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71
– 152화에 계속 –
2부 152화 페스트
페스트. 혹은 흑사병(黑死病, Plague)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인류 역사상 등장한 온갖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인명피해를 냈다.
14세기의 2차 페스트 팬데믹(Pandemic)은 유라시아 전역을 강타했고,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피해가 극심했던 유럽에서는 중세의 종말을 불러일으켰다. 중세의 인간들은 ‘신의 분노’ 앞에서 절망하며 죽어 갔다.
19세기 후반, 3차 페스트 팬데믹이 발생했다. 중국 운남에서 기원해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교통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제국주의 시대는 전염병의 확산이 수월했고, 배와 철도를 따라 움직이는 콜레라와 페스트는 근대적 팬데믹으로 변화했다.
“페스트는 신의 분노가 아닌, 세균 감염에 의한 급성 전염병이다!”
물론, 근대의 인간들은 중세의 인간들과 달랐다. 근대의 인간은 전염병의 기원을 찾고, 과학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동북아시아는 3차 페스트 팬데믹의 상대적 무풍지대였다.
1898년 일본 고베에 페스트가 상륙했고, 화들짝 놀란 일본 정부는 대대적인 방역정책을 구사했다. 근대적 팬데믹을 주시하고 있던 대한제국 정부도 빠른 방역 조치로 페스트가 한반도에 상륙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191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페스트가 동북아시아를 덮쳤다.
기원은 북만주였다.
1910년 가을, 러시아-청 국경.
1900년 의화단전쟁 이래 만주 일대는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러일전쟁 종전 이후에도 북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남았고, 청나라 쿨리(육체노동자)들이 러시아에 고용되는 일이 잦았다.
20세기 초, 유럽의 모피 시세 폭등으로 러시아 자본이 북만주와 몽골 일대로 시선을 돌렸다.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오랫동안 남획으로 모피 자원이 부족했지만, 북만주-몽골에는 아직 자원이 넉넉했다.
“만주에서 모피로 떼돈 번 사람들이 많다더군.”
“그래? 그럼 나도 가야겠군!”
갑자기 모피 열풍이 불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러시아 사냥꾼들뿐만 아니라, 청나라 계절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모피 채취에 여념이 없는 이들에게, 페스트의 전염원이기도 한 타르바간(마멋) 가죽도 그저 모피일 뿐이었다. 사냥해서 모피만 벗긴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일부가 생고기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으윽…….”
“이, 이봐!”
9월 하순, 러시아-청 국경 일대에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러시아 당국은 즉각 조사에 들어갔다.
“페, 페스트요.”
“오, 주여!”
열악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일하고 집단거주하던 청나라 노동자들 사이에서 페스트가 발원하여 전염되고 있었다.
페스트라는 보고에 러시아 당국은 기겁을 했다. 아직 사망자는 7명에 불과했다. 당국은 전염병 발원지로 의심되는 청국 노동자 거주 지역을 폐쇄하여 숙소와 시신을 불태우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검역과 추방이 개시되었다.
사실 페스트는 몽골과 흑룡강 일대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질병이었다. 1900년대 이전이었으면, 인구가 희박한 지방의 지역적 전염병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는 전염병의 양상을 바꾸었다. 이제 철도라는 이동수단이 있었다.
10월에는 흑룡강성 만주리(满洲里) 일대로 페스트가 확산되었다. 만주리는 원래 작은 마을이었으나, 동청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인구는 러시아인 약 5천, 청국인 2천으로 사실상 러시아의 도시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모피 열풍이 불면서 수렵철인 4월부터 10월까지는 산동과 하북 일대에서 온 청국 계절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수는 약 1만이었다.
겨울이 다가와 수렵이 끝나는 10월 하순부터, 이들의 귀향이 시작되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동청철도 화물칸에는 화물뿐만 아니라 교통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하는 청국 노동자들로 가득했다.
동시에, 페스트의 남진도 시작되었다.
“페스트다!”
“하르빈에 페스트 발생!”
10월 25일, 러시아 자본으로 발간되는 하얼빈 신문 ≪원동보(遠東報)≫는 비상경보를 울렸다. 하얼빈은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즉, 남쪽으로 귀향할 청국 노동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지점이었다.
1910년 하얼빈은 법적으로는 청국 영토였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 도시였다.
송화강변의 작은 마을이었던 이곳은 러시아가 철도 요충지로 개발하면서 성장했다. 사람들은 이 도시를 러시아 도시로 인식했다. 하르빈(Харби́н)이란 러시아어 명칭이 국제적으로 통용되었다.
하얼빈 시내, ‘도리구(道理區, 다오리)’는 러시아인 정착 지역이었다. 러시아의 동청철도 관리국이 실질적인 통치기구로 도리구의 행정, 사법, 외교 등을 관할했다.
하얼빈 교외, ‘도외구(道外區, 다오와이)’는 청국 노동자들의 거주지였다. 러시아가 지배하는 하얼빈에서 하층 일자리는 청국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인구 3만여 명이 거주하는 도외구는 전형적인 빈민가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지역에 다수의 인간이 위생에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았다. 전염병이 돌 최적의 환경이었다.
