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74
– 155화에 계속 –
2부 155화 정초선거
광무 15년(1911) 5월.
제3회 민의원 총선거가 거행되었다.
선거권이 확대됨에 따라, 2회 총선에 비하여 유권자는 2배 가까이 늘어나 약 180만 명이 되었다.
동시기 일본이 선거권을 확대하였음에도 선거권자가 160만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보다 인구가 적은 한국은 동시대 아시아 최대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군민공치를 실현하는 대한국 만세!”
집권여당인 입헌개화당은 3회 총선의 결과도 낙관했다.
1,2회 민의원은 입헌개화당과 관제 야당들의 잔치였다. 제국당은 영토 확장의 목소리만 높다는 것만 빼면 개화당 2중대나 다름없었고, 그나마 제1야당 역할을 수행하던 독립당이 다시 개화당에 통합됨에 따라 자유주의자들의 실망이 늘어났다.
“진정 민의원이 민의를 대표할 수 있으려면, 더 이상 개화당 독주로 가서는 안 됩니다.”
협동조합운동을 대표하는 계몽운동가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서북지방의 신흥 지식인과 상공인들이 설립한 신민회가 신민당(新民黨)으로 발전했다.
신민당은 점점 보수화되는 개화당을 대신하여, 정치 개혁과 자유주의적 가치를 내세웠다.
“국권확립! 민권진흥! 인민계몽! 교육입국! 자유평등!”
“선거권 확대! 병역의 의무는 모든 국민에게 있건만, 어째서 선거권은 소수로 제한된단 말인가?”
신민당은 개화당이 내세웠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이 상당 부분 성취되었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를 들고 나왔다.
이승훈과 이종훈 등, 서북지방의 신흥 자본가 계층이 당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이들은 서울에 대한 강렬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경화사족의 독주에 반발했다.
“진정으로 인민을 대표하는 당, 신민당!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인민의 당, 신민당!”
“새로운 시대를 원하는 전국의 인민들이여! 신민당으로 오라!”
기존의 지역적 기반의 정파들이 모두 세력화하는데 실패한 것과 달리, 신민당은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개화당과 독립당의 재통합에 반대한 경기지방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신민당에 합류했다.
오랫동안 권력에서 소외되었고, 근대화의 혜택도 상대적으로 적었던 지역, 남부지방의 개신유림들도 손을 잡았다. 개신유림의 연합체인 대동단의 합류는 신민당의 전국적 확대를 성사시켰다.
이상재·남궁억·양기탁·박은식·장지연·신채호·김창수 등 거물급 정치가와 개혁적 언론인, 계몽운동가들이 대거 신민당에 합류함에 따라, 개화당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들었다.
총재에는 이상재, 부총재에는 박은식이 선출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당을 주도하고 있는 이는 탁월한 연설가이자 조직가인 간사장 안창호였다.
“농민들의 당, 직공들의 당, 평민들의 당, 진보당!”
1909년 기나긴 책무였던 농지개혁을 마치고 귀향한 전봉준은, 천도교 교령 손병희와 함께 유럽 순방을 다녀왔다. 실무 과정에서 유럽의 수많은 자료를 접했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눈으로 직접 보니 전봉준은 시야가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미국 방문이 손병희에게 ‘개척지의 종교적 유토피아 실현’이라는 영감을 주었다면, 유럽 방문은 전봉준에게 ‘농민과 노동자의 동맹을 통한 이상사회 구현’이라는 영감을 주었다.
“유럽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확산되고 있고,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당으로 발전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국제사회주의자연합(제2인터내셔널)이 국경을 초월해 단결하고 있소.”
“대한은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민이니, 농민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있어야 하오. 신민당이 제법 인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도시 상공인과 지식인의 당이오.”
전봉준은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흥성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보다는, 동유럽 인민주의와 북유럽 농본주의를 모범으로 삼았다.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농본주의 분파나 스웨덴 농민당을 모델로 정당 건설에 나섰다.
“아무리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라지만, 농민만 내세워서는 안 되오. 도시 직공 계급이 새로 형성되고 있는데, 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아직 없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직공과 농민의 동맹을 주장하던데, 우리는 사회민주주의는 배격하지만 그 전술은 참고해 볼만 하오.”
“만주를 향한 국민적 열망도 배제할 수는 없지. 천도교와 손을 잡은 이상, 자치령의 성과도 내세워야 하오.”
“새로운 시대를 위해 좀 더 포괄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이름, 진보를 내세웁시다.”
3회 총선을 앞두고, 전봉준과 손병희가 공동 총재가 되어 진보당을 결성했다.
“북방개척운동과 농지개혁을 이끈 농민들의 벗, 녹두장군 전봉준의 진보당!”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북방의 이상향을 건설한 천도교의 진보당!”
