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73
– 154화에 계속 –
2부 154화 의지와 능력
1911년 3월 1일.
가장 격심한 피해를 입은 하얼빈에서, 마침내 페스트 확진자와 사망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지난 24시간 동안 확진자와 사망자 모두 없습니다.”
“마침내…….”
도시마다 죽음의 신이 물러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의료진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막심한 피해를 입고도, 인간은 결국 승리했다.
만주 전역에서, 지난 4개월 간 사망자는 약 4만 4천이었다. 그 대부분은 육체노동자들로, 북만주 일대, 즉 흑룡강성과 길림성 북부에서 사망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약 6만에서 10만으로 추정되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그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었다.
만약 청국의 방역 조치가 좀 더 빠르고 강력하게 이뤄졌다면, 사망자는 그보다 더 줄어들었을 터였다.
놀랍게도 한국령에서는 사망자가 단 20명에 그쳤다. 그조차도 초기에 입국한 만주 방문자였다.
이는 대한제국 정부의 단호하고도 강압적인 조치 덕분이었다.
「내무부 포고령! 위험지역 방문자는 자국민이라 할지라도 의무적으로 격리 10일. 청국인은 지역 방문과 관계없이 의무 격리 10일. 격리소에 수용 후 의료진이 건강자로 인정치 아니하면 여행을 불허함! – 내무대신 겸 방역위원장 서재필」
11월, 페스트 초기부터 한국 정부는 검역 강화와 격리 조치를 명했다. 강력한 조치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정부는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다.
「내무부 포고령! 광무 15년 1월 1일을 기해, 일시적으로 만주 지역의 수출입을 금지함. 전염병 유행지역 방문자는 입국 전면 금지. 이 조치는 한 달간 실시되고, 필요시 연장될 수 있음. 포고령 위반자는 강력 처벌함! – 내무대신 겸 방역위원장 서재필」
12월, 북만주 페스트가 점차 심화되고, 월말에는 남만주의 중심지인 봉천까지 확진자가 발생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1911년 1월 1일을 기해 전면적인 만주 금수조치와 입국금지 포고를 내렸다.
전례 없이 강력한 봉쇄 조치에 수출입 무역상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왔다. 만철에서도 너무 가혹한 조치가 아니냐고 우려를 표했지만, 정부는 단호함을 유지했다.
「페스트 구호에 필요한 생산과 운송이 이뤄지는 요동도 안산군 일대만 예외적으로 수출입과 출입국을 허용함. 단, 다음과 같은 방역규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 ……」
한국령 만주의 공업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지인 안산만 예외적으로 열어 두고, 다른 지역은 차단되었다.
한청 국경에는 군대, 헌병, 경찰이 파견되어 엄격한 단속이 이뤄졌다. 행정력으로 다 망라하지 못하는 지역은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방역자위단(防疫自衛團)’을 결성하여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도록 했다.
법적으로는 청국령이나 사실상 한국령이나 다름없는 자치령도 마찬가지였다.
“박대붕 정교, 귀관은 태자하를 넘는 밀입국자가 있는지 철저히 감독하도록 하라.”
“예, 명을 받듭니다!”
헌병 정교(상사) 박대붕은 한청 국경의 방역헌병으로 배치되었다.
어느덧 헌병 임관 10년 차, 나이 30대가 된 박대붕은 어엿한 중견급 하사관이었다.
10년 전 만주에서 황제 폐하께서 친히 수여한 훈장이 헌병 제복 가슴팍에 달려 있었다. 박대붕은 훈장을 볼 때마다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10년 전 황제 폐하께서 친히 이끄시는 북벌군의 일원으로서, 영광스럽게도 고토 수복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렸다! 10년 전 적이 의화단 폭도였다면, 지금은 흑사병이라는 더 무시무시한 적이 나타났다. 이 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 어떻게 우리를 습격할지 모른다! 삼가 황명을 받들어, 철저한 대책으로 적이 우리 땅에 발을 못 붙이게 하자!”
“옛!”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박대붕은 부하들과 방역자위단 앞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한때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던 박대붕이었지만, 이제는 유식한 연설들도 줄줄 읊을 줄 알았다.
박대붕은 꽤나 노력하는 헌병이었다. 황제 폐하, 총리 합하, 대신 각하, 총장 각하의 연설이 관보에 실리면 줄을 쳐 가며 단어 뜻을 사전에서 찾고 문장을 암기했다. 그가 멋들어지게 연설한 내용도 대부분 관보에 실린 연설문에서 따온 것이었다.