만주리에서 온 청국 노동자들이 도외구의 싸구려 여관에서 머물다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 시신은 검붉은 장밋빛이 돌았다.
하얼빈 최초의 페스트 사망자였다. 그리고 페스트는 만주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빨리 대책을 세워 보시오!”
“페스트 전문가들이 하르빈으로 오고 있습니다.”
하얼빈의 러시아 당국은 즉각 방역대책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이래 바이칼-몽골-북만주 일대의 페스트가 타르바간(마멋)이라는 설치류가 옮기는 전염병으로 인식했다.
러시아는 페스트 연구가 선도적이라고 자부했고, 블라디미르 하프킨(Vladimir Haffkine) 박사의 주도로 선페스트(Bubonic Plague) 백신이 개발됐다.
하지만 새로 나타난 페스트는 하프킨 백신도 무용지물이었다. 북만주 페스트는 기존의 선페스트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북만주 페스트가 피부나 접촉으로 옮기는 선페스트가 아닌, 비말의 흡입으로 전파되는 폐페스트(Pneumonic plague)일 가능성을 의심했다.
폐페스트는 페스트 중에서도 희귀병으로, 전염 가능성이나 치료 가능성에 있어서 최악이었다.
최악의 가능성이 점차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괴역질이다!”
“인명은 하늘이 주는 것, 천명에 따라야 한다!”
청국 당국도 비상이 걸리긴 매한가지였다. 하얼빈을 관할하는 빈강청(濱江廳)은 나름의 방역대책을 세웠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대부분의 청국인에게 근대적 위생관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이 준 형벌이었고, 역병신이 퍼트리는 재앙이었다.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아편 값이 폭등하는가 하면, 악귀를 내쫓아야 한다며 폭죽 소리가 진동을 했다.
“하르빈 시내에서 아무리 방역을 해도, 교외에서 확진자가 쏟아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
“도대체 중국인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초기에 러청 간 방역 공동 대책은 협조 속에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광서신정 이후 청국도 근대화 과정을 거쳤고, 신진 관료들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근대적 방역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문제는, 북경과 천진, 남경과 상해 등 대도시와 개항장에서는 근대적 위생관념이 생겨도, 지방에서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었다.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면, 무조건 해당 지역은 폐쇄하고 밀접 접촉자들은 격리시켜야 한다니까! 왜 말을 듣지 않는 거요!”
“우리에겐 우리의 방식이 있소. 당신들의 방식을 강요하지 마시오!”
러시아 의사들은 빈강청 당국의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에 실망했다. 러시아는 자체적인 행정력을 동원해 검역과 격리를 시행했는데, 청 지방당국은 러시아와의 협력이 불필요한 내정간섭을 불러일으킬지 의심했다.
빈강청 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러시아 의사들은 동청철도 조차지 이외 지역의 방역을 포기하고 철수를 선언했다. 방역협조는 단절되었다.
페스트 사망자가 계속 늘어나면서, 러청 갈등은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하필 시기가 최악이었다. 개혁을 주도하던 광서제가 서거하고, 어린 황제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지방에서는 불온한 기도가 계속되었고, 절강 일대에서는 혁명파의 무장 봉기가 발각되기도 했다. 숙친왕 내각은 광서제 사후의 혼란상에 대처하느라, 만주 방역에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알고는 있지만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황실의 본향인 만주에서만큼은 한인들에게 우선권을 내주면 안 된다.”
사법대신 강유위를 중심으로 하는 입헌파들은 신속한 대처를 요구했으나, 내각을 주도하는 만주 황족들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청국 내부에서 근대적 의료행정을 추구하는 건 대부분 강남 출신 한족이었는데, 만주족들은 전염병 발병을 기회로 삼아 만주의 행정까지 한족들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
이 정치싸움에 희생되는 건 결국 백성들이었다.
1910년 겨울, 만주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참혹했다.
* * *
「10월 하순부터 하르빈에 페스트 발생.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음. 신속한 대처 바람.」
하얼빈 주재 한국 영사관은 페스트 발생 현황을 신속하게 보고했다.
페스트가 동청철도를 따라 퍼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그 다음은 남만주철도를 통해 남만주와 한국까지 확산될 수 있었다.
“이거 보통일이 아니군. 즉각 방역 대책을 세워야 하오!”
하얼빈에 인접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제일 먼저 방역에 나섰다. 만철 경영을 주도하는 한국·일본·미국 3개국은 방역협의회를 구성했다.
11월 초에 만철에 소속된 3개국 의사들이 하얼빈을 시찰하고, 북만주의 페스트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데 동의했다.
“즉시 철도 검역을 개시한다. 검역을 통과하지 않은 이들의 열차 탑승을 금지하고, 특히 남하하는 청국 노동자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하라.”
“쥐가 페스트의 근원이다! 쥐를 잡자!”
만철은 북만주 페스트가 일반적인 선페스트일 가능성으로 인식했다. 병원균으로 지목된 쥐의 포획을 실시하는 데 협조하라는 공문이 계속 쏟아졌다.