신민당에 비하면 진보당의 정치적 기반은 약했다. 전국의 농민을 기반으로, 천도교를 조직 기반으로 삼았지만, 투표권이 제한적이었으니 정치적으로 확대될 기회가 아직 부족했다.
제1야당을 노리는 신민당과 달리, 진보당은 일단 원내에 진입하여 신민당과 연합해 보통선거권 확립을 전략으로 삼았다.
“황제 폐하와 대한국민의 당, 입헌개화당!”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실현한 당, 입헌개화당!”
신민당과 진보당의 세력 확대에 개화당은 놀랐다. 총리 박영효뿐만 아니라 전 총리이자 원훈인 김옥균과 유길준도 지방을 돌며 개화당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호소했다.
“대한의 미래는 만주에 있다! 고구려의 정통 후계인 대한국이 만주를 차지할 역사적 권리가 있다!”
“만주 흑사병은 청조의 무능한 대처로 인해 발생한 일이다. 천명이 청조를 떠났음을 의미한다!”
“청조의 붕괴가 임박했다! 만주를 쟁취하자!”
제국당은 국내 정치적으로는 개화당 2중대나 다름없었지만, 국제 정치에서는 초강경 매파였다.
제국당의 노골적인 만주 진출과 청조 붕괴 운운에 주한 청국 공사관에서 항의를 한 게 수차례였다. 공식적으로 청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 정부는 제국당에게 경고를 보냈다.
물론 제국당도 선은 넘지 않았다. 제국당은 사실상 관제야당이었고, 이들은 국내의 팽창주의적·민족주의적 여론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입헌개화당 108석, 신민당 40석, 진보당 15석, 제국당 11석, 무소속 26석.”
광무 15년 5월 15일, 조청일전쟁 승전 16주년 기념일에 3회 총선거 결과가 발표되었다.
입헌개화당은 여전히 200석 중 과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2회 민의원에 비하면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독립당과 통합하여 확보된 140석의 의석 중 30석 이상을 상실했다.
개화당이 상실한 의석수 대부분은 신민당에 돌아갔다. 평안도·함경도·황해도에서는 신민당이 제1당으로 올라섰고, 황성과 주요 도시에서도 유의미한 성적을 거뒀다. 첫 선거에서 상당한 약진이었다.
“신민당 동지 여러분, 성공적인 결과이나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는 인민의 기대에 부응합시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성취할 수 있도록, 전진합시다!”
“옳소!”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안창호의 외침에 신민당원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들은 개화당을 대신하여 미래의 권력을 꿈꿨다.
“진보당 동지 여러분, 온갖 난관이 가득했던 선거에서 만족스러운 결과입니다. 진보는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이 땅에 농민과 직공의 목소리가 진정으로 대변되는 그 날을 위하여!”
“와아아아!”
진보당도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여 제3당으로 떠올랐다. 천도교의 영향을 받는 요동도와 연길도에서 1당으로 떠올랐다지만 인구가 적어 의석수가 많지 않았다.
농업문제가 가장 중요한 전라도·경상도·충청도의 농민들의 투표권은 제한적이었고, 지주들은 당연히 진보당을 싫어했다. 그나마 3회 총선에는 투표권이 중농(中農)들에게도 확대되었는데, 이들은 진보당을 향해 표를 던졌다.
전봉준이 고향인 전북 고부에서 당선된 것을 비롯하여, 농지개혁의 여파가 강한 호남에서 당선자 대부분을 냈다.
“안정적 과반은 달성했지만, 만만치 않은 선거였소.”
“3회 총선에서 유의미한 경쟁자가 등장했군.”
“그래도 전국적으로는 여전히 우리가 우세하지. 결국 개화의 수혜를 입은 자들은 개화당을 지지하게 되어 있소.”
어쨌든, 개화당은 여전히 제1당이었다. 전국 대부분의 관료·군인·자본가·지주·지식인 계급은 여전히 개화당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새로 투표권이 확대된 계층에서도 지지율이 밀리는 건 아니었다.
지난 25년간의 근대화는 개화당이 주도한 일이었고, 유권자 상당수는 개화당을 곧 국가라고 인식했다.
“하여튼 개화당도 혁신을 해야 하오. 우리도 한때 급진당이 아니었나? 국가의 급진적 변혁을 우리가 이끌었단 말이오. 그런데 신민당 애송이들과 진보당 위험분자들은 개화당이 개혁에 발목을 잡는 보수파 취급을 하고 있으니, 정말 세월이 무상하구만.”
어느덧 나이 60대가 된 김옥균은 무상한 세월을 느꼈다.
25년 전만 해도, 가장 극렬한 급진파 취급을 받으며 수구파들에게 저주의 대상이었던 개화파가 아니었던가. 급진개화의 상징이 된 김옥균을 암살하려는 수구파들의 기도만 수차례였다.
