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83
– 164화에 계속 –
2부 164화 중화민국(中華民國)
1912년(선통 2년) 2월.
신해혁명이 촉발한 내전은 두 달째 진행 중이었다. 중국 18개성 중 14개성이 독립을 선언한 상황. 청조는 봉기의 시발점이었던 무한삼진을 점령하여 혁명의 기세를 잠재우고자 했다.
강북의 한구-한양 점령에 이어, 북양군은 장강을 건너 무창을 공략했다.
북양군은 도하 과정에서 상당한 희생을 냈지만, 사령관 장훈과 풍국장은 인명손실은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다.
“역도들의 소굴을 반드시 함락시켜라!”
“혁명의 상징인 무창을 사수하라!”
혁명군도 무창을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무한삼진은 정치적 상징성을 갖춘 전략적 요충지였다.
무창 성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북양군은 인정사정을 보지 않았다. 격렬한 시가전 과정에서 호북의 중심도시이자 제일 먼저 청조에 독립을 선언했던 무창은 크게 파괴되었다.
“무창을 탈환했다!”
“대청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2월 12일, 북양군은 마침내 무창을 탈환했다.
혁명군의 의기는 훌륭했으나, 질적으로 도저히 북양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혁명군을 이끌던 황흥과 여원홍은 분투했으나 끝내 무창 동쪽의 황강으로 퇴각했다.
호북 군정부 청사로 쓰이던 호광총독 관저에 철혈십팔성기가 떨어지고 다시 황룡기가 올라갔다. 봉기 이후 꼭 두 달만이었다.
“무한삼진을 탈환했으니, 기세를 몰아 역적들의 본거지인 남경을 친다!”
무한삼진의 정복자 장훈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당장이라도 무한에서 장강을 따라 진격할 기세였다.
그러나 무한 점령은 강남을 향한 청조의 마지막 공세였다. 무한 점령 직후, 북경에서는 영국 공사의 강력한 항의가 이어졌다.
“대영제국 정부는 중국의 평화를 위하여, 남북의 화의를 다시 한번 권고하는 바입니다. 만약 전투가 계속 장강 이남으로 확대된다면, 영국 정부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요구는 사실상 최후통첩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영국의 세력권인 장강 유역에서 계속 전투가 이어진다면, 영국은 남경 임시정부를 독자적인 정부로 승인하고 보호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반란을 진압하겠다는 정당한 행위가 어찌하여 열강의 간섭을 불러일으킨단 말인가? 인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영국은 협상으로만 해결했는가? 독일제국 정부는 대청국을 지지하는 바이다!”
독일은 영국에 어깃장을 걸며 청조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독일의 세력권인 산동도 독립을 취소하고 청조에 복속된 상황이었다.
“덕국이 무기와 차관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해 볼 만하다!”
독일의 지지 표명에 청조는 잠시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대영제국 정부, 프랑스공화국 정부, 러시아제국 정부, 대일본제국 정부, 대한제국 정부는 중국의 사태에 우려를 표명하는 바이다. 5국 정부는 중국에서 점증하는 폭력으로 인해, 태평천국이나 의화단의 참상이 재현될 수 있음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다. 5국 정부는 무력이 아닌 평화적 해결을 위해 남북 간의 화의를 촉구한다.」
독일이 개입하자,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5개국의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는 단순히 중국 문제를 넘어, 국제적 차원에서의 연합체인 5국 앙탕트(협상국)였다.
1911년 여름에 2차 모로코 위기, 이른바 아가디르 위기(Agadir Crisis)가 있었다. 프랑스의 모로코 주권 박탈에 분노한 모로코의 반 프랑스 항쟁이 발생했고,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했다.
독일은 알헤시라스 조약 위반을 명분으로 삼아 모로코 아가디르 항에 포함 판터를 파견했다. 프랑스와 독일 간에 다시 일촉즉발과도 같은 전쟁 위기가 발생했다.
“독일의 공격적인 움직임은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영국은 단호히 개입해야 한다.”
이번에도 영국은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부 내 불간섭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프랑스 지지를 표명하여 충돌에 대비해 모로코에 군함을 파견했다.
국제금융을 주도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단호한 조처에 베를린 금융가가 출렁였다. 베를린 주식 시장은 하루 만에 30%가 폭락하고, 한 달 만에 금 보유량의 20%가 사라졌다. 경제위기 앞에 카이저는 결국 이번에도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협상 끝에, 독일은 프랑스령 콩고의 일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모로코 통치권을 인정했다. 최후의 걸림돌이었던 독일의 승인을 얻게 되자, 프랑스는 모로코의 주권을 강탈하여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또다시 독일은 국제적 고립을 감수해야 했다.
신해혁명이 발발한 시점은, 2차 모로코 위기가 막 종결된 시점이었다.
동아시아에서만큼은 영국-프랑스-러시아 앙탕트의 이해관계가 다르리라 생각하고 독일은 청조 지지를 표명했으나, 이번에도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무엇보다 혁명을 극도로 혐오하는 제정 러시아가, ‘정통’ 군주국가인 청조를 지지하지 않고 혁명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에, 독일은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르가 미쳤나? 대체 영국에게서 뇌물을 얼마나 받아먹은 거냐!”