“내 관할 구역에서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박대붕은 열성적으로 일했다. 일시적으로 방역헌병에게는 상당한 권한이 주어졌고, 위생순검과 함께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이봐! 방역조치가 미흡하잖아! 내무부에서 포고한 방역규칙을 분명히 일러 줬을 텐데?”
“아이고 나으리,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나라님의 명령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단 말이냐! 관에서 하라면 하는 거야! 이번엔 계도(啓導)로 끝나지만, 다음은 구류(拘留)야. 알겠어!”
“예, 예, 나으리.”
방역헌병은 강압적이다 못해 폭력적이었다. 근대국가의 중요한 특징이 폭력의 국가독점과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면화라면,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였다.
신영토, 즉 요동과 간도 일대에서는 특히 관의 힘이 막강했다. 전통적인 영토가 아니었기에 더욱 힘이 실렸다. 총과 칼을 차고,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는 국가헌병대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국경을 넘으려는 자들은 헌병이나 경찰에게 단속되었다. 특히 밀입국 시도는 가차 없었다.
“입국 금지 포고령 못 봤어? 썩 돌아가라!”
“나으리, 전 급한 일이 있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입국을 허용하는 다음 포고령이 있을 때까지 안 돼.”
“제발, 나으리! 한 번만 봐주십쇼!
“안 돼, 안 봐줘, 빨리 돌아가.”
박대붕은 참으로 엄정한 헌병이었다. 일부 헌병이나 순검들은 뇌물을 슬쩍 찔러 주면 봐주곤 했지만, 박대붕에겐 어림도 없었다.
“이놈! 황제 폐하의 헌병에게 뇌물이라니! 너 같은 놈들 때문에 황명이 전국에 닿지 못하는 거야!”
박대붕의 단호한 거부를 뇌물 요구로 받아들여 찔러 주려던 자를, 곤봉으로 가차 없이 두들겨 팼다.
“이놈, 포고령 위반으로 구치소에 처넣어. 뇌물 제공혐의도 추가하고.”
“옛!”
“아이고오 나으리이이이!”
박대붕의 단호함에, 그의 휘하에 있는 부하들도 감히 뇌물은 상상도 못했다.
“황명을 수행하는 자는 감히 다른 생각을 품어선 안 된다!”
박대붕은 가슴에 단 훈장을 자랑스럽게 보았다. 황제 폐하로부터 친히 훈장을 받은 자신은 흔들림 없이 황명을 수행해야 했다.
박대붕은 헌병대에 걸려 있는 황제 폐하의 어진을 볼 때마다 반드시 군모를 벗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제 폐하는 국가의 주인이자 어버이였다.
한반도 남쪽 끝의 논두렁에서 살다 죽었을 운명의 자신이 국가의 공복이 될 수 있었던 건, 지극한 황은 덕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폐하께서 내 가슴에 훈장을 달아 주신 일을 잊지 못한다.’
작년에는 박대붕의 고향 전라남도 해남에서도 농지개혁의 영향이 미쳤다.
손바닥만 한 땅을 갖고 있는 이름뿐인 자작농, 반소작을 겸하던 반소작농(半小作農)인 가족도 농지개혁의 혜택을 받았다. 공훈을 세운 군인 가족인 덕분에, 일반 농민들보다 많은 토지가 분배되었다.
기뻐하는 부모님의 편지가 도달하자 박대붕도 감격했다. 문맹인 부모님은 편지를 쓰지 못했지만, 그처럼 군대에서 글을 배운 형이 대필을 했다. 예전에 자신을 천덕꾸러기 취급하던 형은 이제는 존경심을 표했다. 가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가면, 어린 조카들은 군복 입은 삼촌을 자랑스럽게 우러러봤다.
‘반드시 지극한 황은에 보답하겠습니다, 폐하!’
예전에 ‘나라’라고 하면, 그저 주는 것 없이 뺏기만 하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 같은 벽촌의 하층 농투성이에게도 공부도 시켜 주고, 훈장도 내려 주고, 관직도 임용해 주고, 심지어 토지까지 분배했다. 도대체 황은은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고 끝이 없었다.