그런데 이제는 청산해야 할 ‘개화당 일당독재’의 우두머리 취급을 당하니 기이한 느낌이었다.
“총리 박영효 대감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당면한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면 됩니다. 성상의 신임과 다수 국민의 지지가 우리에게 있음을 명심합시다.”
“예, 물론입니다.”
광무 15년의 3회 총선거는, 최초로 유의미한 정당간의 대결이 이뤄진, 일종의 정초선거(定礎選擧)라고 할 수 있었다. 즉, 단순히 일회적 의미를 갖는 선거가 아닌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고 사회의 틀을 잡는 중대한 선거라는 의미다.
주로 토착 유지들이었던 무소속의 비중이 줄어들었고, 선명한 정치적 지향성을 가진 정당들이 유권자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정계는 입헌개화당-신민당-진보당-제국당 4당 체제로 구축되었다.
중도 보수주의 입헌개화당과 관제야당인 우익 팽창주의 제국당 연합에 맞서 중도 자유주의 신민당-좌익 인민주의 진보당이 동맹을 맺은 구도였다.
“선거 결과가 만족스럽군. 유권자들이 현명한 결과를 냈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 하는 법.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이라는 1차적 목표에 근접했으니, 이제 기존의 일당독재 체제는 지양해야 해. 10년 정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경험해 봐야, 정당정치와 보통선거권이 확립되지.”
이선은 선거 결과에 만족감을 표명했다.
현재의 대한제국은 황제가 총리와 내각을 지명하는 프로이센식 외견형 입헌군주제였고, 이선 역시 현시점에서 수권(授權)을 할 수 있는 정당은 개화당뿐이라고 생각했다. 신생 신민당과 진보당은 갈 길이 멀었다.
‘1910년대까지는 제국과 혁명의 시대, 전쟁과 혼란의 시대겠지. 앞으로 8년 정도는 더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기조로 내걸어야 해.’
그럼에도, 견제세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개화당이 집권한 1885년 이래 25년은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이라는 목표를 위해 일직선으로 달린 기간이었다. 이제 그 목표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달성됐으니, 그 이후의 미래를 내다봐야 했다.
‘1920년대에는, 진정한 헌정 민권의 시대, 국민국가의 시대로…….’
그렇게 되면, 자신의 역사적 역할도 거의 완료되는 것이었다.
이선은 언제나 자신의 은퇴와 세대교체를 염두에 두었다. 초인 1인이 비상한 목표를 갖고 국가의 모든 사안을 결정하는 비상시국은 끝나야 했다.
1910년대 대한제국 정치의 한 풍토는, 아시아주의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팽창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념이 아닌 동양평화에 입각한 국제주의 이념으로서도 각광을 받았다.
특히 신민당은 중국 혁명가들에게 동정적이었다. 이들에게 청조는 사라져야할 전근대적 악습의 나라였고, 중국 혁명의 승리는 곧 자유주의와 인민주권의 승리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진보당은 다른 의미에서 청조에 반대했는데, 대개 1900년 ‘경자농민전쟁’을 경험한 이들로선 청조란 곧 만주의 부재지주를 상징했다. 만인대를 이끌었던 전봉준과 손병희는 청조에서 경계대상이었고, 만주의 농민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청조는 무너져야할 구체제였다.
“주권, 국토, 국민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청조는 역사적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역사의 진보라는 도도한 강물의 흐름은 대홍수가 되어 만청의 권력자들을 집어삼킬 것입니다!”
“옳소! 옳소!”
“중국 혁명은 아세아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입니다. 대한은 역사의 진보라는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와아아아!”
“아아, 정숙, 정숙! 의원 동지 여러분! 국제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발언은 자제합시다!”
개화당 중진이자 민의원 의장 김가진이 야당 의원들의 발언을 제지했다. 청조가 정말 멸망을 앞둔 나라라 할지라도, 외교적 분란은 자제해야 했다.
‘암, 역사의 진보라는 흐름을 놓쳐선 안 되지.’
민의원 귀빈 방청석에 앉아있던 김옥균이 속으로 연설에 동조했다. 그는 전 총리이자 원훈으로서 중추원 종신의관을 겸했지만, 중추원보다 민의원을 더 자주 참관하였다.
‘조급해하지 말라고, 젊은이들. 우리도 다 계획이 있으니까.’
김옥균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1851년 신해년 생인 그는 올해로 환갑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한 갑자가 돌아온 올해에,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혁명은 머지않았어. 이제 시작일세.’
김옥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흩어지는 연기 너머에, 새로운 질서가 눈에 잡히는 듯 했다.
1911년 신해혁명의 시간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