물론 러시아의 동기는 영국 지지가 아닌 만주-몽골-신강-티베트의 독립이었다.
이는 이선이 니콜라이에게 설득했던 ‘유라시아의 천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혁명에 대한 이념적인 거부보다, 혁명 이후에 쟁취될 신질서가 더 중요했다. 그동안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을 그토록 방해했던 영국도 세력권 분할을 묵인해 줄 태도였다.
5개국 공동성명에 청조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청조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한 건 독일과 그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뿐이고, 미국조차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 한 나라를 상대하기도 벅찬데, 5개국이 단결하여 화의를 강요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선의 장훈을 향해 급보가 전해졌다.
「호광총독 겸 흠차전권대신 장훈은 공세를 중단하고, 현 전선을 유지하라. 조정은 영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남부 반란군과 협상을 논의할 것이다.」
“망할 영국 놈들! 그놈들이 무엇이건대 대청의 내정에 끼어들며, 반란 진압을 방해한단 말이냐?”
장훈은 분통을 터뜨렸다. 당장이라도 북양군을 이끌고 남경으로 진격하고 싶었으나, 조정의 명령이 내려진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2월 18일, 임자년 춘절 첫날에 15일간의 정전(停戰)과 남북화의가 발표되었다.
신해혁명의 국면은 갑작스럽게 전쟁에서 정치로 전환되었다.
* * *
정전이 발표되고 며칠 후, 손문이 유럽에서 홍콩을 거쳐 상해로 귀국했다.
혁명의 상징, 손문의 귀국 소식에 혁명 지지자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상해항에는 손문을 환영하는 인파로 가득 메워졌다.
배에서 내리는 손문을 향해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손문은 감사를 표하며 답례했다.
“동지들! 동지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기에 혁명은 성공 직전까지 도달했습니다. 나, 손문은 혁명의 완수와 민국의 수립을 위하여 이 한 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와아아아!”
“손일선! 손일선!”
손문의 귀국 일성(一聲)에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손일선 선생의 귀국을 환영합니다!”
“선생이시여, 중국을 이끌어 주십시오!”
손문에 대한 환호는 평생을 혁명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도 있었지만, 혁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각성 대표들에 대한 실망의 표시이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호인(好人)으로 소문난 손문이라면 양심적으로 국정을 이끌어 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다들 내가 혁명 직후에 바로 중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유럽을 경유한 이유를 궁금할 것이오.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청조를 지지하지 않으며, 차관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고 왔소. 그들은 혁명에 간섭하지 않을 거요.”
손문의 ‘설득’ 덕인지는 몰라도, 5국 앙탕트는 청조에게 화의를 강요했다.
사실 이는 손문보다는 이선의 설득이 더 큰 역할을 했다. 이선은 러시아를 설득했고, 이어서 영국을 설득했다. 동맹구조에 의거하여 영국이 나서자 일본도 지지했고, 러시아가 나서자 프랑스도 지지했다.
하지만 이런 배후조종을 모르는 중국 혁명가들 입장에선, 정말로 손문이 서양 열강을 설득해 청조에 화의를 강요했다고 인식했다.
“어쩐지,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가 청조를 압박하여 화의를 강요한 것이군요!”
“과연 외교의 달인 손일선 선생님이십니다!”
거대한 착각이었지만, 그 덕에 손문의 정치적 입지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사실 혁명 과정에서 손문이 한 일은 없다시피 했다. 무창 봉기는 자연발생적이었고, 이어진 각 성의 봉기와 독립 선언도 우발적인 사태의 연속에 가까웠다.
동맹회가 주도해서 봉기를 일으킨 건, 광동과 상해 정도였다. 그조차도 실무를 맡아 움직인 건, 손문이 아니라 황흥과 송교인이었다.
손문은 실질적인 지도자라기보다는 정신적 지도자였다. 이해관계별로 나뉘어 이전투구를 벌이는 각 성의 대표자들에게, 중재자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혁명의 구심점인 손문뿐이었다.
즉, 역으로 말하면, 손문은 만인의 지도자로 추대될지언정 그에게 직접적인 권력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의미했다.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고 각 성에서 선출한 의회에 통치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불행한 내전을 끝내고 다시 화합합시다.”
“내전을 끝내는 건 동의합니다. 하지만 군주정을 지키자고 혁명을 일으킨 건 아닙니다. 중국에서 만청 조정을 폐지하고, 공화정부를 수립해야만 협상은 성사될 수 있습니다.”
2월 22일, 남북화의가 영국 영사의 중재로 상해 공공조계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남부의 혁명파와 북부의 청조는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렇다면 백기투항과 다를 바가 뭐란 말인가? 설마 당신들이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요?”
“중국 18성 중 14성이 독립의 대열에 합류했으며, 모든 성에서 대표자를 남경으로 보냈소! 이래도 청조가 중국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흥! 그 독립이란 게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나지 않았소? 대청은 산동, 하남, 호북을 재정복했소. 만약 전쟁이 계속되면 허약한 독립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 거요!”