박대붕은 황제 폐하의 어진 앞에서 꺼이꺼이 울면서 새삼 충성을 다짐했다.
그 기이한 광경에 헌병들은 뜨악해했다. 국가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그들 모두 공유하는 것이었지만, 박대붕은 유독 심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광적으로 일에만 매달렸다. 정부와 군부에서 내세우는 황제 숭배 프로파간다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도대체 박정교는 왜 저래?”
“황은 덕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황제 폐하께 친히 훈장을 받은 사람으로서 모범적인 공복이 되어야 한다나, 뭐라나.”
“그럼 결혼은 왜 안 하나?”
“성상께서도 국무에 매진하시느라 보령 서른에야 국혼을 하셨으니, 자신 같은 자는 적어도 서른다섯까지는 미뤄야 한다나.”
“아니, 성상께서 늦게 국혼을 치른 거랑 자기랑 뭔 상관인데?”
“처자식이 생기면 그만큼 국무에 매진하지 못할 거라더군.”
“원,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헌병 사령관도 아니고, 일개 정교가 무슨 대단한 자리라고.”
동료들은 뒤에서 박대붕을 비웃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직 황제 폐하와 국가만이 삶의 지침이자 이정표였다.
정작 이선은 이런 광적인 숭배를 떨떠름하고 불편하게 생각했지만, 대경장 이후 국가로부터 이런저런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황제로 상징되는 국가에 열광적으로 충성했다.
“자치령에서는 공공인력이 부족하니만큼 방역자위단의 역할이 중요하오. 우리 천도교와 진보회가 실무를 맡을 것이오.”
남만주 자치령에서는 천도교-진보회-옛 만인대 조직이 방역자위단을 주도해 자율적인 조직에 나섰다. 당국의 요청을 받은 천도교 교령 손병희의 지시로, 자치령 곳곳에서 방역자위단이 구성되었다.
방역자위단은 각 동리마다 설치하여, 장정 30명으로 구성하여 지역을 관할했다. 국경 일대에는 초소가 설치되어 순번으로 감시했다.
“방역규칙을 지킵시다! 철저히 소독하고, 만주 방문자는 모두 격리소로!”
“불법 밀입국자가 없는지 잘 감시합시다!”
“쥐를 잡고, 위생을 깨끗이 합시다!”
“이 역병은 공기를 통해 전염되오! 주의합시다!”
“사람을 만날 땐 당국에서 나눠 준 천을 얼굴에 쓰시오! 특히 코와 입은 가려야 합니다!”
자치령 방역자위단의 조직은 한국 국내의 위생조합처럼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분위기였다.
자치령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청국인들도 천도교가 주도하는 방역자위단에 협조했다.
문자 그대로 ‘자치’와 ‘한만공치’를 지향하는 자치령다웠다.
초기 대응이 늦어지는 바람에 청국과 밀접한 자치령에서는 확진자 1천여 명이 나왔지만, 적극적인 후속 조치로 2월부터 확진자가 급감했다.
같은 청국령이더라도, 북만주에서는 심각한 피해가 밀어닥쳤지만 남만주에서는 피해가 덜했다. 한국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었고, 청국령 만주의 실패한 대응과 대비되었다.
“대한 황제 폐하의 은덕으로 하사한다!”
강압적 조치가 채찍이라면, 당근도 제공되었다. 남쪽에서 만주로 가득 싣고 온 식량, 의약품, 마스크가 분배되었다.
여기에는 국경 너머 청국인도 예외가 없었다. 청국인에게도 ‘한국산’이라고 찍혀 있는 구호물품이 제공됐다. 심지어 무상이었다.
“한국은 물산이 그렇게 풍부한가?”
“역병 대처도 빠르고. 대단하긴 해.”
“이웃나라도 이렇게 배려해 주는데, 도대체 북경 조정에서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놈들이 이런 북쪽 변방까지 관심이 있겠나.”
“한국이 다스리는 지역에선 전염병도 안 돈다더라. 심지어 농민들에게 땅도 나눠 준다던데.”
“이봐, 그건 한국인 이야기야. 우리 중국인들은 차별한다고.”
“흥, 만주족들에게는 차별 안 받나? 한국에서 차별받더라도 안전하게 먹고 살고 싶네.”
“하긴, 그건 그래.”
전염병이 번져서 장기화되는 것보단 적극적인 방역과 구호로 조속히 끝내는 게 더 경제적인 행위였고, 추가로 민심까지 얻게 되니 아까울 게 없었다.
