가 지루함을 못 참고 칭얼거리기 일쑤였다.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 좀만 참으세요!”
섭정왕이 달래면서 하는 말에 지척에 있던 황족들과 대신들은 순간 불길함을 느꼈다.
‘곧 끝난다(快完了)’와 ‘곧 망한다(快亡)’의 중국어 발음이 워낙 비슷해서, 그들의 귀에는 ‘(청조가) 곧 망한다!’는 말로 들렸던 것이었다.
물론 귀의 착각에 불과했으나, 이는 그들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는 셈이었다.
청조가 망조에 들기 시작한 아편전쟁으로부터 70년, 중국 전역을 혼란에 빠지게 한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60년, 청조의 권위를 무너트린 영불 연합군의 북경 함락으로부터 50년, 청조의 천명이 무너진 의화단의 난과 9개국 연합군의 북경 점령으로부터 10년.
중국 역사상 이렇게까지 여러 외세에 치욕적인 굴복을 한 사례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곧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였고, 여태 버티고 있는 것도 용했다.
동치중흥(양무운동)과 광서신정(변법자강)으로 수명을 겨우 늘렸지만, 이조차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광서제의 국장과 새 황제의 즉위식을 지켜본 주청 한국 특명전권공사 이완용은, 어쩌면 이게 자금성에서 거행되는 마지막 즉위식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과연 저 어린 황제가 얼마나 버틸꼬?’
이완용은 청조의 운명이 풍전등화라고 인식했다. 황제 이선이 예측한 청조의 붕괴와 중국의 분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선제에게는 안 됐지만, 이 시대 국가 간의 의리란 게 그런 걸 어쩌겠나?’
광서제가 이완용을 꽤나 신임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죽자마자 중국 분할을 염두에 두고 움직인다는 건 배은망덕이었다.
‘아니, 오히려 선제가 고마워해야지. 만약 반란군이 천명을 위협하더라도, 청조의 사직을 잇도록 만주로 가는 길을 열어 주겠다는 게 아닌가? 이로써 동양평화가 이루어진다면야.’
이완용은 놀라울 정도로 자기합리화에 능했다. 그는 장차 자신이 도모할 행위가 한국과 청국, 동양평화에 모두 기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대청 덕종 광서 황제 폐하.’
광서제는 생전에 주요국 공사에게도 유조를 남겼다. 이완용에게도 대한제국 황제에게 보내는 유조가 전달되었다. 이완용 본인에게는 ‘그간의 공로에 감사하는’ 의미로 은사금이 내려졌다.
외무대신 양돈언(梁敦彦)이 유조와 은사금을 직접 전달했다. 미국 유학파 출신 외교관인 양돈언과 이완용은 주미 공사관 재직 시절에 친분을 맺어 둔 터였다. 나이도 동년배였고, 둘은 스스럼없이 영어로 대화하며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 이완용은 물론 깊은 감사를 표하며 받았다.
“앞으로도 귀국과 귀공이 대청의 친우로서 역할을 다해 주길 바라는 것이, 대행황제의 간곡한 성심이십니다.”
“아! 대행황제의 지극한 공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외신은 마땅히 대청과 대행황제를 위하여 의리를 다할 것입니다.”
각국 외교 사절단이 광서제의 빈전에 조의를 표하며 조문할 때, 이완용은 사대부 출신답게 더할 나위 없는 유교적 예법으로 황제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곡(哭)했다.
“과연 천하에 중화의 예의를 지키고 있는 건 한국뿐이로다!”
서양에 반감을 느끼고 한국을 여전히 ‘옛 속국’으로 여기고 있는 보수파들도, 이완용의 상례(喪禮)에 감탄하며 경의를 표했다. 그는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대청의 친우’였다.
* * *
「대청 황제는 대한 황제 폐하께 마지막 편지를 보냅니다. 아아, 짐의 수명이 다하였으니,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짐의 죽음은 한스럽지 않으나, 하늘이 짐에게 준 책무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그게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 대청과 대한, 만주인과 한국인은 동종(同種)이자 형제입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록 양국 간에 불행했던 과거도 있었으나, 미래를 함께 쓰길 바랍니다. 짐은 폐하와 귀국의 우의를 믿고, 마지막 청을 하오니…….」
광서제의 마지막 편지를 전달받은 이선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가 마흔이라는 한창나이에 죽었다니 깊은 애도의 감정이 들었다.
이선은 인간적으로 광서제에게 친밀감과 동정심을 느꼈다. 광서제가 개혁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망국의 위기로부터 국가를 지켜 낸 이선을 본받고자 노력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정보다는 국가이성이 더 중요했다.
‘안타깝게도 군주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지.’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리는 건 극한의 일이다. 통치자와 지배계층의 뼈를 깎는 노력과 피지배계층의 광범위한 동의가 필요하다. 여기에 천운까지 필요로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운이 안 따라 주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역사의 메이지 일본이나, 이 세계의 조선이 그랬다. 회귀인 이선의 존재, 지배계층의 변화, 국민의 각성, ‘외교 치트’, 천운이 겹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애초에 이선이 미래인의 기억을 갖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기이한 천운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 자체가 천명일지도 몰랐다.
“짐은 대청 황제 폐하의 서거에 마음 깊이 큰 슬픔을 느낀다. 황성에 조기를 내걸고, 조문단을 북경으로 보내 그 슬픔을 함께하도록 하라.”
‘광서 황제시여, 비록 청조의 중국 지배를 유지할 수는 없겠으나, 그 사직은 지키게 할 것이오.’
이선은 광서제의 영령에게 약속했다. 중국의 분할을 꿈꿨지만, 동시에 청조의 사직도 어떻게든 유지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역사로 비유하자면 500년 전 원명교체기와 흡사하군.’
유목민족 몽골-원나라의 지배에 맞선 강남 한족의 봉기로 시작해 북경으로까지 진격, 역시 만주-청나라의 지배에 맞선 강남 한족의 봉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원나라가 장성 이북으로 몽진하여 북원(北元)으로 계승되었듯이, 유사시 청나라도 만주로 몽진하여 만청으로 사직을 유지해야 했다.
‘명청 교체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니, 이 새로운 천명의 교체기에는 변화를 주도해야 하리라.’
3세기 전, 17세기 조선은 명청 교체기에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 했지만, 공화혁명이라는 새로운 천명의 교체기를 주도해야 했다.
“오늘 밤에 이회영을 은밀히 부르라.”
“예, 폐하.”
그날 밤, 극비리에 제국익문사 동아국장 이회영이 어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남의 일은 어찌 진행되고 있소?”
“예, 중국동맹회는 계속 봉기를 모의하고 있습니다. 대청 황제가 서거하셨으니, 이를 기회로 삼고자 할 겁니다.”
“우리 요원들은?”
“황명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소. 경이 직접 홍콩으로 가 줘야겠소.”
“삼가 황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황제의 명에 이회영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이회영은 잘 알고 있었다.
이회영은 선별한 요원들과 함께 홍콩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1910년, 광무 14년, 광서 36년, 경술년 8월 22일.
실제 역사에서는 한일병탄이 강요된 바로 그날, 변화한 역사에서는 공교롭게도 대청 11대 황제 광서제가 붕어했다.
실제 역사에서 대한제국의 운명이 종말을 맞이한 그날, 변화한 역사에서는 대청제국의 천명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실로 천명의 기이한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