“헛소리! 4억의 중화인민을 모두 죽이기 전에는 청조의 재정복이란 불가능하오!”
남북은 첨예한 대립을 이어 나갔다. 결국 의견차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대청 황제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각 성에서 선출한 의회에 권력을 위임한다. 대신 각 성은 독립을 취소하고 무장을 해제하라.”
“중화인민은 공화국을 원한다. 중국 18성에는 공화정부를 수립하며, 청국 황제는 외국 군주의 예로 존중한다. 청국 황제에게는 중국 18성을 제외한 동삼성(만주), 내외몽골, 신강, 티베트, 청해 등의 통치권을 맡긴다.”
중국 전역에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는 조건으로 재통일을 요구하는 청조와, 중국 18성의 독립과 공화국 수립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혁명파의 요구가 부딪혔다.
결국 협상은 결렬 수순을 밟았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원하는 대로 협상이 이뤄지길 바란다면 환상이었다.
“화의가 이뤄지긴 했지만, 청조가 저렇게 고압적으로 나오니 대응책을 세워야 합니다. 저들은 여전히 우리를 각 성과 인민의 대표가 아닌 반란군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부 대 정파가 아니라 대등한 정부 간의 협상이어야 합니다.”
“청조는 어디까지나 만주를 대표할 뿐이오. 임시정부를 선언하여 중화를 대표하도록 합시다.”
독립을 선언한 14성뿐만 아니라, 명목상 중국 18성을 자처하는 대표들이 모두 남경에 집결해 있었다.
18성 대표회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조직 대강》을 통과시키고, 임시정부 수립을 공표했다.
2월 27일, 18성 대표는 임시 대총통의 선출을 단행했다.
“대표단의 수가 다르더라도, 각 성은 동등하게 1표를 행사합니다.”
각 성이 동등하게 연합한다는 측면에서, 중화민국의 건국자들이 독립 초기의 미국 13주를 모범으로 삼고 있다는 게 분명히 드러났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는 각 성이 모두 대표권을 행사하여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손문 16표, 여원홍 1표, 원세개 1표. 이로써 손문 선생이 중화민국 임시정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본인을 대총통으로 선출하니, 책임이 무겁고도 무겁습니다. 중화민국의 수호를 위하여 이 한목숨을 바치겠습니다.”
18성 대표회의는 압도적 다수로 손문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했다. 남양군을 대표하는 원세개와 호북군을 대표하는 여원홍은 실질적인 군권을 지니고 있었으나, 인망이란 측면에서는 도저히 손문을 따를 수가 없었다.
“대총통은 당연히 손문 선생이 맡아야겠지만, 부총통은 군권을 지닌 인물을 선출해야 합니다.”
“그럼 원세개 아니면 여원홍이겠군.”
“원세개는 믿을 수가 없어요. 제일 먼저 독립을 선언한 여원홍 도독이 낫습니다.”
“성공 후에 추대되기는 여원홍도 매한가지였소. 남경 수복의 공을 세운 원세개에게 그만한 배려를 해 주지 않는다면, 무슨 딴마음을 먹을지 모르오.”
18성 대표회의는 원세개를 믿지 못했지만, 정치적 타협 끝에 부총통으로 내세웠다.
“원세개 도독이 중화민국 임시정부 임시부총통으로 선출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축하합니다, 부총통!”
“감사합니다. 대총통 각하를 보좌하여 중화민국을 지키고, 혁명을 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총통으로 선출된 원세개는 대표자들에게 겸손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는 내심 2인자인 부총통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을 방위하는 남양군의 군권을 움켜쥐고 있는 이상, 임시정부의 수호는 그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 손문은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으로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섬긴다. 국권을 수호하여 민국을 공고히 하고, 국민을 살핀다. 청조를 타도하고 민국이 세계만방에 서는 날, 임시대총통 직에서 사임한다. 이를 국민 앞에 엄숙히 맹세하는 바이다.”
“중화민국 만세! 대총통 만세!”
1912년 3월 1일, 손문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하였다.
중화민국 선포를 기해, 1912년은 선통 2년이 아닌 민국 원년으로 연호가 바뀌었다.
중국 18성을 상징하는 철혈십팔성기(鐵血十八省旗)와 혁명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青天白日旗)가 남경 시내에 휘날렸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중화민국은 ‘오족공화(五族共和)’를 상징하는 오색기를 채택하지만, 중국 본토 18성의 ‘광복중화’를 내세운 변화한 역사의 중화민국은 철혈십팔성기와 청천백일기를 택했다.
1912년, 중화민국 원년. 중국 최초이자 동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진시황 이래 2천 년간 내려온 황제를 부정하고, 중국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정부의 출범이었다. 4억 인민이 한순간에 왕조의 신민에서 민국의 국민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그 장대한 이상과 달리, 중화민국의 앞날은 불투명했다. 당장 청조는 민국 수립에 격분하여 화의 결렬을 선언했고, 청조를 몰아낸다 해도 이해관계가 현저히 다른 18성의 권력자들은 민국 정부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을 터였다.
중국에 통일된 민주공화국은 환상에 불과했다.