애초에 청국이 매년 지급하는 의화단전쟁 배상금이 방역 특별예산으로 책정되었으니, 한국 입장에서는 완전히 남는 장사였다.
* * *
1911년 4월.
만주 페스트가 종료된 이후, 청국 봉천에서 제1차 국제 페스트회의가 개최되었다. 중국 최초의 국제학술회의이자, 동아시아 최대의 팬데믹 대책회의였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네덜란드, 러시아, 미국, 멕시코, 일본, 한국, 청국 등 12개국의 학자들이 참여했다.
특히 만주 페스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러시아, 일본, 한국, 청국이 가장 많은 대표단을 보냈다.
이들 4개국은 앞으로도 동아시아의 전염병 발생에 대비하여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페폐스트를 발견하고, 방역 성공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닥터 우를 의장으로, 그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닥터 킴을 부의장으로 추대합니다!”
“와아아아!”
33세의 오연덕에게 최고의 영광이 돌아갔다. 서양 의사들이 동양 출신에게 국제회의 의장직을 양보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큰 공로란 의미였다.
처음부터 오연덕을 지지하고 방역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한국 대표 김필순과 이태준도 국제의학계의 찬사를 받았다.
칭송을 받는 건 의사가 아닌 안중근도 마찬가지였다. 영사관 무관으로 파견된 안중근 정령은 대한제국 황제의 대리인으로 자금과 의약품이 끊이지 않고 공급되어 방역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도록 했다.
“여러분은 국제 우인(友人)이자 의인입니다. 대청국민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연덕은 김필순, 이태준, 안중근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별 말씀을요.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사가 어찌 국적을 가리겠습니까?”
“저 역시 군인으로서 국가에서 명한 바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한국인 3인은 겸손하게 화답했다.
“한국의 빠른 대처 덕에, 중국에서도 의료개혁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이 많습니다. 조정에서도 이번 일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을 겁니다.”
청국의 초기대응 실패와 한국의 성공은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청 조정도 부랴부랴 북경 협화의학당 (協和醫學堂)에 방역학과를 개설하고, 방역규칙을 채택하고, 경사(북경)방역국을 시작으로 만주 일대에 방역국을 설치하여 방역행정에 나섰다.
청국뿐만 아니라, 자국 조계지이자 영향권인 북만주에서 발생한 페스트를 함께 방역하려고 노력했던 러시아에서도 한국의 조처를 칭송했다.
“그래요, 참으로 교훈이 많습니다. 우리는 한국을 모범으로 삼아, 단기간에 국가를 개혁해 나가길 원합니다.”
“우리도 각고의 의지를 다져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능력과 의지만 충분하다면, 여러분도 반드시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젊은 의사들은 동지애를 담아 굳게 악수했다.
1910-11년 겨울에 발생한 만주 페스트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그저 서양 문명을 흉내 내는 중이라고 여겨진, ‘열등한’ 동양인이 새로운 전염병을 발견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서양 의학계도 젊은 동양 의사들에게 찬사와 경의를 보냈다.
청국과 대비되는 한국의 방역대책도 찬사를 받았다. 근대화에 접어든 지 한 세대에 불과한 한국에서도, 서양에 필적하는 의학적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것이었다.
근대화와 국민국가 건설은 선택이 아닌 의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만주 페스트는 대청제국의 몰락과 대한제국의 팽창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제국의 흥망성쇠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었다.
「과학이 중국에 수입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학자의 자격으로 세계가 우러러보는 사람은 오연덕이 유일하다!」
중국 언론과 지식계를 대표하는 양계초는 오연덕에게 극찬을 보냈다.
중국 지식인들은 빛나는 공훈을 세운 오연덕에게 찬사를 보내면서도, 새로운 확신을 가졌다.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면, 의지와 능력이 모두 있어야 한다.
한국이 단기간에 근대화에 성공한 건, 의지와 능력이 모두 갖춰졌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하여 청조는 근대국가 건설의 의지도 없었고, 능력은 더더욱 없었다.
새로운 국가를 꿈꾸는 혁명가들은 의지는 충만했지만, 아직 능력이 없었다.
그 능력을 갖추려면 국가권력을 잡아야 하고, 의지조차 없는 청조는 타도되어야 했다.
1911년, 동아시아에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