때마침 만주의 대두(大豆) 수출기라 철도 화물 수송이 활발한 시기였다. 의사들은 역마다 파견되어 정거장 검역을 실시하고, 열차 위에서 차중검역이 실시되었다.
주요 역마다 격리병사가 세워지고, 의사를 추가로 초빙했다.
만철의 신속한 대처 덕인지, 당장은 남만주로 페스트가 확산되지 않았다.
“심각한 문제군. 페스트가 대한으로 번지지 않도록, 각고의 준비를 하시오.”
이선도 페스트 발병과 전염 보고를 받고 심각성을 인지했다.
“내무대신, 방역위원장을 맡아 페스트 대책을 관리해 주시오.”
“예, 폐하!”
주미공사 재임을 마치고 박영효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입각한 서재필은, 미국에서 병리학(病理學, pathology)을 전공한 의사이기도 했다.
“15년 전 호열자(콜레라) 위기가 생각나는군. 그때도 짐과 경이 신속히 대처하여 전염이 확산되는 걸 막을 수 있었소. 이번에도 신속한 대처로 페스트가 대한에 발도 못 붙이게 해야 하오.”
1895년, 조청일전쟁 직후 만주에서 콜레라가 한반도 북부로 확산됐다. 이선은 방역전쟁을 선포, 콜레라의 확산을 저지했다. 이는 한국 전역에 근대적 위생체계가 확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육군 군의총감과 내무부 위생국장을 역임하며 근대적 위생체계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서재필은, 의사로서는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의료 행정에 관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지엄한 황명을 받들어,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겠습니다.”
방역위원장 서재필은 방역위원으로 김필순과 이태준(李泰俊)이라는 젊은 의사를 발탁했다.
서재필은 이들을 하얼빈으로 보내 직접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김필순이라, 그가 쓴 종군 보고서를 읽은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이선이 기억을 더듬자, 곁에 있던 시종무관 안중근이 아뢰었다.
“김필순 의사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3군에 배속된 군의관이었습니다. 신도 그 당시 3군 관전무관이었는지라, 그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합니다. 특히 일본군에 만연하던 각기병에 대해서 논의했지요.”
“아, 맞아! 그렇지. 일본군의 각기병과 러시아군의 괴혈병에 대한 보고서였지. 기억이 났네.”
이선은 빙긋 웃으면서 안중근에게 명을 내렸다.
“마침 귀관이 북만주 파견 의사와 안면이 있다니 잘됐네. 짐도 대리인을 파견할 생각이 있었는데, 귀관이 가 주겠나?”
“예, 삼가 황명을 받듭니다.”
이선은 지방당국의 비협조에 대비하여 대한제국 황제의 대리인을 파견할 생각이었는데, 안중근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역시 안중근과 하얼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인가.’
안중근과 하얼빈, 과연 운명의 결합이라 할 수 있었다.
“선배님과 함께 국가의 중대한 책무를 맡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책무가 무겁네.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각오하자고.”
“마땅히 의사로서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33세의 김필순과 28세의 이태준은 제중원 의학교 선후배였다. 근래 세브란스 의학교로 개명한 제중원은, 황성대학 의학과와 함께 대한제국 근대 의료의 양대 산맥이었다.
러일전쟁 군의관으로 종군하면서, 각기병과 괴혈병으로 고통 받는 양쪽 군대를 보고 김필순은 병리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종전 후 전역한 김필순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최신 병리학을 공부했다.
이태준은 대한제국에서 드문 세균학 전공자였다.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에 유학해 최신 세균학을 전공했다. 그는 이영의 ‘어학우(御學友)’이기도 했다.
“이 군은 얼마 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귀국하지 않았나. 그때는 러시아에서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나?”
“러시아 의학계에서 선페스트 전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가 있긴 했죠.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동향을 보건대 아무래도 폐페스트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런데 서양 의사들은 선페스트를 고집하고 있단 말이야. 직접 보기 전에는 확정할 수가 없으니, 일단 하얼빈으로 가자고.”
‘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심각하다는 건 알겠다.’
이들과 동행한 안중근은 의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이들을 외교적이고 행정적인 측면에서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 어려운 시기에 하르빈에 와 주셔서 기쁠 따름입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선생님들의 노고가 많으십니다.”
러시아 의사들도 한국 의사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청 지방당국의 답답함에 학을 떼고 있는 러시아 의사들은, 만주 문제의 중요한 협력자인 한국의 적극적 방역 참여를 독려했다.
“병인(病因)을 파악하고, 전염병이 종식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910년 겨울, 페스트가 북만주에서 발생하여 확산됐다. 이는 예전과 다른 근대적 양상을 갖는 팬데믹이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최하부로 포섭된 계절노동자들이 매개가 되어, 철도라는 근대적 교통수단을 통해 빠르게 전염병이 확산해 나갔다.
그런데 동아시아 질병사와 의학사의 관점에서 중요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사소해 보이는 이 사건이, 의학사를 넘어 근대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미처 없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